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y Keane
로이 킨, 맨유의 상징적인 선수이자, 프리미어리그 최고의 캡틴으로도 평가받는 인물. 현재 선더랜드를 이끌고 있는 30대 감독이기도 한 로이 킨의 이야기입니다. 오늘도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럼 이야기 속으로.
프로필
이름 : Roy Maurice Keane (보통 로이 킨이라고 부릅니다)
생년월일 : 1971년 8월 10일
신장/체중 : 179cm / 81kg
포지션 : MF, DF
국적 : 아일랜드
국가대표 : 65시합 9득점
맨유의 레전드, 캡틴 로이 킨의 이야기
어쩌다보니 최근에는 거의 캡틴 이야기만 시리즈로 올리고 있습니다 (웃음) 얼마 전, 브라질의 레전드 둥가에 대해서 쓰고나니, 이와 비슷한 선수가 또 생각이 나서 어쩔 수 없이 손이 가는대로 로이 킨의 이야기를 쓰게 되었습니다. 1998-1999시즌 맨유의 트레블(삼관왕)을 이끌었던 캡틴 로이 킨의 이야기입니다.
거칠고, 투쟁심이 넘치는 로이 킨 선수. 투장이라고 불리기도 할 만큼 카리스마 있는 그의 모습. 사실 로이 킨 선수는 소년시절에 아마추어 복서 였습니다. 그리고 어린 시절부터 문제를 자주 일으키곤 했습니다. 1993년 맨유로 이적하게 된 로이 킨, 이 20대 초반의 혈기왕성하고 격렬한 투쟁심을 가진 청년은 명장 퍼거슨 감독 아래에서 새롭게 거듭나게 됩니다. 정신적으로도, 또한 기술적으로도 크게 성장하게 됩니다. 그전까지는 악동으로서의 로이 킨이었다면, 이제부터는 "투장"으로서 맨유의 캡틴 로이 킨으로 새롭게 부활해서 맨유를 통솔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1997년부터 본격적으로 캡틴을 맡기 시작합니다.
맨유 선수가 파울이라도 받는다면, 무서운 압박감으로 상대 선수에게 항의를 하는 등 굉장한 리더십을 발휘하던 선수였습니다. 그를 두고 프리미어리그 최고의 캡틴이었다고 평가하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그만큼의 이유가 있는 것이지요. 1998-99시즌 맨유는 트레블(삼관왕)을 달성하게 되는데, 로이 킨도 여기에 큰 공헌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듬해 1999-2000시즌에 로이 킨은 잉글랜드 연간최우수선수에 선정되는 등 엄청난 인기와 지지를 모으게 됩니다.
30대가 지나면서 선수생활 후반에는 부상으로 고생하게 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절대적 존재감을 자랑하는 리더십을 발휘하며, 2002-03시즌 맨유 리그 우승을 이끕니다. 로이 킨, 그는 1990년 중반부터 맨유 전성 시대의 중심축이었던 선수 중 한 명이었습니다. 2003-04시즌 맨유의 FA컵 우승에도 공헌합니다.
전성기 시절에 영광의 트로피들을 수 없이 보아왔던 그였지만, 2004년 이후 부터 맨유는 잠시 주춤거리기 시작합니다. 치고 올라오는 강호가 있었으니 바로 아스날, 그리고 첼시였습니다. 조금씩 아스날과 첼시에 밀리는 맨유였고, 항상 최고만을 추구해왔던 로이 킨은 이러한 맨유의 분위기를 스스로 납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맨유의 신예 선수들을 향해서 투쟁심이 결여되어있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입니다. 리오 퍼디난드 등의 선수와 사이가 안 좋았습니다. 한편으로는 로이 킨은 부상으로 인해서 몸상태도 예전만큼 좋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흐름에 있던 로이 킨은 끝내 2005년 12월, 맨유와의 계약을 해제하고 셀틱으로 팀을 옮기게 됩니다. 이 배경에는 선수생활의 마지막을 셀틱에서 보내고 싶어했던 로이 킨의 바램이기도 했었습니다. 즉, 이제 은퇴를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셀틱에서 10경기를 뛰고서 2006년 곧바로 은퇴를 선언하게 됩니다. 어린시절 동경해왔던 팀인 셀틱에서의 은퇴였지요. 셀틱에서는 불과 10경기 남짓 뛰었지만, 영국 최고의 스타 중에 한 명이었던 로이 킨의 인기는 정말 엄청났습니다. 게다가 셀틱은 리그 우승도 차지합니다. 은퇴 경기에서는 7만명이 넘는 관중이 찾았습니다. 그리고 킨은 마지막 수입의 대부분을 자선단체에 기부한다고 발언하였습니다. 200만 파운드나 되었다고 합니다. 마지막 가는 길까지도 정말 큰 갈채를 받았습니다.
한편 아일랜드 국가대표로서는 활약도 많이 했지만, 불화도 많이 있어서 2002년 한일월드컵에는 참가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예선에서는 훌륭한 활약을 펼치면서 아일랜드를 본선으로 이끌었으나, 본선무대에서 불화가 커져서 끝내 아일랜드로 귀국해 버리고 맙니다. 지금도 로이 킨과 아일랜드 축구협회는 사이가 정말 안 좋습니다. 여하튼 월드컵 본선에서 로이 킨을 볼 수 없게 되자 맨유 팬들 뿐만 아니라 많은 축구 팬들이 아쉬워했었습니다. 또한 2002년에는 책을 출판하기도 했습니다. 이 책에서는 악의적 태클에 대한 이야기가 큰 논란이 되기도 했는데, 2001년 4월에 할란드 선수에게 보복성 태클을 했다는 이야기가 실려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1997년 로이 킨은 할란드의 태클로 인해서 십자인대파열의 큰 부상을 당하면서 1년 가까이 재활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시간이 흘러 2001년 할란드에게 와신상담의 과격한 복수(?)를 하게 된 것이지요. 결국 이 논란은 로이 킨의 5경기 출장 정지로 마무리 되게 되었습니다. 할란드는 원래부터 무릎이 좋지 않았던 상태였고, 로이 킨의 고의적인 거친 태클로 쓰러진 이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은퇴하게 되었습니다. 이럴 때 보면 축구 이면의 세계란 참 무섭구나 싶기도 합니다. 허허.
2006년 은퇴 후, 얼마 지나지 않은 2006년 8월. 로이 킨은 잉글랜드 2부리그 소속 선더랜드의 감독이 됩니다. 이제 감독으로서의 이야기 입니다. 당시 선더랜드는 연패를 기록하며 24개의 팀 중 23위를 기록하고 있을 정도로 아슬아슬한 팀이었습니다. 자칫 잘못하다간 최악의 경우 리즈 유나이티드 처럼 3부 강등도 당할 수 있는 입장이었지요. 로이 킨 감독, 시작부터 화끈했습니다. 아일랜드 국가대표팀, 맨유에서의 활약이 있었기에 여러 유명 선수들을 대거 영입하기 시작합니다. 한 때 맨유에서 뛰면서 프리미어리그 득점왕을 차지하기도 했던 드와이트 요크, 아일랜드 국가대표인 공격수 데이비드 코놀리 등 대대적인 보강을 합니다. 그리고 2부리그 중반부터 선더랜드는 놀라운 팀이 되어갑니다. 승리. 승리. 승리... 선더랜드의 연승기록을 갈아치우며, 시즌 초반만 해도 연패에 허덕이면서 23위를 기록하던 선더랜드는 끝내 2006-2007시즌에 당당히 2부리그 우승을 차지하게 됩니다. 불과 1년만의 눈부신 성공이었지요. 언론에서도 굉장한 관심을 가지며, 로이 킨 감독을 맨유의 차기 감독 후보라고 치켜세우기까지 했습니다.
감독으로서의 로이 킨은 많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엄격했습니다. 현역시절에는 독불장군에 카리스마 넘치는 대장님이었으나, 감독이 되고나서는 선수들 모두를 감싸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선더랜드 2부리그 우승 당시에도, "모든 선수가 잘해주면서 열심히 뛰어주었다. 특별히 어떤 선수가 수훈 선수는 아니다." 라고 발언하기도 했습니다. 현재 선더랜드는 프리미어리그에서 고전하고 있지만, 리그 후반에 근성만 발휘한다면 1부리그에 성공적으로 남게될지도 모릅니다. 현재는 중하위권을 기록중에 있습니다.
로이 킨. 맨유에서 보냈던 13시즌동안 309경기에 출장하며, 7번의 리그 우승과 맨유 트레블 영광의 중심에 서 있었던 선수. 지금도 절대적 인기를 자랑하는 대 캡틴이자, 감독으로서도 높은 관심을 받고 있는 인물. 그가 감독으로서도 새로운 성공을 계속해서 열어가게 될 지 사뭇 흥미롭습니다. 투장 둥가는 40대에 브라질 국가대표팀을 이끌게 되었는데, 로이 킨은 이후에 어떻게 될까요. 필자는 로이 킨이 맡고 있는 선더랜드에 왠지 자꾸 관심이 가게 됩니다. 그 만큼 로이 킨, 그 존재 자체만으로 뿜어져 나오는 카리스마는 정말 대단하기 때문입니다. 2부리그에서 놀랍게 치고 올라온 선더랜드. 그리고 로이 킨 감독. 힘내기를 기원해 봅니다.
이것으로 로이 킨에 대한 글을 마칩니다. 위키피디아에서 로이 킨의 또 하나의 사진을 준비해보았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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