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또 형제들아 권면하노니(데살로니가전서 5:14-15)/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20. 9. 30. 03:22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데살로니가전서 5:14-15)

 

이번 주도 영락없이 나라가 코로나 때문에 시끄럽습니다. 특히나 교회발 코로나 사태가 저를 매우 슬프게 합니다. 그리고 자정작용을 갖추지 못한 한국 교회에 대해서 부끄럽고 화가 나고 그렇습니다.

 

그 사람이 목사 명칭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진작에 조치를 취했어야지 사후약방문이 된 느낌입니다. 물론 소를 잃고도 외양간을 고치지 않는 것보다야 훨씬 낫기는 하지만 매우 많이 늦었습니다.

 

스스로 우리가 우리를 깨끗하게 하지 못하고 스스로 우리 가운에서 알아서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니까 직접적으로 하나님이 코로나를 보내서 깨끗케 하시는 형국입니다. 일단 하나님이 개입하시게 되면 많이 곤란한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의 채찍이 내리치면 주변사람들도 더불어 힘들게 됩니다.

 

뭐 일단 이렇게 된거 온갖 비난을 묵묵히 감내하면서 버티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로우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보기에 바른길로 행하다 보면 머지않아 우리에게 틀림없이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다시 한번 주어진 하나님의 자비의 기회를 잡아서 교회의 흑역사를 끝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려고 하면 기도하고 영적으로 깨어 있어서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준비하냐고요? 우리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바른 삶, 그리고 기도, 그리고 성령의 충만을 덧입는 것. 이것 말고 더 있을까요?

 

참고로 산기도...저도 정말 열심히 다녔는데 요즘은 산에 멧돼지하고 뱀이 너무 많아 졌습니다. 숲이 우거지고 자연보호가 많이 되어서 그런지 약간은 위험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밤에 산에서 멧돼지나 곰을 만난다면 좀 그럴 것 같습니다.

 

귀국 후에 지리산에서 기도할 기회가 있었는데 참 좋은 장소를 발견했어요. 아늑하고 뭔가 있을 것 같은 곳. 그런데 한참 기도하다가 눈을 들어 문득 옆을 보니까 플랜카드가 한 장 걸려 있어요. ‘여기는 곰이 자주 출몰하는 지역이니 조심하세요’ 놀래서 자리를 싸고 피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주로 좌광천변을 걸으면서 중간 중간 기도하는 방식으로 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여름에 제가 ‘순례자의 길’로 명명한 좌광천 이십리길, 왕복하면 40리가 되는군요. 아름답고 그렇지만 덥고 사람들도 간간히 다녀서 완벽하게 조용하지는 않은 곳입니다.

 

바쁘고 두려운 삶가운데서도 짬을 내서 최대한 하나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시기를 당부합니다. 대면하여 보지는 못하지만 자기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최선을 다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이 보시고 ‘내 어여쁜자’라고 부르실 수 있도록 항상 바르게 살기를 바랍니다.

 

코로나가 창궐하고 재택근무와 인터넷 수업이 시작되고 대면 예배와 소모임이 금지된 이때를 이용해서 오히려 하나님과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시간이 되도록 기도하세요. 기독교인의 이미지가 나빠져도 우리를 보고서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 받으실 수 있도록 더 바르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아직도 무덥기는 하지만 이제 머쟎아 여름은 갈겁니다. 가을이 오겠지요? 가을이 되면 코로나가 더 기승을 부린다는 예보가 있지만 글쎄요. 하나님의 자비와 인도하심이 우리를 보호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역시 지난 주에 이어서 데살로니가 전서 5장을 살펴봅니다. 우리가 그냥 보아서는 모르지만 바울의 목회서신에 적힌 이 간단한 말 속에는 매우 많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본문은 매우 짧은 절이기는 하지만 이 본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한 ‘성도라면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에 대한 권면이고 교회라면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담담하게 기술한 목회서신이며 세상으로 친다면 바른사회 고운 사회를 위한 올바른 처세라고도 할 수 있는 글입니다.

 

앞에서 바울은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라는 말로 목회자, 교인들에 대한 몇가지 권면을 했습니다. 오늘도 비슷합니다.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라는 말로 믿음 안에서의 형제 즉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한 진실한 권면을 이어서 기술하고 있는 겁니다.

 

이 본문은 기원후 1세기경의 그리스 교인들에 대한 권면이지만 오늘 이 땅에 사는 우리를 향한 권면도 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본문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받는 느낌이 있습니다. 뭘까요?

바울이 너무 부탁이나 권면을 많이 한다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자기가 이전에 세운 교회에 대해서 근심과 걱정이 많기 때문입니다. 관심과 사랑이 넘치기 때문입니다.

 

혹 이들이 무지하여 신앙 밖으로 탈선할까 하는 걱정도 있고 복음의 진리에서 위배되는 행동을 할까 걱정도 되고 또 기독교가 막 태동하는 시점에 로마당국이나 이주민인 유대인들의 집단적 방해와 예수에 대한 오해가 있을까 봐서 걱정하기도 하고 혹 중간에 실망하여 낙담하고 신앙이 소멸되어 세상으로 나갈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안 그래도 교회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인데 혹 기독교인 가운데 물의를 일으켜 제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될까봐 염려도 됩니다.

 

혹 핍박받는 교인이 있을까 걱정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미리 미리 잘하자고 권면하고 당부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교인들을 위해서.

 

몇가지만 당부해도 사실 이걸 제대로 지키는건 어렵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중요한 일을 몇가지가 아니라 열몇가지씩 당부하고 있고 이걸 또 분석하면 당부하는 내용이 수십가지로 늘어나는 경우까지 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겨우 두절의 본문 속에 바울이 당부하는 것이 무려 6가지나 됩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찬찬히 들여다 보면 비슷비슷합니다. 당부 내용이 비슷하면 하나로 압축해서 말하면 좋을텐데 그러지 않습니다.

 

바울이 볼 때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마치 물가에 내어놓은 어린아이 같은 모양입니다.

시시콜콜 당부하고 가르치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입니다.

 

1.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옛날 성경에는 이 말이 “규모없는 자들을 권계하며”였습니다. ‘규모없는 자’를 ‘게으른 자’로 번역했는데 여기에 번역하지 않는 또 하나의 뜻이 있습니다. ‘반항하는 그러니까 교회의 규율에 반항하고 대열을 이탈해서 낙오하는 자’를 말합니다.

 

개별교회가 마음대로 정한 규율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계율, 하나님의 성도로서 당연히 해야할 바를 반항하고 어긴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원래 행군대열에서 이탈하고 낙오한 병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낙오한 이유가 체력이 약해서가 아니라 딱딱한 규율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반항의 의미로 대열에서 이탈하고 낙오하는 자라는 말입니다.

 

제 멋대로 행하는 자, 식욕은 많은데 게을러서 일하지 않는 그런 자를 일컫습니다.

 

그런 이들이 자기의 식욕을 일하지 않고서도 충족시키려면 교회의 법과 규칙을 어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규모없는 자’로 번역되었던 겁니다. 게으른게 문제가 된다는 말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문제가 될게 뭐 있습니까? 자기가 게을러서 제대로 밥을 못먹는데 우리가 걱정할게 뭐가 있나요?

적당히 흉이나 보고 뒷담화 정도 하는 거지. 자기 인생을 우리가 책임질 것도 아니고 뭔 걱정입니까?

 

그런데 이게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형제들에게 권면하는 첫 번째 사항입니다. 이상합니까?

 

그건 오늘의 우리와 그 당시의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사고방식이 완전히 달랐기에 우리가 이 사태의 심각성에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항상 강조하는 것 중에 운명 공동체, 식구, 또는 가족이라는 말을 생각해 보세요. 요즘 ‘가족같은 회사’라는 말은 있는데 ‘가족같은 교회’라는 말도 아직 쓰고 있는 교회가 있을 겁니다.

 

교회 이름에 하늘 가족이라는 이름도 있쟎아요. 가족이니 식구니 하는 뜻 속에 우리는 중요한 한가지를 가정합니다.

 

교인 중에 어려운 이가 있으면 한마음으로 그 형제를 도와서 먹고 살도록 해야 한다. 아픈이가 있으면 한마음으로 기도하고 위로하고 그 병을 낫게 할 방도를 고민하고 노력해야 한다.

 

실직하여 생계가 어려운 형제가 있으면 그의 새로운 직장을 위해서 함께 기도하고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형제 중 그 누구도 경제적이나 육체적인 어려움으로 실족지 않게 해야 한다.

 

이런 원칙이 전제되어 있는 겁니다.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

 

예, 맞습니다. 오늘의 우리가 생각할 때에는 정말이지 이해가 안되는 원칙입니다. 그러나 원래 교회라는 말 속에는 이런 것을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한 교회의 교인은 ‘믿음안에서 한 가족’이라는 가정이 들어 있습니다. 이런 원칙에 동의하지 못한다면 한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한날 한시 한 장소에 모였지만 강단만 바라보고 나를 위한 간구만 잔뜩하고 돌아가는 곳이 교회가 아닙니다. 그 교회의 교인은 가족이요 식구가 되어야 합니다. 그 말은 운명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앞만 아니라 옆도 뒤도 돌아봐야 한다는 겁니다.

 

허허, 말도 안돼! 그래요 요즘에야 말도 안되는 소리지만 당시에 교회는 그랬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게으름이 문제가 된 겁니다. 공동체의 구성원이 밥을 굶는다면 다른이들이 책임져야 하니까 이런 이들이 많아지면 교회에 문제가 심각해 집니다.

 

십시일반이라고 열명이 한숫가락씩 덜어내서 밥 한그릇은 쉽게 만들지만 게으른 이와 열심히 일하는 이가 반반이면 구성원 각자가 밥을 한 그릇이 아니라 반 그릇씩밖에 못 먹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 비율이 반대가 된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합니다.

 

옛날에는 음식을, 먹을만한 것을 충분히 먹는 것이 매우 어려웠고 그래서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제대로 먹고 살기가 어려웠던 그런 시절에 게으른데 식탐이 많다면 정말이지 곤란해 집니다.

 

당시의 교회들은 예배가 끝나면 애찬을 거행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점심이나 저녁을 같이 먹는 겁니다. 예배 전후의 공동식사는 교회의 가장 아름다운 특징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아마 교회에서 모든걸 다 준비하는게 아니라 각자가 음식을 가지고 와서 함께 나누어 먹었던 모양입니다.

 

게을러서 가난해지고 그래서 음식을 가져오지 못하고 그러니 평소에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이들이 당연히 교회의 애찬에 집착하는게 당연합니다. 가져오지는 않고 남의 것만 먹는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런데 이걸 애찬으로 생각해서 성도의 교제중에 적당히 먹고 마시는게 아니라 걸신들린 것처럼 양을 넘겨 먹거나 맛있는 것, 비싸서 평소에 잘 먹지 못하는 것을 형제들이 맛보지 못하게 혼자서 싹쓸이한다면? 그런데 이런 이들이 한둘이 아니라 많은 숫자가 그렇게 행동한다면?

 

식사가 어떻게 될지는 안봐도 훤하지요? 그래서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라는 말이 제일 먼저 나오는 겁니다.

 

교회가 너무 쪼잔합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가난한 형제를 돕는 것하고 게으름을 피우는 것하고는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엣날의 일은 지금처럼 전문적인 지식이나 기술을 요하는 일이 많지 않았습니다.

 

신체 건강한 이가 몸을 쓰면 충분히 할 수 있는 그런 일들입니다. 농부, 어부, 포도원 일꾼이나 상단의 짐꾼, 하인 이런 정도입니다. 그러니 몸이 정상이면서 일을 하지 않아서, 혹 게을러서 일하는 것을 싫어해서 가난한 자, 그 자를 일하게 권계하라는 말입니다.

 

가난한 형제가 있으니까 다른 형제들이 당연히 도와야 하는데 충분히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음에도 불평하고 게으름을 피우고 무위도식하며 보내는 형제는 그렇게 하지 말고 정신 차리고 일해서 먹고 살라고 권면하라는 겁니다.

 

혹 오해하실까봐 다시 말씀드리면 교회는 부자와 빈자를 차별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그 교회 공동체를 구성하는 일원으로서 한 가족으로서 크건 적건 맡아서 역할해야할 임무가 다 있습니다. 각 구성원이 그 임무에 맞게 행해야 합니다. 그걸 ‘규모’라고 하는 겁니다.

 

제가 일전에 한번 말씀 드렸습니다. 제 동기 목사 중에서 미국 칼빈신학교에 유학한 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칼빈신학교는 네델란드 이민자들이 세운 학교입니다. 그들의 삶의 모습이 너무 좋아서 그 교파의 교회에 출석하면서 그 멤버가 되려고 했답니다. 그랬더니 넌 장로교인이 아니냐. 우리하고 달라서 안된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그 교회에 출석은 해도 정식 멤버는 못됐다고 하던데 이런겁니다.

 

그 교회의 멤버가 되면 내야 할 헌금 규모가 있습니다. 재산이나 수입의 다과에 따라 그 규모가 정해진답니다. 그러니까 그 교회에서 사용하는 재정규모를 신도 수로 나누어서 각자의 형편에 따라 매년 천만원 일억 또는 백만원 십만원 이런 식으로 정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멤버 중에 갑자기 실직을 한 이가 있습니다. 그러면 헌금을 내기가 곤란해 집니다. 그리고 자녀들의 학비도 문제입니다. 왜냐면 미국의 공교육이 이미 붕괴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신앙교육을 할 수 있는 자기 교파의 사립학교에 자녀를 보내는데 이 학비도 엄청 비쌉니다. 그런데 실직을 하면 학비를 내기가 어렵지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남은 이들이 그 사람이 담당해야 할 헌금을 나누어서 냅니다. 그리고 실직자의 자녀 학비도 전 교인이 나누어서 내는 겁니다. 왜냐면 자기들은 운명공동체기 때문입니다.

 

그 형제가 새로운 일자리를 찾기까지 나머지 교인들이 나누어서 그 형제의 부담을 대신 지는 겁니다. 그래요 본문의 ‘권면’이란 것을 하게 되면 그 형제의 경제적인 부분을 나누어 부담해야 합니다.

 

자기는 십원 한장 주지 않으면서 말로만 하는 형제사랑만큼 꼴보기 싫은 것도 없습니다. “형제여 왜 배를 곯고 있느냐. 빨리 시장에 가서 돈을 주고 빵을 사서 배를 불리라”이게 말입니까 시비입니까?

 

바울의 권면에는 이런 문화적 배경이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최고의 스펙을 쌓아도 취직하기가 하늘의 별따기 이기 때문에 취직하지 못한 이들이 게을러서 백수로 있는게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의 실직이 사회 구조적인 문제라면 여기서 말하는 것은 일부러 게으름을 피우거나 무위도식하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초대 교회가 사랑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까 고의로 일부러 게으름을 피우고 그 부담을 형제에게, 그리고 교회에 전가하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는 안된다 그러니 너희가 그런 형제를 권계하라 이 말입니다.

 

2.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옛날 성경에서는 ‘마음이 약한 자들을 위로하고’ 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원문의 뜻을 잘 보면 위로하는 말보다 격려라는 말이 더 정확합니다. 여기서 ‘마음이 약한 자’는 용기가 없는, 겁이 많은, 심약한 자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기가 약하고 뻔뻔해서 자기위주로 살지도 못하고 그런 자를 말합니다.

 

이런 자들은 외적인 핍박에 쉽게 무너지고 그래서 시련이 오면 세상으로 쉽게 떨어지고 구원에 대한 확신은 없으면서 동시에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기 때문에 세상으로 완전히 나가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신앙상태자를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소심하고 용기도 없기에 보통은 남의 말에 쉽게 흔들립니다. 염려는 많지만 모질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하루에도 열두번 이럴까 저럴까 하면서 전전긍긍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도는 이런 믿음이 약하고 심약한 이를 계속해서 위로하고 격려해서 함께 신앙의 증진을 꾀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걱정하지 않도록 위로하고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열심을 내도록 격려하고 해야 할 사명을 지라고 권면하는 겁니다.

 

심약하고 겁많은 이들의 특징이 ‘항상 마음이 왔다 갔다하는’ 겁니다. 그래서 어제, 전주에 저번달에 위로했다고 해서 그가 굳게 섰다고 관심을 끊었다가는 어떤 일이 생길지 모릅니다.

 

그래서 자주, 매우 자주 계속해서 그를 찾아서 격려하며 걱정을 들어주고 염려를 해소할 수 있도록 노력도 해주고 말벗이 없을 때 말벗도 되어주고 일이 없을 때도 일부러 일을 만들어서 같이 식사도 하고 선물도 하고 격려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등산을 할 때 노련하고 건강한 이는 쉽게 쉽게 산을 오릅니다. 요령도 있고 힘도 있습니다. 그러나 초보자와 함께 등산을 하면 여러 가지로 신경 쓰이는게 많습니다.

 

혹 넘어질까 살펴야 하고 높은 곳을 오를 때는 받쳐주기도 해야 하고 자기는 계속 오르고 싶은데 초보자와 함께 하려면 같이 중간 중간 쉬어주기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일행이라면 당연히 이 정도 수고는 해야 합니다. 바울의 권면이 바로 이런 식입니다. 그 교회의 앞선 성도들에게 믿음의 후배와 초보자들에게 그들을 신경 쓰면서, 형제를 사랑하면서 함께 신앙생활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더 많은 짐을 부여하는 겁니다.

 

우리 주님에게로 가면 멍에가 없이 온전히 자유롭습니까? 그렇지 않지요. 우리 주님이 주시는 멍에는 분명 있습니다. 내가 주는 멍에는 가볍다고 하셨지 나는 절대로 멍에를 주지 않겠다고는 하지 않으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3.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여기서 힘이 없는 자는 앞에서 나온 마음이 약한 자와 같은 말입니다. 왜냐면 여기서의 힘은 영적인 힘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약한 것도 포함합니다. 그러나 주로 영적인 힘이 약한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 세상은 이런 힘이 없는 자들을 어떻게 합니까? 짓밟고 무시하고 이용하고 착취합니다. 자본주의 무한 경쟁사회에서 이런 자들이 살아갈 수 있는 자리는 지극히 적습니다.

 

아니 사회에서 설 자리가 없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이와는 달라야 합니다. 세상에서와 같이 교회에서마저도 힘있는 자, 유능한 자가 대우를 받고 힘이 없는 자가 무시를 받는다면 이는 교회가 세속화되었다는 말입니다.

 

물론 오늘날의 교회에서는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귀찮아 합니다. 손이 많이 가고 귀찮으니까 그리고 별 이익이 없으니까.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자비로우셔서 힘이 없는 자를 사랑하시고 품에 안으사 보호하시고 격려하시며 지켜 주십니다.

 

여기 본문의 ‘붙들어 준다’는 말이 바로 ‘지키다’는 말입니다.

 

힘이 없는 자는 유능하고 강한 자들끼리 벌이는 경쟁에 낄 생각을 아예 포기하고 한구석에 찌그러져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적으로 약하기에 욕심을 벗어 버리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유혹에 매우 취약합니다. 세상은 무언가도 댓가없이 거저 주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을 얻으려면 댓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 자본주의 세상의 법칙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들을 유혹에 욕심에 휘둘리도록 내버려 두면 이용만 당하다가 인생을 망치고 영혼까지 멸망길로 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좋은 이들이 이들을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격려하고 위로하고 지키고 도우고.

 

성도는 그렇습니다. 혼자만 굳건한 신앙위에 서서 자기 신앙만을 챙기는 자가 아니라 형제의 처지도 살피면서 교회의 상태도 걱정하면서 사회도 배려하면서 나가는 자를 말합니다.

 

본문을 크게 보면 맨 앞에서 나온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라는 말과 균형을 잡아 주고 있습니다. 게을러서 가난하고 그래서 규모가 없고 식탐을 부리고 하는 말을 듣게 되면 자칫 교회가 가난한 자를 차별한다는 오해를 불러 일으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바울이 게을러서가 아니라 진짜로 능력이 없어서, 요즘 말로 경쟁력이 없어서 취직을 못하고 그래서 삶이 힘들고 한 형제를 보면 그들을 지켜주라는 겁니다.

 

옛날 신학교에서 노 교수님들이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전도사님들, 절대로 교회에서는 정치 얘기 하지 마세요. 그리고 배우자감이나 직장 소개해 주지 마세요”

왜냐면 그거 하면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예수만 소개하세요”

 

참 좋은 말이기는 하지만 저는 좀 다르게 생각합니다. 정치얘기야 그렇지만 요즘처럼 처녀 총각들이 시집장가를 안가는데 당연히 소개도 시켜주고 결혼할 수 있도록 밀어 줘야 합니다.

 

취직도 소개할 수 있으면 좋지요. 한쪽은 배 불러서 죽고 한쪽은 배 고파서 죽고 이건 절대로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사실상 영적인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육적인 것까지 종합적으로 돕고 도움받는 공동체입니다.

 

그냥 공동체가 아닙니다. 운명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교회는 예배 후에 공동으로 식사를 하는 겁니다. 이게 이번 코로나 때문에 깨어졌는데 다시 같은 식탁에 둘러앉아 서로 음식을 나누며 교제할 수 있는 날이 속히 오기를 바랍니다.

 

지금 시점에 우리 성도들이 취해야 할 바른 자세입니다.

 

4.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오래 참으라고 하니까 인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인내라고 하기는 곤란합니다. 풀어서 설명하자면 불행과 고생 중에서도 끈기 있고 용기 있게 참아 주는 것을 말합니다.

 

복수할 일에 대해서도 온화하게 참아 주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세상은 이런 자를 호구라고 욕하고 비웃고 이용하고 착취하고 버리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참으라고 하십니다.

 

이런 오래 참음은 하나님의 속성 중에 하나입니다. 멸망받은 죄인에게도 오래 참으시사 회개할 기회를 주고 또 주고 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이 바로 ‘오래 참음’입니다.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하나님의 속성을 닮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 보면 눈에 거슬리는 형제에게도 오래 참아야 하고 세상에 대해서도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얼마든지 보복하고 징계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자비를 발휘하여 오래 참는 것입니다.

 

힘이 없어서 어쩔 수 없어서 참는 것을 우리가 오래 참음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힘이 있음에도 스스로를 자제해야 오래참음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오래참지만 결코 비굴하거나 굴욕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힘있는 자의 여유를 가지고 오래참는 것입니다.

 

마치 암행어사가 암행어사 출도일까지 스스로 몸을 낮추어 악질 사또의 핍박을 참는 것에 가깝습니다. 암행어사가 출도일까지 몸을 굽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러라고 암행어사쟎아요. ‘암행’ 몰래 움직인다 ‘어사’ 왕의 사신이다. 이 두가지가 합쳐지면 그에게 무엇이 두려울까요?

 

마찬가지로 왕의 자녀들인 우리 성도들 역시도 전혀 비굴하게 또는 겁먹고 초조하게 참는게 아니라 여유있게 그리고 소망을 가지고 끈기 있게 약간은 웃으면서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사랑하는 자, 긍휼을 받을 만한 자에게만 오래 참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오래 참아야 한다는게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주는 것 없이 미운 이에게도, 실제적으로 해를 끼쳐서 당장 박살을 내야 하는 이에게도 기회를 주어야 하고 오래 참아야 하니까 문제일 뿐입니다.

 

왜입니까?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그 형제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형제사랑은 그리스도의 첫 번 계명입니다. 그래서 오래참음입니다.

 

5.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참 재미없는 구절입니다. 자기에게 해를 끼치는 자를 그냥 두면 나쁘게 대해도 저항도 못하는 바보로 만만하게 보고 더 괴롭힐 확률이 높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한 힘을 내서 자기를 방어하고 보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현대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고 합니다. 아니 자기가 해를 입었는데도 보복하지 못하게 하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너무 바울이 세상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사도들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지 몰라도 세상에 사는 일반 신도들은 그게 절대로 안됩니다.

 

중국사람들이 영웅이라고 가정하는 자들은 은혜는 열배로 원한은 백배로 갚은 자라고 합니다. 보세요. 은혜는 열배인데 원한은 백배로 갚은 겁니다. 그게 바로 사람입니다. 영웅이라고 하는 자의 수준입니다.

 

이게 왜 영웅인고 하니 소인배는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한은 뼈에 새긴다고 합니다. 은혜는 당연하게 여기고 해를 직접적으로 끼치지 않고 다만 은혜를 베풀어 주지 않는다고 오히려 원한을 품는답니다. 그러니 열배로 은혜를 갚아 주는 자가 영웅일밖에요.

 

세상의 어떤 책에서도 원한을 잊어버리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전혀 현실적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무한경쟁의 사회에서 그런게 통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런 식으로, 하나님이 요구하는 식으로 살 수 있으려면 악인이 도저히 해를 끼칠 수 없을 정도로 정오의 해처럼 높이 솟아 빛이 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하나님만은 그렇게 요구하십니다. 그래요, 하나님은 우리를 정오의 해처럼 빛나게 높이 올리셔서 악인이 아무리 우리를 끌어내리려 발악해도 발목을 잡지 못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그 놀라운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가 되는 겁니다. 우리는 이미 좋은 편에 서 있습니다. 그러니 이 좋은편을 지켜야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목회서신에 나온다는 것은 실제로 당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살면서 이런 핍박과 위협을 받고 있었고 그래서 오래 참아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악인으로부터 계속해서 위협과 핍박을 받고 있기 때문에 보복의 유혹에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생각하면 자기를 지키기위한 노력이 정말로 필요한 시기입니다. 당시의 로마제국은 기독교인에게는 거대한 함정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한걸음 걸을 때에도 조심해야 하는 호랑이 굴입니다.

 

그런 곳을 완전무장이 아니라 완전 무방비로 가야 된다는 요구는 정말이지 따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 요구를 따르고도 승리할 수 있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코로나가 창궐하고 멈출 줄을 모릅니다. 거리두기 3단계로 격상해야 된다고 할 정도입니다. 여기 부산은 아닌데 이미 서울 경기 지역은 2.5단계입니다. 말이 웃기지요? 3단계가 되면 정말이지 곤란해 지기 때문에 인내에 인내를 하는 겁니다.

 

이러다가 나라의 존망이 아니라 인류의 존망이 문제가 될 정도입니다.

 

대면 예배 금지령에 대한 반발의 움직임이 거셉니다. 예배를 수호하기위해 목숨도 건 옛 성도를 본받자고 선동합니다. 말은 그럴 듯 하지만 옛날 성도들은 예배를 드림으로 세상을, 이웃을 위험에 처하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무슨 기독교 탄압하려고 대면 예배를 금하는게 아닙니다. 오히려 이웃을 사랑하고 사회를 안전하게 하기위해서 대면 예배를 금지한 겁니다. 그냥 하나님이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를 보호하시기위해 쉼을 준다고 생각하세요.

 

목사가 말을 안 들으니까 하나님이 국가의 행정명령을 이용해서 쉼을 주신다고 생각하면 좋습니다. 바이러스에 눈이 없으니까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를 보호하시려고 역사하신 걸로 보세요.

 

물론 하나님은 바이러스고 세균이고 병도 낫게 하시고 이기게 하시는 분이시지만 그가 스스로 만드신 자연법칙을 웬만해서는 깨트리려고 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걸 알기에 사탄도 예수님에게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했지 말씀으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도 주님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지 모래로 흙으로 포도주를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법칙을 존중하려고 그렇게 하신 겁니다. 고체는 고체로 액체는 액체로 당시의 돌맹이하고 떡하고는 매우 비슷해보입니다. 특별한 일이 없는데 일부러 파괴하다 보면 그걸 일반 법칙이라고 말하기 곤란해 질 겁니다. 이건 이래서 어기고 저건 저래서 어기고 이러다 보면 특별함이 일상이 되어서 더 이상 보편타당한 법칙이란게 없어 질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보니까 어제와 다른 또 다른 교계 원로라는 사람들은 누가 그들에게 자격을 준건지 모르겠지만 오히려 기독교에 대한 일반인들의 반감을 극대화시켜 기독교를 이땅에 말살시킬 수도 있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

 

정부의 대면예배금지령이 종교의 자유에 대한 위반이라고 절대로 대면예배를 금지해서는 안된다고 목숨으로 대면예배를 지켜야 된다고... 이런식으로 교회를 선동하게 되면 안 그래도 미운털이 박힌 교회를 죽이는 행동이 될겁니다. 그래서 정부의 대면예배 금지령보다 오히려 기독교에 더 큰 위협이 될겁니다.

 

한편에서는 전아무개를 목사로 불러서는 안된다는 기독교 원로 지도자들의 성명이 있었습니다. 제가 말씀드렸지요. 기독교는 자정능력이 부족하다고. 너무 늦게 성명이 나왔습니다. 조금 더 일찍 나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지금 이 땅의 교회는 각자 자기의 좋은대로 행하고 말하며 일치라는게 없습니다. 교회는 정치논리에서 벗어난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중에서도 성도는 더 조심해야 합니다.

혹 내가 잘못된 언행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거나 교회를 힘들게 하지는 않는지 되돌아 보아 스스로 살펴서 근신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자기 배가 부르고 자기는 이미 기득권을 누리니까 이 나라 교회 전체의 환경을 생각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살면서 세상사람들과 교류하면서도 하나님의 진리를 지키며 살아야 하는 평신도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습니다.

 

자기 손으로 돈을 벌어본 적이 없는 이들이 교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얼마나 국민들이 미워하게 될지를 생각지 않고 마구잡이로 내뱉는 말이 교인들과 교회를 이 땅의 주류에서 밀어낼 겁니다.

 

이런 개김이 점점 기독교회를 위협합니다. 지금 일부 교인들의 언행은 국민적 공분을 초래합니다. 어설픈 논리로 교회를 국민들의 혐오 대상으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겁니다. 자중해야 합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용서를 빌고 잠잠해야 합니다.

 

6.항상 선을 따르라

우리 기독교인은 항상 선을 따라서 행해야 합니다. 무엇이 선입니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

 

하나님이 이웃을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너무 대우를 받으며 살다 보니까 현실감이 많이 무뎌졌다면 제발 현실사회에 악영향을 끼쳐 후배 목사들과 작은 교회들의 앞날을 막으려 하지 말고 가만 있는게 차라리 낫습니다.

 

항상 선을 따른다는건 보통의 인간이 가진 인내심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은혜에 푹 잠기지 않으면 도저히 가능하지 않습니다.

 

조금만 틈이 있거나 여유가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우리의 몸 안에서 악성이 솟아나고 욕심이 나오고 죄성이 우리를 주도하려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나갈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강제적으로 우리를 주장하시지 않으면 우리 인간의 순수한 자체 힘으로는 어렵습니다.

 

‘선을 좇으라’에서 좇으라는 말은 사냥개가 사냥감을 필사적으로 쫓아 가는걸 말합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착하게 사는 것으로는 안됩니다. 단순히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도 안됩니다.

 

적극적으로 착하게 적극적으로 사랑으로 그렇게 살라는 말입니다. 이게 쉬워요? 전혀요. 절대로 쉽지 않습니다. 그러면 절대적으로 불가능할까요? 그렇지도 않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가능합니다. 오직 성령으로만 우리가 이렇게 순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수준에서 가능한 일을 인간인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성령의 역사에 푹 잠길 때에만이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입니다. 오늘은 성령의 시대입니다. 인간의 문명이 고도로 발달하고 온갖 첨단 기법과 사상이 판을 치고 그래서 오히려 신에의 도전이 판을 치는 오늘날에 우리는 성령의 시대로 돌아가야 합니다.

 

오직 성령 하나님만이 우리로 하여금 난세에서도 승리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승리까지는 필요가 없어요? 그렇다면 더 성령의 역사가 필요합니다.

 

난세에 자기 한몸 자기 가정 하나를 보존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세상과 싸워 세상을 장악하고 하나님의 선한 영향력을 심어 주는 것보다 아무것도 안하고도 안전하고 평안하기를 바라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민초에 불과한 성도들의 삶은 거대 공룡들의 싸움으로 풍비박산이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거대한 욕망덩어리들의 발악 속에서 사회의 안정이란게 참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반석과 산성이 되시는 내 주 하나님의 성령을 받으시기를 그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가 한번 쭉 전화를 돌려보니까 우리 성도들이 다 평안한 것 같아서 마음이 좋습니다. 그래도 항상 조심하고 기도하고 주님의 보호와 인도 가운데서 또 한주일을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 홍종일 목사님 2020년 8월 30일 주일 설교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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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라디오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예를 들어, 만 개의 직업이 있다면, 만 개의 어려움이 있다. 라는 거죠.

겉으로 보기에는 근사한 직업이라도, 속사정으로는 괴로운 순간들이 있는 듯 합니다.

심지어 문학상까지 받은 작가라도, 글이 안 써진다고 현실의 마주보기가 그토록 어려움을 호소합니다.

 

일을 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 있습니다.

삼시 세끼가 간단하게 해결되길 바라고, 나머지 시간은 편안히 쉬고만 싶습니다.

그런데 성경책은 그런 본성을 너무 정확하게 간파해 버렸습니다.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공동체에 도움이 되는 인생을 살아보라는 것입니다.

 

그 두꺼운 기독교서적을 읽어도, 또 최신 정신의학서적을 읽어도,

고통스러운 현실에 대한 해답을 좀처럼 찾지 못했는데...

오늘 설교에는 마치 쓴 약 처럼 권유가 담겨 있습니다.

 

일을 하지 않고, 더 가지려는 태도는 잘못 이라는 그 정직함이 몹시 무겁게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역설적으로 써도 좋지 않을까요.

내가 힘써 일하여, 누군가와 함께 좋은 시간을 보냈다면, 그것은 천국의 한 장면이라 생각해 봅니다.

 

인생이여!

부디 깨어서, 노력하는 모습이기를!

 

오늘 이야기는 여기에서 이만 줄입니다. / 2020. 09. 시북 (허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