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3월 17일 주일 예배
예수와 니고데모 (요한복음3:1-)
예수께서 성전정화사건을 일으키시고 난 다음에도 계속해서 유월절과 이어진 무교절기가 끝날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무시면서 이적을 행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전 지역과 세계각지에서 온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이적 행하는 모습을 관찰하고는 그를 믿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는 저희에게 몸을 의탁지 아니하셨답니다.
사실 사람들은 유월절 전에 성전에서 소란(?)을 피운 젊은 지방의 랍비에 대해서 주목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그가 많은 표적을 행하는 것을 보고 그를 믿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를 ‘믿는다’는 것이 예수님을 메시야나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었다는 말이 아니라 어느 정도 실력이 있는 , 또는 어느 정도 영능력이 있는 선지자와 비슷한 사람 정도로 믿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말로 하면 성전에서 소란을 피울 정도는 되는 사람이라고 인정했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주님은 사람들의 믿음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저들에게 몸을 의탁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성경 본문에는 의탁지 아니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예수께서 사람들을 보시고 느낀 것이 ‘이들이 나를 진정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이들은 나를 이용하여 이적을 맛보거나 어떤 이득을 노리고 있구나’ 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몸을 의탁하기가 어렵습니다.
사실 인생은 우리 주님의 눈으로 보기에는 매우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불완전한 존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기도 매우 불순한 경우가 많습니다.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감격해서 주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를 따르는 것이 나에게 어떤 이득을 주기 때문에 따른다는 것을 주께서 아시고 이들을 결코 신뢰하지 않으시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오늘날도 주님에 대한 진정한 신뢰가 없는 가짜 제자들의 기도에 주님은 결코 응답지 아니하십니다.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 중에 오늘 본문에서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며 유대의 관원이랍니다. 이 사람은 산헤드린 공회원입니다. 우리말로 하면 유대 자치국회의원쯤 될까요? 본문의 관원이란 말은 ‘아르콘’이란 말로 왕이나 대제사장부터 회당장에 이르기까지 권력을 가진 자에게 붙이는 용어입니다. 그러므로 니고데모가 관원으로 나와있는 것은 그가 상당한 권력자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보통 민족의 반역자요 백성들을 착취하는 악독한 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니고데모는 예외였던가 봅니다. 그는 나중에 유대교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를 꾸밀 때 반대한 사람이고 예수님의 사후에 마리아와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예수님을 장사지낸 사람입니다. 그는 산헤드린 공회원 중에서 유일한(?) 예수님의 지지자였습니다.
그 사람이 처음 주님을 만나서 나누는 대화를 오늘 본문이 기록하고 있는데 이 대화가 바로 유대교에 비해서 기독교의 특징을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언제 주님을 찾아 왔는고 하니 밤에 왔답니다. 낮에는 사람들의 눈이 무서워서 예수님을 찾지 못하고 아무도 몰래 밤에 주님을 찾아 온 것입니다. 그래도 주님을 찾아 온게 어딥니까?
이 니고데모는 주님을 찾아 와서 예수를 “랍비”라고 부릅니다.
니고데모 역시 당시 유명한 랍비였습니다. 게다가 랍비가 되기위한 정규과정이 따로 있었습니다. 물론 랍비는 적어도 40은 넘어야 되는 연령규정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사실 이러한 규정의 어떤 것도 충족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니고데모는 주님을 만나서 그를 랍비라고 부른 것입니다. 이것은 그가 마음이 관대하고 겸손하며 신중한 사람이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는 유대교의 지도자였고 산헤드린 공회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시골의 젊은 무자격 랍비에게 겸손하게 가르침을 청합니다.
왜 그가 무자격자이며 젊은 예수님을 랍비라고 불렀는지 이유가 나옵니다.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그래요, 그는 주님이 전혀 세상적인 랍비의 요건을 갖추지 못했고 또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사롭게 폭력(?)을 휘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하나님께로서 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밤에 그를 찾아 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생이라고 생각했을까요?
답이 있네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그래요, 당신이 행하는 표적을 보니까 당신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생인줄 알겠다는 말입니다. 니고데모는 사람들로부터 예수의 기적에 대해서 들었고 그의 눈으로도 살펴 보았는데 그걸 보고 듣는 순간 ‘아! 이분이야 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 주신 분이다’이렇게 느꼈다는 말입니다.
이정도만 해도 그는 굉장히 깨어있는 사람입니다. 그 당시의 유대교 대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 관원들은 이미 누리고 있는 권력과 부귀에 취해서 아무도 그런 영적인 경각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도 그는 예수님의 이적을 보고 그가 하나님이 보내신 이라고 생각하고 지금 찾아 온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에워싸고 있을 때 ,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낮에 , 공개된 장소에서 예수를 찾은 것이 아니라 밤에 몰래 찾았다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이것은 그가 가진 한계를 보여 주는 것이거든요.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은 “진실로 진실로”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걸 우리가 쓰는 용어로 바꾸면 “아멘 아멘”입니다. 멋지지요. ‘내 말은 절대로 그릇됨이 없이 다 이루어져. 그러므로 내 말은 참 진리야’ 그래서 ‘아멘 아멘’인 겁니다. ‘진실로’ 가 헬라어로 ‘아멘’이거든요. 사실 이 말은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지자 정도로 이해했다면 주님은 그런 너의 인식의 한계를 깨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정작 주님이 말씀하신 내용은 더 기가찹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거듭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사실 율법에는 거듭난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니고데모는 황당합니다. 도대체 거듭난다는게 무엇을 뜻할까요?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거듭나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는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라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인은 반드시 거듭나야만 합니다.
여기서 거듭난다는 말은 헬라 원문의 뜻으로는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즉 하늘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골치가 더 아픕니다. 어떻게 해야 하늘로부터 다시 태어날 수가 있을까요?
니고데모 역시 우리와 똑같은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그래요, 거듭난다는 말을 들은 니고데모는 이렇게 이해합니다. 생물학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겁니다. 자, 거듭난다는 말의 정확한 뜻은 무엇일까요? 이건 불교의 환생하고는 전혀 다른 겁니다.
거듭남의 비밀을 강조하는 이단도 있던데............ 어쨌든,
예수께서 니고데모의 의문에 대해서 다시 한번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아까의 말은 이랬지요.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가는 거나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이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앞에 말 즉 거듭남의 비밀이 여기 있네요.
‘물과 성령으로 태어 나는 것’을 거듭난다고 말합니다.
그럼 또 물과 성령으로 태어 나는 것은 무엇을 말하지요? 여기서 물은 물로 죄를 씻는 의식 즉 세례를 말합니다. 물론 세례 자체가 아니라 죄를 씻어서 깨끗하게 된다는 것이 강조됩니다. 그리고 성령의 임재가 뒤따라야 비로소 거듭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고 그래야만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네가 죄를 씻지 않고는 결코 성령님이 내재하실 수 없습니다. 왜냐면 성령님은 더러운 곳에서는 거하실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우리의 죄를 물로 깨끗하게 만들고 그 깨끗해진 몸에 성령께서 임하셔야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물세례와 예수의 제자들의 성령세례가 퍼져나간 것을 기억하십시오.
자, 그리고도 주님은 부연 설명을 하고 계십니다. 왜냐면 유대교의 오랜 율법적 관습에 젖은 니고데모는 도저히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지요.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라는 말에서 ‘육’이란 육체를 말합니다. 즉 우리말로는 ‘살’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이 말은 성령과 완벽하게 대치되는 말입니다. 그리고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라는 말이 이어집니다. 여기서 영은 성령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으로 난 사람은 결국 죽음에 이르러 그 살이 썩어질 것이고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그 영이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는 말입니다. 왜냐면 썩어져 버릴 육체가 아니라 썩을 수 없는 영이기 때문인 것이지요.
어떻게 보면 이 말은 상당히 의미심장하기도 하지만 또 모순적이기도 합니다. 왜냐면 육체도 결국은 살뿐만 아니라 영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육체는 그러한 영혼이 배제된 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우리가 육체만을 가지고 있는 듯이 행동하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오늘날의 우리를 보는 것 같습니다.
육체적 쾌락을 모든 것에 우선하는 요즘 세대는 그러한 육체적 쾌락을 보다 더 즐기기 위해 젊음을 숭상합니다. 쾌락을 즐길 수 없는 늙은 육체는 오늘날 경멸과 비웃음의 대명사이며 불쌍함과 동정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많은 돈을 젊음을 유지하는데 사용하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육체는 세월이 지남에 따라 늙어지고 결국은 죽어서 썩어집니다. 우리의 영이 영생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육체는 썩어져서 최후의 부활을 기다릴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우리가 육체를 유지하는 것이, 보이지 않지만 영생하는 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 영원한 삶을 위하여 우리의 죽음이후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단순한 쾌락이 아니라 하나님의 앞에 심판을 위한 보다 착한 삶을 살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의 영은 처음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이루어 진 것이므로 하나님의 영과 하나가 되고 싶어하고 교류하고 싶어하는 성질을 가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육체가 아니라 그 너머 영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영적 본능에 따라 우리의 창조주 하나님을 떠날 수 없고 단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서의 삶으로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새로운 삶을 준비해야만 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니고데모에게 주님은 이러한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기이히 여기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우리는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설명에 매우 놀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놀랍니까? 도저히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요, 기독교의 진리는 일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다만 우리의 안에 성령의 조명 즉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셔야 만이 우리가 그 기이한 설명을 믿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또 한가지 예를 들어 설명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여기서 바람(프뉴마)으로 사용된 단어는 성령(프뉴마)을 일컫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람을 가만히 보면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람이 불어서 나타나는 결과는 볼 수 있습니다. 먼지가 날리거나 우리의 머리카락이나 나뭇잎들이 휘날리는 것을 보고 또 우리의 몸이 느끼는 것을 보고 바람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바람을 불게 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대로 할 수는 없습니다. 언제 어떻게 어느 정도의 세기로 불어야 될지를 인간이 정할 수도 없습니다. 바로 그런 것처럼 성령의 역사를 인간이 제어하기는 어렵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성령하나님의 임의대로 하시는 것이거든요.
여기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는게 바로 무당의 귀신입니다. 보통 선녀니 보살이니 장군신이니 대감신이니 하는 여러 귀신들을 섬기는 무당들은 자기가 이러한 귀신들을 조종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처음에는 도저히 안될 것처럼 이야기 하다가 돈을 많이 내고 그래서 큰 굿을 하거나 부적을 쓰면 귀신의 행사를 조종할 수 있는 듯이 이야기합니다. 아마 무당이 거짓말을 했거나 무당의 말이 맞다면 귀신이 무당에게 조종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무당이 신이 된 것처럼 여겨지게 합니다. 이 사람들이 잘쓰는 말있쟎아요. “천기를 누설하면 안되는데 어쩌고 저쩌고..........” 여하튼 넘어가고,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그 말씀조차도 알아 듣지 못하고 항복하고 맙니다. “어찌 이러한 일(들)이 있을 수 있나이까” 니고데모는 사람이 거듭나는 것도, 육의 일이니 영의 일이니 하는 것도, 바람에 관한 설명도 도저히 알아 들을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바람부는 것과 성령이 무슨 상관이지?’
니고데모는 성령이니 영이니 하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의 율법준수같은 물질적이며 보이는 것에 치중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보이는 형식을 넘어서는 더 중요한 영과 의미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담은 유대교가 가진 한계를 나타내는 것이며 기독교와의 차이점을 한마디로 말하는 것입니다.
니고데모와의 대담을 통해서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 간단합니다. 먼저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세례를 받음으로 우리의 죄를 씻어라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형식적인 세례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세례가 의미하는 회개와 죄씻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나 여기에서 끝이 나서는 안되고 우리가 성령님을 영접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이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잇음을 인정하고 영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인간의 고유한 품위를 유지하기위해 서로 사랑하며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고 그러한 존엄함에 맞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인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 설교에서 정말 눈여겨 본 것은 이와 같이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을 눈여겨 보아야 하느냐?
그것은 바로 성전을 정화하는 것 같은 사건을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하나님으로부터 온 표적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예루살렘에서 주님을 따른 이는 니고데모 한 사람밖에는 없었다는 거지요.
물론 마가의 집안은 주님을 따른 제자입니다. 또 다른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제자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 기사 이후에 주님을 따르기로 한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 니고데모
그런데 그 니고데모도 주님을 완전히 따른 것은 아닙니다. 그냥 남들보다는 조금 더 양심적으로 주님을 대접했다고 해야 합니까?
아니면 조금 더 주님에게 호의를 베풀었다고 해야 합니까? 그것도 아니면 기존의 세력과 예수님이라는 신진 세력사이에 어정쩡한 입장을 취한 사람이라고 해야 합니까?
우리는 주님의 제자들이 어떻게 해서 주님을 따르게 되었는지 압니다. 그들은 모두 정치적인 메시야,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키고 새로운 왕국을 만들 혁명가 예수를 소망했기 때문에 주를 따른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왕국이 세워지고 나면 한자리를 차지할 욕심 때문에 주님을 따른 겁니다.
갈릴리 시골에서는 도저히 꿈도 꿀 수 없었던 출세를 이루어질 희망의 끈으로 주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주님의 제자가 된 겁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엄마이지 예수님의 이모가 주님께 와서 한 말이 있잖습니까? 다른 이는 친척이 아니기 때문에 눈치만 보고 있어서 그렇지 아마 똑같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이들이 처음 주님을 따를 때 고심한 것은 내가 어떻게 해야 천국에 갈 수 있는지가 아니고 과연 내가 선택한 나의 선생님이 나중에 왕이 될 수 있는가하는 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주님을 따르고 있는 제자들도 세속적인 이해관계를 초원해서 단순히 영적인 해방과 진리를 위해서 주를 따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뭔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주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전을 정화한 사건은 대부분의 유대인들에게는 큰 환영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모두가 원하지만 힘이 없어서 하지 못하는 일들을 주님은 하셨고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사합니다. 이런 놀라운 이적과 행동을 보고서도 기존의 유대교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거나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지자라, 그래요 메시야는 놔두고 , 하나님의 아들인 신의 신분이라는 건 놔두고 제대로 된 선지자로서도 대우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분명히 성전을 정화 하시는 것이며 이후에 사람들에게 행하시는 예수님의 이적을 보았습니다. 그가 하늘로부터 왔다는 표적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 역시 밤에 주님을 찾아 와서는 그러한 점을 이야기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땅의 일을 이야기 하지 않고 하늘의 일을 이야기하자 제대로 알아 듣지를 못했습니다. 아마 그것이 니고데모를 세상을 포기하고 오직 주님만을 따르는 제자가 아니라 뒤에서 , 어둠속에서 간접적으로 주님을 지지하는 어중간한 태도를 취하게 한 이유일 것입니다.
주님의 말이 뭔가 심오하게 들리고 , 주님이 베푸신 표적은 분명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생이라는 것을 인정하게는 하지만 이 땅의 것이 아니라 저 하늘의 것들만을 이야기 했기에 주를 전적으로 따르면 신뢰하지 못한 것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유월절을 맞이하여 세계 각국으로부터, 이스라엘 전토로부터 수십만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몰려와 있었습니다 이들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했고 하나님이 아직도 자기네를 위하여 역사하시는 것을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하늘의 것 보다는 신령한 것 보다는 땅의 일을 , 육체의 일을 더 고대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단 한사람 니고데모만이 주님을 찾아 온 것이지요. 그것도 남들 앞에서 당당하게 드러나게 주님을 지지하지 못하고 뒤에서 은근슬쩍 주님을 지지하는 그런 미지근한 신자의 상태가 된 것입니다.
왜 입니까? 예루살렘에 사는 이들에게 기득권을 포기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를 좇는 다고 해도 버릴것이 적습니다. 그래요 적은 것을 버렸기 때문에 , 아니면 아예 버릴 것이 없기 때문에 나중에 이것이 아니다 싶으면 다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도 손실이 별로 크지 않습니다.
그런데요 버려야 될 것이 많은 사람은 전적으로 주님을 따르기가 좀 어렵습니다. 물론 부자들도 주님을 따른 이들이 많았습니다.
12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저택을 소유한 마가도 있고, 헤롯의 유모도 있고, 아마 곳곳에 주님을 후원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숫자는 매우 적었습니다. 그만큼 부자들이 주를 따르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주를 좇으니라 라는 말은 말처럼 간단하지 않습니다.
저는 부활절을 앞두고, 고난 주간을 앞두고 우리 주님이 느끼셨을 암담함을 생각합니다.
주님은 지금 말로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로 잡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일이지만 감히 용기가 없어서 하지 못한 일을 하셨습니다. 뿐입니까? 하늘로 부터온 표적도 보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사람들의 속 마음 진실을 아시기 때문에 그들을 전적으로 믿지는 않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자기의 몸을 의탁하지 않으 셨답니다.
오늘 저는 요구합니다. 우리 주님을 따르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내가 가진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른다면 천국에서의 영광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서 우리 모두가 행복에 들어갈 수가 있음을 믿읍시다.
오늘 니고데모처럼 내가 뭔가를 가졌기 때문에 땅의 일만을 생각하고
내가 뭔가 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을 꺼리고
내가 뭔가 알기 때문에 주님의 일에 대해서 의심하고 그래서 그를 전적으로 믿고 따르지 못해서
좋은 재능을 썩히고, 기회를 잃어 버리는 그런 사람은 되지 맙시다.
니고데모는 신실하고 책임감이 있고 어느정도는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지만 열두 사도도 아니고 소위 말하는 ‘나사렛 당’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가진 재물은 주님이 이땅에 계실 때 주를 위해서 사용되지 못하고 기껏 아리마대 요셉과 더불어 주님을 장사지내는데 일부 사용된 것이 다입니다. 니고데모가 주님을 적극적으로 따랐다고 해서 세상을 구원할 하나님의 계획이 바뀌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니고데모 개인적으로는 가장 큰 면류관을 쓸 수 있는 기회를 잃어 버린 셈이 되는 것입니다.
아마 니고데모는 자기가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은 것을 주님을 장사지내는 일로 어느 정도 보상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그걸로 양심의 가책을 어느정도 달래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다입니다. 다른 무언가 적극적인 행동은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니고데모는 놔두고 과연 우리는 어디 쯤 와 있습니까? 주님의 제자들 역시 처음부터 하늘의 일을 위해서 육의 것을 버린 것은 아닙니다. 그들 역시 땅의 더 큰 영광을 위해서 자기가 가진 것들을 버리고 주를 따른 겁니다. 그러다가 그 주님의 능력과 사랑에 감명받아서, 그 십자가 사랑에 사로잡혀서,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로 더 이상 자기들이 생각한 땅의 영광이 가망이 없다는 것이 밝혀 졌음에도 주께서 전하고자 하신 진리와 사랑, 주께서 만들고자 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에 와 있습니까? 온전히 주를 위해 세상의 것을 버릴 수가 있습니까? 온전히 하나님의 일을 위해 땅의 것들을 과감하게 포기할 수 있습니까?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하나님의 일은 곧 이땅의 일이 됩니다. 그가 만드시려고 하신 나라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니까요. 죄를 회개하고 성령을 받아서 새로워 진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나라, 하나님의 사랑의 법이 지배하는 그런 나라는 하늘의 일이기도 하지만 땅의 일도 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만드는 것이 또 천국으로 들어가는 일이 되니까요.
우리는 지금 어디쯤 와 있습니까? 그리고 어디쯤으로 가고 있습니까?
육의 일입니까? 아니 육만을 위한 일입니까?
영의 일입니까? 아니 영의 일을 함으로 육도 잘되는 쪽입니까?
이제 우리 앞에 두 갈래 길이 있고 우리는 그 길 중에 한쪽을 선택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과연 어느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3월 17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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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백운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한메일 / stronghjs@네이버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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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문득 기독교에서 통용되는 블랙 유머가 생각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다시 오심을 믿기 때문에, 언제가 될 지 모르는 그 날에 대해서 가끔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이제 막 내 집 장만을 했다거나, 이제 고시에 합격해서 좀 좋아지려던 그 때, 더 나아가자면, 사놓은 땅값이 폭등하고, 주가가 상한가를 기록한 그 때, 예수님이 오신다면 이렇게 말하겠지요. "아, 예수님. 쫌! 쫌! 오는 건 좋은데 몇 년만 더 있다가 좀 오세요."
사회에서 집권층에 가까운 니고데모가 전적으로 예수님을 따르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자신이 가진 것을 내버리고 주를 좇았다면 둘 중 하나가 되겠지요. 1. 진짜 예수님에 미쳐서 이것이 진리라고 확신한 사람 2. 성경책이 잘 꾸며진 소설이거나 거짓말. (소설에서는 작가의 입맛대로 어느정도 인물을 움직일 수 있을테니까요)
그러나 니고데모는 본문처럼, 예수님의 영적 가치에 대해서 받아들이기 어려웠을테고, 자연스럽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열두제자에 속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없더라도 잘 살 수 있었던 그는, 단지 예수님을 통해서 좀 더 바르게 세상을 보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랍비"라고 부르며, 그에게 지혜를 구한 것에 가깝겠지요.
이것은 하나의 통찰을 줍니다. 기독교인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통찰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보고, 교회에 간다는 것을, 하나의 그럴싸한 선한 행동으로 여깁니다. 서양에서는 예수는 믿지 않아도, 교회는 가끔 나가고, 성탄절 등을 즐겁게 여기는 문화가 존재합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이 가르쳐준 지혜들을 사랑하는 셈입니다. 행동은 일반적 세상의 룰을 따라가며, 적당히 즐기면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이들이 추구하는 삶입니다. 저는 니고데모나, 이런 사람들을 결코 비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이 바랐던 것을 생각해 볼 때, 그것은 보다 엄격한 삶이었다는 점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반드시 돕고, 천국의 시민으로서 살아가고, 세상의 가치에 눈을 두지 않는 삶이었다는 점입니다. 가난한 나그네에게 물 한 모금 대접하는 것이 천국에 들어가는 열쇠라고 본다면, 엄격히 말해, 많은 것을 가질 수록, 많은 것을 나눠줘야 한다는 책임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바꿔 말해, 재능이 많다면, 더 치열하게 노력해, 더 많은 일들을 해나가야 한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가 아쉬운 점은, 그는 누구보다 적극성은 있었지만, 현실에 안주하는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삶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적당히 예수님의 말씀 좋지 라고 생각하기란 쉽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라고 적어도 질문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웃을 생각하고, 이웃에게 나눠주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라고 스스로에게 질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의 삶이 니고데모처럼 멀리 떨어져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삶이 아니라,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부대끼면서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선의로 누군가를 돕고, 선의로 할 수 있는 올바른 일들을 하고, 세상이 볼 때는 작은 일처럼 보일지라도, 그렇게 용기를 내며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는 삶이 되어간다면, 반드시 주께서 돌보시고, 채우시리라 저는 확신합니다. / 2013. 03.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