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2년12월16일/보라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2 (청지기교회 초청설교)/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3. 1. 7. 18:45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2년 12월 16일 주일 예배

보라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초청 설교)

들어가기 앞서서. 변화의 화씨옥.

전국 시대, 초(楚)나라에 변화씨(卞和氏)란 사람이 산 속에서 옥(玉)의 원석을 발견하자 곧바로 여왕에게 바쳤다. 여왕이 보석 세공인(細工人)에게 감정시켜 보니 보통 돌이라고 한다. 화가 난 여왕은 변화씨를 월형(발뒤꿈치를 자르는 형벌)에 처했다. 여왕이 죽은 뒤 변화씨는 그 옥돌을 무왕(武王)에게 바쳤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번에는 왼쪽 발뒤꿈치를 잘리고 말았다.

무왕에 이어 문왕(文王)이 즉위하자 변화씨는 그 옥돌을 그러안고 궁궐 문 앞에서 사흘 낮 사흘 밤을 울었다. 문왕이 그 까닭을 묻고 옥돌을 세공인에게 맡겨 갈고 닦아 본 결과 천하에 둘도 없는 명옥이 영롱한 모습을 드러냈다. 문왕은 곧 변화씨에게 많은 상을 내리고 그의 이름을 따서 이 명옥을 '화씨지벽'이라 명명했다.

그 후 화씨지벽은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의 손에 들어갔으나 이를 탐내는 진(秦)나라 소양왕(昭襄王)이 15개의 성(城)과 교환하자는 바람에 한때 양국간에는 긴장이 조성되기도 했다. 이에 연유하여 화씨지벽은 '연성지벽(連城之壁)'이라고도 불렸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여러 가지로 보물을 품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재능은 저 옛날 변화의 화씨옥처럼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귀한 옥이라도 다듬지 않으면 보배가 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 역시 우리가 가진 재능을 갈고 닦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어떠해야 합니까?
교육을 받는 것입니다.
배우고 단련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성과 지성을 갈고 닦는 것입니다. 성도로서 기도하며 말씀대로 행하고 훈련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어니 무어니 해도 이것의 가장 대표적인 방법이 바로 학교에 다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라에서도 학교제도를 만들어서 수많은 학생들을 교육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서도 주일학교를 만들어서 학생들을 교육합니다.
모두다 우리 학생들의 내일을 위해서 투자하는 것이고 우리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재주와 품성을 갈고 닦아서 교회의 내일을 책임지는 기둥으로 만들고자 함입니다.

초등학교때부터 시작해서 대학교를 마칠때까지 무려 12년이 걸립니다. 요즘은 보통 유치원이나 이전부터 시작하고 대학을 마치고도 대학원에 가는 분도 있기 때문에 무려 20년 가까이 준비를 하는 셈입니다. 너무 너무 오랜 기간인 것 같습니다. 실제로 학교라는게 별로 필요없는 것 같기도 한데 왜 이렇게 오랜기간동안 준비를 하는 것일까요?

우리 주님은 이땅에 오셔서 3년간의 사역을 위해서 무려 30년 동안을 준비하셨습니다.
겨우 3년을 사용하기위해 30년동안 준비하는 것이 참으로 쓸모없고 비효율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역시 우리의 나머지 삶을 위하여 부지런히 배우고 닦아서 내일을 준비합니다.
준비하지 않고 배우고 닦지 않고는 우리가 가진 재능이 사회에 쓰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거친 우리의 자연그대로의 품성으로는 기존의 잘정비된 체제하에서 결코 알맞게 쓰이지 못하겠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는 중학교로 , 중학교를 졸업하고는 고등학교로 ,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대학교로 진학을 합니다. 물론 그 뒤에도 대학원으로 진학을 하고, 그 전에는 유치원을 졸업하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실로 인간의 삶의 전반부는 졸업과 입학의 연속입니다.
반드시는 아니라 할지라도 인간의 삶에서의 졸업과 입학은 많으면 많을 수록 더 많은 것을 배우게 하고 , 더 좋은 미래를 보장합니다. 이러한 입학과 졸업은 학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네 삶에도 있고 믿음생활에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졸업과 입학에는 반드시 시험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연단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학생시절에는 우리는 규율과 학칙에 얾매여 빽빽한 일정 속에서 과정을 이수해 나가야 합니다. 이러한 규율과 엄격한 학칙은 우리를 숨막히게 합니다. 하라, 하지마라는게 왜그렇게 많은지!

그런데 사회의 학교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역시 마찬가지로 우리를 교육과정 속에 집어 넣으시고는 연단을 통하여 키우십니다.
그 시련과 연단이 크면 클수록 더 많은 일을 감당할 수가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요셉입니다.
요셉의 이야기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요셉은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서 11번째 아들입니다.

그리고 야곱의 네명의 부인중에서 야곱이 가장 사랑했던 라헬의 큰 아들입니다. 라헬은 요셉의 동생 베냐민을 낳다가 죽어버렸기 때문에 야곱은 요셉을 남달리 사랑했습니다. 자기가 가장 사랑했던 여인의 아들이기도 하지만 어머니가 없다는게 너무 측은해서입니다. 그런데 이게 다른 형제들의 눈에는 아버지의 편애로 보였습니다.

창세기 37장에 처음으로 나오는 요셉의 모습을 한번 볼까요
2절에 보면 “ 요셉이 17세의 소년으로서 그 형제와 함께 양을 칠때에 ...그가 그들의 과실을 아비에게 고하더라”
이걸 보면 요셉도 약간은 대인관계에 문제가 있습니다. 물론 형제들이 잘못했고 자기는 이걸 순수하게 아버지에게 알린 거지만 형들의 입장에서는 일도 안하고 자기를 감시하고 걸핏하면 고자질하는 몹쓸 아이로 바뀝니다. 그런데 이런 아들이 자기들보다 더 사랑받는게 보기 싫은 겁니다.

3절에 보면 야곱은 요셉을 너무나 사랑해서 다른 아들은 입고 있지 않는 채색옷을 해서 입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너무 유별나서 다른 형제들이 요셉을 시기하고 미워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어릴때부터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요셉은 대신에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았는데 , 아버지는 아들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채색옷을 해 입혔습니다. 이 채색옷은 오늘날의 까까옷이나 색동옷의 개념하고는 전혀 다른 옷입니다. 그리고 당시는 신분제 사회였기 때문에 입은 옷을 가지고 그 사람의 신분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 채색옷은 무슨 옷입니까?
성경원문을 그래도 번역하면 색색깔의 옷이란 말은 전혀 없고 ‘손바닥, 발바닥의 옷’이란 말입니다. 즉 당시 일을 하는 사람들의 겉옷은 소매가 없고 무릎까지만 오는 활동복이었는데 이 채색옷은 손바닥과 발바닥까지 치렁치렁 내려오는 옷으로 이걸 입고 일을 한다는건 불가능한 옷입니다. 주로 왕이나 왕자, 그리고 대귀족들만 입는 옷이지요.

아마포로 만들어졌고 소매에 금실로 수를 놓고 발에까지 치렁치렁하게 내려오는 왕자의 복색이었던 것입니다. 히브리 족에서는 족장과 족장의 후계자만 입을 수 있는 옷이었는데 그것을 첫째도 둘째도 아닌 11번째 아들인 요셉이 입고 있습니다. 당연히 형들이 그를 시기할 만 합니다.

여하튼 왕자의 옷을 입은 요셉은 형들과 양을 칠때에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고자질을 했다는 말입니다. 요셉이 철이 없는 것이 그 불편한 옷을 입고는 형들하고 같이 양을 친다고 나가있으니 형들이 좋아하겠습니까?
게다가 자기들하고 어울리지도 않고 뻑하면 형들의 잘못을 고자질합니다. 농땡이를 칠 수가 없습니다.

글쎄요, 이때까지 요셉은 아직 아이에 불과합니다.
아무런 어려움도 없이 그냥 아버지의 품안에서 재롱이나 떨면서 자라는 아이, 자기의 형들이 자기를 얼마나 시기하는지도 모르고  형들의 잘못을 고자질해서는 형들의 시기심에 불을 붙이는 그런 철부지 소년에 불과했습니다. 그의 육체적 나이가 비록 17에 달했지만 그의 정신연령은 겨우 초등학생에 불과했습니다.

멀리 가 본적도 없고
고생해 본 적도 없고
그리고 남을 배려할 줄도 모르는 그런 철부지 소년의 모습으로 무려 17살까지 보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는 꿈만은 아주 큽니다.
유명한 요셉의 두가지 꿈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형들의 단이 자기의 단에게 절을 한다는 꿈
두 번째는 해와 달과 열한별이 자기 별에게 절을 하는 꿈

이것은 누가 보아도 요셉이 집안의 족장이 된다는 꿈입니다. 형들은 “네가 진정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하면서 마구 마구 화를 냅니다.
해와 달의 꿈에 이르러서는 아버지 마저 화를 냅니다. 야곱이 생각할 때 해와 달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말함 같으니까요. 실로 요셉의 꿈은 허무 맹랑합니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철부지 소년은 자기의 처지도 잊고 아버지의 사랑만을 믿은채 끝없이 교만해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일생에 처음으로 학교에 입학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학교에 입학하기위해서는 반드시 입학시험을 쳐야 합니다.
요셉에게 부과된 입학시험은 무엇입니까?
바로 순종입니다.

아버지 야곱은 요셉에게 세겜에서 양을 치고 있는 형들에게 가서 위문하고 그들이 잘있는지를 보고와서 나에게 말해달라는 명령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요셉에게 부과된 입학시험입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등학교에 들어가기 위한 일차시험은 요셉에게 먼거리를 가서 그를 미워하는 형들을 만나고 오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형들에게 줄 음식들을 잔뜩 가지고.

요셉이 살고 있던 헤브론에서 세겜까지는 무려 65Km, 150리에 달하는 먼거리입니다. 어떤이들은 80km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여하튼 한사람이 광야길을 가기에는 좀 먼 거리입니다. 더구나 형들이 먹을 양식을 가지고 갔다면 글쎄요 그 무거운 짐을 지고 뙤약볕아래서 먼길을 간다면 굉장히 힘든 길인 것은 사실입니다.

하루만에 가기는 어려운 거리이므로 중간에서 노숙도 했을 것입니다. 17살짜리 에게는 많이 힘겨운 여행입니다. 더구나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도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에게 인사도 하지 않는 형들을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형들은 자기에게 솰롬이라고 인사도 하지 않습니다. 당시에는 길에서 만나는 사람일지라도 솰롬이라고 인사하던 시절입니다. 그런데 형이 동생에게 솰롬이라고 하지 않는다면 말다한거지요.

이제껏 한번도 그렇게 멀리 가본 적이 없고 , 또 무거운 짐을 지고 광야길을 가야하는 시험인데도 요셉은 기꺼이 순종합니다.
그런데 막상 형들이 있다고 하는 세겜으로 가보니 형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때가 중요하지요.
그냥 돌아와서는 ‘형들이 보이지 않아요’ 이렇게 말했다면 요셉에게 부과된 입학시험에서 요셉은 불합격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리 저리 형들을 찾으러 빈 광야를 헤메니까 하나님께서는 한 길안내자를 보내셔서 요셉의 형들이 도단으로 갔다고 가르쳐 줍니다. 세겜에서 도단까지는 또 25km입니다. 천신만고 끝에 여기까지왔는데 형들은 보이지 않고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 형들이 여기서 25km떨어진 도단으로 갔다고 말합니다. 과연 이 사람의 말을 믿을 수 있을까요? 아니면 그냥 아버지에게 돌아가서 세겜에 형들이 없더라고 말하고 끝냅니까?

이것은 요셉에게는 길안내이지만 하나님의 편에서 보면 요셉에게 부과된 이차 입학시험이었던 것입니다. 만일 요셉이 세겜에서 돌아섰다면 그는 결코 애굽의 총리대신이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도단까지 가서 애굽의 보디발의 집으로 가는 마차를 타야만 하거든요. 그게 그를 한단계 성장시키는 시험입니다.

천신만고 끝에 세겜에 도착한 요셉에게 부과된 이차시험, 도단까지 가기
도단까지 다시 길을 떠난 요셉은 과연 도단에서 형들을 만납니다.
요셉은 중학교에 입학하기위한 입학시험에 당당히 합격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학교는 인문계가 아니고 실업계입니다
더구나 낮에는 일하고 밤에 공부하는 주경야독의 열악한 조건입니다.
그런 열악한 조건하에서 요셉은 애굽에 있는 중학교에 유학을 가게 됩니다.
물론 우리가 볼 때는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팔려가는 것입니다.
믿었던 형들에게 배신당하고 졸지에 인신이 구속되어 종이되어 팔려가는 것처럼 비참하고 황당한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편에서 생각하면 그건 요셉을 강제적으로 애굽으로 유학을 보내서 더 큰 인물을 만들기 위한 방편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어느 학교에 유학을 갔습니까?
보디발의 집으로 가게 되었지요. 애굽왕의 시위대장이라는 막강한 자리에 있는 보디발의 집에서 그는 주경야독의 힘겨운 유학생활을 시작합니다.

여기서 그는 힘써서 배우고 노력합니다.
약 10년간 그는 보디발의 집에서 이론과 실무를 익히며 중등과정을 이수합니다.
그는 마침내 보디발의 집 하인들 중에서 가장 높은 가정 총무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하인의 신분으로는 더 이상 올라갈데가 없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수석을 차지한 것입니다.

이제 요셉은 대학교에 진학해서 더 많은 것을 전문적으로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요셉은 물긷고 장작패고하는 일부터, 물품을 구매하고 관리하고 하는 일을 거쳐, 수많은 사람들을 지휘하는 일과 방대한 보디발의 가정경제를 주관하는 경영학에 이르기까지 고급기술들을 배우고 실무를 익혔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요셉은 실습과 이론을 같이 하다보니 배움의 깊이가 낮을 수 있습니다. 이제는 전문적으로 심화학습을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대학교에 가야합니다.
대학교에 진학하려고 하면 또 입학시험을 치러야 합니다.
요셉에게 부과된 입학시험은 무엇입니까?

바로 자기의 여주인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이겨내는 것입니다.
이제 장성하고 세상의 물정을 알게된 요셉은
순종이라는 입학시험의 관문을 통과했던 중등학교 입학시험과는 달리
절제라는 대학입학시험이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주인공 요셉은 당연히 이 시험에 당당하게 합격합니다.
여주인의 육체적 공세를 이겨내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앞에서 조금도 부끄럼이 없는 사람이 됩니다.
이제 요셉은 이 곳을 떠나서 대학교에 입학해서 더 전문적이고 고급의 학문을 익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가게 될 대학교는 어디입니까?

바로 보디발의 집 뜰에 있는 지하감옥입니다.
요셉은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감옥에 갖힌 죄수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편에서 보면 이것은 요셉을 보다 더 실력있는 사람으로 키우기 위한 대학교에의 입학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사방이 조용하고 어두컴컴해서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는 요즘의 고시원에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학문을 전공과목으로 택합니까?
그는 보디발의 집에 있는 지하감옥에 갖혔는데 이곳은 국사범들을 가두어 두는 곳입니다.
국사범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국왕에 대해 반역을 꾀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적어도 일국의 왕이 되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반란을 일으켰거나 , 왕과 정사에 참여했던 대신들을 가두어 두는 곳입니다. 요셉은 이들을 시중들면서 4년간 나라를 경영하는 일들에 관해서 배우게 됩니다.
아마 요셉이 간음을 범한 죄인을 가두어 두는 곳에 갇혔다면, 그는 그런 방면의 기술을 익혔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을 국사범들이 갇힌 곳으로 보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4년간 나라의 대신들과 반란의 두목들과 나라를 다스리는 치국의 도를 연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감옥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일했기 때문에 죄수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답니다.
수석이지요.

요셉은 두 번의 입학시험을 당당하게 통과했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부과된 교육과정에서 모두 수석을 차지할 만큼 열심히 배웠습니다.
마침내 요셉이 30의 나이로 애굽의 임금 앞에 섰을 때 임금은 그에게 꿈을 해몽할 것을 명령합니다.
요셉이 꿈을 해몽하고 애굽의 총리가 된 사실은 너무나 유명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애굽의 총리가 꿈 해몽 한번 했다고 할 수 있는 그런 시시한 자리입니까?
천만에요.

당시 세계의 강대국이었던 애굽의 총리는 그렇게 만만한 자리가 아닙니다. 결코 꿈해몽 한번에 차지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그러면 성경이 거짓말을 합니까?
천만에요.

성경을 자세히 보세요.
요셉은 꿈을 해몽하고는 어떻게 하면 애굽에 밀어닥칠 대재앙으로부터 그 땅을 구할 수 있는지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결정적으로 그는 애굽의 세율을 대 풍년기간에 두배로 인상해서 종전의 십분의 일에서 오분의 일로 증액해서 그걸 지방 중심도시에 쌓아두고 흉년을 이기도록 건의합니다

게다가 어떻게 곡식을 저장하고 , 오랜기간 썩지않게 관리했다가 , 얼마나 공평하게 이를 분배하며, 또 기근과 한발을 이길 관개와 도로의 건설같은 치국의 도에 관해서 바로와 그 대신들에게 방안을 자세히 설명할 수 있는 지식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요셉의 말이 그럴듯했으면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가 이 일을 좋게여겼다고 합니다. 마침내 바로는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있는 자가 없도다” 이러한 일을 위해서 실로 요셉은 12년동안 정말 피나는 노력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이든 거저 주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대기만성이라고 큰 그릇이 되려면 오래 걸리는 법입니다.
대저 하늘이 사람을 사용하고자 할 때에는 먼저 그 근골을 수고롭게 하고 오랜 연단을 거친 연후에야 만이 사람에게 일을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한과정을 마칩니다.
그러나 이것은 끝이 아니고 새로운 과정으로 가는 중간과정, 터닝포인트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완성되어 가는 중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졸업과 입학이라는 이름으로 부릅니다.
아직 우리에게 배움의 기회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더 커질 수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대학을 마치고 대학원을 마친 다음에는 우리는 세상이라는 필드에 나가게 됩니다. 직접 세상이라는 살벌한 작업장에서 갈고 닦은 것을 나타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의 배움이 끝이 나는 것은 아닙니다.

왜입니까?
아직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기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끊임없이 배워야 합니다.
이제 그만 배우고 , 이제 그만 일하고 오라고 할 그때까지 끊임없이 배우고 익히며 또 그 배우고 익힌 것을 가지고 나와 가족과 사회와 나라와 인류를 위해 일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기독인의 일생입니다.
여러분들의 앞날에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을 믿습니다.
임마누엘 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새로운 세상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행복합니다.
왜입니까?
우리가 배운다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 우리에게 아직 기회가 있다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명심할 것은 졸업은 끝이 아닙니다.
우리네 인생에는 끝이란 없습니다.
주님앞에 서는 그날 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졸업과 입학을 반복하며 위로 위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변화의 화씨옥처럼 아무리 귀한 옥덩이라도 깎고 갈고 닦지 않으면 단순한 돌멩이일 수 밖에 없습니다. 후세에 무려 40개의 성과도 바꾸지 않을만큼 귀한 보배도 깎지 않았을때는 돌멩이로 오인받았습니다.

그래요. 우리가 아무리 거대한 꿈을 품고 하나님으로부터 멋진 재능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 꿈을 이루기 위한 노력이 없다면, 그 재능을 제대로 다듬지 못한다면 결국은 아무것도 아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갈고 닦아야 합니다.

자, 여기서 몇가지 우리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요셉이 나이 서른에 바로의 앞에 서기까지 여러 가지 시험을 이기고 노력한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괴로운 과정 중에 우리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셨을까요?
요셉을 위해서 어떻게 역사하셨나요?
과연 우리네 삶의 과정 중에서 내 아버지는 어떻게 역사하셨나요?

이제 본문을 다시 한번 살펴 봅시다.
만일 하나님이 요셉을 강제로 데리고 가시지 않고 요셉에게 네가 이러이러한 큰 일을 해야되는데 너는 아직 부족하다. 그러니 아버지의 집을 떠나 한 14년간 종살이도 하고 지하감옥에도 가서 훈련을 해야겠다. 그러면 나중에 내가 너를 애굽의 총리대신을 삼아 주께하고 말씀하셨다면 과연 요셉이 좋아 했을까요?

천만에요. 요셉은 이렇게 얘기했겠죠. “하나님 왜 하필이면 접니까? 전 지금도 충분히 만족합니다”
그래요,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괜찮은데 그렇게 피말리는 훈련을 꼭 겪어야 한다면 차라리 총리대신 안하고 말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고난을 받고 훈련을 받는 것은 우리가 그 일을 충분히 감당할 만하다고 , 그래서 사람들 중에서 특별히 뽑힌거라는걸. 뽑히기 싫다고요? 그러나 거부할 수 없는 우리의 소명이지요.
왜냐면 다른 이들은 아예 중도에서 포기하고 그로 인하여 낙망하며 좌절할 것이거든요.

요셉은 처음 이스마엘 상인들 때문에 애굽으로 팔려갈 것이 예정됩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이 가지고 온 음식을 먹고 있다가 이스마엘 상인들이 가는걸 보고 죽이지 말고 차라리 은20세겔을 받고 노예상에게 팔아 버리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마엘 상인들은 도단에서 지체하지 않고 바로 애굽으로 내려가버렸습니다. 그래서 형들은 물구덩이에서 끌어올린 요셉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게 됩니다. 바로 이 미디안 상인들이 보디발의 집과 노예계약을 맺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 팔려 가게 된 겁니다.

노예는 주인을 얼마나 잘 만나느냐에 따라 운명이 달라집니다.
그가 만일 농부의 집에 팔렸다면 농사를 지었을 것이고 어부의 집에 팔렸다면 고기를 잡았을 것이며 공사장에 팔렸다면 공역을 했을 것입니다. 솔직히 보디발의 집같은 권력자의 집에 팔려가는 것보다 다른 곳으로 팔려갈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은 가운데서 하나님은 요셉을 키우시기위해서 보디발의 집으로 그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개입이고 인도입니다.

요셉이 도단으로 가야만했기에 하나님은 세겜의 빈들에서 형들을 찾으며 방황하는 요셉을 도단으로 인도하시려고 한사람을 예비하셨다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요셉에게 도단으로 길을 가르켜 줄 수있게 만드신 것입니다. 왜냐면 도단은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내려가는 주요 대상로로 요셉을 보디발의 집으로 가게해줄 미디안 상인들이 지나는 곳이거든요.

시간과 공간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져야만 하나님의 요셉 강제 유학 계획이 이루어 질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요셉을 인도하신 것입니다.
왜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들어 가야 했지요? 그가 애굽의 궁중사정을 배우고 장차 나라를 다스리는 법을 배워야할 필요가 있었거든요.

그는 보디발의 집에 출입하는 관리로부터 나라를 다스리는 법을 배우는 겁니다. 사람 다루는 법을 배우는 겁니다. 그것도 이론과 실제를 겸해서 배운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보디발의 집뜰에 있는 감옥에 들어가야 했기에 그가 보디발의 집으로 가게 된 겁니다. 보디발은 시위대장이므로 집뜰에 국사범들을 가두는 감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셉이 감옥에서 전옥의 눈에 든 것도 다 보디발의 집에서 가정총무를 할 때 맺었던 인맥 때문이지요. 그가 비록 성실하게 행동했다고 해도 주인집의 마님을 겁탈하려다가 잡혔다면 이미 사람으로 대우받기는 틀린겁니다. 그러나 이미 전옥은 요셉을 잘알고 있었기 때문에 결코 요셉이 그런 나쁜 일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 것이지요.

신기하지 않습니까?
원칙대로 하면 요셉은 시위대장집의 뜰에 있는 감옥에 갇힐 신분이 아닙니다. 그곳은 그래도 국사범을 가두는 곳입니다. 나라에 대한 반역자들을 가두는 곳이지요. 그런데 요셉은 어때요? 파렴치범이쟎아요. 그래서 그런 파렴치범들이 가는 곳에 갇혀야 했는데도 요셉은 이상하게 국사범들이 들어가는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아니 히브리 노예가 그런 죄를 저질렀다면 진작 목이 잘렸어도 잘려야 했는데 그는 죽지 않고 살아 납니다. 그건 바로 시위대장이 바로의 신하라는 데 열쇠가 있습니다. 여기의 신하는 원문에는 내시라는 말입니다. 왕궁에서 왕의 옆에 있어야 하므로 당시에는 시위대장도 내시로 임명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내시하고 산다면 여주인이 왜 그렇게 요셉을 유혹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마 보디발도 요셉이 결코 그런 죄를 저지르지 않았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쉬쉬하면서 자기 집의 감옥에 가두는 것이지요. 죽이거나 다른 감옥으로 보내지 않고.

그리고 우리의 눈으로는 감옥으로 간 죄수가 된 것이지만 실제로 요셉은 종에서 해방된겁니다. 노예에서 죄수가 된게 별거 아닌거 같지만 죄수가 된 이상 그는 더 이상 보디발의 노예가 아닙니다. 당시 노예는 사람으로 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공을 세우면 그 상을 받는 사람은 주인인 보디발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면 요셉이 보디발의 소유이므로.

그래서 계속해서 요셉이 보디발의 노예로 있었다면 결코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잘하면 보디발이 상을 받고 요셉은 몇마디 칭찬과 맛나는 음식정도로 포상이 끝났을 것입니다. 노예란 원래 그런것이거든요.

사실 고대사회에서 엄격한 신분제사회에서 노예에서 해방되는 것은 엄청나게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웃기게도 죄수의 신분이 되므로 노예에서 해방되게 된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은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
자, 요셉이 왜 보디발의 감옥에 가야만 했습니까? 그건 그 감옥에 들어올 왕의 술맡은 관원장을 만나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이 그를 바로의 앞에 세워줄 사람이거든요.

그를 만나야 했기에 하나님은 바로의 술맡은 관원장과 요셉을 만나게 하시기위해 역사하신 겁니다. 그리고 요셉의 꿈해몽의 능력을 돋보이게 하기위해 떡맡은 관원장은 엑스트라가 된 겁니다. 주인공을 더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한거지요.

우리도 잘 알다시피 요셉이 술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몽하고 그가 석방되고 복직되었지만 그는 요셉도 잊어 버렸고 요셉과의 약속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게 나쁜게 아니었지요.

왜냐면 바로 약속을 이행해서 요셉이 석방되었다면 그는 아마 가나안으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 갔을 확률이 큽니다. 그때는 아직 바로가 꿈을 꾸기도 전이고 요셉의 나이가 서른이 되기도 전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안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통하여 자기의 백성들을 번성하게 하시기 위했기 때문에 요셉이 그냥 가나안으로 돌아가서는 안되는 것이었거든요.

몇 년이나 흘러서 바로가 꿈을 꾸고 그때야 비로소 왕의 술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한 것도 하나님의 간섭 때문입니다. 그전에 꿈을 해몽했다면 그는 아직 30이 되지 않아서 애굽의 공직을 맡을 수 있는 나이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몇마디 칭찬과 작은 부상으로 그쳤을 것이거든요.

이렇게 본다면 우리는 요셉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간섭과 섭리하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바로의 꿈이 요셉이 나이 30이 되었을 때 꾸게 된 것도 그러합니다. 심지어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 쓰고 지하감옥에갇힌 그 일조차도 하나님의 요셉 총리만들기 계획의 일환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지금 내가 너무 힘듭니까? 삶이 너무 팍팍하고 내 뜻대로 되지 않습니까? 전혀 필요없을 것 같은 일도 해야 하고 이상하게 휘둘리는 것 같습니까? 그러나 여기에 하나님의 나를 위한 장기 계획이 개입되어 있을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일조일석에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기에 먼저 나를 갈고 닦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천하의 명옥이라도 갈고 닦지 않았을때는 단순한 돌멩이지만 그걸 갈고 닦으면 보배가 되는 것처럼 나도 갈고 닦는 오랜 과정이 필요합니다.

옛날 옥을 어떻게 가공했는지 아십니까?
보통 옥은 옥쇄라고 해서 철기로 내리치면 전체가 바스러집니다. 가루처럼. 가루가 된다고 해서 옥쇄라고 하잖아요. 임진왜란때 조헌과 칠백의사들이 모두 죽은걸 가지고 옥쇄했다고 합니다. 그처럼 옥은 다루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옥을 다룰 때 모래송곳과 실을 가지고 옥에 구멍을 내고 깎았습니다. 모래구멍에서 바람을 받은 모래가 튀어나와서 계속해서 옥의 구멍을 뚫도록 하고 명주실로 활처럼 옥을 깎고 닦아 나가는 겁니다. 그러니 옥을 깎는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를 세우는 계획이 단시간에 끝나지 않는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대기만성이라고 큰그릇은 빚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므로 오래 걸리는 법이고 오래 날지 않는 새가 한번 날면 더 높이 더 오래 나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실망하지 말고 하나님의 역사를 믿고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믿고 그의 인도를 따라 갑시다.

그 옛날 형들은 요셉을 보고 보라 그 꿈들의 주인이 저쪽에 있다고 비웃었습니다. 왕자의 복색을 하고는 무거운 짐을 지고 광야를 걸어 오는 그의 모습은 전혀 왕자의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의 꿈과 그의 모습이 너무 달랐기에 형들은 그꿈의 주인이 저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고 그를 비웃었고 노예로 팔았으며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몰랐겠지요. 먼훗날 그들이 요셉을 노예로 팔았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의 그 꿈이 이루어 지게 된 것을.

우리의 결말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과연 나를 사랑하시는 그분이 나를 위하여 어떤 거대한 계획을 세우고 나를 이끄실지 알고 싶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비록 지금이 어렵더라도 좌절하거나 낙망하지 말고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을 믿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꿈을 꾸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꿈과 재능을 갈고 닦아서
하나님의 거대한 꿈의 주인공이 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2년 12월 16일 주일 (청지기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의 설교 원고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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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백운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한메일 / stronghjs@네이버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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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2013년 새해가 되고, 저는 약간의 가치관 변화를 겪었습니다. 영감이라면 영감이겠지요. 삶은 팍팍하고, 여유는 찾기 힘든 생활이 계속 이어지자, 결국 완벽주의적인 충동을 걷어내기로 하였습니다. 결정적으로 이 말이 제 가슴에 비수를 꽂았습니다.

"당신의 상품 또는 서비스가 지금 존재하는 것과 비교했을 때, 그 관계가 마치 휴지와 바스러진 나뭇잎 같다면 그때가 바로 시장에 제품을 내보낼 때다. 내.보.내.라. 내보내란 말이다." (가이 가와사키, Rules for Revolutionaries 중에서)

글이나, 공부나, 저는 환경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옆에 커피가 있어야 하고, 음악도 흘러나오면 좋고, 집중할 수 있는 분위기에서 비로소 공부가 되고, 글이 나올 수 있고, 훌륭한 무엇인가가 탄생한다고 믿었습니다. 심하게 들리겠지만, 시궁창 비슷한 현실에서 어떻게 멋진 글이 나올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인간의 뇌는 환경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받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완벽한 준비가 되어있을 때, 움직이고, 순종하고, 뜻을 향해서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모습이 지금 존재하는 것들에 비교했을 때, 초라하고, 볼품 없으며, 심지어 정말 몽상가나 거지 같아 보일지라도, 바로 그 때가 우리가 진정으로 뜻을 가슴에 품고 전진해야 할 때인 것입니다.

요셉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환경 속에 몇 번이나 내던져 졌음에도, 그의 거대한 꿈을 잊지 않고, 그저 걸어갔습니다. 감옥에 쳐박혀서, (그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억울하게 누명을 썼습니다) 세월을 보내고 있는 사람이, 훗날 국무총리급의 거인이 될 거라고는 도무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이 대목이 중요합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환경 가운데서도 우리는 준비를 계속해야 하며, 배워나가야 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소명이라는 두 글자가 주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험난한 하루를 보내고, 이제 현실 앞에 서서 울고 싶어지는 밤은 종종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자, 그때가 바로 우리에게 중요한 순간입니다. 조금만 더 노력해 봅시다. 조금만 더 힘을 내봅시다. 그렇게 조금 조금 깎고 닦아 나가는 인생은 그 고통의 순간이 끝나면, 더욱 아름답게 빛나고 있음을 저는 확신합니다 / 2013. 01. 새해에.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