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Review]/한국사

중세문화사 1 - 고려의 유학과 역사서

시북(허지수) 2013. 4. 24. 23:29

 고려의 유학을 살펴본다고 하면, 어쩐지 조금 어색한 느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조선의 유학이라면 딱 하고 성리학이 떠오를테지만, 고려의 유학이란 대체 뭔가요? 조선시대 철학적인 성리학이 주류를 이루었다면, 고려 초기에는 훈고학의 시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경전의 자구 해석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뜻이지요. 유학과 가장 관련이 깊은 왕을 꼽으라면 고려 초기 성종을 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종하면 떠오르는 유학자가 있는데, 바로 시무 28조를 건의한 최승로 입니다. 유학자 최승로의 제안은 성종에게 받아들여졌는데, 이 지점이 시험 단골 코스니까 몇 번이고 잘 파악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신라 때, 최치원이 올린 제안은 거부당했다는 것도 같이 체크)

 

 한편 최승로 때까지만 해도, 불교를 비판적으로 보긴 했어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았습니다. 고려는 충분히 불교의 문화가 널리 퍼져있던 나라이기도 했고요. 말하자면 고려는 유교와 불교가 같이 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만, 나중에 고려 말기 성리학으로 단단히 무장한 신진사대부가 등장하면서, 불교는 완전히 부정되고 배척받지요. (신진 사대부의 집중 비판 대상이 바로 불교와 권문세족들이었습니다.)

 

 고려의 정치적 이념은 유교였기에, 성종은 국자감을 설치 하게 되었습니다. 일종의 국립 대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관학을 진흥시키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유학부도 있었고, 기술학부도 있었는데요. 재밌게도 7품 이상의 관료 자제들은 유학부에 들어갔고, 8품 이하의 하급 관료나 일반 민중들은 기술학부에서 기술을 배웠다고 합니다. 신분이 낮았다면 국자감에서 감히 유학을 배울 수 없었다고 하니, 조금은 씁쓸한가요? 신분제 사회는 원래 어느정도 폐쇄적인 면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고보면 요즘은 인기가 반대지요. 전문직과 고도기술직이 최고인기고, 기초분야의 학문들은 폐쇄까지 검토되기도 하는데! 뭐 어쨌든 옛날에는 전문기술을 별로 우대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조선시대에 유명한 성균관쯤 가면 기술학과를 아예 빼버리고 천대하는 분위기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고려 중기, 문벌귀족이 잘 나갈 때의 유명한 유학계 인물들이라면, 김부식과 최충이 있습니다. 묘청의 서경파와 김부식의 개경파가 피보는 싸움을 벌인 것은 잘 알려져 있지요. 그래서 이번 문서에서는 해동공자 최충을 집중적으로 살펴봅시다. 최충은 요즘말로 한다면, 사교육계의 "거성"입니다. 국립 대학보다 더욱 뛰어난 사학을 운영했고, 사람들이 몰려와서 최충에게 배웠습니다. 최충학파를 두고, 사람들은 문헌공도 혹은 9재학당이라고 불렀는데, 하여튼 당시 사교육이 엄청나게 유행했다는 것 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학구열이란 새삼 엄청납니다! 수도 개경에는 사학12도가 있었는데, 그 열둘 중 갑은 최충이 운영하던 9재학당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몰려서 높은 명성을 얻었을까요? 살짝 비밀이 있습니다. 이른바 좌주-문생 관계라고 하는 시스템인데, 당시 최충처럼 명망 높은 유학자들은 국가시험의 채점관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유명 유학자에게 학문을 배운다면, 과거시험에 상당히 유리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렇다고 부정이 만연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당시 중요하던 경향들을 뛰어난 유학자에게 핵심적으로 배울 수 있었기에, 사학은 거대한 흐름이 될 수 있었습니다. 유학 열풍의 주인공 해동공자 최충 입니다! 아, 그런데 문제가 있긴 있습니다.

 

 그럼 공교육인 관학은 어쩌란 말입니까! 당연히 관학은 위축되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공교육도 좀 살려봐야 하지 않겠어요? 관학 진흥책도 있긴 있습니다. 일단 양현고(장학금)를 설치하며, 공부하는 이들을 후원해줍니다. 또한 전문7재 라고 좋은 강좌를 만들어서 관학의 경쟁력을 키우는데 힘을 쏟습니다. 물론, 이 모든 일이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습니다.

 

 오늘날 교육시장이 엄청나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고려의 뜨거운 교육문화도 참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학문장려 차원에서는 대단한데, 사교육 열풍은 학연의 강화 및 관학이 쇠퇴하며 왕권이 약화될 우려도 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공교육의 틀을 제대로 다잡지 못한다면, 정부신뢰도가 추락하는 것과 비슷하다 랄까요.)

 

 어쨌든 이런 분위기들은 무신정변이 일어나고, 무신이 정권을 잡기 시작하자, 위축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칼과 쿠데타에는 관심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무신들에게 유학이란 "아웃 오브 안중", "관심無" 에 불과했습니다. 이 점은 뒤를 잇게 되는 지배층인 친원파 권문세족도 사실상 마찬가지였고요. 그래서 고려의 유학은 말기에 가면, 상당히 예전과 다른 경향을 갖게 됩니다. 바로 성리학의 유입입니다. 성리학은 중국 송나라에서 발달했고요.

 

 안향이라는 사람은 원나라를 통해서, 마침내 고려에 성리학을 소개 시킵니다. 이제현, 이색 같은 사람들이 성리학을 열심히 배웠고, 이런 흐름들은 그 뒤의 유명한 핵심인물들인 정몽주, 정도전에게까지 이어집니다. 정몽주, 정도전? 네, 이들이 성리학을 사상적인 기반으로 하고 있는 "신진 사대부" 세력들이었지요. 이들은 불교를 자극적일만큼 비판하였고, 성리학은 새로운 사회의 대안으로 떠올라가는데, 뭐, 이점은 조선 건국 때 또 다루어 질 것입니다. (한편, 국립대학격인 국자감은 고려 말이되면 성균관으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고, 공양왕 시대가 되면 기술학부까지 폐지되고 맙니다. 여기까지가 고려의 전반적인 유학의 흐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역사서를 살펴볼까요. 고려 초기에는 7대실록, 구삼국사가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현존하지는 않습니다, 만약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왔다면, 우리는 배워야할 분량이 좀 더 늘어났겠지만, 명확하게 고대를 이해하고, 조명해 볼 수 있었을텐데 말이에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는 문벌귀족 시대에 등장합니다. 잘 알려진 김부식의 삼국사기 입니다. (개인적 여담을 감히 하자면, 어린 시절 어찌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헛갈리든지요. 과거에 암기형 문제가 나올 때는, 부식 사기를 줄여, 식사, 식사, 식사, 식사, 식사... 김부식은 삼국사기라고! ㅠㅠ! 라면서 절규했던 기억이 납니다. 어떻게든 장기기억으로 확고하게 만들려는 처절한 몸부림... 씁쓸하네요. 하하.)

 

 삼국사기는 형식이 기전체 방식 이라는 점도 반드시 체크해 둡시다. 중국 사마천의 사기와 같은 방식인데요. 입체적으로 구성되는게 특징입니다. 복합적인 역사 이해가 가능하지요. 기전체라고 함은, 본기(왕)+세가(제후)+지(시스템)+열전(신하)+연표로 기록되는데, 한 사건을 (열전에도 써놓고, 지에도 써놓고, 본기에도 써놓고) 다양한 기록에 써놓기 때문에, 사건을 다각도로 넓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삼국사기 편찬은, 보통 일이 아니었고, 장난 아니게 방대한 작업이 요구됩니다. 중요한 대목이 있는데, 이 삼국사기는 신라계승 의식이 있었으며, 사대적인 성격이 있다 는 점도 함께 기억해 둡시다. 시험에 종종 나올테니까요.

 

 그리고, 이제 고려 후기가 되면, 강력한 외세 몽골이 침입해 들어옵니다. 원나라(몽골)는 세지만, 맞서야 하지 않겠어요. 자주적인 고려인의 자세가 시대정신으로 요구되었고, 주체성을 찾기 위한 역사서들이 집필됩니다. 이규보가 쓴 동명왕편은 고구려를 강조 하고 있는데, 고구려 같은 패기로 살아야 한다는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승려 각훈은 해동고승전을 편찬해서 불교 쪽 기록을 보완하기도 했습니다. 위기 상황에서 우리가 무슨 역사를 떠올릴 것인가는 상당히 비중있는 대목입니다. 우리가 누구냐? 우리가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 라는 시선과, 우리는 역시 예로부터 어쩔 수 없었어 라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결과를 낳게 되니까요. 그래서 일제식민사관을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넌 어차피 안될꺼라는 유도된 자포자기라면, 경계부터 합시다. 인생을 누군가의 판단에 맡겨둘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지요?

 

 자, 이야기로 돌아와 고려후기에는 일연의 삼국유사, 이승휴의 제왕운기 가 있습니다. 공통적인 특징이 있는데, 단군 고조선 이야기가 수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출발이 단군 조선임을 규정하고,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나라임을 강조하고, 주체적이고 자긍심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힘겨웠던 고려말 원간섭기에, 염원이 담겨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을 생각해보면, 역사서는 정치적 성향을 상당히 띠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요. 삼국시대만 해도 그 나라가 한참 잘 나갈 때, 역사서를 편찬하곤 했었습니다. 게다가,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는 지금도 현재진행형 입니다. 근, 현대사를 두고 논쟁은 여전히 존재하고요. 그 이유가 뭘까요? 역사는 이처럼 정치적 민감성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조금만 뒤틀어버리면, 잘못도 얼마든지 정당화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왜곡이 위험한 것입니다.

 

 오늘의 영감을 이쯤에서 언급한다면 - 우리가 오늘날 언론이나 방송, 거대미디어를 조심해야 하는 까닭도 다른 게 아닙니다. 현실을 왜곡시켜 보여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거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전부일까요? 똑같은 행동도 누가 하면 멋지다고 말하고, 누가하면 이상하다고 말해버릴 수도 있습니다. 어떤 목소리는 크게 틀어주고, 어떤 목소리는 외면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언론, 방송, 미디어는 가급적 중립을 지향한다면 좋겠지만, 완전한 중립에 서기 힘듭니다. 때로는 의도적으로 왜곡하는 추태도 보여줍니다. 어쩌면 한 쪽만 유리하게 비추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좀 더 현명해져야 합니다. 다양한 관점을 고려하되, 억지스러운 주장과 위선가득한 주장은 간파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 영화에 이런 대사가 있습니다. "바람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다" 바람 뿐만이겠어요. 사회의 문제들은 논하고 계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극복해내야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쉽지는 않겠지만, 사람들이 점점 현명해져 갈 때, 우리는 더 좋은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북유럽에 스터디 모임이 가득한 것처럼, 평생 학습을 통해서 민주주의를 강화시키는 것처럼, 우리도 더 나은 사회에 대해서 고민하고, 이야기 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간다면 좋겠습니다. 하나씩, 하나씩, 그렇게 꾸준히 계속 해나가는 것이 어쩌면 가장 빠른 길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의는 저절로 뚝 떨어지지 않습니다. 올바른 사고를 견지하려는 인간다움을 잃지 않을 때, 정의는 우리 곁에 서 있게 될 것입니다. / 리뷰어 시북.

 

(※이 자료정리는 최태성 선생님의 한국사 강의를 노트로 요약하고, 메모를 함께 쓴 것입니다. 개인적 용도로는, 공부방 등 에서 활동할 때, 보조 자료나 참고 자료, 혹은 글쓰기 영감을 위한 데이터베이스 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 거기에 대한 일종의 고찰이기도 합니다. 키워드 형태로 중요한 부분들은 나름대로 강조해 두었습니다. 크게 바라는 것은 없으며, 다만 짧게나마 영감의 시간이 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