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3년1월6일/선을 쌓으면 복을 받는다(열왕기하8:1-6)/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3. 1. 10. 22:25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1월 6일 주일 예배

선을 쌓으면 복을 받는다 (왕하8:1-)

오늘 말씀의 제목은 마치 유교의 교훈집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우리가 착한 일을 하면 언젠가는 그걸 돌려받는다는 성경적인 실례를 들 수 있어서 너무 기쁩니다.

제가 어릴 때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께서 잘하시던 말씀이 있습니다. 적선지가에 필유여경이란 말입니다. 선을 쌓는 집에는 반드시 경사가 있다. 참 좋은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전혀 기독교 적이지 않은 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말은 가장 기독교적인 말입니다. 천지의 화복을 주관하시며 사람의 선과 악을 판단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없다면 하기 어려운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는다는 아주 단순한 사실을 하나의 허구로 여기게끔 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아무리 착해도 안되는 사람은 결국 안될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짙은 불신이 깔려있기 때문입니다. ‘아무개는 그렇게 착하고 신앙이 좋은데 정말 못산다’ 거나 아니면 ‘누구를 보면 정말 신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그렇게 못된 사람이 수많은 사람들의 피눈물을 짜내고서 그렇게 잘산다는게 과연 말이 되냐’ 는 식의 이야기가 어느새 우리에게는 당연하게 받아들여 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요 이러한 이야기가 당연한 듯이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은 결국은 인간의 도덕성을 마비시키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회의하게 하며 불신으로 우리를 이끌고 가다가 마침내는 무신론적 결론을 이끌어 내게 합니다. 세상에 선과 악의 절대적 기준이 없어지고 모든 것이 개인의 이기적인 욕망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경상도에서 제일 큰 죄가 뭘까요? 이건 넌센스 퀴즈이기도 하고 웃기는 이야기이기도 한데 정답은 ‘들킨 죄’입니다. 안웃깁니까? 아무리 큰 죄를 저질러도 안들키면 된다는 생각이 이 ‘들킨 죄’라는 말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냥 웃자고 하는 이야기일 수는 있어도 정말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이성과 양심이 점점 마비되어 가고 있다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반기독교의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신이 죽었다고 이야기되어질 때마다, 교회의 부패상이 방송이나 신문으로 소개될 때마다 사람들은 환호합니다. 런던에서는 시내버스의 겉면에 ‘하나님은 죽었다’라는 광고가 공공연하게 나붙어 있고 이 광고는 계속해서 사람들의 지지를 얻어서 광고료를 지원하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다고 합니다. 마치 사탄이 커다란 입을 벌리고 하나님의 백성과 그 이름을 조롱하는 웃음을 호쾌하게 웃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가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설교하기가 때론 망설여 질 때가 있습니다. 과연 내가 이 설교를 해도 괜찮을까?
그러나 오늘 우리는 엘리사와 수넴여인의 기사를 접하면서 우리 하나님은 결코 공짜가 없는 분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그는 우리의 선을 결코 모른다 하지 않으시고 정말 더 크고 놀라운 복으로 갚아 주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엘리사가 수넴 여인에게 기근을 피하기 위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할 것을 명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 수넴 여인은 과거 엘리사에게 다락방을 지어서 그가 쉴 수 있도록 하는 등 엘리사 선지자를 극진하게 대접한 여인입니다. 처음 엘리사와 수넴 여인간의 만남은 우연히 엘리사가 수넴을 지날 때 부유한 여인이 엘리사를 자기집에 초대하여 음식을 대접한데부터 시작합니다. 이때 여인은 엘리사를 강청하여 자기집에 초대했습니다. 이게 시작이 되어서 그 뒤에 엘리사는 수넴을 지날 때마다 이 집에 가서 식사를 대접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엘리사가 진정한 하나님의 선지자임을 깨닫고는 남편에게 엘리사를 위하여 “작은 방을 담위에 짓고 침상과 책상과 의자와 촛대를 진설”하자고 합니다. 그래서 수넴에 오면 엘리사 선지자가 여기에 거하도록 하자는 겁니다.

이러한 형태의 방은 문루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본채와는 상관없이 직접적으로 바깥에서 이 방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귀한 손님을 대접할 때 이 방을 제공했다고 합니다. 수넴 여인은 엘리사를 위하여 이러한 방을 짓고 가구를 배치하자고 하는 겁니다. 그뒤부터 엘리사가 수넴을 지날 때마다 바로 이 방에서 지내게 된 겁니다. 아무리 부유한 사람이지만 이건 정말 과분한 선물이고 대접입니다. 엘리사가 흡족해 한 것 같습니다.

우상숭배에 몰두한 당시 이스라엘의 분위기상 이러한 하나님의 선지자에 대한 대접은 상당히 파격적인 것입니다. 엘리사의 스승인 엘리사는 스스로 한탄하면 이땅에 하나님을 섬기는 이는 자기 한 사람밖에 없다며 한탄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제 엘리사는 자기가 하나님의 선지자이기 때문에 대접하는 여인을 만나서 대접을 받았습니다.

선지자를 대접하면 선지자의 상을 받는다는데 과연 우리 하나님은 이 수넴 여인의 헌신을 보시고 이미 수넴 여인에게 아들을 주시고 또 한번 죽었던 아들을 엘리사가 살리는 놀라운 이적을 행하게 하셨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엘리사는 그 수넴 여인에게 이 땅에 7년의 대기근이 있을 것이므로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그냥 권유가 아니라 강하고 즉각적인 순종을 요구하는 명령입니다.

우리는 앞장에서 엘리사가 사마리아 성을 구원하는 예언을 하고 그 예언이 이루어지는 놀라운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8장에서 다시 엘리사는 북이스라엘에 7년의 대기근이 있을 것임을 예고하고 자신에게 헌신적이었던 수넴 여인에게 그 대기근을 피하기위해 먼 지역으로 이주할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의 스승인 엘리야 때부터 엘리사 때까지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 중에서 대기근에 대한 예언이 유독 많이 보입니다. 그것은 특별할게 없습니다. 하나님을 불순종하고 패역한 세대에게 내리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징벌이 그대로 실현되는 과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계속되는 하나님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끊임없이 우상을 섬기며 약한 자를 괴롭히며 하나님의 공의를 해하는 일을 계속했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할 때는 내가 기근으로 너희를 징치하겠다는 그 말씀에 따라서 징계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왕과 백성들은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를 눈으로 보면서도 우상숭배의 음란함과 악행을 계속해서 저질렀고 하나님의 징벌 역시 계속해서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대기근의 특징은 광범위한 지역의 수많은 사람들이 무차별적으로 피해를 입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한 자들 때문에 그 속에 사는 의로운 자들도 피해를 함께 당할 수가 있습니다. 아마 의로운 자들이 악한 자들 속에 있다면 그 괴로움은 더 심할 것입니다. 의로운 자들은 악한자들의 꾀와 공격성을 당해 내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와 인도하심이 필요한 법입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만이 악한자의 꾀를 이겨낼 수 있기 때문이지요.

여하튼 엘리사는 하나님의 징벌인 대기근에서 하나님의 사람을 구하기위해 수넴여인에게 그 대기근에서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을 지금 제시하고 있습니다.
너는 일어나라! 그리고 너와 너의 집은 가라! 그리고 너는 네가 머루는 곳에 머무르라!
요즘 말로 하면 기근이 없는 곳으로 이사를 가라는 말과 같이 들립니다. 그러나 이 말 속에는 실천하기 어려운 몇가지 점이 보입니다.

엘리사의 말 속에는 수넴 여인에게 고향에서 누릴 수 있는 많은 재산권을 포기하라는 말이 들어 있습니다. 더구나 그 포기 기간이 무려 7년이나 됩니다.
성경에서 보면 제일 가난한 자의 대명사로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이 세 종류의 사람은 성경에서 항상 가난한 자의 대명사처럼 나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나그네가 되라는 명령을 자기의 든든한 후원자였으며 헌신된 자세로 선지자를 섬긴 수넴 여인에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사는 그 이유를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왜냐면 여호와께서 기근을 명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대기근이 7년동안이나 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는 너의 모든 가족을 이끌고 이 땅을 떠나서 타향에서 머물러라고 말합니다. 나그네는 일반적으로 땅을 가질 권리를 소유하지 못하기 때문에 먹고 사는 것이 힘들 수 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기본적으로 조상대대로의 땅을 다른 가문에게 넘기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소위 ‘기업 무를 자’가 있게 된 것이지요.

말이 쉬워 7년이지 만일 이 기간 동안 대기근이 오지 않는다면 이 여인은 어쩌면 다른 유력한 친족에게 자기 소유의 땅을 빼앗길 수도 있고 아니라면 7년간의 휴경이 땅을 황무하게도 할 수 있을 것이며 어쩌면 패역한 세대인 이스라엘에서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조상대대로 내려온 땅을 빼앗기는 황당한 일을 겪을 수도 있어서 엘리사의 이 말씀을 따르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입니다.

물론 땅을 무사히 찾는다 하더라도 경제적 손실은 피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이 여인의 남편은 이미 세상을 떠난 상황입니다. 아직 어린 아이 하나만 있습니다. 수넴 여인이 엘리사를 굳게 믿고 따르지 않았다면 도저히 순종하기 어려운 명령입니다.

대기근이 무려 7년이나 갈 것이라는 것에서 우리는 이 7이 하나님의 수이며 완전한 수이고 또한 매우 많음을 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7년의 대기근은 숫자의 상징성도 있지만 엘리야가 아합에게 명한 기근 3년반의 두배 입니다. 즉 엘리야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더 패역한 세대가 되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징벌도 계속해서 늘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산이 정말 철저합니다.

2절에 “여인이 일어나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행하여”라고 하는 구절에서 우리는 여인이 자기의 소유를 놓아두고 이방 땅으로 순종하며 떠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은 이미 엘리사의 능력을 체험했고 그가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임을 확신했기 때문에 기약없는 많은 기득권을 포기하고 7년의 나그네생활을 시작하기위해 길을 떠난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사람이란 말은 선지자를 일컫는 말이기는 하지만 오직 하나님에게만 속한 사람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그러므로 그는 인간적인 고려를 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에게만 속해 있기에 하나님의 말씀에만 따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하튼 이 여인은 북 이스라엘을 떠나서 블레셋땅에서 7년을 거하게 됩니다. 그런데 당시 블레셋은 국력이 점점 약화되어서 중심지 몇 개의 도시를 중심으로 더 이상 군사적으로 위협이 되지 않은채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블레셋 지역은 유다의 남서쪽 지중해 연안의 평야지대로 강수량이 비교적 풍부해서 같은 가뭄이라도 비교적 피해가 덜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수넴 여인이 피난을 하기에 좋은 조건입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런 지리적 조건이 아닙니다. 블레셋이나 유다나 이스라엘이나 나라와 민족은 갈리지만 실제로 그 지역자체가 그렇게 넓은 곳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즉 이 지역이 말로는 멀리 떨어진 것 같지만 실제로 대기근에 의한 피해를 입고 있는 지역에는 큰 차이가 있기가 어렵다고 하는 것입니다.

현재 가나안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영토는 넓이가 겨우 20,000제곱킬로미터에 불과합니다. 경상도보다 더 작다고 할 수 있고 경상북도 정도의 넓이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강수량이나 지리적 조건이 달라봐야 어느 정도 달라지겠습니까? 만일 한반도의 다른 땅과는 달리 경북지역만 7년의 대기근이 든다고 한다면 너무나 이상한 일이겠지요? 그런데도 수넴 여인이 7년간의 대기근을 피해서 블레셋에 체류했다는 것은 대기근에 고통받는 이스라엘에 비해서 블레셋이 살기가 좋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수넴 여인이 견디기가 쉬웠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재이주를 하지 않고 블레셋에 계속 거주한 겁니다. 이런 사실을 보면 이스라엘에 내려진 극심한 대기근은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징계라는 것이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자기의 공의를 세우기 위해 자신이 약속한 징벌을 내리시지만 그 가운데서도 자신의 신실한 자녀를 위해 피할 길을 주신다는 사실.
마침내 7년간의 대기근이 끝이 나고 수넴 여인이 다시 북 이스라엘로 돌아 왔습니다.

“호소하려 하여 나아갔더라”
여기서 ‘호소하다’란 말은 커다란 고통의 상황에 처하여 도움을 부르짖거나 흥분하여 절규를 발하는 것을 말합니다. 특히 공의가 부재하거나 심판이 요구되어질 때에 많이 사용됩니다. 이 수넴여인이 지금 왕앞에 호소하러 나옵니다.

아마 수넴 여인이 고향을 떠나있는 사이에 이 땅은 주인없는 땅으로 취급되어 국가에 귀속되었거나 다른 사람에게 소유권이 넘어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귀국한 여인이 자기의 토지와 집에 대한 소유권을 되찾기 위해 왕앞에 나아가는 겁니다.

여인의 남편이 이미 죽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왕에게 호소하러 갈 때 남자가 하는데 여기서는 수넴여인이 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당시의 북이스라엘의 실정으로 보아서 7년만에 여인이 나타나서 자기의 토지소유권에 대한 청원을 한다고 해서 땅을 되찾기가 매우 어려웠을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불법이 자행되었으며 패역했기 때문에 모든게 법대로 되는 세상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말 공교로운 일이 벌어집니다. 당시 왕은 엘리사의 사환인 게하시와 더불어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무엇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하면 엘리사가 행한 기적에 관한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아마 엘리사는 은신처나 선지학교에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고 있었고 게하시를 왕궁에 파견하여 이스라엘의 왕을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하려고 노력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게하시가 마침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고 하니 바로 수넴 여인의 아들이 죽었을 때에 그 아이를 다시 살린 일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수넴 여인이 자기의 토지를 되찾기위한 재판을 청구하자 게하시가 바로 그 여자와 아들이 이야기 속의 그 사람들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우상 숭배자인 여호람이라는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살린 이야기를 듣고는 놀라고 반신반의했을 것입니다. 물론 엘리사의 명성이 워낙 뛰어나서 그럴 수도 있기는 하지만 설마 죽은 사람까지 살렸겠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때를 맞춘 듯이 죽었다가 살아난 아들과 그 어머니가 나타난 것은 마치 게하시의 이야기를 증거하듯 합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주인공, 하나님의 역사의 증인을 보는 왕은 즉시로 수넴 여인의 호소를 다 들어 주게 됩니다.

이 재판은 그렇지 않았다면 여인의 패소로 끝을 맺었을 것입니다. 여자가 호소했다고 하는 대목이 바로 그걸 나타냅니다. 아무도 자기의 말을 들어 주지 않고 너무 억울해서 여자는 지금 소리높여 절규하며 호소합니다. 아마 하급 법원에서 자기의 호소가 받아 들여지지 않자 마침내 왕에게 최후의 소원을 아뢰는 간절한 마음으로 온 것이지요. 왜냐면 수넴에도 당연히 왕의 재판관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고 장로들이 이런 재판을 먼저 했을 것이거든요. 여기에서도 자기의 권리를 되찾지 못하자 수도에 왕앞으로 호소하러 나온 겁니다.

이 여인의 호소는 자신의 생존을 위한 필사적인 외침이었습니다. 왕이여 나의 억울함을 풀어 주소서!
한편 이 여인은 게하시에게는 자기의 말이 사실임을 증거하는 증언입니다. 보시오, 바로 그 이야기의 산 증인입니다. 왕에게는 그 놀라운 기적의 주인공입니다. 이야 신기하다. 바로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구나!

바로 그 기적을 이야기 하고 있을 때 여인이 기적적으로 때를 맞추어서 왕에게 자기의 재산을 찾아 달라는 탄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 여인은 꿈에도 자기의 일이 왕에게 이야기 되고 있는 중인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냥 필사의 각오로 자기의 잃어버린 재산을 되찾기위해 왕에게 나온 것 뿐입니다.

게하시가 깜짝 놀라서 외칩니다. “내 주왕이여 이는 그 여인이요 저는 그 아들이니 곧 엘리사가 다시 살린 자니이다”
이 말속에는 게하시가 그 여인과 아들을 보고 자기도 너무 놀랐음이 드러납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우리말로 표현하면 이 말이지요.

재판의 결과는 보나마나입니다. 왕이 여인을 위하여 특별히 전담 관리를 임명하여 여인의 재산을 모두 되찾아 줄 것과 더불어서 지난 7년간의 소출까지도 다 돌려줄 것을 명합니다. 여기서 관리는 내시를 말합니다. 왕을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거세된 신하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왕이 직접 처리한다는 것과 동일한 효과를 가져옵니다.

요즘말로 하면 무슨 토지조사국의 공무원이 처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청와대 비서관이 직접 처리를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일이 빠르고 강력할 수 밖에 없습니다. 파격적입니다. 여인이 필사의 각오로 나온게 다 허무할 지경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만일 게하시가 이야기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다른 때에 여인이 왕에게 호소하러 나왔다면 왕은 그냥 시큰둥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왕이 일개 백성의 억울함에 일일이 반응하지 않는 것은 당연합니다. 왕에게는 그러한 일 말고도 중요한 일들이 산더미처럼 많고 왕이 직접 보지 않은 상태에서 수넴지역의 장로나 자기가 임명한 관리의 편이 아니라 여인의 편을 들어 준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지요. 더구나 7년 대기근이 끝난 시점에 수넴 여인처럼 타지에서 돌아와 토지를 도로 찾으려고 하는 청원이 많았을 것입니다.

왕이 왜 이렇게까지 처리할까요? 그것은 단순히 그 여인과 아들이 하나님의 기적의 주인공이어가 아니라 그 여인이 오늘날 왜 자기의 토지를 위하여 호소하러 오게 되었는지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사가 그 여인에게 7년간 다른 지역에 가서 기근을 피하라고 이야기했다는 것은 결국 이 일의 배후에 하나님의 손길이 있다는 말과 같거든요. 왕은 이 모든게 하나님의 섭리임을 깨달았기 때문에 자기 역시 그 일을 태만히 하지 못하고 시종을 파견하여 여인의 일을 처리하게 한 것이며 더구나 7년간의 토지 소출까지 환급받게 한 것입니다.

솔직히 그래서 여인은 피토하는 애절한 절규로 왕에게 호소하러 간 건데 이미 하나님은 이 여인을 위하여 게하시를 먼저 왕에게 보내어 자기의 일을 말하게 하신 겁니다. 자신의 선한 접대가 낳은 기적과 아들의 태어남, 그리고 그 아들이 죽었을 때 어떻게 엘리사가 다시 살린 일을 말하게 하신 겁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때를 맞추어 여인의 탄원의 호소와 절규가 울려퍼졌다는건 실로 놀라운 일입니다. 때가 이렇게 정확하게 맞다니요!

우리가 뭐라고 했습니까? 선한 일을 하면 복을 받는다고 했지요. 그런데 선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면 복을 받는다고 말해야 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를 대접했기에 선지자의 상을 받는 다고 말해야 될 것 같습니다. 왜냐면 그가 선지자를 대접한건 선지자 그 사람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을 보아서 하나님의 선지자를 대접한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그가 하나님을 대접한것과 같기 때문이지요.

아마 이 여인은 엘리사의 명령에 순종해서 자기의 고향을 떠날 때 이미 자기의 토지가 혹시 국가나 다른 사람의 소유로 넘어가서 잘못하면 자기의 모든 재산을 다 날릴 수가 있다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엘리사의 명령에 순종한 것은 그만큼 엘리사와 그 엘리사를 부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나는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나에게 손해를 끼치실 분이 아니야, 그의 말에 순종하면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길것이야. 왜냐면 엘리사가 그 여인에게 앞으로의 7년 대기근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 것은 순전히 여인의 엘리사에 대한 선대에 대한 호의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며 자기가 이제까지 겪어본 바에 따르면 엘리사의 말과 그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틀림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여인은 자기의 집과 땅을 되찾는 것 만을 기대했었지만 하나님은 이 여인에게 그것에 더하여 지난 7년간의 소출까지 더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이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역사하시지 않는다고 불평합니다. 심지어 내가 하나님의 선지자를 하나님의 얼굴을 보아 대접했음에도 선지자의 상이 없습니다. 내가 가난한 이와 약한 이를 하나님의 낯을 보아 대접했음에도 아무런 상이 없습니다. 내가 의인을 위하여 나의 물질을 주었음에도 나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애초에 내가 물질적 유익 때문에 그들을 대접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선과 악을 심판하시며 상과 벌을 주관하시는 천지의 대주재인신 하나님아버지께서 그러시면 안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에게는 왜이렇게 박하게 대하실까하며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곁에서 말없이 우리를 지키시며 사랑하셔서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의 간구와 탄식을 들으시고 역사하십니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한 착한 일을 그가 기억하고 갚아 주십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착한 일을 한 것을 그는 결코 모르지 않고 그냥 넘어 가지도 않고 작은 것 하나라도 갚아 주십니다. 오죽하면 그가 적은 소자 하나에게 아버지의 이름으로 물한그릇 대접한 것도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착한 일을 했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을 쌓았습니까? 그리고도 아직 보상을 받지 못했습니까? 기다려 보십시오.  그가 반드시 보상을 주실 것이며 늦게 주시면 늦게 주실수록 그 보상은 더 크고 멋질 것입니다. 그는 우리를 너무 너무 사랑하셔서 나를 떠나지 아니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선한 일들은 단 하나도 빠짐없이 갚아 주십니다.

물론 우리의 눈으로 즉각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 같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자기의 자녀들에 대한 사랑의 손길을 결코 잊어 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역사하고 계심과 그의 사랑날개로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제까지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신 하나님은 새해에도 여전히 우리를 보호하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이 명하신 7년의 대기근이 끝나고 우리에게 지난 7년간 잃었던 집과 땅과 모든 재산을 도로 돌려 주심과 더불어 토지소출까지 더하여 주실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그래서 더 기대가 됩니다. 내가 미처 바라지 못한 것도 더하여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제껏 아버지의 이름으로 착한 일을 하고 나그네를 대접하고 선지자를 대접했습니까? 그렇다면 더 즐거워하며 하나님이 뭘 준비하셨을지를 기대해 보십시오.

우리 아버지는 나를 위하여 어떤 좋은 일을 이번년도에 준비하셨을까?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 내 아버지의 보상을 기대하며 즐겁게 아버지의 길을 따라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1월 6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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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오늘도 급히 올리기 때문에, 극히 개인적인 이야기 하나 덧붙이면 좋겠지요. 최근 지인의 강력 추천이 있어서, 저는 영화 레 미제라블을 보고 싶어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리만큼 보러 갈 기회가 좀처럼 생기지 않더군요. 뭐, 그냥 혼자가서 보면 되지만... 어쩐지 그럴 용기는 없는 소심한 사람이라, 결국 이렇게 합리화 했습니다. "보고 싶어도 못 볼 수도 있지. 이 영화와는 인연이 아닌가봐." 라고 말이에요.

며칠 후, 군대에 있는 동호회 아는 동생에게 연락이 옵니다. 일시 외박이랍니다. 얘는 원래 서울 사람인데, 부산에서 복무 중이라 때마침 잘 되었다 싶어서 밥도 한끼 사줄겸 잠깐 보기로 했지요. 그리고 이 동생 녀석이 대뜸 그런 말을 합니다. "놀 시간이 너무 짧아서 그러는데, 꼭 레 미제라블을 봅시다" 깜짝 놀랐습니다. 게다가 가난한 지갑에는 문화상품권 만원짜리도 한 장 있었습니다. 당연히 저는 OK를 했고, 영화를 보러 갔습니다.

부끄럽지만 보는 내내 눈물이 납니다. 먼 자리에 앉아 있던 어떤 손님은 자도 자도 끝이 안 나서 힘들었다고 하소연했지만, 저로써는 너무 감동적이었습니다. 뭐 뻔한 장발장 이야기 아니냐고요? 영화에 참 신기한 장면이 나옵니다. 위기에 처한 어떤 사람을 장발장이 도와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장면은 스치듯 지나가지요.

한참 시간이 흘러서, 장발장이 좇겨서 갈 곳을 찾고 있는데, 어떤 성당에서 한 신부를 만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바로 장발장이 과거 도와줬던 사람이었지요. 이 장면은 비록 소설이지만, 우리는 이런 일을 실제로도 종종 경험합니다. 무심한듯 챙겨줬을 뿐인데, 그 사람에게는 그것이 커다란 힘이 되었던 것이지요.

당연한 이야기지만,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입혀서 눈물을 흘리게 한다면, 그는 훗날 피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그것도 같은 방법이거나 더 잔인한 방법으로 당하면서 말이지요.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을 선하게 대우하는 사람은, 훗날 반드시 선한 대우를 받게 될 것입니다. 더 놀랍고도, 더 엄청나게 말이지요.

여기까지 읽으면 분명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릅니다. "것참, 그런 건 우연일 뿐이겠지" 나쁜 놈들이 얼마나 잘 사는데! 들키지만 않으면 조금씩 다 돈을 빼먹고 하는건 상식이라고! 오늘날 사회가 정말 무서운 것은, 불의한 행동을 하는게 표준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냐고요? 남들이 다 하니까, 나 하나 쯤 무임승차하면 뭐 어때? 라고 생각합니다.

뭐, 좋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성도라면 여기서 나 하나 부터 다른 생각을 가질테야, 그리고 다른 삶을 살아야 겠다고 다짐하는게 필요합니다. 말하자면 수넴 여인과 같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당장은 어쩐지 나만 손해보는 것 같고, 바보같거나 이상하게 보일지라도, 정직하게 살고자 노력하고, 선하게 살고자 노력하는 것은 반드시 보답받게 되어 있습니다. 감옥에 약 20년 장기수로 복역했던 신영복 교수님이 재밌는(?) 표현을 했습니다. 인생이란, 감옥에서 20년을 살았더라도 결코 손해가 아니다. 이 말에 얼마나 큰 영감과 감동을 얻었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당장 남을 돕고자 노력하고, 행동하는 것들이 결코 손해가 아니라고 확신하는 이유는, 인생은 나쁘게 살아도 되는 것처럼, 인생은 선하게 살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결코 자신에게 손해는 아닙니다. 다만 나쁘게 살면, 점점 나쁜 대우에 적응해갈 뿐이고, 선하게 살면, 점점 선한 대우를 받게 된다는 것일 뿐이지요 :) 본디 콩을 심어놓으면, 거기서 쌀이 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선을 삶에서 쌓아가고자 결단한다면, 거기서 나오는 것은 결국 선일 것이라는 믿음. 이른바 선순환의 믿음을 가지고, 오늘 당장 실천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20대 시절에 이 이야기를 참 많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남에게 잘해줘봐야 결국 남는 거 하나 없고, 너만 상처 받을 뿐이야."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도 비슷한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늘 상처 받고, 손해보는 느낌이 날껄. 연애는 밀고 당기기지." 참 합리적이고 바른 말인 것처럼 들렸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갈수록 장발장처럼 사는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과거에 잘못을 저지르고, 못난 모습이 있다고 하더라도, 선하게 살기로 결단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헌신하고, 도와주고, 퍼주다 보면, 어쩜 그렇게 사람이 빛나 보이는지 모릅니다. 인간은 누구나 압니다. 부정직한 1등 보다, 정직한 2등이 훨씬 아름답다는 것을. 꼭 경쟁주의의 꼭대기를 바라보면서 살 필요는 없습니다. 남들하는 거 다 따라하지 않고, 자신만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기로 결단하는 것. 이것이 중요할 뿐입니다. 그러한 인생은 비록 소박한 인생일지라도, 주께서 돌보실 것을 확신합니다. / 2013. 01.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