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2년 12월 30일 주일 예배
누구라도 사용받을 수 있다 2 (열왕기하7:1-20)
오늘은 누구라도 사용받을 수 있다 두 번째 이야기로 엘리사와 아람군대 부분을 살펴 보겠습니다.
본문의 주인공은 엘리사도 이스라엘의 왕도 아람군대도 아니고 네 나환자들입니다. 이들은 사마리아 성이 굶주릴 때 성안에 있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이들 나환자들은 부정한 사람으로 규정되어서 이스라엘 성내나 마을 안에서 살 수 없는 이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웃기게도 사마리아 성이 포위되어 극심한 기아에 시달리고 있는 때에 성밖에 있으면서도 아람군대도, 이스라엘 군대도 상관하지 않는 중립지대에 있습니다. 전쟁의 와중에서도 전혀 시달림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시달림을 받지 않는 것은 이들이 나환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전염을 우려한 병사들이 이들을 무시한 겁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한마디로 말하면 인생의 낙이 끊어진 자들입니다. 게다가 이들은 개인의 죄로 말미암아 나병이 걸렸다고 생각되어지는 옛날 이스라엘에서 언약공동체의 일원으로 여겨지지도 않았습니다. 무가치한 자들이지요. 그런데도 오늘 성경본문의 주인공은 바로 이들입니다.
세상의 눈으로는 전혀 어디에도 쓸모 없어 보이는 이들이 바로 오늘 역사를 일으킨 주인공들입니다. 우리는 이 기사를 읽으면서 누구라도 하나님께 사용받을 수 있음을 느낍니다. 왜냐면 그분은 우리의 영혼을 사랑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럼 육체는 아름다운데 영혼이 아름답지 못하다면? 하하, 글쎄요.
아람군대에 의해 포위된 사마리아성내에서 엘리사는 왕과 장로들 앞에서 극심한 기아로 아사 직전의 사마리아성민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을 하고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을 하리라”
솔직히 엘리사의 이 예언은 인간적인 눈으로 볼때는 도저히 일어나기 어려워 보입니다. 지금 나귀 머리 하나에 은 팔십세겔을 하는데 갑자기 저런 이야기를 하면 믿어 지겠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나귀머리를 먹지 않아서 그냥 버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러한 나귀 머리가 무려 노예 세명값입니다. 안믿어 지지요.
오죽 했으면 왕의 병거에서 왕을 모셔서는 병거대장이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했겠습니까?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그래요, 보통의 사람들은 결코 엘리사의 예언이 이루어 지리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아니 감히 못하는 거지요.
사실 우리 인간의 머리는 매우 유한합니다. 게다가 우리는 소위 합리와 이성이란걸 주입받아서 알게 모르게 그 영향을 받습니다. 즉 우리의 상상은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는데도 마치 우리의 머리는 생각자체도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는 듯이 여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자꾸 우리의 유한한 머리로 제한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건 아마 기도로 안될 거야. 이건 도저히 될 수가 없어!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눈으로 볼때는 불가능은 없습니다.
오늘 바로 그 놀라운 역사가 여기에서 나타납니다.
과연 엘리사의 이 예언은 어떻게 이루어 지게 될까요?
갑자기 장면이 바뀌어서 사마리아 성문 어귀의 나환자 네사람이 주인공으로 나옵니다.
이 사람들이 바로 엘리사의 예언을 성취하기위해서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사용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은 지금 사마리아성이 포위되었기 때문에 멀리 가지는 못합니다. 다만 성문 어귀에 있습니다. 이들이 성문어귀에 있는 것은 이들이 율법상 부정한 자들이므로 성내에 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성문에 있었던 이유는 성문을 출입하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거나 성내에 있는 친척들에게서 음식물을 공급받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성문을 오가는 사람도 없고 사마리아성내에 지독한 식량부족 때문에 이들에게 주어질 음식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들도 굶고 있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기가찹니다. 동족들로부터도 인간취급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주어진 목숨이기에 음식이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비상시국에서도 대책없이 배가 고픕니다. 인간육체가 가진 한계지요.
하나님은 사마리아 성내의 신체가 성한 그 누구도 아니고 사람의 눈으로는 하나님께 죄인이요 언약 공동체내에 존재할 수 없는 부정한 이로 추방되어진 나환자를 사용하신 겁니다. 왜냐면 그들은 하나님께 죄를 지어서 그 병에 걸린게 아니고 이스라엘 진밖으로 나간 것도 죄가 있어서 부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전염의 우려가 있어서 진밖으로 격리시킨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지요.
이들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 우리가 어찌하여 여기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랴”
원문을 직역하면 “우리가 여기에 앉아서 우리가 죽을 때까지 무엇을 하겠느냐”라는 뜻입니다. 이들은 성문어귀에서 계속해서 앉아 있어봐야 결국은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차라리 아람군대에 가서 항복을 하자고 말합니다. 물론 아람군대가 항복을 받아 주리라는 기대와 더불어 아람군대에 의해 죽을 수도 있다는 인식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도 아무것도 안하고 여기에 앉아 있어도 결국은 죽을 수 밖에 없는 비상상황에 그들은 새로운 방식의 해결책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아람군대에가서 항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에 들어가자고 할지라도...우리가 거기서 죽을 것이요” 나환자들은 사마리아성에 들어가지 못하는 몸이기는 하지만 만일 그 성안에 들어가도 굶어 죽는 것 외에는 별 뾰족한 수가 없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사마리아 성내에서는 정말 별 수가 없습니다. 평소에는 큰소리를 치고 잘난체하는 왕과 대신들도 별 수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곡식자체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이들은 성내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아람군대쪽으로 가기로 결심합니다. 그런데 본문의 항복이란 단어는 사실 잘못된 번역일 확률이 높습니다. 항복이란 말은 적어도 군인이나 정부관리정도에게 쓸 수 있는 말이지 나환자, 당시의 관습으로는 사람으로 취급을 받지 못하고 전염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서 살아야 하는 나환자들의 항복이란 건 정말 우스운 일입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원문을 “우리가 가서 아람군대의 진영으로 들어가자”라는 말로 해석을 합니다. 즉 이들은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 성문어귀에서 오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해서 먹고 살았지만 이제 이스라엘에서 먹을 것을 얻지 못할 상황이 되자 마찬가지로 아람진영으로 가서 구걸해서 먹고 살자는 식으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물론 나환자들은 자기들이 아람진영에서 죽을 수도 있다는 각오를 합니다. 물론 자기들처럼 비참한 처지에 있는 자는 아람이나 이스라엘이란 국가적 관념이 아니라 단순히 전염병자라는 차원에 머물러 있다는걸 보여줍니다.
이 대화를 보고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한국의 하층민들은 한국이 존속되거나 망하거나에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어차피 이들은 잃을게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상류층들이나 중간층의 사람들은 잃을게 많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류층의 사람들이 아니라 중, 상류층 사람들이 국가를 위해서 더많이 희생하고 국가 존속을 위해서 힘써야 한다는 겁니다. 이들이야 말로 국가가 존속함으로 수많은 혜택을 받는 존재이기 때문이지요.
평소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구걸해서 먹고 살기는 했지만 율법에 의해 부정한 자들로 여겨져 성밖에 살면서 사람들의 철저한 무시를 받던 이들은 이제 자기들의 생존을 위해 국가의 구분이 없이 상대방인 아람진영으로 구걸을위해서 가고 있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그러나 이들이 아람진영으로 걸어갈 때 이들은 이스라엘의 영광을 위해서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거창한 명분을 가지고 나간게 아닙니다. 당연하게도 이들은 엘리사의 예언에 대해서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자기들이 적진을 향해 가는 길이 아람군대를 두렵게해가지고 예언이 성취되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판사판으로 그냥 먹을걸 구하기위해 간겁니다.
단순히 먹고 살려고 간겁니다. 이들의 동기에는 민족적 자부심이나 하나님에 대한 충성과 헌신의 의미는 전혀 없습니다. 이들은 사마리아지역을 탈출하기위해 황혼에 일어나서 해질녘에 아람진영으로 출발합니다. 어둠이 자신들의 탈출을 막는 이스라엘군으로부터 감추어 줄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아마 극심한 굶주림에 못이겨서 아람진영으로 탈출하려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에 군대가 탈출을 막기위해 지키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면 국가란 참 웃깁니다. 자신의 백성들을 먹여 주지도 못하면서도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 백성들이 필요하기 때문에 적군에게 투항하는 것은 못하게 막습니다. 왜냐면 왕이나 정치가들이 백성들을 이용해서 ‘죽기살기로 저항하면 너희도 피해가 클테니 우리에게 어느정도 대우를 해달라’고 하기위해서 백성들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막상 네명의 나환자들이 아람진에 가보니 아무도 없었습니다. 놀라운 일이 벌어진겁니다. 이들은 무슨 영문인지를 알지 못했지만 실은 하나님께서 나환자들의 발걸음 소리를 군대의 진격소리로 듣게 하신 때문입니다. 즉 네명이 걸어오는데 아람군대에서는 병거 소리와 말 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로 잘못 듣게 된 겁니다. 그래서 이들은 헷사람의 군대와 애굽의 군대가 자기들을 치려고 온 줄로 알고는 뒤도 돌아 보지 않고 도망을 가버린 겁니다. 헷의 군대와 애굽의 군대가 이스라엘왕의 용병이 되어 쳐들어 온 걸로 생각한 것입니다.
당시 강대국으로 성장하던 중인 아람에게 여러 국가들이 연합하여 대항하려는 생각은 누구에게나 매우 타당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당시 헷족속들의 집단이 아람북부에 위치해 있어서 이들이 용병으로 각종 전투에 참여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연합해서 아람진영으로 쳐들어 온다는 생각은 전혀 이상한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람사람들은 자기들이 듣게된 군대의 소리에 대한 적당한 이유까지 만들어서는 스스로 겁을 집어 먹고 도망가 버린 겁니다. 그냥 도망간 것도 아닙니다. 이들은 얼마나 급했는지 그 장막과 말과 나귀를 버려두고 진을 그대로 버려두고는 도망을 간겁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가지고 온 식량들이 그대로 남은 겁니다. 비로소 엘리사의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그것도 우리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방법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들이 말을 타고 도망갈 수도 있었지만 아마 말들은 따로 마굿간에 메여 있었기 때문에 미쳐 마굿간으로 가서 말을 풀어서 타고 갈 여유가 없이 그냥 냅다 도망을 간 겁니다. 즉 이들은 극심한 두려움으로 조급함과 초조함을 가지고 그대로 도망을 간겁니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자기들의 진에 있던 양식들을 전혀 갖고 도망가지 못했고 엄청난 군수품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엘리사의 예언이 기적적으로 성취된 것입니다.
네 나환자들은 먹고 마시고 감춥니다.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고 그리고 금과 은과 의복을 감추어 둡니다. 혹시라도 빼앗길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들이 이러한 것을 감추어 두는 것은 어찌보면 참 웃기는 일입니다. 이들에게 주어진 금과 은과 좋은 의복들은 제구실을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나환자들에게 무슨 부귀영화가 필요가 있을까요? 그런데도 이들은 먹고 마시고 나서 이제는 재물에 대한 욕심으로 이것들을 감추게 됩니다.
인간들은 참 웃깁니다. 조금만 생각을 해보아도 번연히 알게될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현실을 애써 외면하고 재물을 감춥니다. 그까짓 물질이 평시에는 중요해도 나환자들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나병이 전염병인데 아무리 사람이 물욕에 눈이 돌아가도 그들이 가진 은과 금과 의복을 받을까요? 그게 전염병의 매개체인데 그걸 받아서 뭔가를 해준다는 생각을 하는 자체가 웃긴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 벤허를 볼 때 눈이 보이지 않는 봉사가 성중에서 구걸을 합니다.
그때 벤허가 거지에게 한푼을 던져 주는데 마침 벤허는 나환자가 된 어머니와 누이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들을 피하면서 나환자라고 소리를 칩니다. 이들과 접촉하면 부정해 지기 때문에 나환자는 자기스스로 나는 부정하다고 외쳐야 합니다.
이 외침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돈이 나환자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한 소경거지는 통에든 동전을 흔들어 보다가 결국 땅으로 쏟아 버립니다. 비록 소경거지이기는 하지만 부정한 자의 돈, 즉 부정한 돈은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겠지요. 소경인데다 나병까지 걸리면 안되겠으니까
그런데도 정작 나환자들은 자기들을 위해서 은과 금과 의복을 훔치고 그걸 감춥니다. 물론 주린배를 채우고 난 다음에 한 행동입니다. 사람이 배고파서 죽을위기에 처해 있을때는 제일 중요한게 배를 채울 식량입니다. 그러나 일단 배고픔이 채워지자 다시금 인간 본연의 욕심이 고개를 드는 것입니다.
만일 나환자들이 가졌던 의복이라면 그 의복이 아무리 화려하다고 해서 입으려고 할까요? 나병이 옮을거라고 생각한다면 그들이 준 은과 금을 받으려 할까요? 그러나 이들은 자기들의 처지도 잊고 눈앞의 재물에 정신이 팔려 인간의 추한 욕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이와 같습니다.
나의 처지를 잊고 그냥 욕심을 부립니다. 사실은 그 욕심이 아무것도 바꾸지 못할 가능성이 높은데도 그냥 인간 본연의 욕망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이들은 애초부터 어떤 뛰어난 점 때문에 하나님에게 쓰임 받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단지 이들은 아람군대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자기들의 목숨을 건질 양식을 구걸하기를 원했던 것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종종 놀라는 것은 하나님의 기적, 특히 수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기적이 전혀 의도하지 않은 사람들로 인해서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전혀 의도하지 않았는데 나의 단순한 욕망의 결과가 사람들을 구하는 놀라운 기적의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의 설교 제목은 누구라도 쓰임 받을 수 있다는 겁니다. 요셉이나 다니엘같은 신앙의 영웅들,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이며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열정에 불타는 소명자들이 아니라 전혀 그런 것은 생각지도 않고 , 아니 아예 생각할 처지도 되지 못하는 별볼일 없는 사람을 들어서 자기의 큰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엘리사의 예언을 듣고 왕의 병거장관은 “하늘에 구멍이 나도 안된다”고 비웃었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이와같은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경우가 일반적이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광대하고 능력이 많으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을 넘어서시거든요.
실컷 먹고 마시고 배부른 상태에서 재물도 마음껏 감춘 이들은 이제 비로소 사마리아 성내에서 굶주리고 있는 동족들이 생각납니다.이들은 서로 말하되 “우리의 소위가 선치 못하도다”라고 이야기 하고는 아람군대가 물러가고 수많은 군수품이 그대로 버려져 있다는 사실을 사마리아 왕궁에 고하려고 생각합니다.
이게 아마 보통사람들과 다른게 아닐까요? 솔직히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요? 아마 실컷 먹고 마시고 난 다음 귀중품을 숨길 수 있을 만큼 숨기고 가지고 갈 수 있을 만큼 가지고 몰래 도망을 갈겁니다. 괜히 아람군대의 전리품을 신고했다가 혹시라도 자기들이 가진 것을 빼앗긴다든지 아니면 왕이 모든걸 차지하기위해 비밀을 지키려고 나환자들을 죽여 버릴 수도 있고, 아니 평소에 사람취급도 받지 못했는데 굳이 성내의 왕궁까지 가서 기쁜 소식을 알려야 할 필요도 의무도 없을 건데...
아니면 백번 양보해서 귀찮은 일을 초래하지 말고 그냥 조용히 보물들을 가지고 사라지는게 더 나은 선택인거 같습니다. 여러분들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까?
이게 다 피해의식일까요? 솔직히 정부와 관련되어서 좋은 꼴을 보지는 않을터인데...옛날 우리나라의 현실만 봐도 토정비결에 제일 나쁜 일로 세가지를 들고 있는데 손재수와 구설수와 관재수를 들고 있습니다. 바로 관재수가 정부와 연관된 재앙을 말하는 거지요. 그런데 이 나환자들은 자기들의 욕망을 채운 다음에는 비록 늦었지만 날이 밝기 전에 이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한다고 왕궁으로 향합니다.
9절의 ‘잠잠하고 있도다’란 말은 ‘말하지 않는다’는 의미에 더하여 ‘행동하지 않는다’는 의미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기쁜 소식을 즉시 전하지 않으면 벌이 자기들에게 미칠 것이라고 말하고 왕궁에가서 고합니다.
물론 이들은 왕궁으로 갈 수는 없습니다. 나환자이기 때문에 성내에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문에가서 문지기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아람군대가 물러가고 그들의 군수품이 산더미 같이 쌓여 있다는 것을 말이지요.
자 왕궁에서 이 믿을 수 없는 기막힌 소식을 듣고 사람들은 갑론을박하며 대책마련에 분주합니다. 심지어 이스라엘의 왕은 아람군대가 철수한게 철수가 아니라 함정이고 그들은 자기들을 죽이려고 매복해 있다고 주장하며 아람군대의 철수를 받아 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하나님의 선물을 포기하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자 한 신하가 그러지 말고 말 다섯필을 취해서 정탐을 한번 해보자고 제안합니다. 어차피 나가서 죽으나 여기서 앉아서 굶어 죽으나 같다는 말을 합니다. 결국 정탐까지 마친 왕은 비로소 아람의 완전한 철수를 사실로 받아 들이입니다.
즉시 백성들이 성밖으로 나가서 아람의 진을 노략질합니다. 그리고 엘리사의 예언이 성취됩니다.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이 되고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이 됩니다. 정확하지요?
그런데 왕의 명령을 받은 왕의 병거대장은 성문에서 백성을 통제하려고 하다가 밀려드는 백성들에게 밟혀 죽어 버렸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엘리사의 예언을 듣고 “하늘에 창이 난들 가능하겠느냐”며 비웃었던 사람이지요.
이 사람은 곡물가가 떨어져서 엘리사의 예언이 성취된 것은 보았지만 정작 자기는 그 곡식을 먹지 못하고 죽고 말았습니다.
뭐 우리는 여러 잡다한 사실을 이 본문에서 밝혀 낼 수 있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한가지입니다.
하나님은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자기의 말씀을 이루신다는 거지요. 저는 여기서 하나님의 예언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말씀보다도 더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라도 보면 전혀 무가치하다고 생각되어지는 나환자 네명이 아람군대에 항복하고 ,아니면 거기서 뭔가 얻어 먹으려고 , 단지 자기들이 살기위해서 아람군대쪽으로 황혼에 걸어 갔는데 그걸로 인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일이 이루어진걸 보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누구라도 들어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십니다. 공부잘하고 돈많고 잘생긴 사람들만을 사용하시는 건 아닙니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들만을 사용하시는게 아닙니다.
요즘 우리가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더 이상 우리나라에서는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다”
참,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이 말은 대부분의 경우에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면요.
그래요, 우리가 하나님의 장중에 붙들려서 사용되기만 하면 우리는 얼마든지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잊혀지고 백성의 숫자에도 포함되지 않는 잉여인간!
단순히 백성들의 자비에 기대어 살 수 밖에 없는 그들이 한 행동이 자기들도 모르게 하나님의 거룩하고 위대한 일을 하게 된 겁니다. 사마리아 성의 수만명의 목숨을 구하는 큰 일을 하게 된 겁니다.
물론 사람들은 이들의 공적을 크게 평가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이들이 기쁜 소식을 전해 준 것에 대해서는 평가했겠지만 이들의 걸음에 하나님의 역사가 더해져서 그것이 거대한 군대의 진격소리로 변해서 아람군대를 도망가게 한 사실까지는 모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걸음이 이스라엘민족을 구한 거대한 발걸음이 된 것은 결코 변함이 없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나환자들이기 때문에 비록 공을 세운다 해도 높은 벼슬에 나가지는 못합니다. 백성들의 칭송과 존경을 받으며 좋은 집에서 수많은 하인들을 두고 편하게 살지는 못합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누구보다 먼저 실컷 먹고 마시고 자기들의 눈에 가장 좋은 것들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들이 이런 큰 일을 한 것은 이들이 거대한 소명의식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이들은 단지 자기들의 목숨을 살리기위한 조금의 양식을 구하려고 아람진영으로 간겁니다. 아마 황혼에 간 것은 못가게 막는 이스라엘 군대의 눈도 피하고 역시 적의 침입도 경계하는 아람군대의 눈도 피하려고 한 거지요. 여기에 무슨 전략적인 고려가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냥 황혼의 어둠을 이용하여 걸어 간 겁니다. 그런데 그 단순한 동작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놀라운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사람들에게 큰 상을 받았는지 아닌지는 모릅니다. 아마 그저 그런걸로 치부되어서 겨우 은돈 몇 개와 빵과 고기 몇덩이만을 상으로 받고 끝났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전에 이미 충분한 보상을 스스로에게 내렸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책에는 이들이 한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비록 이름도 없이 단순히 나환자로 나오는 이들이 실은 이스라엘의 왕보다 병거대장보다 더 큰 일을 한겁니다.
아람군대의 철수와 산더미같이 쌓여있는 군수품이란 경천동지할 사실 앞에서도 이스라엘의 왕은 엘리사의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혹시라도 이게 자기들을 끌어내어서 다 죽이려는 함정이 아닐까 두려워해서 선 듯 양식을 가지러 가지 못합니다. 백성들은 지금 주린 배를 움켜쥐고 오늘내일 하고 있는데 이 사람은 아직도 살만한 왕이기 때문에 백성들의 고통은 모르고 단지 자기의 권력기반이 무너질까봐만 걱정합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삶에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어떻게 역사하실지를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이렇게 저렇게 하고 그 다음에 이렇게 이렇게 하면 될것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전혀 다른 길을 제시할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은 솔직히 인간의 시각으로는 불가능해 보입니다. 도저히 방법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나놓고 보면 우리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너무 오밀조밀해서 가장 멋있는 방법으로 가장 빠른 길로 역사하셨구나하고 감탄합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에 쓰임 받은 네 사람의 나환자를 봅니다. 이들은 인간의 눈으로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무가치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쓸모없이 보이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자기의 일을 이루십니다.
그리고 여기서 하나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는 참으로 대단한 것 같습니다. 물론 거창한 대의명분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자기들의 배고픔을 면하기위한 지극히 인간적인 욕망으로 일을 시작한 겁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런 인간적인 동기를 통해서도 자기의 일을 이루십니다. 그것은 최소한의 도덕성을 갖추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일 이 기사에 나오는 네 나환자가 끝까지 자기들만을 생각하고 몇날 몇일을 들킬 때까지 먹고 마시고 재물을 감추는 일에만 전념했다면 아마 이들은 하나님의 역사의 손에 쓰임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네명이 걸어가는 발걸음소리가 어떻게 해서 거대한 군대의 진격소리로 들렸는지에 대해서 여러 신학자들은 합리적인 해석을 내놓으려 합니다. 비록 성경이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런데 굳이 합리적으로 우리가 납득해야만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거나 예언이 성취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납득하건 하지 않건 하나님의 역사는 변함없이 일어납니다.
단지 그 하나님의 역사가 어떻게 일어날지를 놓고 우리의 적은 머리로 그럴싸한 가설을 세우고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그는 우리의 지식과 이성의 한계를 초월하시는 초월자시기 때문입니다.
평소에는 사회의 가장 아래층에 있던 이들이 가장 위기의 순간에 가장 큰 일을 해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최소한 이들보다는 나은 입장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들어 사용하실 확률은 이들을 사용하실 확률보다는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본성적으로 이기적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이기적이기만 해서는 하나님의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없습니다. 적당히 우리의 욕심을 채웠다면 이웃도 돌아볼 줄 아는 이가 되어야만 하나님의 역사에도 참예할 자격이 있습니다. 왜냐면 그분은 나를 통하여 자기의 의를 이루시기를 원하셔서 역사하시는 것이지 이 어둡고 이기적이며 경쟁과 미움의 시대에 단순히 나혼자만 잘살고 끝나라고 기적을 베푸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누구라도 들어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언제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 받을수 있을지 모릅니다. 내가 지금 너무 낮고 보잘 것 없다고 해서 걱정하거나 실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가 나를 들어 쓰시면 바로 내가 낮고 천한 자리에서 높고 귀한 자리로 옮겨지는 것이니까요.
그렇습니다. 나는 나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결코 나를 이대로 그냥 두지 않으실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나를 사용하여 아버지의 의를 이루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만을 믿고 함께 나아갑니다. 보잘 것 없는 나의 발걸음은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를 이루는 위대한 발걸음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2년 12월 30일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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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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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소록도 입니다. 1923년 수십명으로 시작된 이 섬은, 몇 년 후 수백명이 되었고, 1941년에는 5천명이 넘는 사람을 수용할 수 있게 됩니다. 한편으로는 사실상의 격리가 시작되었지요. 이후에도 소록도에 살았던 한센인들은 (적어도 외부인의 시선으로는) 사람 대우를 잘 받지 못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고, 그 직후의 시간 때는 여러번 학살당한 기록도 있습니다. 저는 종종 목사님과 대화하면서 2천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도록 사람의 의식이라는 것은 거의 발전하지 못한 것 같다고 이야기 할 때가 있습니다.
다시 과거로 돌려서, 이 모습 그대로를 옮겨가면 왜 나환자들이 성밖에서 거주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지만, 매우 신기하게도 이들이 수만의 사람들을 구하는 시발탄이 됩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한다면, 놀라운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 눈치챘다고요? "하나님은 누구라도 사용하신다?" 라고요? 본문에 이미 명확하게 나와 있는 이야기 하려고 제가 코멘트를 쓰는 건 아닙니다. 하하.
제 사고적성에 따르면, 저는 사과를 볼 때 씨앗이 있는지를 쓸데없이(?) 생각하는 독특한 습성이 있다고 하는데, 대충 그런 느낌의 이야기, 사과의 씨 같은 이야기(?)를 덧붙이려고요. 하나님이 나환자를 움직여서 당신의 역사를 이루었던 사건에는 어떤 묘미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무엇인가 겠지요. 저는 이것이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어떤 모습인지 상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얼마나 잘났는지에는 별로 관심도 없습니다. 심지어 세상에서 당신이 어떤 평가를 받고 사는지 조차도 전혀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세계는 독특합니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명함부터 있거나, 학위부터 있거나 해야 사람들이 이야기를 들어주기 시작합니다. 이걸 잘 알고 있는 일부의 사람들은 그래서 앞장서서 재빨리 (명함이나 학위를) 위조하거나, 세탁하거나 합니다. 내세울 게 없는 사람들의 입장이란, 어쩌면 정말 본문의 나환자 처럼 되기 십상입니다. 무시받거나, 나가라고 하거나, 심지어 밥줄이 끊겨서 밥을 굶을 수도 있습니다 (...)
저의 초점은 이렇게 사회적인 약자로서, 열악한 대우를 받을 때의 우리의 자세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입니다.
1. 울면서 썩어빠진 사회를 원망한다. - 네, 뭐 나쁘지 않습니다. 눈물에는 치유효과도 있고요. 하지만 명심해야 할 것은 10달이나 10년이나 원망해봐야 세상은 당신을 위해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불평을 쏟아내기만 한다는 것은, 현실 개선에 도움이 되기는 어려운 방법이네요.
2. 나같은 건 결국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고 생각하며 자살을 꿈꾼다. - 냉정하게 말해서, 이건 어떤 의미에서 매우 오만한 발상이며, 한계에 갇힌 발상입니다. 자신의 틀 안에서 볼 때, 스스로의 모습이 한없이 못나보일 수 있겠지요. 그러나 결국 인생이란, 지독한 불행만이 먹구름처럼 뒤덮여 있는 것은 아닐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저마다 재능이 있고, 태어난 까닭이 있고, 노력만 한다면 삶의 의미를 찾아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간이란, 어쩌면 가장 근사한 하나님의 걸작품이라고 불리는 것이겠지요. 네, 당신도 걸작품 맞습니다. 용기를 가지세요.
3.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며, 세상을 바꾸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찾고 행동한다. - 솔직히 이건 너무 기름끼가 들어간 말입니다. 이렇게 지도자나 삶의 주인처럼 살기가 쉬울리가 있겠습니까. 하하. 그렇다면, 본문의 표현을 빌려오지요. "어차피 이대로는 죽을 것 같으니, 뭐라도 해보자." 네, 저는 이게 더 마음에 드네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뭐라도 해보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즐겨 쓰는 사막 비유 하나 하자면, 사막 중간쯤에 떨어졌네요. 물도 떨어져 가네요. 갈 수 있는 방향이 나침반처럼 8방향쯤 있고, 어디로 가는게 최선의 길인지 도무지 모르겠네요. 가장 좋은 방법이 뭘까요? 최선의 방법은 저는 모릅니다. 하지만 현명한 방법은 압니다. 일단 방향을 하나 정하고, 끝이 보일 때까지 계속해서 걸어가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의 인생에서 힘든 순간을 맞이할 때마다, 일단 힘을 내고, 일어나서 걸어간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이 지금 올바르게 행동하고 있는지" 그것에 관심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을 가지고, 행하고 있는지" 바로 그것에 관심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걸어간다면, 너무 지쳐 쓰러지고 싶은 순간에는, 분명 하나님께서 업고서라도 우리를 계속 인도해 나가실 것입니다. 어떠한 순간에도 우리는 쉽게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할 수 있는데까지 끝까지 해보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행함이 늘 계속되기를 언제나 기도합니다. / 2013. 01.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