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2년9월9일/모세와 아론 그리고 훌(출애굽기17:8-16)/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2. 9. 11. 12:38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2년 9월 9일 주일 예배

모세와 아론 그리고 훌 (출애굽기17:8-16)

우리가 성경을 보다 보면 오늘날처럼 이성적이며 논리적인 사회에서 조금 황당해 보이는 듯한 기사를 접하게 됩니다.

하하, 사실 따지고 보면 성경의 이적과 기사는 모두 다 황당할 수 밖에 없지요. 뭐 논리적으로 그러한 이적을 설명할 길이 없으니까.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하나님을 믿습니다. 만일 모든 일이 논리적으로 설명되어지고 이성적으로 이해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적과 신비가 빠져버린다면 교회라는 것도 어차피 또 다른 독서클럽이나 사교클럽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요. 그럴듯한 말씀에 사람들과의 사귐이 있다면 이건 영락없는 클럽이네요.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가 우리의 머리로는 도저히 받아 들일 수 없는 놀라운 이적을 행하시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신이 납니다. 나를 위해서도 그 이적을 베풀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왕왕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뇌가, 우리의 지식이 굉장한걸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머리로 납득할 수 없는 것은 부인하려고 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 오늘날도 수많은 과학자들은 가설과 추측으로 자기들의 이론을 설명합니다.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그렇게 해서 끼워맞추는 것이지요.

우리가 잘 쓰는 말 중에 ‘돌연변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진화의 고리 중에서 빠진 부분을 설명하는 말로 잘 사용됩니다. 이걸 뭐로 설명할 길이 없거든요.

돌연변이, 이거 한자어지만 순 우리식으로 풀어 보면 ‘갑자기 변해서 달라졌다’ 는 말입니다. 웃기지 않습니까? 과학이라는 것도 결국은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의 머리도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머리로 이해되지 않는다고 해서 틀린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머리로 성령의 거대한 사역을 제한해서도 안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과 우리의 머리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인간은 이제 겨우 삼차원에 도달했습니다. 지금 한참 4차원에 관해서 논의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게 끝일까요?

인간에게는 오감이 있습니다. 뭐 보고 듣고 느끼고 만지고..그런데 얼마전 제6번째 감각에 대한 영화도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게 과연 감각의 끝일까요? 제7, 제8의 감각은 없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할 필요가 있습니다.

옛날 사탄이 하와에게 선악과를 주면서 이것을 먹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이야기 하지 않고 눈이 밝아져서, 즉 똑똑해 져서 신들 중의 하나가 되리라고 말한 부분이 바로 이겁니다. 우리는 연일 떠들썩 합니다. 신의 영역을 정복할 날이 머지 않았다. 게놈지도를 판독해낸다. 그래요, 그러나 그것이 과연 끝인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오늘 제가 이렇게 우리의 인지영역 바깥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한 것이 다 이유가 있습니다. 본문으로 들어갑시다.

8절 “ 때에 아말렉이 이르러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여기서의 ‘때’는 ‘이스라엘이 므리바에서 물 문제를 해결했을 때’ 라는 말입니다. 본문의 바로 앞부분에는 ‘므리바’에서 모세가 바위를 지팡이로 쳐서 물을 내게 한 기사가 나옵니다. 바로 그때라는 말입니다.

아말렉은 사실 이스라엘과는 친척관계입니다. 이스라엘은 야곱의 두 번째 이름인데 야곱의 형인 에서의 후손이 바로 아말렉입니다. 원래 에서의 후손을 에돔족으로 불리워왔는데 아말렉사람들은 바로 이 에돔에서부터 갈라져 나온 것입니다. 자기들도 세력이 커지고 사람이 많아지니까 에돔에서부터 나와서 독립된 영역을 구축하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따지고 보면 이스라엘이나 아말렉은 형제입니다. 더구나 야곱과 에서는 원래 쌍둥이 아닙니까? 이제 400여년의 세월이 흐르고 쌍둥이들은 각각 민족을 이루어서 이제 서로 싸우게 됩니다.

당시 아말렉 사람들은 시나이 반도에서 유목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가 200만명이나 되는 거대한 이스라엘 민족이 시나이 반도에 오게 되자 혹시라도 자기들의 땅을 빼앗길까 싶어서 기습을 하게 된 것입니다.

아말렉의 입장에서는 이런 식의 기습이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면 이들은 아직까지 므리바의 반석에서 물이 쏟아지고 물문제가 해결되어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가 된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물 때문에 힘들고 지친데다가 이로 인해서 지도부와 백성들이 미워하고 원망하며 나뉘어 있는 이때가 공격하기 가장 좋을 때이기 때문입니다. 무려 200만이나 되는 이스라엘인들을 정면대결로 물리치기는 사실 좀 어렵습니다. 아무리 철제 무기가 없이 청동기, 지팡이나 돌맹이만 들고 있는 노예들이지만 그래도 숫자가 주는 위압감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기에 나름대로 기습의 묘를 살리려고 이스라엘이 물 때문에 고통받고 원망하여 지도자와 백성이 서로 분열되어 있을 때 쳐들어 가는 것이 당연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그리고 공격당하는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정말 괘씸한 일입니다. 형제가 어려울 때 도와주어도 시원찮을판에 형제의 어려움을 틈타서 기습을 하다니요?

그래서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사람들을 데리고 나가서 싸우라고 명령합니다. 여호수아는 원래 본명이 호세아였습니다. 구원이란 뜻을 가진. 그런데 모세가 그를 여호수아로 개명을 시켰습니다.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란 뜻을 가진. 그래서 단순히 ‘구원’에서 ‘여호와는 구원이시다’가 된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모세를 만남으로 그의 이름이 바뀌었고 모세의 후계자가 됩니다. 지금은 출애굽한 후 처음으로 이스라엘이 외적과 싸움을 하게되는 전투의 사령관으로 나가게 됩니다.

그런 여호수아에게 모세는 내가 내일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고 말합니다. 사실 모세가 지팡이를 잡고 산꼭대기에 서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차라리 싸움에 참여해서 돌맹이 한번 던지는 것보다 못한 것 아닙니까?

심하게 이야기하면 너는 싸우고 나는 산위에서 네가 싸우는 것을 보고 있겠다? 뭐, 그정도로 꼬아서 이야기 할 필요는 없지만 모세는 왜 그런 식으로 이야기 했을까요?

여기서 ‘산꼭대기’는 높은 산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냥 높은 언덕정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서있는 산꼭대기로는 결코 아말렉의 군인들이 쳐들어 올 수 없다거나 산아래서 모세가 결코 보이지 않는다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결코 모세가 선 곳이 전장으로부터 떨어진 안전한 곳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만일 이스라엘백성들과 싸우던 아말렉의 군대가 모세를 알아보고 그를 인질로 사로잡고자 언덕위로 진격해 온다면 매우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사실 광야에서 언덕이라고 해봤자 나무도 없고 그저 흙이 쌓여서 좀 높은 정도인데 충분히 위험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모세의 위치를 말씀드리는 것은 여호수아와 용사들은 용감하게 싸우는데 모세만 싸움을 피해서 피신한게 아니란 말입니다. 모세 역시 위치상 싸움에 관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요?

아론과 훌이라는 조력자들을 데리고 언덕위에 올라가서 전장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론은 우리가 잘 알지만 훌은 유다지파 갈렙의 아들입니다. 어떤 이들은 훌이 미리암의 남편 즉 모세의 처남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갈렙은 유다의 대표이며 족장으로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으로 파견된 12정탐꾼에 속한 사람이고 애굽의 노예출신으로는 여호수아와 더불어 가나안에 살아서 들어간 유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갈렙의 아들 훌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고 있을 때 아론과 더불어 이스라엘을 다스린 사람입니다. 또한 그는 모세에 의해 발탁되어 성막건축의 기술자들을 감독한 오홀리압의 할아버지이기도 합니다. 그는 족장 중에서는 가장 큰 세력자였던 것 같습니다.

언덕위에 선 모세는 속으로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이기기를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군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군이 이긴답니다. 사람 수야 아무래도 이스라엘이 많지만 실상 이스라엘군은 이제까지 애굽에서 노예로 채석장이나 작업장에서 일만했지 군사훈련을 받거나 무기를 다루는 법을 베우지도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에 비해 아말렉 사람들은 오랜 독립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호전적인 민족들입니다. 그러므로 결코 만만한 상대는 아닙니다. 더구나 걸핏하면 불평 잘하고 원망만 하며 틈만 나면 모세의 지도를 벗어나서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힘들고 위험한 첫 번 전투에서 패배하기라도 한다면 이스라엘은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워낙 노예근성에 젖어 있는 사람들이라서 한번의 패배로 겁을 먹고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모세가 손을 올리고 기도할때면 이스라엘이 이겼답니다. 그리고 힘들어서 손을 내리고 기도를 쉰다면 아말렉이 이겼답니다. 이것은 모세의 기도가 , 하나님의 개입이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였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간구할 때 주로 손을 듭니다. 즉 손을 들어 여호와께 간구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누구의 기도를 부탁받고 기도할 때 그 시간 내내 기도한다는게 매우 힘드는 일입니다. 그래서 중간 중간 쉬는 시간도 있고 특정시간 안에 기도를 빨리 끝내기도 합니다. ‘어차피 기도했으니까 나머지는 하나님이 어련히 알아서 해주시지 않겠나’가 우리의 생각입니다.

아마 모세도 그렇게 했던 것 같습니다. 더구나 모세는 나이가 많은 이로서 긴전투 시간동안 손을 들어 기도하기가 무리였을 것입니다. 더구나 손에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의 지팡이를 잡고 서서 기도 한다는게 힘이 듭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기도의 손이 내려오고 앉아서 쉬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이스라엘군이 아말렉 군에게 지는 것이 눈에 보입니다.

그러니 어쩝니까?

안타까운 마음에 다시금 힘을 내어서 승리를 달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그래도 힘이 든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아론과 훌이 모세의 앞에 돌을 쌓아서 모세가 앉도록 하고 그들이 양편에서 모세의 손을 들어 올립니다. 그리고 그런 자세로 해가 질 때까지 계속합니다.

12절에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란 말은 손을 들었다 내렸다 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빠진 극도록 피곤하고 힘이 빠진 상태를 말합니다. 모세는 아마 아말렉과의 전투를 바라보면서 자기의 최선을 다해서 기도에 집중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손에 힘이 빠지면 조금 쉬고 또 전세가 불리해지면 손을 들어서 기도하고 이렇게 하다보니 이제는 도저히 혼자서는 손을 올릴 수 없을 정도까지 힘이 빠져버린 상태입니다. 이때 아론과 훌이 그의 양손을 하나씩 들고 서있습니다. 물론 모세는 돌위에 앉은 상태입니다. 이렇게 그들은 셋이 하나가되어 해가 질때까지 지속하게 되었고 이스라엘은 아말렉을 쳐서 이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이것을 책에 기록해서 여호수아에게 계속해서 들려주어 외울정도로 만들라고 하십니다. 아마 하나님은 이렇게 함으로써 여호수아 역시 하나님의 역사를 의지하고 그에게 기도해야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14절에 보면 ‘아말렉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겠다’고 하셨는데 최종적으로 히스기야 때에 시므온 지파에 의해서 아말렉은 완전히 멸망하여 사라져 버립니다.

아말렉에 첫승리를 거둔 모세는 여기에 단을 쌓고 그 땅의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고 지었습니다. 여호와 닛시는 ‘여호와는 나의 군기 이시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 군대는 여호와가 대장이시며 그를 의지하여 싸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맹세가 이어집니다.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이 말을 원어 상으로 풀어보면 ‘아말렉의 손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침으로써 여호와의 왕권에 대항했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그 아말렉과 대대로 싸우실 것이다’는 말이 됩니다.

아말렉은 이스라엘의 형제로서 그들이 가장 힘들었을 때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했습니다. 오랜 노예생활을 겪고 아무런 무력도 갖추지 못한 도망 노예들이 사막에서 물마저 없어서 힘들어 할 때 형제로서 그들을 돕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공격하고 그들의 물건을 빼앗고 사로잡아서 자기들의 노예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때 모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출애굽 후의 첫 번째 전투에 백성들을 뽑아서 보내놓고는 아론과 훌이라는 두명의 조력자들 데리고 싸움을 잘 볼 수 있는 언덕으로 올라가서 전장을 바라보면서 서서 기도한 것입니다.

이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의심할바 없이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라는 성경의 여느 다른 본문과 비슷한 내용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군기이시다’와 같은 멋진 말도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다른데 있습니다. 뭐냐면 동역의 중요성, 아니면 조력자의 중요성정도.

모세는 이미 나이가 많이 들었습니다. 그에게는 후계자도 있습니다. 여호수아지요. 젊은 여호수아는 전쟁을 지휘하고 늙은 모세는 뒤에서 기도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모세와 여호수아의 분업뿐만 아니라 아론과 훌의 조력에 대해서도 강조합니다. 한사람은 대제사장이고 한사람은 세속적인 족장 중에서 가장 세력이 큰 자였습니다. 글쎄 요즘으로 치면 한사람은 종교의 최고지도자고 한사람은 행정의 최고지도자였던 것입니다. 이 두사람이 모세와 함께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활약한 부분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론과 훌이 모세를 위해서 제일 처음 한 일이 뭡니까?

그것은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고 모세로 하여금 그곳에 앉게 한 것입니다. 왜 돌을 가져와서 앉혔는지는 우리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피곤하기 때문에 돌을 가져와서 앉게 한 것입니다.

지금 언덕아래에는 전투가 한창입니다. 모세의 손이 내려가면 지고 모세의 손이 올라가면 이기는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모세의 손이 내려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걸 위해서 아론과 훌은 먼저 모세를 위해서 돌을 가져와서 그를 앉게 한 것입니다. 그들이 보았을 때 모세의 손이 올라가느냐 내려가느냐도 중요하지만 결국 모세가 덜 피곤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결과만을 중시한 것이 아니라 모세의 건강을 세심하게 챙기면서 일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야 아론과 훌은 양쪽에서 모세의 손을 하나씩 들고 서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에서 아론과 훌이 모세를 양쪽에서 보좌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보좌관은 사실 싸움터에 나가있는 여호수아까지 해서 모두 세명입니다. 종교와 행정과 군사의 세분야에 모세는 협조자를 두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이 변화산에 세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올라 가신 것과 비슷합니다. 또 산위에서 모세와 엘리야라는 두명의 선지자와 이야기하신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저는 여기서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것이 인간들의 협력, 즉 서로 한마음이 되어 사랑하는 마음으로 서로 도와주는 것을 가장 좋아하신다는 점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을 좋아하지 서로 싸우고 질투하며 원망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 여기서도 나타납니다. 사실 아론은 미리암과 더불어 모세의 가족입니다. 훌이 미리암의 남편이라고 하면 이들은 모두 모세의 가족입니다.

그런데요 이들이 항상 모세의 아래에서 모세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를 보좌하기를 즐겨한 것은 아닙니다. 나중에 모세가 이디오피아 여인과 결혼한 것을 계기로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에게 반기를 들게 됩니다. 미리암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 배후에 훌이 있습니다. 미리암은 남편에게 권력을 주기위해서 모세를 반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중에 모세의 정적이 되는 이들은 아직까지는 자기들에게 주어진 직분에 만족하면 모세를 위해서 돌을 가져오고 그를 앉히고 그의 손을 들고 해가 질때까지 서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협력하고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일인자와 이인자와 삼인자가 서로 서로 사랑할 수 없습니까? 비록 일인자는 아니지만 이인자의 위치, 삼인자의 위치가 결코 가벼운게 아니지 않습니까?

더구나 그들이 그런 고위직에 오른 것이 모세의 형이요 모세의 처남이라는 이유가 많이 작용한 것 같은데........ 뭐 그들이 원래 능력이 있었다 칩시다. 하지만 그들이 스스로 감사하고 서로 협력할 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만일 모세가 싸움을 주관한다고 생각하고 아론과 훌이 ‘어디 너 골탕 좀 먹어봐라’고 모세가 혼자서 하루종일 서서 기도하게 만들었다면 아마 모세는 그 자리에서 그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을 것이고 이스라엘 공동체도 아말렉에게 졌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삼과 사는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습니다. 삼은 하나님의 숫자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하나님은 삼위일체가 되십니다. 그래서 삼은 신의 숫자입니다. 사는 인간의 숫자입니다. 삼위하나님 다음에 가장 고귀한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삼 다음의 사로 인간의 숫자를 만들었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한사람 모세에게 능력을 부어 주셔서 모든 일을 혼자서 다 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일체의 이인자를 허락하지 않고 혼자서 독재를 하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권력이 나뉘지도 않고 반대의 목소리도 허락지 않고 일사분란하게 일을 하는 것도 뭐 효율적인 것 같기는 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에는 기름부음을 받는 사람이 세사람이 있습니다. 숫자가 꼭 세명이라는 말은 아니고 세종류의 직업군의 사람들이 기름부음을 받습니다.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가 바로 이들입니다. 뭐 숫자가 수십명이 될 수 있고 몇 명도 될 수 있고 심지어 수백명도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은 이렇게 전혀 인간의 눈으로는 높이가 같지 않은 세종류의 사람에게 똑같이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서입니다. 요즘말로 하면 입법, 행정, 사법의 권리를 삼분해서 인간들의 권리를 최대한 옹호하기 위함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왕과 제사장이 정교를 분리시켜서 서로 일한다면 선지자는 주로 재야에서 이들이 잘못되었을 때 이들을 비판하고 백성들에게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을 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그냥 피상적으로 읽으면 모세의 권위가 절대적이고 만능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절대적이지도 않았고 만능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모세일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을 때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떠나시자 그는 느보산에서 죽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또 하나 아론과 훌은 당대의 권력자이면서도 모세의 가족들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들 중에 하나로 후계자를 세우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후계자의 자리를 주었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레위지파입니다. 훌은 유다지파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에브라임지파입니다. 나중에는 유다지파와 에브라임 지파가 서로 자기네가 이스라엘의 장자라고 주장합니다.

유다와 에브라임은 결국 나중에 서로 싸워서 이스라엘을 남북으로 나누어서 남북왕국의 왕가가 됩니다. 이런 것을 보면 유다지파와 에브라임 지파는 자존심 경쟁을 넘어서 권력투쟁까지도 하고 있는 사이입니다. 그런데도 모세의 후계자는 그의 형제들이 아니라 전혀 피가 섞이지 않은 유력한 경쟁 지파의 여호수아에게 돌아갑니다.

모세와 아론과 훌이 서로 사랑하고 힘을 합치는 것을 성령님께서는 기뻐하신 것입니다. 모세와 여호수아가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 서로 그 역할을 인정한 것은 협력의 귀중한 모범입니다.

본문에는 아론과 훌의 모세에 대한 조력을 설명할 뿐만 아니라 여호수아에 대한 후계교육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왜 모세는 자기의 아들을 이스라엘의 차기 지도자로 만들지 않았을 까요? 이백만의 사람을 움직이는 일국의 수장 자리는 남자라면 한번쯤은 탐을 낼만도 한데 말입니다. 그것은 모세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지명을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여호수아의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여호수아가 등장하기 전에 모세의 아들도 충분히 후계자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모세의 아들들과 여호수아가 후계자 자리를 두고 다투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심지어 모세의 후손들은 사사기의 말미에 몰락한 상태로 기록에 등장합니다. 왜 모세는 자손들이 먹고 살만한 큰 자리 하나 주지 않았을까요? 모세는 요즘말로 하면 성과 속의 모든 권력을 혼자서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직통으로 계시를 받는 희대의 권력자였는데 왜 그 자신의 가문을 왕가로 만들지 않았을까요?

자기는 하나님의 종이고 이스라엘의 주인은 하나님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탐나는 자리도, 그 재물의 일부도 그는 자기 가문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가 독재를 꾀했고 자기 가문이 영원히 이스라엘을 다스리려고 꾀했다면 모세의 영도력은 땅에 떨어 졌을 것이고 아론과 훌에게도 당당하지 못했을 것이며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이 모세를 버리셨을 것입니다.

모세와 여호수아와 아론과 훌의 협력이 출애굽한 신생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자유민으로서의 첫 번째 전투를 승리로 이끌게한 계기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형제를 내몸같이 사랑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그가 잘되면 내가 잘된 것처럼 기뻐합니까?

아니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질투의 불길이 끓어 오릅니까?

나의 조력자가 , 나의 동역자가 유능하면 나는 그것을 기뻐합니까? 아니면 나의 권위를 해치고 위협한다고 생각해서 싫어하고 질투합니까?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하셨지요. 형제라도 결국은 남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형제를 남처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야만이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놀라운 역사를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형제가 친혈육이 아닌 것은 알고 계시겠지요? 우리는 그들을 형제처럼이라도 대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내몸처럼 사랑해야 된답니다.

성령 하나님은 서로 싸우고 질투하는 곳에서는 절대로 역사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어려운 인생길을 걷고 있습니다. 우리의 지향하는 바는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인생길에 보호와 인도를 제공하시는 든든한 분이 하나님이란 사실이고 그는 우리가, 우리 인간들이 서로 사랑하며 협력하는 것을 좋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모세와 아론과 훌, 그리고 전장터에서 싸우고 있는 여호수아가 있습니다. 이들은 각자 다른 이들이지만 모두 한가지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나안땅에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를 세우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을 사는 우리들도 모두 같은 일에 종사합니다. 뭐지요? 직업도 나이도 위치도 다른 것 같은데요? 그렇지요. 그러나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가는 일을 하는 동역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협동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고 그분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 닛시, 여호와는 나의 군기이시다. 정말 멋진 말입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나의 군기로 세우고 걷기 위해서 먼저 우리는 하나님과 세상앞에서 당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앞에서 당당하려면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 하고 그 첫 번째가 바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합시다. 그리고 나의 군기이신 하나님을 믿고 나아갑시다. 그것도 함께 서로 사랑하며 나아갑시다.

-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2년 9월 9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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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가까운 이웃 이스라엘을 향해 팀킬을 시도한 아말렉 이야기는 먼 나라, 오랜 과거의 이야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도 이와 비슷한 일 있었지요. 2004년이었는데요. 민주당에서 뽑았던 노무현 대통령이, 열린 우리당을 지지한다는 이유로, 바로 민주당에서 탄핵소추를 추진하던 사건. 축구로 치면 자살골이지요. 역주행 드리블! 가만히 들여다보면, 역사에서 팀킬 및 아군 공격은 늘상 있어왔습니다. 힘을 실어주고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내쫓거나 나가라고 협박하는 사람의 습성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요. 그칠 줄 모르는 왕따 사건도 그렇고, 사람의 뇌에는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이 훨씬 편하게 디자인 되어있는걸까요.

이럴 때는 버트런트 러셀의 표현을 빌리는 게 좋겠네요. "거지들은 백만장자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자신보다 조금 돈이 많은 거지를 부러워할 뿐!" 이 표현을 제 나름대로 바꾸어 쓴다면 이렇게 쓸 수 있습니다. "인간이란 본디 자신의 영역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다. 다만 가까운 누군가가 이 영역 안으로 들어오려 하거나, 믿었던 누군가가 내 기대대로 행동하지 않을 때는 등에 칼을 꽂고 싶어한다" 조금, 심한 문장인가요. 하하. 한 마디로 내 눈앞에 보이는 누군가가, 내 근처에 누군가가 잘 되는 것을 보는 게 지독하게 괴롭다는 것입니다. 안철수 선생님이 힐링 캠프라는 TV프로에 나와서, "사람들 특히 학교 동기와는 절대 비교하지 않으면서 산다" 라는 생각을 이야기 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게 바로 삶의 지혜이자, 행복의 비결 중 하나지요.

우리는 비교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옷과 신발 같이 작은 것에서부터 차와 집, 사는 지역 처럼 큰 것까지 비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비교합니다. 어떻게든 비교우위에 서서 남에게 근사하게 보이기 위해서 힘겹게 삽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경쟁에서 밀려난 이들이 이제는 물귀신 작전이라도 써서, 나도 죽어가는 김에, 너도 같이 죽자 라고 달려드는 세상이 되어갑니다. 두 글자로 줄이면, "정글" 또는 "지옥" 이 되어갑니다.

우리 모두가 모세가 될 수는 없겠지요. 우리 모두가 지도자가 되어서 이런 씁쓸한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불가능할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론은 될 수 있고, 훌은 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손을 들어줄 수는 있다는 말입니다. 조국 교수님은 담담하게 말합니다. "아무리 소수라고 하더라도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문제제기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우리가 지속적인 관심을 잃지 않고, 참여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올바른 사람을 향해서 손을 들어준다면, 분명 세상은 바뀌어져 갑니다. 모세가 계속 손을 들고 그 힘든 와중에서도 기도했듯이, 우리의 인생도 힘든 여정 속에서도 올바른 꿈을 향해서 계속해서 걸어가는 용기를 가지기를 조용히 소망해 봅니다. / 2012. 09.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