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3년5월26일/물위를 걷다(마태복음4:22-)/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3. 5. 27. 19:11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5월 26일 주일 예배

물위를 걷다 (마태4:22-)

우리는 전 주에 오병이어의 놀라운 기적에 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바로 그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본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야단법석을 피웁니다. 일반인들 뿐만 아니라 제자들도 부화뇌동해서 ‘예수 왕’을 부르짖습니다. 제자들이야 예수님이 왕이 되면 한자리하는게 꿈이었으니까 당연히 기뻐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지만 예수님의 뜻은 아니었지요.

이때 우리 주님은 왕이 되어서 왕명으로 모든 이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이끌 수 있는 아주 쉬운 길을 버리고 도망을 갑니다. 좋게 이야기하면 피신? 아니면 은신?
오늘날 교회를 이용해서 권력을 가지려는 사람이나 교회안의 벼슬이랍시고 성직을 놓고 다투는 이들은 진정한 주님의 제자가 아닙니다. 주님은 왕의 자리를 거부하고 피신한 분입니다.

만일 그때 예수님이 왕이 되었다면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그쳤을 것이고 로마제국을 정복해서 황제가 될 수는 있었겠지만 오늘날 기독교가 세계종교가  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잘해야 이스라엘의 민족종교로 남았겠지요.

인류애에 기초한 보편적인 종교, 그것이 바로 기독교인데 특정 민족의 한을 풀어주는 그런 민족주의적 종교에 그치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 아니거든요. 예수님이 비록 유대인으로 나기는 했지만 그는 모든 인류를 사랑한 분입니다. 태양이 온 세상을 골고루 비취듯이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에 골고루 퍼지기를 원하신 겁니다. 만일 유대인의 한을 풀어주는 유대인만의 왕이 된다면 그것은 그를 이땅에 보내신 아버지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은 왕으로의 추대를 거절하고 홀로 피신한 겁니다.

22절에는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라고 되어있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을 재촉하신 이유는 바로 제자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는 사람들과 부화뇌동해서 들떠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제자들이 사람들을 오히려 선동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을 따로 떼어서 배에 태워서 바다 건너편으로 보내시고 자신은 사람들을 해산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주님은 홀로 산으로 기도하러 가신거지요.

아마 이 당시 예수님과 제자들은 벳세다의 외곽지역인 광야의 산비탈쯤에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배를 태워서 벳세다로 보낸겁니다. 아마 거기서 제자들과 다시 만나서 함께 가버나움으로 가려고 하신 것 같습니다.
벳세다 외곽에서 벳세다로 가는건 별로 멀지 않은 장소지만 이때 제자들은 그만 풍랑을 만나 게네사렛으로 가게 됩니다.

우리 주님은 제자들과 사람들을 모두 돌려 보낸 후에 따로 산에 기도하러 가셨고 그곳에서 밤을 맞았습니다. 저도 밤에 산기도하는 것을 즐겨하는데 밤에 산에서 혼자 기도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지만 매우 효과적인 기도방법입니다. 그래서 제가 아주 위급할 때 잘 쓰는 기도법이지요. 아마 이때 주님은 바다가 잘 바라다 보이는 갈릴리 근처의 산위에서 기도하셨던 것 같습니다.

사실상 본문 23절의 “따로... 혼자” 라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가장 근원적인 모습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사람들과 더불어 이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하나님과의 영교와 영적인 안식을 위하여서 그러한 세상 사람들과 따로 떨어져서 조용하게 하나님 앞에서 머물며 침묵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에 대한 싸인을 기다리며 기도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세상을 이기는 힘이 바로 여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고 살기 위해서는 우리는 ‘따로’와 ‘혼자’라는 이 두 단어를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주님 앞에 홀로 서 있다는 생각으로 생활해야 하며 때때로 사람들과 떨어져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할 때가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이때 바다에 있던 제자들이 탄 배는 풍랑을 만나게 됩니다. 제자들은 이미 육지에서 4.6~5.6km정도 떨어져 있었습니다. 본문에는 단순히‘수리’라고 표현했지만 요한복음에는 ‘25혹은 30 스타디온(그리스어로)’이라고 표현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힘들기 때문에 제자들은 지금 ‘고난을 당하고’있습니다. 여기서 고난은 산모가 애를 낳을 때 당하는 고통을 말합니다. 그정도로 지금 제자들은 풍랑 때문에 정신이 없습니다. 바다 한가운데서 폭풍우를 만난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들은 육지와 무려 십리 이상 떨어져 있습니다. 오지도 가지도 못합니다. 만일 이들이 육지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풍랑을 만났다면 어쩌면 희망을 가지고 육지로 갈려고 할 수가 있었을 것이지만 문자 그대로 바다 한가운데서 만난 풍랑 앞에 이들은 어떤 인간적인 희망도 가질 수가 없어서 그냥 있는대로 소리만 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가 아마 밤 4경이었습니다. 밤4경은 새벽3시부터 6시까지를 말합니다.
갈릴리 바다는 해수면보다 많이 낮기 때문에 때때로 돌풍이 일어나서 잔잔하다가도 갑자기 풍랑이 거칠어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특히 밤에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납니다. 기온이 급강하 하는 사막기후때문이지요.
풍랑을 만나서 고생하던 제자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제 생각에는 주님을 마구 원망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만일 주님이 억지로 자기들을 사람들과 떨어지게 해서 배를 태워서 보내지 않았다면 지금쯤 왕좌에 오른 주님과 더불어 기쁨에 넘치는 잔치 자리에 있었을 것인데 그냥 왕이 되면 되지 그 왕이 안되려고 자기들을 억지로 배워 태워서 보내니까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밤에 기류변화로 인해 돌풍이 부는 일이 많은데 이걸 갈릴리 바다 주변사람이라면 다 압니다. 그럼에도 저녁도 지나서 자기들을 배워 태워보낸 것은 명백히 주님의 실수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주님을 원망하지 않았을까요?

우리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믿음의 삶을 살기 시작했는데 엄청난 위험을 겪을 수가 있습니다. 더구나 그러한 위험은 이미 예견된 일입니다. ‘이렇게 하면 분명히 내가 어려움에 빠질 터인데 그래도 주님이 시키는 일이니까 잘되겠지’ 하고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위험이 닥친다면 우리는 신앙에 회의감을 갖기 시작할 것이고 주님을 원망하게 될 것이며 신앙이 곤두박질 치게 될 것입니다.

밤이 되었는데 배를 태워서 건너편으로 보낸 주님에 대한 원망이 사무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은 자기는 타지 않았기 때문에 위험으로부터 비껴있습니다. 제자들은 실망하고 원망하며 힘이 빠져있습니다. 게다가 너무 극심한 고통 때문에 지금 정신이 없습니다.
아직 아침이 되려면 한두시간은 있어야 됩니다. 원래 새벽이 오기직전이 가장 어둡고 가장 춥지요. 지금 제자들은 가장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십니다. 주님은 멀리 산위에서 제자들이 파도와 사투를 벌이고 있는 것을 보시고는 오신겁니다.
제자들은 파도가 이는 물위를 걸어 오시는 주님을 보고는 유령이라고 외칩니다. 그들의 생각에는 결코 사람이 거대한 파도위를 걸어서 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람의 잣대로 판단하고 원망하며 불평하고 있을 때 그의 실체는 훨씬 더 굉장한 것이지요. 한나라의 왕이란 엄청난 자리가 분명하지만 그래봐야 결국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파도를 잠잠케 하거나 물위를 걸을 수 없는 육신을 가진 존재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물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는 신인이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하나님 자신이어서 대자연의 거대한 풍랑도 그앞에 순종하는 천지의 지배자이십니다. 그가 자연을 만드셨기 때문에 자연법칙이 그를 구속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여하튼 제자들은 물위를 걸어오시는 주님을 보고는 유령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요, 그들의 상식으로 사람이 물위를 걷는다는게 말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눈에는 보이니까 사람이 아니라 유령이라고 외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분명히 초자연적인 일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로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는데도 우리의 마음으로는 그러한 이적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허깨비를 본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이적에 대해서는 믿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즉시 말씀하십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하하, 제자들이 선생님을 알아 보지 못하고 오히려 유령이라며 두려워하니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안심하라”
주께서 말씀하신 안심하란 말은 원문상으로는 현재명령형입니다. 즉 지금부터 계속해서 용기를 갖고 즐거워하라는 말입니다. 지금 캄캄한 바다위에서 폭풍을 만나 휘몰아치는 파도위에서 정신이 없는데 너무 너무 고통스러운데 주는 나타나셔서 바로 지금부터는 두려워하지 말고 계속해서 용기를 갖고 즐거워하라는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그 명령을 듣고 즉시 두려움을 떨치고 용기를 가지고 즐거워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상황이 그게 아니거든요.

그런데 사실 믿음은 그런 겁니다. 눈으로 보는 상황은 도저히 아닌데 자꾸 우리로 하여금 걱정하지 말고 용기를 가지고 그리고 앞으로 계속해서 즐거워하라는 말씀이 들려옵니다. 이건 계속해서 따라야 하는 명령입니다.
우리는 그저 그 명령에 순종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요, 뭔가 거대한 풍랑이 이는 바다한가운데서 사람같은게 물위에 서있으니까 유령이라고 소리치지 말고 용기를 가지고 즐거워하라는 명령입니다.

‘두려워말라’는 즉각 두려워하는 것을 그만두라는 말입니다. 항상 이렇게 그의 명령은 즉각적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파도가 치고 태풍이 불고 풍랑 때문에 죽을 지경입니다. 상황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두려워하는 것을 즉시 그만두라고 말합니다. 그러한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그래서 어렵습니다. 왜냐면 눈에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진 걸로 믿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내니”
내니 라는 이 말이 엄청나게 중요합니다. 우리나라 성경에는 단순히 내니 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 이 말은 나는 나다란 말입니다. 헬라어로 에고 에이미
뭐 별거 없는거 같은데 옛날 시내산의 가시떨기 사이에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자기를 일러 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나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바로 이 말이 본문의 “내니”에 해당되는 말입니다.

이 말은 유대인들에게는 아, 주님이 바로 하나님이시구나. 지금 물위에 서 계신 분이 그 옛날 시내산 가시떨기 불꽃속에 계셨던 바로 그 하나님이시구나 하는 느낌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천지를 만드시고 운행하시는 천지의 지배자시기 때문에 자연법칙을 거스리는 것입니다.
왜냐면 그는 오롯이 홀로 서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어야만이 놀라운 일이 일어 납니다.

그런데 그 제자들 중에 한사람 베드로가 말합니다.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올라 하소서”
우리는 베드로가 말하는 사람이 예수님인지 아닌지 몰라서 의심했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는 분명히 주여라고 하잖아요. 베드로는 지금 주님의 그 기적에 너무 놀랐고 또 위급한 순간에 주께서 나타났기 때문에 감격한 마음으로 이렇게 말하는겁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28절 후반부의 말 때문입니다.
“나를 명하사 물위로 오라 하소서”
베드로는 주님은 충분히 그런 능력을 나타낼 수 있음을 믿었으므로 자기에게 물위를 걷도록 명령하라고 청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그의 청을 들으시고 “오라”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네려 물위를 걸어서 주께로 나아갑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의 또다른 형태를 봅니다. 믿음은 고요하거나 순조롭거나 평안한 가운데서 나타나는게 아니라 어렵고 위험하며 위기의 상황에서 그 위기를 반전시키기위해 나타나는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그 거대한 풍랑이 배를 집어 삼킬 듯이 흔들어도 결코 배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어쨋거나 배위에 있어야만이 살아날 확률이 조금이라도 있겠기에 배위를 고집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풍랑이 이는 바다위로 뛰어 내리는 것은 결코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특히나 사람의 눈은 정신을 지배합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거대한 풍랑을 보고도 물위로 뛰어내리는 것은 굉장한 믿음입니다.
그것은 그가 눈앞에 보이는 파도보다 주님의 말씀을 더 믿고 있다는 명확한 증거입니다.

사실 사람은 물위를 절대로 걷지 못합니다. 더구나 그 수면이 거울처럼 잔잔한 것도 아니고 파도가 치고 풍랑이 일고 있을때는 정말이지 바다는 무시무시한 괴물같아서 결코 가까이 가고 싶지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물위를 걷기위해 배에서 바다로 뛰어든 겁니다.

다른 제자들은 결코 그 배를 포기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히 이대로 있으면 침몰할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더 큰 어려움, 미지의 세계를 향해서 뛰어들기가 두렵습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저곳에 들어가면 죽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힘들어도 이대로 있어 보는 거지요. 혹시라도 배가 침몰하지 않고 어떻게 어떻게 육지까지 갈 수도 있을테니까요.

사람은 미지의 세계에대하여 동경하기 보다는 두려움을 느낍니다. 물론 그게 여행이나 모험이라면 어느 정도 즐길 수도 있지만 삶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아는 것 위주로 안정적인 것 위주로 나가려는 속성이 있습니다. 이건 그 누구도 바꾸기 어렵습니다.

우리들이 베드로 같은 상황에 있다면 베드로처럼 주님의 오라하는 말씀을 믿고 바다로 뛰어들 수 있을까요? 천만에요.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뛰어들어야 역사가 생기는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끝까지 배에 있는 것을 고수했기 때문에 단순히 역사를 구경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기적적인 역사의 주인공이 되지 못하고.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주님의 약속을 믿고 담대하게 나아갑니다. 간혹 어려움이 있어도 믿음으로 이겨내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요 정말 큰 위험이 닥쳐와서 내가 가진 이 조그마한 배를 버리고 바다로 뛰어내리라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가진 이 조그마한 배라는 기득권을 버릴 수 있을까요?

우리가 저 거친 파도속으로 뛰어들면 반드시 죽을 것입니다. 그것이 대자연의 법칙입니다. 과연 어떻게해야 우리가 저 바다속으로 뛰어들어도 죽지 않고 살아날 수 있습니까?
바로 주님의 명령에 순종할때입니다. 주께서 걸어서 나에게 오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에 그 명령에 순종해서 자연의 법칙을 거슬러 승리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산중의 기도원에서 집회가 있었습니다. 아마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때 홍수가 져서 기도원에서 밖으로 나가는 길이 끊어졌고 네 명의 처녀들이 급히 도시로 돌아가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어떤이는 왜 죽었고 어떤이는 왜 살았습니까? 어떤 행동은 광신이고 맹신인데 어떤 행동은 믿음의 귀감이 됩니까?

그 차이는 하나죠. 바로 주님의 명령.
우리는 왕왕 자가발전을 합니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이것이 주님의 명령이라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주님의 명령인가 아닌가를 판단하기가 너무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초자연적 현상인지 아니면 나의 자가발전인지 알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영분별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역사인지 사탄의 역사인지. 자 그런데 이건 사탄의 역사도 아니고 단순한 나의 착각이라고 한다면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명령을 구별할 수가 있을까요?
물론 지나고 나면 우리는 충분히 구별할 수 있습니다. 만일 그말대로 이루어 졌다면 하나님의 뜻이고 안이루어 졌다면 나의 자가발전이거나 착각이겠지요. 그런데 이런식이면 성령을 받기위해서 기도할 필요도 없고 성령의 은사도 필요없고 나아가서 성령님도 필요없고...이래서야 기독교가 존속할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자 그러면 우리는 과연 어떤 것을 표준으로 성령의 역사인지 아니면 나의 자가발전인지를 구별할 수 있을까요?
물론 사탄의 역사와 하나님의 역사를 구별하는건 어느정도 더 쉽습니다.
가령 제가 어떤일의 해답을 구하는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자기는 이걸 어떻게 해야될지 모르지만 그래도 자기 마음속에 가지는 일에 대한 관념이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다가 자기의 마음속에 이건 하자, 아니 이건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칩시다. 그런데 이 마음이 주님의 명령인지 아니면 자기의 생각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사실 이런 문제 때문에 우리는 기도하는 겁니다. 하루종일 이거 주고 저거 주고 합격하고 돈벌고 출세하고 이런것만 요구하는 것이 기도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더 잘 느끼고 하나님의 뜻을 더 잘 분별하며 내가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도록 평소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의 미세한 음성도 놓치지 않고 더 잘 들을 수 있습니다. 더 잘 깨달을 수 있습니다.

자, 계속 본문을 따라 갑시다
물위를 잘 걸어가던 베드로가 갑자기 물에 빠져갑니다. 왜 빠졌습니까?
“바람을 보고 무서워”
물론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진건 바람이 세게 불어서 풍랑이 거세졌기 때문입니다. 사실 바람은 소리나 감촉으로 느끼는 거지 보이지는 않쟎아요. 물론 미국의 토네이도는 보이기도 합디다만.

자, 그럼 베드로는 언제 빠지게 되었을까요?
열 발자국, 아니면 스무 발자국?
사람의 눈은 두 개입니다. 이 두 개의 눈의 초점과 사물의 점이 삼각형을 이루어서 눈이 물체를 보는것이지요. 베드로가 물에 빠진다고 살려달라고 소리를 치자 즉시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붙잡았다는 구절을 보면 아마 베드로는 거리가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거의 끝까지 걸어서 주님가까이 까지 간겁니다.

그런데 주님과 너무 가까이 가니까 그만 주님이 아니라 주님의 뒤편으로 보이는 거대한 파도가 눈에 들어 온 겁니다. 주님은 너무 가까워서 주님 뒤편으로 몰아치는 거대한 파도가 그의 눈에 들어온 순간 그가 두려움에 사로잡혔고 그러자 바로 그의 몸이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지 못하고 물속으로 빠지기 시작한 것이지요.

이게 시사하는 바가 아주 큽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 주여 살려주십시오. 주께서 오라 하시면 저는 어디든지 갑니다 하면서 믿음있게 행동하다가도 그 어려움이 어느 정도 해소되고 나면 우리의 눈은 눈앞의 주님이 아니라 주변으로 시선을 돌리게 됩니다.

주님에게만 집중할때는 일이 형통하다가 그가 주님으로부터 시선을 다른곳으로 돌리자 마자 두려움에 빠졌고 믿음을 압도했으며 그 순간 그는 사정없이 물속으로 빠져드는 평범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때 베드로가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말합니다. 혹시 여러분은 SOS를 아십니까?
배가 파도를 만나 침몰직전에 있을 때 모르스 부호로 sos를 때리는 거지요. 그런데 이 SOS는 무엇의 약자입니까? SAVE OUR SOUL? 나의 영혼을 구원하라?

솔직히 제가 고등학교 3학년때 그리고 공부할 때 이게 무엇의 약자인지 알아보려고 엄청나게 많은 참고서를 뒤적였지만 결국 알지 못했는데 나중에 신학교에서 헬라어 성경을 보면서 바로 이게 헬라어(그리스어) 소손(구원하다)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물에 빠지면서 주님에게 부르짖은 말이 바로 ‘큐리에 소손 메 ’거든요.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어때요? 성경이 실로 다양한 방면에서 널리 사용되어 오고 있었음에도 우리는 알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님의 은총이 우리 주위에 다양하게 있음에도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외면하려고 하고 있지는 않나요?

주께서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잡을만큼 베드로가 주님에게 가까이 가게 되자 베드로는 이제 모든게 끝났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이제는 나도 주님이 아니라 주변도 좀 살피 여유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이게 베드로의 실패 원인입니다. 그는 결코 신이 아니라 신의 명령에 순종한 사람에 불과한데 그 스스로 주님과의 연결고리를 끊어 버리자 자연 앞에 무력한 평범한 사람이 된겁니다.

그때 주님은 베드로를 건져주시면서 뭐라고 하셨나요?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굉장하지요. 어때요? 여러분의 믿음은 주님의 뒤를 덮치려고 하는 파도에 맞설만큼 단단합니까? 주님의 뒤로 파도가 덮쳐오면 주님이 그 파도에 휩쓸릴까봐 걱정됩니까? 아니면 주님은 몰라도 나는 꼼짝없이 죽겠다고 생각하고 두려워하게 됩니까?

‘주님이 아무리 나의 곁에 있어도 일단 파도에 휩쓸리면 나는 결코 안전하지 않을거야’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주님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도 보이지 않는곳에서 뒤통수를 맞게 되면 어쩔 수가 없어’라고 생각한다면 이건 거의 신성모독 수준입니다. 주님이 미덥지 못해서 파도를 보고 두려워하며 두려움에 휩싸인 베드로나 주님안에 있다고 자부하면서도 갑작스런 어려움앞에 믿음을 저버리는 우리나 의심하며 믿음이 없어서 세상을 이기지 못하는건 똑같네요.

믿음이 있다고 해도 믿음이 적다면 결코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믿음이 적다면 더 큰 어려움이 돌발적으로 닥칠 때는 실족할 수 밖에 없습니다. 미처 준비가 안되어 있는데 닥치는 어려움은 우리에게 주님에 대한 믿음을 회의하고 의심하게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능력과 나에 대한 사랑의 보호에 대해서 의심하는 순간 나는 세상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이 주는 파도에 휩쓸리며 두려워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나는 세상의 법칙의 지배를 받는 평범한 사람이 되겠고 결국에는 세상의 노예로 살게 될 겁니다.

세상을 이기는 이김 참 어렵지요,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뭔가를 달라고 하는 기도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며 하나님의 품안에 있기를 소원하는 것이 우리의 기도여야 합니다.

배에 함께 오르시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라는 말로 본문이 끝이 납니다.
어때요? 거짓말 같습니까? 그렇다면 나도 그러한 이적을 체험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해 보세요. 나에게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느낄 수 있는 체험을 달라고 기도해 보세요.

내 아버지께서는 반드시 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그를 바라고 그의 명령에 순종하고 그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음을 믿고 그와 함께 있기함 하면 어떤 불가능도 없음을 믿고 그에게로 나아가십시오.
의심하지 말고 그를 믿으십시오. 그리고 그의 명령에 따라 나아가십시오.

‘나는 나다’고 외치시는 그 전능의 주님을 믿고 거센 풍랑이 이는 세상속으로 과감하게 뛰어드십시오. 승리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배에 오르니 바람이 그칠것입니다.
믿음의 용사로 승리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5월 26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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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물위를 걷는 베드로 이야기는 워낙 익숙한 이야기라서, 나중에 목사님께 한가지 의문점을 물었습니다. 왜 그 나쁜 파도는 나중에야 멈췄을까요? 라는 겁니다. 영화 연출으로 예를 들어보면, 갑자기 파도가 잠잠해 지면서 고요한 장면에서 주님이 나타나면, 얼마나 안심도 되고, 기뻤을까요? 아니면 일단 폭풍 중에 등장한 다음, 너희들 잘 봐라! 그러면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해 주고, 파도를 잠잠하게 만들어 놓고, 베드로보고 물 위로 오라고 한다면, 훨씬 더 쉽게 용기를 내지 않았을까요?

언제나 그렇듯이 주님의 요구는 이런 흐뭇한 기대와는 다릅니다. 폭풍이 치고 있지만, 두려워 하지 말고, 즉시 안심하라고 말합니다. 네? 뭐라고요? 당장 인지부조화가 일어날 법도 합니다. 게다가 베드로는 물 위를 걷기까지 합니다. 두 행위 모두, 일반적 사고방식과는 전혀 다른 범위에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어떻게 힘든 환경에서 웃을 수 있단 말인가요? 어떻게 불가능한 일에 도전할 수 있단 말인가요?

여기서 우리가 세상을 경멸하고, 위대한 착각으로 살아가는, 이른바 "광신자" 처럼 행동한다면 곤란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생각하면서, 역경 앞에서 무슨 선택을 해야 하나 라고 질문하는게 좋겠다 싶었습니다. 환경이 너무 가혹하게 느껴지고, 평소보다 훨씬 견디기 어려운 날이 있기 마련입니다. 게다가 이 선택을 뒤로 돌릴 수도 없습니다. 그럴 때, 쉽게 포기하지 말고, 지금 눈앞의 환경만을 전부라고 생각하지 말고, 견디고, 인내하라는 이야기로 들렸습니다. 둘째로, 남들과 다른 선택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절대적으로" 나쁜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베드로는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 어떠하든, 자신이 "주님을 믿고 있기에", 그 분의 명령을 과감히 좇는 결단을 했습니다. 이걸 현대적으로 바꿔 써보면, 우리는 다른 사람이 어떠하든지, 선하게 대하려고 끝까지 노력하고, 친절함을 잃지 않으며, 감사와 사랑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주어진 것을 나누는 인생을 선택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기를" 명하셨기 때문이지요. 만약 그럼에도 현실을 원망하고, 남탓만 하고, 투덜거리고만 있다면 자신의 기득권에 안주해서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않는 사람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나만 생각하고 싶은 이기심과 주님의 명령을 묵상하는 마음이 갈등을 일으킬 때, 그래도 베드로 만큼의 용기를 낼 수 있기를 소박하게 바랍니다. / 2013. 05.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