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Review]/한국사

국가의 형성 - 초기 나라들의 결혼 이야기

시북(허지수) 2013. 3. 21. 10:49

 이제 본격적으로 한민족의 초기 고대국가를 하나씩 천천히 살펴봅시다. 부여, 고구려, 옥저와 동예, 삼한이 되겠네요.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처처럼 나라들이 아주 많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 솔직히 과거에는 온갖 암기법으로 외웠던 가슴아픈 기억이 많지만, 가급적 이해할 수 있는 방향으로 접근한다면 좋을 듯 합니다. 그들은 왜 그렇게 제도를 만들었는가? 당시 시대의 최선은 무엇이었는가? 왜? 왜? 왜? 이것이 제 나름의 공부를 즐기는 방법이랄까요. 여하튼, 부여부터.

 

 부여는 일단 5부족 연맹 형태의 연맹왕국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절대권력을 가진 왕이 있는게 아니라, 네 방향의 지역을 다스리는 사출도 와 중앙지역의 왕이 합해서 국가를 이루었습니다. 왕이 힘이 없다보니,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왕에게 책임을 덮어씌우기도 했다니, 약간은 불쌍한 바지사장 같은 느낌도 납니다. 왕권이 약한 것은 연맹왕국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한편 (고구려보다 더 위쪽인) 상대적으로 북쪽에 있다보니, 농사와 목축을 같이 했다는 것도 중요포인트. 그래서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행사 [영고]가 유독 12월에 있기도 합니다. 일년단위로 끊어서 제사를 치르는 것이 유목민의 풍습이라는 주장도 있고요. 보통 추석이나, 추수감사나 이런 행사가 10월이나 가을에 있는 것과는 상당히 다르지요? (그래서 부여의 영고는 각종 시험의 단골중의 단골이 되고 말았습니다.) 덧붙여, 부여에는 (죽은 사람을 따라서 산 사람까지 묻는다는) 순장이라는 장례방식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편, 부여에는 1책 12법이라는 엄격한 법률도 있습니다. 절도 시, 물건 값 12배 배상 책임이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지하철 무임승차하다가 30배 벌금을 당하는 것보다는 조금 약합니까? 하하. 어쨌든 역시 사유재산을 중시한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결혼제도로는, 형사취수제 라고 있었는데, 형이 죽으면, 형수는 동생이 책임지고 결혼한다는 제도입니다. 고대에는 자주 볼 수 있는 제도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결국 사유재산의 측면에서 접근한다면, 그만큼 집안의 재산유출을 싫어한다고도 읽을 수 있겠지요. 고대사회에는 근친혼이 상당히 많은데, 이 역시 집안의 재산을 외부와 나누고 싶지 않으려는 심리로도 파악할 수 있습니다.

 

 결국 사회적 환경이 제도를 만든다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재산이 많았던 기득권층은, 법으로 일단 사유재산을 보호하고, 누군가 죽어도 동생이 형수와 결혼함으로서 재산 유출을 막을 수 있었고, 심지어 근친혼을 통해서 계속해서 지위를 누리고 싶어했습니다. (이걸 반대로 할수록 행복한 사회가 될 수 있을까요? 여하튼, 현대 사회는 무거운 상속세나 증여세 등으로 사유재산을 어느정도는 합법적으로 건드리고 있습니다. 세금의 비율을 얼마로 정할지가 문제라면, 문제겠지요.) 인간은 무엇인가를 잃어버리는 상실감을 거의 혐오하기 때문에, 여전히 부자는 부자끼리, 재벌은 재벌끼리 결혼하는 풍습은 현대사회도 마찬가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제 고구려. BC37년 고주몽이 세운 고구려는 부여에서 출발한 나라로 볼 수 있는데, 나중에는 크게 발전해서 5세기경에는 부여를 압도하는 엄청난 위세를 자랑하지요. 아무래도 출발점에서는 부여와 닮은 점이 많습니다. 역시 5부족연맹이 있었고, 1책12법이 있고, 형사취수제가 있습니다. 재밌는 것은 환경의 차이겠지요. 부여와 달리, 북쪽에 평야는 찾아보기 힘들고, 산악지대만 있고, 그러다보니 식량은 더욱 부족하고, 먹고 살기 위해서 강인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소국들을 정복하는 약탈하는 경제, 정복 전쟁 활동을 펼치는 것도 큰 특징이지요. 그러다보니, 용맹하고 호전적인 이미지가 지금도 강합니다. 중국 기록에서도 평하기를 부여는 온순한데, 고구려 사람들은 포악하다고 까지 묘사됩니다. 이걸 우리식으로 말하면, 부여는 순박하게 살았지만, 고구려는 강인한 위세로 중국을 위협하기도 했다고 쓸 수 있겠지요. 고구려의 제사 행사는 10월에 동맹이라고 있습니다. (부족이 모여 맹세하여 맺은 의식)

 

 고구려의 재밌는 결혼제도로는 서옥제 라는 풍습이 있습니다. 혼인을 정하면, 어린 신랑이, 신부(여자)네 집에 찾아갑니다. 그리고 집 뒤쪽에 작은 집을 짓고, 거기서 자식을 낳고 기르는 것입니다. 나중에 신랑이 장성하게 되면, 마침내 아내를 데리고 신랑 집으로 돌아오는 풍습이지요. 요즘도 이런 식의 결혼이 간혹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꽤 나름의 합리성이 있습니다. 여자집에 있으면, 아이를 돌보기가 상대적으로 편합니다. 남자가 활동하기에도 좋겠고요.

 

 서옥제 시행의 결정적인 사유로는 노동력의 문제가 걸려 있다고 봐야겠지요. 생각해 봅시다. 노동력이 아주 중요한 고대 국가에서, 만약 내가 아주 잘 키운 딸이 결혼해서 바로 집을 떠나게 되면, 정말 치명적인 손실입니다. 딸을 둔 집안 입장에서는 상당히 불공평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일단 어린 남자가 신부집에 들어가서 일정기간 노동을 하고, 도움을 준 후에, 남자가 장성하게 되면 신부와 함께 떠나게 해주는 셈입니다. 고대인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가치관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강조하지만, 옛날 사람들이 결코 어리석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가만히 따져볼수록, 저마다 이유가 있는 행위를 한다고 봐야합니다. 제도도 마찬가지겠고요.

 

 자 이제 옥저와 동예를 봅시다. 두 나라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왕이 없는 군장 국가였고, 해안가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옆에서는 저돌적이고 강대한 고구려의 압박이 엄청났습니다. 생필품 소금을 구하기 어려웠던 고구려는, 일단 가까운 옥저부터 자꾸 공격해 들어오는 셈입니다. 옥저는 해산물 등의 공납을 바치다가, 나중에 시간이 많이 흘러 고구려에 흡수됩니다. 한편 저는 지금도 추억의 "옥민이"를 기억합니다. 옥민이만 외워도 도움이 될날이 온다는 압박에, 대체 걔가 누구야? 했었는데, 옥저는 민며느리제를 줄여서 옥민이... 것참. 생각할수록 열받는데, 옥민이라고 태그에도 써놓아야 겠네요. 민며느리제 하면 자동으로 옥저가 나올 정도로, 슬픈 추억입니다 -_-... 주입형, 암기형의 혼합물이랄까 (으휴!)

 

 어쨌든, 민며느리제의 의미를 살펴봅시다. 매매혼으로도 볼 수 있는데, 남자집에서, 다른 집에 있는 어린 딸을 대가를 지불하고 사옵니다, 나중에 이 딸이 성장하고 크면, 남자와 결혼이 예정되어 있지요. 여자집에서는 일차적으로 딸의 양육비 부담을 덜 수 있습니다. 이차적으로 게다가 딸을 어릴 때 미리 결혼시킴으로서, 대가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 대신에 일찍부터 시집간 딸은 남자집에서 일을 하게 되겠지요. 따라서 남자집에서도 결혼 및 나중에 일할 사람을 생각한다면, 민며느리가 필요했던 셈입니다. 그래서 옥저 지방에서 특히 유행했다고 합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고대 사회에서는, 한 사람의 노동력을 중요하게 생각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매매혼 어감이 다소 나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엄밀히 말해서, 고대의 민며느리제 같은 제도는 여성의 노동력에 대한 보상적 성격이 강합니다. 고구려의 서옥제와 마찬가지로, 내 딸을 그냥 준다면 애써 키운 사람은 뭐가 됩니까? 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제도일 수 있습니다.)

 

 계속 결혼 이야기로 이어가면, 동예는 책화와 족외혼 이 대표적인 풍습입니다. 씨족(부족)사회였기에, 그들은 다른 족과 결혼을 해야 했습니다.(=족외혼) 이렇게 서로 결혼을 통해서 평화와 동맹을 맺어간다는 느낌이랄까요. 그래서 책화도 같은 측면에서 본다면, 책화는 A부족의 사람이, B부족을 무단 침입하면, 반드시 A부족이 죄에 책임을 지고 변상하도록 하는 풍습입니다. 그러다보니 부족끼리는 안정된 생활과 재산 보호라는 두 가지를 같이 얻을 수 있었지요. 서로 지킬건 지키고, 결혼도 해가고, 잘 살아보자는 동예. 특산물도 있어서, 단궁, 과하마(작은말), 반어피(바다표범가죽) 같은 물건들은 유명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동예는 나름 공동체적 낭만이 있다랄까요. 10월에는 춤추며 즐기던 제사 행사인 무천도 있습니다. 살기 좋아서(?), 춤까지 추다니. 척박한 고구려와는 좀 느낌이 다르긴 다릅니다. (스포츠 댄스도, 요가 자세도, 생활의 여유가 있어야 좀 배울 수 있는거 아니겠어요!)

 

 이제 끝으로 삼한입니다. 마한, 변한, 진한으로 대표되는 삼한은, 몇 가지 특징을 잘 생각해 두면 좋습니다. 일단 남쪽지방이 그렇듯이 풍족한 지대 아니겠어요. 벼농사를 잘 할 수 있었고, 저수지도 있었고, 작업 공동체 두레도 있습니다. 농업은 발달했고, 함께 모이는 작업이 많았기에, 축제도 1년에 2번이나 엽니다. 5월의 수릿날, 10월의 계절제를 열었지요. 또한 나중에 가야가 되는 변한 지역은 철이 풍족해서, 왜나 낙랑 등에 수출하기도 했고요. 고구려에 비한다면, 참으로 살기 좋아 보입니다. 한편 삼한의 중요한 포인트로는 "제정 분리 사회"라는 것이 거의 법칙처럼 삼한관련문제에 필수단골로 등장합니다. 삼한에는 제사를 지내는 소도라는 곳이 있었는데, 이 곳으로 죄인이 도망치면, 성지라고 해서 잡아가지 못하게 하였다는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인터넷에서 아주 유명세를 탄 글이나, 전설이 된 글을 "성지"가 된다는 표현을 요즘은 쓰는데, 삼한 사회였다면 아무리 유명한 죄인이라도 성지 소도에 들어가면, 일단 함부로 잡아갈 수 없는 셈입니다. 너무 독특하고도 궁금해서 좀 더 찾아봤는데, 아무래도 삼한이 제사를 아주 중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제사 지내는 곳을 잘 보호해서, 질병과 재앙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주 컸다고도 볼 수 있겠네요. 쉽게 말해, 이 사람들은 죄인 하나 잡는 것보다는, 제사를 잘 지내서, 우리 모두가 더 잘 사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혹시라도 죄인이 소도를 마구잡이로 훼손한다면, 삼한 사람들은 이어질 끔찍한 결과를 염려했는지도 모릅니다. 옛말도 있잖아요. "이보게, 그러다 천벌 받아!"

 

 현대의 결혼 이야기와 고구려의 결혼이야기가 인상적이라 같이 덧붙여 둡니다. 2010년대 들어와서 평균 결혼비용이 2억을 넘어간다고 합니다. 말이 좋아 2억이지요. 사회 초년병 치고는 직장을 적당히 잡아서 월 200을 번다고 칩시다. 1년에 2천만원씩 모아도, 10년 모아야 2억인데, 당연히 실제로는 2억이 그렇게 쉽게 모아지지 않습니다. 자연히 대출을 끼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고요. 그러다보니 가난한 사람들은 무턱대고 결혼하기가 점점 어렵습니다. 결혼을 약속해놓고, 파혼하는 사유의 절반이상이 결혼비용 때문이라고 하니, 심각하지요. 혼수 때문에 싸운다는 이야기는 너무 흔해진 소재입니다. 부모들도 마찬가지로 자녀의 결혼에, 절반 이상이 부담감을 느낍니다.

 

 아까 잠깐 언급했지만, 고대 사람들이 결코 만만하거나 어리석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제 고구려를 볼까요. 일반적인 고구려의 결혼은 돼지고기와 술로 결혼식을 준비하고, 재물을 보내는 것은 부끄러운 행위로 여기고 금기시 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혼수를 준비할 게 있었는데, 그게 "수의"였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전쟁을 벌이는 일이 잦았던 고구려에서는 사람이 죽는 일이 자주 있었고, 언제나 죽음을 대비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었던 셈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인간으로서 가장 기쁜날에도, 죽음을 함께 생각하는 고구려 사람들의 용기는, 대단히 인상적입니다. 어려서부터 활을 익히고, 용맹한 사람들로 이름을 날리던 그 문화를 살펴보면, 이런 결혼 이야기들도 함께 있습니다. 확실히 우리는 옛사람보다 피곤한 삶을 살고 있다는 느낌을 종종 받습니다.

 

 영감적인 측면에서 우리는 물질적으로는 초기 국가들에 비해서, 엄청나게 풍요로운 열매를 맛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풍요로운가? 라고 질문한다면, 일부 사람들은 이제 결혼을 포기하거나, 이룰 수 없는 일로 생각할 정도로, 지쳐 있기도 합니다. 남에게 잘 보이려는 결혼을 위해서, 혹은 상대방에게 흠잡히지 않기 위해서 결혼은 간혹 계약서 작성처럼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고구려 사람들이 지금 시대로 왔다면, 아니 옷 한 벌만 있으면 되지, 것참 이상하구만. 이라고 일갈할지도 모르겠네요. / 리뷰어 시북.

 

(※이 자료정리는 최태성 선생님의 한국사 강의를 노트로 요약하고, 메모를 함께 쓴 것입니다. 개인적 용도로는, 공부방 등 에서 활동할 때, 보조 자료나 참고 자료, 혹은 글쓰기 영감을 위한 데이터베이스 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 거기에 대한 일종의 고찰이기도 합니다. 키워드 형태로 중요한 부분들은 나름대로 강조해 두었습니다. 크게 바라는 것은 없으며, 다만 짧게나마 영감의 시간이 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