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을 소멸치 말며
데살로니가전서5:19-22
지금은 성령의 시대입니다. 지금은 성령받을 때요 성령을 받지 않고는 성도로서 승리의 삶을 사는게 불가능한 시대이기도 합니다. 또한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기를 원하고 있는, 말 그대로 성령의 시대입니다.
그런데 성령 받음이 무엇이냐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해보면 뭔가 특별한 징조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가령 뜨겁다
가령 차갑다
가령 기쁘다
가령 슬프다 그래서 눈물이 난다
손을 얹어 기도한즉 병이 낫고
말씀을 그냥 전하기만 했는데 즉각적으로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고
예언을 하고
방언을 하고
세상의 것에 더 이상 욕심을 내고 싶지 않고
항상 감사만 나오고
믿음으로 주와 함께 천하를 횡행하고
이런 객관적으로 나타나는 징표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나는 성령받지 못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이미 성령받은 경우도 있고 성령받은 걸로 착각했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하기야 하나님의 역사를 인간이 어찌 속속들이 알 수가 있을까요? 그 세밀하고 신비한 영적인 비밀을 한갓 인간이 다 안다는건 오만입니다.
여하튼 지금은 성령의 시대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보니까 받은 성령을 소멸할 수도 있는 모양입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성령받기 만을 힘썼는데 이제는 ‘성령 소멸’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야 합니다.
혹시 우리의 상태를 점검해 보면
우리의 신앙상태를 보면 혹시?
농담인데... 이렇게는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난 성령을 소멸할 걱정은 없어. 왜냐 처음부터 받은 적이 없거든’
하하
우리 모두는 이미 성령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여기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것이 바로 성령 받은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이 놀라운 복음의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공로가 믿어진다는 것이 바로 성령께서 내 마음의 영을 깨우셨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 한
우리는 이미 성령을 받은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생각하는 가장 일반적인 형태의 ‘성령 받음’ 하고는 달라서 그렇지 성령께서 우리의 영을 깨우시지 않고서 우리가 하나님께로 가까이 다가갈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그리스도 안에 우리 모두는 이미 성령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잘 보니까 뭔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약간 다른 모양입니다. 성령을 소멸치 말라고 하고는 다음에 에언을 멸시치 말라고 합니다. 둘은 같은 것입니까? 그래서 강조하려고 연달아 두 번 사용했을까요?
아니면 둘은 서로 다른 것일까요? 그래서 이것저것 다양하게 나열한 것일까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은 파고 파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기야 인간이 어찌 하나님이 허락지 아니하시고는 그 깊은 영의 세계를 다 알 수 있을까요?
1.성령을 소멸치 말며
오늘 본문을 보면 성령과 예언을 따로 따로 언급한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19절에서 22절은 전부 성령의 역사 중에서 특별히 예언에 관한 내용을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먼저 성령에 관해서 잠깐 언급한다면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모든 그리스도인과 함께 하시고 또
교회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영을 말합니다.
우리가 흔히 ‘성령받았다’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성령을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이시며 그가 우리를 운행하시는 것이지 우리가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게 아닙니다.
성령이 탄식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셨지요? 위로의 영이라고 들어보셨지요? 감동, 감화, 교통? 그래요, 그는 우리에게 임하셔서 우리의 심령을 주관하시고 우리 속에서 역사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몸에 제한을 받지 않으시고 온 천지의 하나님이시며 성도와 성도를 교통하게 하시고 세상을 운행하시는 천지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소멸치 말며’라는 이 구절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원문으로 보면 소멸한다는 말은 ‘불을 끄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성령을 불로 가정합니다. 물론 물로 가정한 곳도 많습니다. 다만 불의 속성 중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뜨겁다. 그래서 태운다는 것과 열심을 내게 한다?
일단 성령을 받게 되면 죄악을 버리고 의의 길로 나가게 되며 뭔가 하나님의 일을 위한 열심 때문에 가만있지 못하게 됩니다.
그 뜨거운 불로 우리 속에 있는 죄악의 뿌리를 태워버리십니다. 또한 너무 감사해서 끊임없이 감사가 나오고 세상이 달라 보이고 구제하고 싶고 남을 도와주고 싶고 봉사하고 싶고 또 이 좋은 것을 남에게도 전해주고 싶어서 전도하게 되고 위기의 순간에 자기도 모르게 그걸 피하게 되고 지혜가 생겨서 올바른 길로 가게 되고,,,
그런데 그런 모든 역사를 중단하게 되고 죄의 싹이 다시 자라고 그리고는 죄가 몸과 마음을 장악하게 되고 그래서 감사가 그치고 봉사도 그치고 긍휼하게 여기는 마음도 식어지고 그것을 ‘불을 끄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마음에 억제하는 경우를 일러 불을 끄다, 성령을 소멸하다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인간이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소멸한다고 하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스스로 마음에 성령의 역사를 억제하려고 하는 경우를 일컫습니다.
나는 절대로 전도하지 않을거야, 나는 절대로 구제하지 않을거야, 봉사하지 않을거야, 감사할 일도 없는데 무슨 감사냐? 치병을 위한 기도는 남사스럽게 무슨, 예언이라니? 그러다가 틀리면 무슨 창피야? 방언이라니? 무슨 광신도도 아니고?
이런 식으로 스스로를 억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성령을 소멸하게 됩니다. 물론 하나님은 강제로 자기의 일을 이루시기도 하시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인격적인 성령께서 스스로 억제하는 자에게는 그런 능력을 도로 회수하십니다.
한가지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 일은 반드시 네가 해야된다, 그걸 위해서 네가 너를 이때까지 인도한거야!’
그걸 제외하고는
마치 ‘네가 죽을만큼 싫어하니 내가 미안해. 다른 사람에게 시킬게’ 아니면 ‘네가 용기를 내지 않으니 너는 그냥 이대로 살아라’하시는 거지요.
여기 본문에서는 ‘성령을 소멸치 말며’ 라는 말은 바로 ‘예언을 멸시치 말라’는 말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본문의 ‘성령 역사’는 예언에 관한 것입니다.
참고로 예언이라고 해서 “어느 곳에 가면 터가 제법 넓은 허름한 이층집이 있는데 그 집을 사면 삼년내에 열배로 오를테니 그걸 팔아서 노후를 보내라” 이런 것을 기대하면 안됩니다.
우린 뭐든 돈으로 계신하는 버릇이 있는데 뭐 이건 얼마짜리 얼마어치 이런식으로... 하나님의 예언은 이기적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위해 있는게 아니라 교회의 건덕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주신 하나님의 은사임을 명심하고 선한 용도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럼 나는 뭐먹고 살고?
하하,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청지기가 떡을 다루면 당연히 손에 떡고물이 묻는 거니까요. 횡령이나 배임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하나님이 일꾼들에게 주시는 겁니다. 사치가 아니라 먹고 힘내서 더 열심히 일하라고...
하나님이 손이 없어 못 주시는게 아닙니다. 마음에 들지 않아서, 때가 아직 되지 않아서 안 주시는 것일 뿐.
2.예언을 멸시치 말고
이 말을 보면 우리는 데살로니가 교회에서는 예언을 금지하는 분위기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언을 싫어하고 무시하며 하지 못하게 하는 그런 이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교회마다 영적인 분위기는 천차 만별입니다. 어떤 목사는 방언을 그렇게 싫어해요.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방언을 공격하던데 참 그럴 필요는 없는데 말이지요.
이런 교회 저런 교회가 있지만 고린도 교회는 예언을 또 너무 남발해가지고 책망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교회는 또 반대입니다. 그러니 예언을 멸시치 말라는 명령을 하시는 겁니다.
이 ‘예언을 멸시치 말고’ 라는 말은 앞 절의 ‘성령을 소멸치 말며’라는 말을 좀 더 구체적으로 풀어놓은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임하셔서 예언하게 하셨는데 이걸 ‘안돼, 이런 말은 내가 생각해도 말이 안된단 말이야! 이런 예언을 하면 사람들이 나보고 미쳤다고 할거야! 그러니 절대로 이건 할 수 없어!’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몇 년전에 우리 교회서 대표기도시간에 우리 ***께서 기도하면서 제가 서울에 가서 기도하면 민준이의 병이 나을거라는 예언을 하셔가지고 제가 정말이지 당황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그게 낫는 병이 아니거든요. 식물인간으로 살다가 아니면 평생 지적, 육체적 장애를 가지고 가는건데 그걸 세상에 , 제가 기도하면 낫는다고 해가지고 제가 겁이 더럭 났지요.
‘아, 이건 위기다. 가서 기도했는데 안 나으면 이 무슨 망신이냐? 그건 절대로 나을 수 없는건데’
그래도 믿는 마음으로 순종하는 마음으로 같이 서울대병원에 가서 기도했는데 놀랍게도 나았다는 그 기적이 바로 예언으로부터 시작된 겁니다. 잘 아시지만.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신 예언은 이렇게 신묘한 일을 합니다.
하기야 민준이가 아프다는 말을 들은 이후로 자꾸 이런 찬송이 나오는 겁니다. “찬양합니다. 찬양합니다. 우리 주를 찬양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우리 주께 감사합니다”
만일 병이 낫지 않을거라면 찬양하고 감사할 일이 없겠지요? 그러니 하나님이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영광을 받을 것이다. 이렇게 하신 모양입니다.
여기서 예언이란 말은 원래 ‘거품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다’ 또는 ‘대신해서 말하다’라는 말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언이란 자기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전하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올라서 어쩔 수 없이 전하는 말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자가발전을 해서 또는 그럴듯한 말을 창작해서 하는 말은 예언이 아닙니다.
도저히 내가 이 말을 하지 않고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거지만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말을 대신해서 전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예언을 하게 하실 때 아무리 스스로 억제하려고 해도 도저히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속에서 하고 싶어서 끓어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언을 하다 보면 자기의 성향과는 정반대의 이야기가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왜냐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예언자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지 결코 스스로의 영성으로 이 말을 하는게 아닙니다.
갑자가 스스로 뭔가 깨달아 지고 그래서 깨달은걸 말하고 싶어지고 그런건 성령이 주신 지혜 또는 성령의 조명이라고 하지 예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예언은 전혀 말하려고 하지 않았는데도 갑자기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어 말하게 되는 겁니다. 지나고 보면 ‘내가 그때 왜 그랬을까?’하고 얼굴 빨개질 일을 하게 하시는 겁니다.
참고로 우리가 생각하는 예언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말하는 거지만 여기서의 예언은 그렇지 않고 다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을 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잘못하면 큰 혼돈을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받은게 아닌데도 그럴듯하게 자기의 말을 하나님의 권위를 빌려 말하게 되면 영적 혼란뿐만 아니라 성도의 삶에 큰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심지어 성도들 사이에 영적인 공격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이런식으로 말씀하시지 않아. 그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야 그건 너의 말이야” 이렇게 될 수도 있는 겁니다. 이게 검증이 안되니까.
가령 우리가 전통적으로 생각하는 예언의 경우에 그 예언이 이루어 지는지 아닌지를 보면 이게 하나님이 주신 예언인지 스스로 자가발전을 한 엉터리인지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을 전하는 것’을 예언이라고 하게 되면 이를 검증할 수가 없게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인간의 생각으로부터 온 것인지. 그래서 영 분별도 필요하고 그렇습니다.
지금과 달리 초대교회에서는 방언과 더불어 예언을 하는 이들이 매우 많았던 모양입니다. 지금도 이런 식으로 예배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퀘이커 교도들인데 이들은 설교자가 따로 없고 자기들끼리 가만 앉아 있다가 일어서서 “하나님이 방금 나에게 말씀하셨는데 이러저러하라 하셨습니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겁니다.
그러다가 옆에 사람이 또 일어나서 “성령께서 말씀하시기를 이건 저렇게 하는게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았다고 하는 이들이 일어나서 자기에게 온 말씀을 전하는 거지요.
그래서 자칫 잘못하면 영적인 혼란을 일으킬 수가 있습니다. 물론 요즘이야 아무도 이런 식으로 예배시에 말하지 않겠지만 초대교회에는 이런 일이 많았답니다.
그런데 일부 교단의 신학자들은 더 이상의 이런식의 예언은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니까 본문에서 말한 예언같은 것은 없다는 거지요.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말씀을 전하는 행위로서의 예언’은 더 이상 없다는 겁니다.
왜 그러냐면 이미 성경 66권으로 계시가 충분히 주어졌기에 더 이상의 예언은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글쎄요, 영적인 신비에 대해서 우리가 완전히 알지 못하면서 너무 섣부르게 말하는게 아닌가하는 걱정이 듭니다.
여기서 ‘예언을 멸시치 말고’ 라고 하고 있는데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에서도 지금의 일부 교단 관계자와 같은 이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들은 예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고 심하게는 예언하는 자를 제재하고 무시했습니다.
오늘 본문 “예언을 멸시치 말며”는 예언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 무시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예언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예언을 멸시하는 행위는 자칫 성령을 거스르는 죄를 짓는게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지요, 성령을 거스르는 죄는 결코 사함을 받지 못한다고 그래서 우리가 영적인 활동에 대해서는 항상 조심하고 또 영적인 민감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말씀으로 무장하고 욕심을 내려놓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3.범사에 헤아려
‘범사에 헤아려’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을 시험하여 입증하라는 말입니다. ‘헤아리다’는 말이 정말로 다시 생각하고 재어보고 그리고 입증하고 의 뜻입니다.
원문의 뜻으로는 금이나 은을 용광로에 넣어서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시험해 본다는 뜻입니다. 그걸 성경에서는 헤아린다고 말했습니다.
무릇 지혜로운 자는 무턱대고 자기가 믿고 싶은 말만을 믿고 남의 조종과 선동에 넘어가는 자가 아니라 범사에 헤아려야 합니다. 우리가 무조건 믿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밖에는 없습니다. 그 외의 것은 헤아려보고 좋은 것이면 취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미련이 남아서 버리지 못하고 있다가는 큰일이 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판단을 방해하는 것은 욕심이 제일 큽니다. 욕심이 우리의 올바른 판단을 방해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서는 그런 생활의 지혜, 삶의 지혜에 대한 격언이 아니라 예언과 관련된 말씀입니다. 예언이라고 해서 무조건 다 믿지 말고 시험하여 입증해보고 난 다음에 좋은 것이라면 그러니까 성령의 감동으로 나온 예언이라면 믿고 행하라는 것입니다.
왜냐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나오지 않은 것을 예언이라고 포장해서 거짓말을 하고 사람들을 속이는 경우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각하지 못하고 욕심에 미혹되어 예언한다면서 사탄의 꼭두각시처럼 행동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예언에 대해서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진짜 예언인지 아닌지를 그 당시에 즉시 판단할 수가 없다고 하는 점입니다.
우리는 어떤식으로 그 예언의 진위를 판단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이 적은 지혜와 영성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언을 헤아리는 데에는 간단하게 세가지 기준을 가지고 헤아릴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예언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성도인가를 보는 겁니다. 그가 비록 교회 안에 있어도 하나님의 성도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예언을 한다면 한번쯤은 의심해야 합니다. 성도는 자기의 행실로 입증을 해야 하는데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도 않으면서 입으로만 거룩거룩을 외치는 자의 말에 무슨 신령한 은사가 임할까요?
왜냐면 성령님은 죄와 함께 거하시지 않기 때문에 죄를 저지르면서 성령의 감동을 받는다는게 말이 안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성령의 감동이 없이 무슨 예언이 나온단 말입니까?
두 번째는 그 예언 내용이 성경에 비추어 잘못되지 않아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지 않고 성경이 금하는 내용을 예언으로 말한다면 당연하게도 그건 잘못된 것입니다. 가령 게이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축복하라는 예언이 있었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거짓 선지자요 사탄의 도구입니다.
공의의 하나님께서 자기가 주신 성경에 어긋나는 내용을 예언으로 계시하실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그 예언이 비윤리적인가를 보면 됩니다. 어떤 사교의 교주는 유부남인데도 불구하고 여신도와 영혼결혼을 하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고 소위 영혼결혼식을 올리고 뭐 어쩌고 하다가 지금은 서로 헤어지고 재산소송을 하고 있지요.
물론 그 교주라는 자는 지금 구치소에 있습니다. 이런건 절대로 성령으로부터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윤리적이고 공의로운 내용을 명령하시지 부도덕하고 패륜적인 내용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네 번째는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그 예언이 이루어 지는지 아닌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건 결과론이기 때문에 그 사이에 예언에 미혹되어 패가망신하는 이들을 구제할 수가 없게 됩니다. 사후약방문이 되는 거고 소잃고 외양간을 고치는 격이 됩니다.
앞에서 예로 든 교주가 자기는 ‘이긴자’이므로 병 걸리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고 얘기해 왔습니다.
그런데 웃기게도 이번에 구속적부심의 심사를 받으면서 자기가 구속되어서는 안되는 사유를 들면서 지병도 있고 고령이라는 점을 들었다고 합니다. 아니 영생하는 자에게 무슨 고령이 있고 이긴자가 무슨 지병이 있다는 말입니까?
그전에도 이 사람은 아프고 그래서 병원에서 치료도 받았지만 그걸 신도들이 모르게 했는데 이제 자기가 구속의 위기에 처하게 되니까 당당하게 고령과 지병을 핑계로 드는걸 보면서도 아직까지도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사탄으로부터 온 것인지 판단하지 못한다면 이것이야 말로 기가 찰 노릇입니다.
물론 네 번째가 가장 확실한 구별법이긴 하지만 사전에 알기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주로 앞의 세가지에 근거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헤아려 보고 그것이 좋은 것이라는 결론이 난다면 굳게 그것을 붙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예언을 굳게 잡아야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말입니다.
그러나 이게 웃기게도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희한하게도 이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다고 생각하고서도 자기의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좋은 것을 굳게 잡지 못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몰라서가 아니라 욕심 때문에 모르는 척 하는 것을 우리 하나님은 아시고 그를 벌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내 자신의 유불리를 고려하지 않고 순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서 결과적으로 패망한 자가 있나요? 없습니다. 반대로 당장 눈앞의 이익에 광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고의적으로 어긴자가 비통한 처지에 빠진 이들은 많이 있습니다.
4.악은 모양이라도 버려라
이게 단독구절이 아닙니다. 앞에서 말한 모든 것을 헤아려보고 좋은 것으로 판명나면 반드시 붙잡고 악한 것으로 판명이 되면 모양이라도 버리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예언이 따져보아서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이 확실해지면 모양이라도 버리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독립적인 내용을 적은 구절이 아니라 앞절에 종속된 구절입니다.
너무 당연한 말씀을 왜 이렇게 따로 따로 적었을까요?
그것은 이 당연한 것이 결단코 당연하게 행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악간에 붙잡을 것과 버릴 것을 강조하기위해 이걸 따로 떼어서 한 절씩 적어놓은 것입니다.
강하고 충격적으로 보이도록 적은 이유는 이것이 정말 중요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악’은 효과면에서는 파괴적이고 내용상 사악한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하신 말씀은 이 악을 하나라도 비록 그 모양이라도 허용하게 되면 이게 묘하게도 전염이 되어서 결국은 우리 온몸과 온 교회와 온 사회에 퍼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단 이게 온몸으로 온교회로 온 사회로 퍼지게 되면 그 다음 부터는 이 악이 선을 쫓아내고 핍박해서 그 사회에 아예 모든 빛을 꺼버리고 공의가 발붙이지 못하도록 성도를 핍박하는 세상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이슬람교를 보면 이들은 처음에 자기들이 소수일 때는 종교의 자유와 평등을 말합니다. 그리고 인류공동의 정의에 입각해서 평등한 대우를 요구하는 거지요.
그러다가 수가 많아지면 할랄 음식을 달라, 기도 공간을 달라, 모임 공간이 필요하다 이런 식으로 요구가 거세집니다.
그러다가 이제 무시 못할 세력이 되면 공직에 진출할 권리를 달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한 지역에서 다수를 차지하게 되면 자치 경찰을 만들고 공권력을 배제하고 자기네 풍속에 따라 처벌하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이슬람이 다수가 되고 그 다음엔 저들이 소수일 때 그렇게나 요구하던 종교의 자유 대신에 다른 종교를 탄압하고 핍박합니다.
이들은 전도도 안합니다. 솔직히 할 필요가 없어요. 저네 나라에선.
그럼 외국에선? 다만 여자를 공략해서 애를 낳고 그걸로 포교를 합니다. 이들은 이슬람의 법으로 네명까지 아내를 둘 수 있답니다.
참고로 어느 지방 신학교를 나온 여전도사가 어느 목사 사모의 소개로 이슬람 유부남과 결혼을 했다가(처음엔 유부남인줄 몰랐지요) 태어난 아이를 이슬람으로 교육시키는 것을 반대하다가 맞고 애도 뺏기고 애를 보려면 돈을 가져오라는 협박을 받고 그 사이에 취득한 국적으로 자기네 나라에서 사촌동생이라는 아내도 데려오고 그사이에 난 애도 데리고 오고...
사막의 사람들이 잘쓰는 속담에 낙타 속담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춥다고 텐트에 재운 낙타 때문에 결국 낙타가 텐트를 차지하고 주인은 한데 쫓겨나서 벌벌 떤다는 그 속담.
우리의 마음속에 한가지라도 악을 허용하게 되면 이게 그대로 있거나 소멸되어 죽는게 아니라 점점 악을 퍼뜨려서 결국은 온몸을 차지하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의 성도가 아니라 죄악의 자녀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을 기억하고
악은 그 모양이라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걸로 밝혀졌는데도 인간적인 관계나 자기의 유불리를 따지고 대응한다면 크게 후회하게 됩니다.
오늘은 광복75주년을 맞이하는 광복 기념주일입니다. 독립운동을 하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리며 우리 교회는 나라의 평안과 도덕성 향상을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성령과 광복이 무슨 상관이 있나요?
제가 항상 강조하다시피 성령 충만이 곧 나라의 독립을 유지하는 지름길입니다. 성령에 충만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바르게 행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행동하고 기도하는 것이 곧 이나라 독립의 절대적 안전판입니다.
돌이켜보면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은 장차 민족에게 닥칠 고난에 앞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힘을 주시기위해서 일으키신 것 같습니다. 장차 이 세계에 닥칠 대환난가운데서도 우리가 승리하기위해서 먼저 우리가 성령충만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진리와 비진리의 싸움
교회안에 들어온 적그리스도와 세속화의 물결에 대한 싸움
악에 대항하기위한 영적 재무장을 위한 싸움
그리고 닥쳐올 환난에서 이기기위한 영성 향상을 위한 싸움
이 모든 싸움을 이기는 힘은 성령께서 주시는 영성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소멸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무슨 우리가 주변 4강을 한번에 격파할 수 없습니다. 모조리 다 덤벼, 이건 우리가 추구하는 바가 아닙니다.
중국, 러시아, 일본 그리고 미국 이 네나라가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나라 중에서 어느 나라도 우리의 진정한 친구는 없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중국도 미국도 믿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믿어야 합니다. 그 옛날에 애굽도 앗수르도 믿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라는 그 말씀과 같습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이 오늘날 더 요구되어 집니다.
오늘날처럼 전염병이 대유행을 하고 홍수에 폭염에 실업에 정신없이 몰아치는 환난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사람들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성령 충만 밖에 없습니다. 성령의 역사, 그가 주시는 지혜와 인도만이 우리가 이 말세에 승리하고 평안한 삶을 살 수 있는 보장이 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총 넉절의 말씀은 표면적으로는 넉절이나 되고 내용도 다양하게 나타나 있지만 실제로는 예언 한가지에 집중된 말씀입니다.
지금 코로나가 비록 창궐하고 교회에서도 계속 산발적으로 발병하고 전염이 되고 있지만 그 와중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들은 성령의 역사를 결코 제한하거나 우리의 믿음을 억제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성령의 주신 계시의 테두리 안에 있는지를 헤아려 살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헤아려 보아 그것이 진정한 성령의 예언이라면 어떤 일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고 붙들어야 합니다.
사실 요즘처럼 영적으로 혼란스러운 시절에 필요한 것이 예언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부터 나온 그 말씀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지금 어두운 미망 속에서 겨우 겨우 꺼질듯말듯한 희미한 등불을 의지해서 더듬 더듬 앞으로 나가는 형편입니다.
그런데 이 어둠 속에서 무엇을 만날지 알지를 못합니다. 한치 앞을 모르는게 인생이라고 해도 정말이지 혼탁한 세상입니다. 전염병도 홍수도 지나가겠지만 우리의 앞에 또 무엇이 기다릴지 모릅니다.
지금은 해가 나고 덥습니다. 그러나 언제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고 비가 오고 천둥번개가 칠지 모르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가 필요합니다. 앞날에 있을 일을 알려 주어서 예언이 아니라 그때 그때 성령의 보호와 간섭과 인도가 필요해서 예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냥 아무 생각없이 읽는게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말씀을 주시고 우리가 보고도 알지 못하거나 깨닫지 못하는 것을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십니다.
결국 우리네 인생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여정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죄악의 어둠 속에서 사탄에게 하나씩 하나씩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인도는 인생의 나침반이 될 성경 말씀을 주시는 것으로
하나님의 보호는 우리의 행동에 대한 경계를 그어주시는 성경 말씀으로
위기를 이겨내는 믿음은 성령의 조명으로 찾아내는 성경 말씀으로
예언에 성경 말씀과 같은 권위를 부여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에 규정되지 않는 것에서 예언도 충분히 규범성을 가진다고 봅니다.
제가 법공부를 좀 했기 때문에 법률적인 상식으로 한번 성경을 비유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라. 이건 헌법핵입니다. 기독교에서 가장 기본적인 조항입니다.
네 이웃을 네몸처럼 사랑하라. 역시 헌법핵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앞의 법에 기속됩니다. 아무리 사랑을 해도 하나님의 품을 벗어나는 사랑은 잘못된 것입니다.
주일날 예배하러 교회에 간다? 이건 헌법률입니다. 앞의 두 조항처럼 굉장한 조항은 아니지만 성도가 지켜야 하는 조항입니다. 여기서 반드시 예배당에 가야만 하나님을 예배하는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가정에서 하나님이 세우신 가장이 주도해서 얼마든지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별된 성도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러 모인곳은 구별하여 교회가 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지요. 내가 새계명을 네게 주노니 뭐라고요?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라는 이 말씀이 여기에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무조건 오냐 오냐 옳다 옳다 하는건 사랑이 아닙니다. 잘못된 것은 단호히 지적하고 바로 잡도록 하는게 바로 사랑입니다. 그렇지 않고 형제의 잘못을 보고도 관용하면 오히려 형제를 지옥불로 떠미는 행동일 수 있습니다.
자,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예언의 영을 부어주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그리고 그 놀라운 능력의 배후이신 능력의 원천 되시는 성령께서 나에게 우리에게 임하시도록 기도합시다. 참 깨끗한 행실은 기본입니다. 아시지요? 죄인에게 그는 결코 임하시지 않습니다.
죄인을 불러서 회개하고 죄사함받고 새사람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죄악 속에 그대로 거한다면 결코 임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도의 성결이 중요한 겁니다. 일단 성령께서 내 맘에 임하셨다면 우리가 성령을 소멸치 않도록 기도하고 바르게 살고 감사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서울과 경기도에서 교회발 감염으로 확진자가 폭증하고 있어서 가슴이 아픕니다. 교회에 대해서 욕을 욕을 쏟아내는 이들을 보니 안타깝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성령의 보호와 인도가 너무나 더 더 더 필요합니다.
성령님 우리에게 임하시고 떠나지 마시옵소서. 아버지여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옵소서!
- 홍종일 목사님 2020년 8월 16일 주일 설교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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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믿음이 연약해질 때,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믿는다는 것이,
성령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증거라는 말에 위로를 얻습니다.
밖으로는 코로나의 고통, 그래서 실직의 위기와 두려움을 겪고,
안으로는 건강상의 고통, 그리고 가족의 병간호를 겪어야 하고,
인생살이가 어찌 살아볼수록 더 견디기 어려움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내 욕심을 치워두라는 말씀이 그토록 아프게 들리고,
그 한 줄이 실천하기가 왜 이렇게 무겁게 느껴지는지요.
인간적인 욕심과 하나님을 우선하는 삶은 아무래도 같이 갈 수 없는 갈림길처럼 보입니다.
계속해서 신앙생활을 노력해서, 성숙된 목소리를 내고, 좋은 행함이 적게나마라도 함께 하는...
그리하여 좀 더 근사한 성도가 될 수 있기를, 부디 그렇게 인도되어 지기를 소망해 봅니다.
- 2020. 08. 시북 (허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