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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데살로니가 전서5:12-13

 

오늘은 지난주에 보았던 구절의 바로 앞부분에 대해서 살펴 볼려고 합니다.

 

지금 이땅에

잘못 세워진 목사들과

영적인 무지와

자정작용의 미비로 교회에 대한 내외적인 공격이 심합니다.

 

교회라는 성결된 공동체의 정체성이 안으로부터 무너지고 있는 요즘 바울의 목회서신을 읽으면서 초대교회의 상황에서 주어진 말씀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공되지 않고 변형되지 않고 왜곡되지 않은 복음의 초기형을 살펴보는게 오늘날 왜곡되고 변질되고 심지어 가공된 교회의 모습을 바로잡는데 도움이 될겁니다. 그래서 이 본문입니다.

 

요즘 우리 개신교계가 완전히 이 나라의 관심의 중앙에 있습니다. 그 관심이 아주 부정적이지요? 부정적인 관심이 무지 무지 뜨겁습니다. 이거 우리처럼 개척교회는 이런 관심에 몸이 데일 정도, 아니 푹 익을 정도입니다. 곤란합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물을 흐린다고 솔직히 요즘은 뉴스 기사 읽기가 겁이 납니다. 이 사람 때문에 전도 효과가 한 1000%가 감소했습니다. 어쩌면 더 심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권사님이 보내 주시는 쑤세미를 가지고 전도할 수 있는 날이 언제 다시 올지...돌이켜보면 전도할 때 아낀다고 마음대로 나누어 주지도 않고 그랬는데... 참으로 마음껏 전도할 수 있는 그 날을 고대합니다. 옛날의 그 날이 그립습니다.

 

지금 개신교회와 신천지와 비견하는 기사도 나오는 형편입니다. 말하기로는 더 나쁘답니다. 신천지보다 더 악질이라네요. 참 부끄럽고 화가 납니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욕은 욕대로 먹는 형편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지금 자기가 뭐나 된 줄 알고 겉멋이 잔뜩 들어서 희희낙락입니다. 수천의 교인에 수만의 지지자들에 수백억대의 재산까지 참 할 말이 없습니다.

 

학력도 안되고 신학교도 제대로 안다닌 자가 어떻게 목사가 되었는지 참! 그런데 이런자가 더 승승장구 했다니 참!

 

제가 이발소에 가니까 이발사가 어찌 전**이 욕을 하는지...교인들은 도매금으로 욕을 먹고....

 

이거 참 너무 불공평한거 아닙니까? 혜택있는 곳에 책임이 있고 권리가 있는 곳에 의무가 있는게 당연한데 혜택도 없고 권리도 없었는데 엉뚱한 사람 때문에 이거 참 말이 안될 정도로 우리가 곤경에 처했습니다.

 

신천지 파동에 이은 더 직접적인 타격입니다. 게다가 뉴스에 이백명의 목사가 모여서 전국 수련회를 했다고 하는데 비록 모자이크 처리는 되어 있어도 우리 교단 마크인 듯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참석한 이들은 대부분 여자들입니다. 우리 교단에서는 여자 목사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정면으로 위배하기 때문에 우리는 여목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된건지. 자료화면이 잘못된 건지...물론 제가 잘못 본걸로 생각합니다만.

 

현실은 복잡하고 골치 아픕니다. 멈추지 않는 확진 행렬땜에 어떤 공포스런 결과가 올지 무섭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현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은 결코 끊어지지 않습니다.

 

오늘 이 말씀 속에 그가 우리를 향하여 주신 가공되지 않은 교회와 교인의 원형이 있습니다.

 

자, 오늘 본문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1.형제들아 너희에게 구하노니

먼저 12절부터 22절까지 종말을 맞이한 성도들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우리는 19절부터 22절 까지는 지난주에 살펴보았습니다. 뭐 한마디로 하면 ‘예언을 멸시치 말라’는 겁니다.

 

12절부터 15절 까지는 사역자들을 존경하라는 전반부와 성도들 사이에 서로 화목하라는 당부와 직분자들 또는 일반 성도들에 대한 권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중에서도 12,13절 만 봅니다.

 

성도들이 사역자들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깊이 있게 살펴보면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복잡한 교회 내의 상황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은 성도들에 대한 바울 일행의 당부로 시작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먼저 이 말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성도들이 사역자들을 대할 때 존경으로 대하라는 말을 명령형으로 엄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부드럽게 요청하는 표현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사역자들을 대할 때 존경으로,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이건 절대로 명령으로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부드럽게 요청할 수 밖에 없다고 하는 겁니다.

 

그렇다는 말은 곧 사역자에 대한 성도들의 사랑과 존경이 결코 비자발적인 일종의 강제적 의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역자를 존경하는 것은 성도들이 충분히 저들이 존경스럽다고 느끼고 그리고 자발적으로 존경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이렇게 바울이 사역자들에 대한 강제적인 존경을 명령하지 않은 이유는 데살로니가 교회에 상당히 복잡한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2.너희 가운데서

오늘 본문이

성도들이 사역자를 대함에 있어 사랑으로 , 존경으로 대하라는 부드러운 권면인데 정작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목사나 사역자를 세운적이 없다는 겁니다. 심지어 그는 데살로니가 교회에서는 일반 직분자들도 세운 적이 없습니다.

 

바울은 약 3주 정도 데살로니가 교회를 세우기 위해 전도했는데 이 삼주 동안 어떻게 사역자나 직분자를 세울 수 있을까요? 못세웁니다. 시간이 너무 촉박합니다. 불신자가 믿는 첫날 세례를 받는다고 해도 석달도 아니고 삼주 동안 무슨 신앙교육이 된다고 직분자나 사역자를 세운단 말입니까?

 

물론 요즘 언론에 나온대로 물의를 일으킨 아무개씨는 속성으로 신학을 나와서 뭐 그것도 제대로 출석도 않았다고 하는데 여하튼 그렇게 목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참 그런 망령된 사람빼고 일반적으로 도저히 바울에게 사역자를 세울 시간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여기서 특별히 요청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정식으로 임명하여 파송한 사역자나 직분자가 아니라 교인들이 자기들끼리 일반 성도 중에서 신앙에 열심인 자를 추대해서 사역을 하게 하고 직분자를 세웠기에 이들의 권위가 공인받지 못하고 일부 교인들에 의해서 무시받는 상황이었습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이 추정하기를 이때 데살로니가 교회에서는 종말론이 유행이었는데 이걸 핑계로 일상생활을 등한시하고 교회에서 말썽만 일으키는 교인들이 있었고 이를 평신도 사역자들이 자제할 것을 권고했는데 이를 무시하고...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이런 소식을 들은 바울이 특별히 이 일을 염두에 두고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권고하는 것입니다.

참고로 혹시 싶어서 말씀드리지만 ‘데살로니가 교회’라고 해서 특별한 건물에 모이는 단일 교회를 말하는게 아닙니다. 데살로니가에 있는 많은 가정교회에 전하는 겁니다.

 

그래서 특정한 가정 교회에서 이 편지를 읽고 난 다음에는 데살로니가의 다른 교회에서 이 편지를 돌려 읽는 식으로 편지를 데살로니가 지역의 수많은 가정교회에서 돌아가며 읽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를 목회서신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12절에 “너희 가운데서”라는 말이 바로 이런 상황, 교인들이 스스로 사역자를 세운 상황을 설명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정식으로 세워진 목사가 아니라 그냥 목사가 없는 곳에서 목사의 역할을 하는 자 정도로 보아도 됩니다.

 

바울이나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한 공인된 사역자가 아니라 비공식적으로 성도 중에서 추대된 사역자를 말하는 거지요. 그래서 일부 교인들이 이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 소식을 듣고 너희들 가운데서 너희들이 임의로 세운 자라도 일단 사역을 하게 되면 그 사람을 우리가 파송한 사역자와 같이 존경하라는 그런 말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그 사람들이 결코 우리의 인정을 받지 못할만큼 형편없는 자가 아니라는 그런 말도 됩니다. 편지로 ‘데살로니가 교회의 집행부를 신임한다’는 그런 뜻이 들어 있습니다.

 

하기야 우리나라의 교계를 봐도 자기들 마음대로 머리를 눌러서 안수를 주고 목사이네 하는 이들이 어찌나 많은지!

 

지금 한창 논란이 되는 그 사람부터 시작해서 이런 이들이 이번에 코로나 사태의 중심에 있습니다. 어디서 그렇게 이상한 목사들이 많이 나오는지!

 

그런데 이런 자들이라도 사역을 제대로 하면 좋겠는데 무슨 이상한 짓거리를 하고 그래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고 하나님을 욕먹이고 교회를 타격하게 된다면 기가 찰 노릇입니다.

 

아마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세운 사역자들은 다행히도 주어진 사역을 잘 감당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 사역때문에라도 존경해 달라고 부탁한 겁니다.

 

그런데 이걸 부탁이나 권면이 아니라 명령으로 하게 된다면 앞으로도 개교회에서 자기들이 알아서 사역자를 마구 세울까 봐서

그리고 존경을 강제하는 경우에

이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교인을 정죄하고 책망하는게 되기 때문에

특별히 교인들의 동의와 자발적인 존경을 부드럽게 요청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안그래도 요즘 무조건 목사만 되면 된다고 해서 여 목사에, 신학도 하지 않은 목사에, 비인가 신학교에 전도사나 평신도가 갑자기 중간 단계를 생략하고 어느날 갑자기 목사가 되는 일도 많고...

 

사실 사역자가 교인들을 향하여 “왜 나를 존경하지 않느냐?”고 투정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특히 평신도 사역자라면 근거도 없고 당연히 그럴법합니다. 교인들의 명예에 대한 욕구는 일반인들의 돈에 대한 욕구보다 더 강한 경우가 많습니다.

 

속으로야 투덜대더라도 입을 열어 강제적으로 동료 교인들에게 명령하지 못하는 겁니다. “앞으론 나를 모두 다 존경해라”이렇게 말할 수 있는 뻔뻔한 사람은 드뭅니다.

 

하물며 자기에게 맡겨진 일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면서 교인들의 존경을 강제적으로 명령한다면 정말이지 당황스러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행동은 사랑으로 자발적으로 자원하여 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입니다.

 

2.수고하고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바울이 존경을 권유한 이들은 단순히 사역자가 아니라 ‘이런 이런 일을 감당하는 사역자’들을 말합니다.

 

1)수고하고

이 말은 ‘노역으로 인해 피곤에 지치다’는 말입니다. 데살로니가의 평신도 지도자들은 교인들의 문제를 해결하기위해 피곤에 지치도록 지나치게 헌신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르게 말해서 교인들의 문제를 해결하고 저들을 섬기기위해 피곤에 지칠 정도로 헌신하지 않는다면 바울이 성도들에게 저들을 존경하도록 권하지 않았을 거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피곤에 지치도록 헌신한다는 것을 모두가 인정하지는 않더라도 객관적으로 그 정도로 헌신적인지 아닌지는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저도 옛날 사역했던 교회에서 피곤에 지치도록 헌신하는 바람에 자주 몸에서 열이 났고 코에서 열기가 솟았답니다. 그래서 그럴 때는 심방을 중단하고 산에 가서 맨땅에 누워서 몇시간이고 기도하고 다시 기력을 회복하고 산을 내려온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영적인 평안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명령만 내리고 대접만 받으려고 하는 자들은 성도들의 존경을 요구할 자격이 없습니다.

 

2)다스리며

명령만 하는 자는 존경을 요구한 자격이 없다고 했는데 두 번째 조건이 ‘다스리며’ 라는 말은 좀 모순인 듯 보입니다. 그런데 이 말의 원뜻은 ‘앞장서다’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통할권을 가지고 감독하며 보살피다는 뜻으로 쓰인 이 말을 단순히 앞장서다란 말로 표현한 것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남을 ‘다스린다’는 말은 세상과 달리 명령하고 대접받고 위에서 군림한다는 말이 아니라 어려운 일이나 복잡한 일에 앞장서서 문제 해결을 위해서 나서고 대적의 위협 앞에서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서 회중의 앞에 서서 그걸 담당하고 혹시 교인의 가정에 어려움은 없는지 보살펴야 한다는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감독’이란 말이 조사하고 지시한다는게 아니라 결국 보살핀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몇주 전인가 제가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렵고 힘든 일에는 뒷짐만 지고 대접받고 낯이 나는 일에만 앞장선다면 그런 자는 교인들의 존경을 요구할 자격이 없습니다.

또 사역자가 무슨 벼슬이라도 되는 양 행동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만일 데살로니가의 평신도 지도자들이 그런 자들이었다면 바울이 성도들에게 존경하라고 권유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3)권하는 자들을

여기서 ‘권한다’는 말은 원뜻이 ‘마음속에 두다’입니다. 여기서 출발해서 알아듣도록 ‘훈계하다’는 뜻으로 발전했습니다.

 

우리는 훈계라고 하면 눈물이 쏙 빠지도록 훈계하다 처럼 뭔가 우월적인 위치에서 윽박질러 뭔가를 하게 하거나 하지 못하게 마음먹도록 말하고 다짐을 받는 상태를 가정하지만 여기서의 훈계는 앞서의 말과 합쳐서 저들이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노력한다’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니까 교인들이 잘못을 하게 되면 어디 이상한데 불러서 자기들이 무슨 청문회장의 국회의원이나 판사 처럼 행동하는게 아니라 성경 말씀을 가지고 또는 그리스도의 목자가 양을 사랑함처럼 온유한 마음으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잘못을 뉘우치고 잘못된 행동에서 벗어나도록 노력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걸 권한다고 말합니다.

 

이 노력에는 저들의 회개를 위한 기도도 포함합니다. 평소에 잘못된 교인을 위해서 기도도 하지 않다가 욕하고 책망하고 비난하기위해 나선다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평소에 잘못된 교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권고하고 그래서 지도자와 지도받는 이가 서로 얼싸안고 회개하고 용서를 빌고 용서하고 새롭게 그리스도의 나라를 위해 나아갈 것을 다짐하는 이런걸 말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지도자라고 목에 힘주고 대접받으려 하고 명령만하고 이상한 짓을 한다면 그래서 존경이 아니라 반감에 증오만 심어 준다면 이는 교회의 지도자가 아니라는 말인 겁니다.

 

여하튼 이런 일을 한다는 가정하에 바울은 그런 지도자를 ‘사랑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라’고 권유하는 겁니다.

 

3.너희가 알고

너희가 ‘알아 주라’는 말입니다. ‘알고 있다’는 말이 아니라. 그러니까 일부의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겁니다. 물론 다수의 사람들이 알아 주지 않았다면 이들이 교인들의 추대로 지도자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대다수는 존경하고 알아 주지만 일부는 존경하지도 알아 주지도 않는 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런 사람들에게 부탁하는 말인데, 위의 세가지 일을 제대로 하고 있다면 그들의 노고를 알아주고 존경하라는 그런 말입니다.

 

“너희가 알고” 는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에 걸리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너희가 알아 주기를 구한다는 뜻이 되는 겁니다. 왜냐면 알아 주지 않는 이들이 있으니까.

 

그러나 일방적으로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지도자들의 노고를 알아주라고 부탁하는게 아닙니다.

 

여기서의 ‘알고’는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지도자들의 수고와 다스림과 권고의 가치를 ‘눈으로 확인하고 잘하고 있다는게 증명되면 알아주라’는 그런 뜻입니다.

 

좀 웃기는 가정입니다만 그 수고와 가르침과 권고가 전혀 효과가 없었다거나 오히려 잘못된 결과를 나타냈다면 그런 결과를 보고 인정해주기가 곤란하겠지요? 그렇다면 바울이 교인들에게 저들 지도자들을 존경하라고 요구하지 않았을 겁니다.

 

전혀 복음에서 벗어난 소리를 권고랍시고 하고 권리만 요구하고 책임은 전혀 지지 않으려는 행동이 이어지고 수고는 커녕 지도자라는 직위를 가지고 무슨 벼슬처럼 군림하고 즐기려고 하는 행동을 보였다면 존경하라고 요구해서는 안된다는 뜻이 들어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이런 요구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와 지도자들에게 동시에 하는 요구인 셈입니다.

 

4.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귀히 여기며

우리가 이제까지 했던 말이 여기 명문으로 나옵니다. 저들 즉 데살로니가 교회의 지도들자의 사역 때문에 저들을 귀히 여기라는 말입니다. 그 사람이 목사라서가 아니라 목사의 일을 하기 때문에 그 일 때문에 존경하라.

 

그러니까 지도자라는 타이틀을 붙이고는 있지만 아무런 수고와 노력과 헌신이 없다면 저들을 귀히 여기지 않아도 된다는 뜻도 성립하는 겁니다. 약간 무섭습니다. 하하.

 

솔직히 목사된 자로서 아무런 일을 안 한다고 해서 그냥 무시하고 귀하게 여기지 말라고 제가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곤란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말을 뒤집어 보면 사역자로서 지도자로서 세가지 일을 제대로 하지 않고서 일방적인 존경을 요구하고 왜 귀하게 여기지 않느냐고 투덜댈 수는 없다는 겁니다.

 

오늘 성경의 본문이

목사나 사역자들에게는 너희가 교인들의 사랑과 귀하게 여김을 받으려고 한다면 노력하고 헌신하고 사랑하고 보살피고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교인들에게는 그런 노고를 알아주고 귀히 여기라는 겁니다.

 

‘그들의 역사’라고 했지요? 이 역사는 앞의 세가지 수고하고 다스리고 권하는 일을 말하지만 이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하는 겁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나의 영광과 영향력 확대를 위해서 했다면 역시나 교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요구할 자격이 없습니다.

 

교인들의 사랑 한번 받으려다가 너무 피곤한 삶을 살겠다고요? 교인들의 사랑뿐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까지 받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런 일을 하겠다고 결심하지 않은 자가 지도자의 직을 수락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수고는 자기가 지도자 되기를 수락할 때부터 하나님에게 맹세한 지도자의 엄숙한 의무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인들의 앞에서 엄숙하게 위의 세가지 사역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하겠다고 승낙한 것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목사가 된 자는 목사의 일을 해야지 사장이나 정치꾼의 일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그냥 귀히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 안에서’ 귀하게 여기는 겁니다. 여기서의 사랑은 아가페 사랑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주는 사랑을 말합니다.

 

그래서 ‘가장 귀히 여기다’는 말은 ‘할 수 있는 한의 최대한의 대우를 해주라’는 뜻이 됩니다. 더 이상 존중할 수 없을만큼 존중하라는 뜻입니다.

 

제가 성도들을 보면 정말이지 너무 가련하고 착합니다. 목사라고 부족한 사람에게 최대한 대우를 해줍니다. 사례금에 사택에 차에 휴대폰비에 의료보험에 국민연금까지 판공비에 도서비에 참 기가 찰 정도로 여러 명목으로 섬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제 말은 아닙니다. 우리 교회는 너무 약하기 때문에 이런 대우를 받는다면 교회 운영이 어려워집니다.

 

그게 아니고 다른 큰 교회말입니다. 이렇게 대우 받으면서, 그러니까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인격적으로 좋아하지 않는 지도자라고 할지라도 최대한 성심을 다해서 대우하는데 받은만큼도 제대로 헌신하지 않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목자는 관두고 삯꾼 만큼도 일하지 않는 목사는 너무 하지요.

 

하나님의 나라와 교인들의 영적인 건강한 삶을위해 사역하는게 아니라 자기의 생계를 위해서 자기의 권세와 명예를 위해서 사역하는 이들을 볼 때는 정말이지 부끄럽습니다.

 

5.너희끼리 화목하라

‘너희’가 누구를 말하는지를 놓고서 대체적으로 ‘너희’는 성도들을 말한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지도자와 평신도 사이를 말하는게 아니라 평신도 사이에 화목을 요구하는 겁니다.

 

제가 처음에 말씀드렸지만 모든 이들이 지도자의 사역에 대해서 박한 평가를 내리고 그의 지도를 따르지 않는다면 지도력 자체가 성립할 수 없습니다. 그럴것이 교회의 지도자란 지도받는 신도들의 자발적인 복종과 동의로만 이루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발적인 복종이나 동의는 ‘직접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동의해야 하는’ 것이므로 사람에 따라 지도자에 대한 평가가 다른게 당연합니다. 당연하게 모든 신자들이 지도력에 찬성하고 복종하고 동의한다면 좋지만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나는 저 목사가 좋은데 아무개는 싫은가봐’ 이렇게 생각할 수 있고 반대로 ‘나는 진짜로 싫은데 저 사람은 좋은가봐’ 이럴 수도 있습니다. 교인들 사이에 지도력을 놓고 분열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되면 무슨 문제가 생기느냐면 교회의 기능이 정지되는 문제가 생깁니다. 일치가 아니라 분열과 다툼이 있는 곳에는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거하시지 않는 곳은 당연하게도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수천 수만의 교인이 모여 있어도 성령께서 거하시지 않는 곳에서 성령의 역사는 일어날 수 없고 영적인 능력을 잃어버린 곳에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교인들을 선동하고 내몰고 하는 것은 정말이지 악질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자기의 나라를 위하는 자는 하나님의 종이 아닙니다. 스스로 교주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그 집단은 겉으로 보기에 어떠하든지 실질적으로 교회가 아닌 겁니다.

 

그래서 지도자와의 관계는 서로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너희 신도들끼리는 화목하라. 왜냐면 지도자는 한 사람이고 전체를 위해서 물러나면 되기 때문입니다. 지도자, 사역자는 결국 하나님이 파송한 자를 말합니다. 그 교회에 파송한 겁니다. 하나님은 한사람을 위해서 교회를 분열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물러나게 하셔서 다른 곳에서 사역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기서 ‘너희’가 지도자와 평신도를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왜냐면 이 데살로니가 교회는 다른 곳에서 교역자를 파송받은게 아니라 그 교회의 신도 가운데 열심있는 이들을 자기들끼리 추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화목’하고 ‘최대한의 존중’하고는 명확히 다른 말입니다. ‘너희끼리 화목하라’는 말에는 서로 ‘사랑안에서 대등한’ 관계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규율과 규칙으로 대표되는 지도자와 지도 받는 관계에 하신 말씀은 아니지 싶습니다.

 

뭐 목사와 신도가 상하 관계에 있느냐고 물으신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 아마 바울은 서로간에 사랑하고 아껴주는 관계에서도 영적인 질서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신도의 대표인 장로들을 위시해서 평신도들은 교회가 이런 사태까지 온 것에 회개해야 합니다. 애초에 자기들의 눈이 잘못된 것으로 말미암아 저런 지도자를 추대해서 교회에 큰 어려움을 초래했기에 하나님께 죄를 자복하고 교회에 용서를 빌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지금이나 그때나 정말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똑같은 모양입니다. 초대교회의 모습을 우리가 동경하지만 우리가 막연하게 알던 교회의 모습하고는 많이 다릅니다.

 

하기야 우리가 생각하는 초대교회는 예루살렘 교회를 말하는 거지 그리스와 터키의 교회는 아닙니다. 지금 터키를 당시에는 소아시아라고 불렀습니다. 바울이 주로 이 지역을 다니면서 교회를 세운겁니다. 유대인 교회나 헬라인 교회나 가리지 않고 온갖 문제가 다 들어 있습니다.

 

그건 다 우리 인간의 몸속에 죄성이 흐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냥 가만히 두면 죄악으로 흐르게 되어 있나 봅니다. 억지로 억지로 우리를 세우고 바로 잡고 돌려 놓지 않는다면 죄성으로 흐르는게 자연스러운 모양입니다. 그래서 교회안에는 온갖 문제가 다 들어있습니다.

 

제가 언론매체를 통해 보니까 서울 경기 인천 지역에 얼굴 보고 하는 예배를 전면 중단시킨 모양입니다. 부산은 코로나 환자가 몇 명 생기지도 않았는데도 중단입니다. 저번에 코로나 초기에 한번 선례를 만들어 놓으니까 툭하면 이제 예배중단이 내려집니다.

 

관례니 선례니 하는게 이렇게 무서운 겁니다. 그래서 교회들이 먼저 스스로 조심했어야 합니다. 사회의 간섭, 국가의 간섭이 들어오지 않도록 선제조치를 취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끼리 말인데 “예수쟁이들 정말 지독하게 말 안듣지요?” 자발적으로 정화하지 못하니까 나라가 강제로 정화를 시킵니다. 욕은 욕대로 듣고 뭐하는 짓인지?

 

제가 또 이번에 보고 놀란게 전국에 여목사가 왜이렇게 많은지... 성경이 명문으로 금하는 것을 인간적인 논리로 꼭 어겨야 할까요? 남녀평등이라는 인간의 교리를 하나님의 명령보다 앞세우는게 타당할까요?

 

전도사로서 권사로서 얼마든지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기독교회에 큰 일을 하려고 하면 그냥 권사의 직을 유지하고 했습니다. 교계에 유명한 기도원 원장들이 다 권사였지요. 여전도사의 직에서도 큰일을 이룬 분들이 많습니다.

 

이번에 언론에 노출된 예배 모습이 충격적입니다. 막 앞에서 정신없이 뛰어다니고....이게 성령충만의 표시라고 하기도 좀 , 제가 봐도 충격적인데 안믿는 이들이 코로나와 이 상황을 엮어보면서 뭐라고 생각할까요?

 

이번 사태로 신천지 보다 더 사악하다고 불리는 그 사람을 자정할 능력이 안 되어서 정부가 개입했으니 앞으로 점점 더 어려워 질겁니다. 진작에 좀 하지 말라는건 안했으면 좋을텐데.

 

이제는 부산에서도 코로나 환자가 생깁니다. 물론 아직까지 정관엔 단 한명도 환자가 생기지 않았지만 시내에서 왔다갔다 하는 이들이 있으니까 완벽하게 안전한 건 아닙니다. 더구나 우리 성도들이 원근 각지에 흩어져 있으니까 이분들이 병에 노출될게 걱정됩니다.

 

무더위에 홍수에 코로나에... 이걸 보고 ‘죽어라 죽어라 한다’ 라고 하지요? 그래서 더 성령님의 보호가 필요합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정말이지 지금은 나라와 한국 교회를 위해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그래도 기대를 해본다면 위기 속에 기회가 있다고 혹 이로 말미암아 한국 교회의 영적인 체질이 변하고 교인들의 믿음에 대한 순도가 변하고 교회 지도력이 변해서 더 작지만 더 알찬 교회로 성장해서 진정한 알곡들만 남아서 더 큰 빛과 소금의 역할이 가능해지지 않을까요?

 

솔직히 ‘내가 올 때 믿는자를 보겠느냐’는 작년까지하고 또 달리

그 말씀이 어쩌면 점점 현실화 될지 몰라서 두렵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시다. 그리고 말씀을 맺어야 겠습니다.

바울의 설교는 항상 이렇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간단한 몇마디인데도 파고들면 한없이 파고들 수 있습니다. 그만큼 내포한 의미가 깊습니다. 그리고 실천하는게 정말이지 어렵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무슨 거룩한 성인들의 단체로 가정하는 모양입니다. 우리는 단지 욕망에 물든 죄인일 따름인데 모든게 부족하고 실수투성이 인간일 뿐인데...성경이 가정하는 교회와 우리의 현실이 너무 차이가 큽니다. 괴리감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오늘의 우리는 더 어렵습니다. 도저히 그 경지에까지 나가기가 어렵습니다. 사회는 복잡해졌고 사람들의 욕심은 더더더 커졌습니다. 세속과 교회의 구별이 무너져서 교회 안으로 세속화의 물결이 물밀 듯이 밀려 들어오고 돈의 위력은 교회 안팎으로 똑같이 막강합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말 일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 하나님은 이 땅의 어딘가에 하나님의 참된 종들과 일꾼들을 세우시고 하나님의 큰 일을 준비하실 것입니다.

 

천리길도 한걸음부터라고 이렇게 초라한 우리라도, 이렇게 죄많고 문제 많은 우리지만 조금씩 조금씩 하나님의 공의를 향해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멋진 교회, 멋진 사회가 될 겁니다.

 

우리가 사회를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평안한 삶, 성도의 평안을 위함입니다. 우리네 삶이 여기, 두발을 딛고 선 여기에서 이루어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평안이 없는데 육적인 평안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평안이 필요한 것이고 이 교회의 평안이 사회의 평안이 되고 사회의 평안이 곧 나라의 평안이 되는 겁니다.

 

평안은 어디에서 오나요? 성령의 임재하심으로부터 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임재를 우리가 그렇게나 갈구하는 겁니다.

 

성령님의 임재는 순결한 영혼으로부터

죄악을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자복하는 영혼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좋은 교회에 소속된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런면에서 우리 성도들은 참 좋겠습니다. 왜냐면 여기 있는 우리 모두가 정말로 한사람 한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참된 성도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더 이상 불순물로 뒤범벅된

규모나 덩치가 말하는 교회가 아니라 질이 말하는 교회, 순수함이 말하는 교회가 될겁니다. 지금 이 땅의 교회는 그렇게 하지 않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지금 강제로 그렇게 만들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를 패러다임의 변화라고 합니다. 생각의 기본 틀이 바뀌는 겁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지금 이전에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세계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 최종형태가 무엇이 될지 궁금합니다. 두렵기도 하지만 기대도 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지극히 암담한 소식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우리를 위한 계획을 믿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라고 또 일주일 동안을 사회 각처에서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시 대면예배가 중단되고 다음주도 그렇겠지만 일주일동안 우리가 다시 만날때까지 승리하시고 주의 보호와 인도 가운데 거할 것을 믿습니다. 당장은 두렵고 힘들어도 우리는 하나님의 성도입니다. 성령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이 우리 성도들과 함께 하실 것을 믿습니다. 믿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2020년 8월 23일 주일 설교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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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누리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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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이번 주에 목사님과 통화를 하면서, 신앙의 먼 길을 가는 동안에는 여러가지 일을 만나기도 한다고

무척이나 담담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되짚어보니, 무슨 천로역정의 그림 한 장면 같기도 하고....

그 책에 보면 맹수를 만나게 되는데, 그래서 순례길을 가면서 아주 위협이 되는 것처럼 느껴지나,

사실은 직접적으로 주인공을 해치지는 못합니다.

 

왜 이 이야기를 덧붙이게 되느냐 하면, 코로나로 분명 교회는 많은 타격을 입고, 비난도 받겠지만,

그럼에도 똑바로 살아가려는 교회는 해치지 않을 것이고, 그런 교회들은 환난이 지나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성도를 지키고 돌봐주신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하지만 우리는 자주 잊습니다.

 

동호회에서 지인 한 분은 아예 시편 23편을 콕 집어 말씀해 주셨습니다.

4절은 참 좋지요.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그러므로 이런 어려운 환경일수록, 믿음을 굳건하게 하고, 이웃에 잘하려고 노력한다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한다는 메시지를 벌써 몇 번이나 적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다는 이야기를 벌써 몇 번이나 적는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은 환경이 어려워지면 인간은 교만을 마침내 꺾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한다고 제법 적나라하게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는 말은, 그만큼 저의 삶이 어렵고 캄캄하다는 반증이기도 하겠네요.

앞이 캄캄할 때, 기도 잊지 마세요. 라는 오래된 찬송이 떠오릅니다.

 

오늘의 두서없는 덧붙임은 여기까지만 쓰겠습니다. 방문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2020. 08. 시북 (허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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