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도식화 해서 조선 후기를 이해한다면, 16세기 붕당 정치, 17세기 환국 정치, 18세기 탕평 정치, 19세기 세도 정치로 흘러간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조선 후기는 왜란과 호란, 즉 양란을 거치면서 성리학적 가치도 흔들리기 시작하는 시점이기도 합니다. 이번 문서에서는 치열한 붕당 정치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 보려 합니다. 예송논쟁이 무엇이며, 정치적 물타기 기술(?)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면 좋겠구나 싶습니다. 정치는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 모습이 펼쳐진다는게 상당히 재밌습니다.
우선 복습겸, 조선 전기부터 거슬러 올라간다면, 훈구와 사림의 싸움이 있었잖아요. 15세기 처음 조선을 장악하던 것이 훈구파 였다면, 이 때 사림은 3사를 장악해 나가며 훈구를 지속적으로 압박해 나갑니다. 열받은 훈구파는 대놓고 사림을 총공격 해버립니다. 몇 번씩이나 사림이 화를 입었던 "사화"가 있었고, 쑥대밭 되었던 사림 세력이지만, 그럼에도 계속해서 서원 등에서 힘을 키웠고, 마침내 16세기부터 역사주도세력이 "사림"이 됩니다. 오늘 문서는 여기서부터 이어지는 내용이지요.
사림은 붕당을 맞이하는데, 동인당과 서인당으로 나뉘게 됩니다. 이유가 있었겠지요? 아니 대체 왜? 다양한 이유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척신잔재청산, 그러니까 기존 훈구파 청산을 놓고 생각이 달랐던 겁니다. 동인쪽은 상대적으로 강경노선을 추구했고 청산을 싸그리 해버려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나섭니다. 한편 서인은 비교적 온건했고요. 초기에는 목소리 크고, 명분까지 좋았던 동인이 유리했습니다. 새판을 짜는데, 구세력을 청산한다면 합당해 보이니까요. 여기서부터 전개가 흥미로워집니다. 스토리를 그냥 즐기세요!
"정여립"이라는 인물이 있는데, 이이의 제자이기도 합니다. 원래 서인에 몸담고 있었던 인물이고요. 아니, 그런데 정여립이 동인으로 가버렸습니다!!! 총명한 학자였던 정여립의 배신(?)에 서인들은 단단히 뿔이 났습니다. 물론 정여립도 할 말은 있었습니다. 요즘말로 본다면, 정여립은 "무슨 당이 중요한게 아니라, 사람을 잘 쓰는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 입니다. 정여립은 그 성격이 올곧은 사람이었고, 거침없는 면도 있었지요.
어쨌든 뿔난 서인당은 단단히 벼르고 있다가 마침내 강경파 정철이 주도하는 "정여립 모반 사건" 으로, 정여립을 반란자로 뒤집어 씌웁니다. 이 전략(?)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는데, 많은 동인들이 희생되었고, 정여립도 죽음을 피할 수 없었지요. (*물론 정치적 정쟁이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아도 뒤집어 씌울 수 있다는 것, 조작될 수 있다는 것을 염두해야 합니다. 따라서 정여립 사건도 실제로 모반을 하지 않았지만, 서인 강경 세력에 의해서 조작되어 희생되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모반에 엮이며 억울하게 죽은 이들도 있을 수 있겠고요.) 결론적으로 이 사건으로, 서인당의 힘은 대단히 "파워업"을 하게 됩니다.
가령, 좌의정이 된 서인당의 정철은, 동인 세력을 추방하기도 하고, 또한 선조에게 이제 "후계자"를 정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며, 거침없는 행보를 이어갑니다. 장난 아니네요, 왕 앞에서도 기죽는 법이 없습니다. 아, 서인당! 뭐, 서인에게는 이론적 배경도 있었습니다. 이이의 성학집요에 따르면, 왕은 좋은 신하를 만나서 함께 해나가야 하며, 왕이 스스로 잘 하는 위대한 존재로는 보지 않았으니까요. 말하자면 서인 입장에서는, "왕과 어느정도 대등한 국정파트너가 우리 서인당이다" 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셈입니다. 그러니 선조에게도 대놓고 "후계자" 이야기를 선방으로 하지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임금 선조가 생각하기에, 내가 살아있건만, 그래도 아직 40대이건만, 너무 괘씸했던 겁니다. 어쨌든 언젠가 해야할 말을 했을 뿐이었지만, 정철은 파직당했고, 그동안 당해왔던 "동인" 세력들은 정철 역공에 나섭니다. 이렇게 하여 권력이 동인으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동인이 권력을 잡고 보니까, 그동안 얼마나 당했는가 생각할수록 열받는 겁니다. 그놈의 모반 사건에 희생되며 동인쪽에서 거의 천명도 넘게 피를 봤다고도 합니다. 이참에 기회가 왔을 때, 확 서인들을 쓸어버리자라는 강경한 생각도 들었고요.
그리하여 동인당은 이번에 또 다시 길이 나뉘게 됩니다. 강경파 북인과 온건파 남인으로 나눠지게 되었습니다. 정여립 "모반 사건"과 정철이 파직된 "건저의 사건"을 겪으면서 내부적 의견이 달랐던 것입니다. 역시 이번에도 강경파인 북인 세력이 대세를 쥡니다. 그리고 이 때가 광해군 시기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강경한 북인 세력은, 결사항전을 외치기도 하고, 의병을 적극적으로 모집하기도 하고, 신하들 역시도 반대파를 휙휙 숙청하는 등 꽤 쎈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뭐, 광해군의 외교 노선만큼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의 중립 외교를 추구했지만요.)
정철 파직 이후, 이래저래 제대로 상황이 좋지 않았던 서인당은 결국 판을 완전히 뒤엎어버립니다. "인조반정"이 일어난 것입니다. 광해군이 보여주었던 일부 패륜적 모습도, 좋은 공격 명분이 되었고요. 서인이 주도하고, 남인과도 손을 잡으며, 이들은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임금으로 세웠습니다. 이제 광해군과 북인쪽은 거의 사라지고 말았지요. 자,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드디어 정권을 확 잡았네요. 이제 살아남은 서인과, 또 남인이 공존을 추구하면서 16세기를 이른바 붕당 정치로 부르게 되는데요. 이 무렵, 기억해야할 대목 중에는, "예송논쟁"이 있습니다. 여기까지 배경설명만 해도 분량이 너무 길었네요. 일단 끊고, 예송 논쟁은 다음 문서에서 계속할께요 :) 너무 신나게 쓰느라... -_-;;;
오늘의 영감은 - 슬픈 일이긴 한데, 17세기 이후부터는 붕당이 변질되면서, 남아있는 서인과 남인이 서로 전쟁하듯이 싸우게 됩니다. 극단적으로는, 정권을 빼앗겼다가 사약을 받는 일도 일어나지요. 이렇게 상대를 무시하고, 부정하는 모습으로는 나라가 엉망이 되기 쉽습니다. 어떻게 본다면, 각 정당에서 하지 말아야 할 일은, 자제하는 여유도 필요하겠고요. 정치에서 한 번 위험한 선을 넘어가면서까지, 권력을 탐하기 시작한다면, 그 뒷감당으로 결국 전쟁 같은 싸움만 남게 됩니다. 그래서 신채호 선생은, "당보다 사람을 중요하게 보았고, 천하를 모든 이들의 것이라고 보았던" 정여립을 높게 평가하기도 하고요.
오래 전에, "우리가 남이가"를 말하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나라를 "우리들이 차지하는 것" 이라고 보았던 사람들입니다. 또 그렇게 판을 짜기 위해서, 다양한 "전술"도 준비하던 사람들이지요. 그리고 이 행태는 예나 지금이나 반복되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알다시피 국가는, 한 정당, 한 파티의 소유물이 될 수 없습니다. 국가는 "모든 이들이 잘 살게 하는 것을 추구하고, 반칙을 하는 사람에게는 처벌을 제대로 하는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헌법에서도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라고 명시되어 있고요.
오늘날 극복해야 할 과제는, 우리 지역만 잘살면 그만이지, 나만 안 걸리면 괜찮은거지, 같은 편협한 생각에서 반드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 편만 소중히 여기고, 상대 편은 짓밟아 뭉개도 된다는 생각은 그래서 위험합니다. 결과가 중요하다며 과정에 이상한 행태를 집어넣어도 그만이라는 생각은 그래서 정말 위험합니다. 망국의 모습이 만약 존재한다면, 그 행태는 분명 이럴 겁니다. "반칙을 하면 안됩니다!" 라고 누군가 외쳤을 때, 이것을 외면하고, 이상한 반국가주의자 라며 색칠을 시작하게 된다면, 그 달콤한 꼼수로 인해서, 한 국가가 서서히 몰락해 나갑니다. 저는 진심으로 대한민국의 미래가 이렇지 않기를 바랍니다. / 리뷰어 시북.
(※이 자료정리는 최태성 선생님의 한국사 강의를 노트로 요약하고, 메모를 함께 쓴 것입니다. 개인적 용도로는, 공부방 등 에서 활동할 때, 보조 자료나 참고 자료, 혹은 글쓰기 영감을 위한 데이터베이스 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 거기에 대한 일종의 고찰이기도 합니다. 키워드 형태로 중요한 부분들은 나름대로 강조해 두었습니다. 크게 바라는 것은 없으며, 다만 짧게나마 영감의 시간이 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