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Review]/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Masquerade, 2012) 리뷰

시북(허지수) 2013. 9. 23. 14:32

 2012년 최고 걸작 중 하나로 평가받는 영화 광해를 보았습니다. 지위가 점점 올라갈수록 책임도 함께 따르는 법이지요. 따라서 "권력을 휘두른다는 것"을 바라볼 때, 남용되는 측면은 없는지, 또 누가 희생될 수 있는지를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잠시 강상중 교수님의 표현을 빌려와본다면 "국가 지도자의 결단은 만일 전쟁으로 이어질 경우 막대한 희생자를 내기 마련이므로, 그 영향은 가히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심대하다. 따라서 우리는 늘 그들의 결단을 엄정한 눈으로 점검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개개인이 가진 엄정한 눈이란 그토록 소중한 것입니다. 배우 류승룡이 열연한 "허균"은 상당히 파격적인 주장을 한 바 있습니다. 이하 허균이 주장한 호민론 입니다. 신영복 선생님께서 해설해주신 것을 옮겨봅니다.

 

 호민론 탐구 - 힘겨운 세상에 대해서 항민 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항상 힘들게 사는게 당연하고, 노예처럼 사는게 당연한 사람들입니다. 조금 과격하게 표현한다면, 스스로가 굴욕과 어려움을 자처하는 셈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원민 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은 잘못된 것에 대해서 목소리를 낼 줄 알고, 원망할 줄 압니다. 못 살겠다 라고 외칠 줄 압니다. 하지만 행동하지는 않습니다. 요즘 식으로 보자면, 투표는 하지 않고, 정권에 욕하는 사람들이 딱 어울립니다. 마지막으로 호민 이 있습니다. 이 호걸의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깨어 있어서, 행동하고 나섭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하고, 실천합니다. 허균의 지적처럼 "지금 조선에 호민이 없습니다" 라고 말하는 대목은, 세월이 이토록 흘렀건만 눈물날 만큼 아픕니다. 호민이 없었기 때문에, 기득권들이 백성을 업신여기며 모질게 대했고, 백성을 우습게 알고 두려워 할 줄 몰랐다 라고 말합니다.

 

 서론이 길었네요. 이런 배경을 깔아놓고서 오늘은 영화 광해 이야기를 신나게 해볼까 합니다. 한효주 좀 웃어!

 

 

 영화 광해는 우연히 왕과 닮았다는 이유로, 왕자리에 대신 앉게 된 남자 하선의 이야기를 유쾌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 남자야 말로, 허균이 생각해 왔던 "호민"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극중의 하선은, 막돼먹은 현실에 분노할 줄 알았으며, 바꿔보려고 노력하고, 때로는 공부하며, 과감히 시도하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날 무엇보다 중요한 게 있다면, 광해 같은 뛰어난 지도자가 나와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선 같이 목소리를 낼 줄 알고, 생각을 해보며, 분노할 줄 아는 "호민"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당하는 국민, 생각하지 않는 국민만 늘어난다면, 우리 역시도 그 때의 조선처럼, 기득권들이 백성을 개처럼 업신여기는 장면을 똑같이 보게 될 것입니다. 역사란 그렇게 반복되는 모습을 거울처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의 내용은 영화 본편에 대한 누설이 담겨 있으므로 아직 영화를 보시지 않은 분은 주의하세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분노해야 하는 걸까요? 영화 광해에서 얼마든지 매력적인 힌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선은 꽃다운 10대 소녀가, 권력에 의해서 노리개로 착취당할 수 밖에 없는 구조를 목격하게 됩니다. 세상 참 씁쓸하구나 싶었던 게지요. 그리고 오늘날 역시 비슷한 풍경은 여전히 볼 수 있습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에게 좋은 일자리가 주어질리는 거의 없기 때문에, 정말 열악한 환경에서 혹독하게 참고 견디며 일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착한사람 컴플렉스에 걸린건지, 참고 살다보면 해뜰날이 온다며, 힘들게 삶을 보내고 있습니다.

 

 저는 괴로운 순간에는 분노를 표현하는게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잘못된 환경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려는 용기, 이것이야말로 정말 귀중한 것입니다. 물론, 이야기해봐야 바뀌는게 없다는 말도 일리는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항민이 되어 항상 힘들게 사는게 당연해야 할까요? 누군가의 결정에 언제나 좌지우지 되어야만 하는 걸까요? 그렇지 않잖아요.

 

 하선은 이제 임금의 행세를 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궁 안에서도 불편한 진실은 존재합니다. 가령 시중을 드는 10대 소녀 사월이의 사연을 듣고 있노라면, 이 얼마나 모질고 가혹한 현실인지를 서늘하게 만나게 됩니다. 농사를 짓고 살려고 노력했을 뿐인데, 사월이네 가정은 악덕한 시스템에 의해서 그대로 박살나버리는 적나라한 풍경을 맞이합니다. 덕분에(?) 몇몇 사람은 잘 살았을 겁니다. 공납(특산물납부)을 강요하고, 고리대금잔치를 벌였으니, 업자나 관리 입장에서는 배부른 풍경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문제는 거기에 희생당하고 있는 다수의 아픔입니다. 여기서 정치의 어려움이 등장합니다. 모두를 만족시키고, 납득시킬 수 있는 방안이란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특히 세금은 풍선과 같아서 한쪽을 계속 깎아주면, 다른 쪽이 짊어져야 할 때가 많고요.

 

 그래서 광해군은 대동법 시행이라는 파격적인 카드를 꺼내들었습니다. 공납을 없애버리고, 지주들에게 세금을 걷겠다는 겁니다. 부자들은 더 내라는 거지요. 그럼에도, 무시무시한 반발이 이어집니다. 실제로 대동법 시행이 완전히 정착하기까지 무려 10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고요.

 

 또한 영화 후반부에 불길하게 펼쳐지듯이, 계속되는 반대파 서인집단의 반정으로 인해서 광해군과 세력들(북인)은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명분을 좇지 않고, 개혁을 추구했다가, 역풍으로 쓸려나가 버린 셈이지요. 이런 광경을 아프게 바라보고 있자면, 어떤 개혁이든, 든든하게 뒷받침해주는 지원세력이 없다면 결론은 영화와 참으로 비슷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앞서 언급한 "호민", "현명한 백성"은 그토록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야 막돼먹은 행동을 OUT! 시킬 수 있는 거니까요.

 

 한편 하선이, 무엇보다 "생명"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대목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날카로운 관찰력을 지닌 도부장이 하선을 가짜 왕으로 대놓고 의심했고, 칼까지 들이밀었으나, 위엄있는 중전의 도움으로 간신히 하선은 위기를 모면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상황은 역전되었고, 도부장은 감히 왕 앞에 설 명분이 없으므로 자결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그대로 자결을 막아버리는 하선! 이병헌식 표현으로 쓴다면, 단언컨대, 인간의 목숨이란, 그 어떤 명분 보다 우위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선이 자신이 먹을 것만 먹고, 그대로 되돌려주려는 따뜻한 마음이 무엇보다 좋았고요. 그들이 배고파 하는데, 왕 혼자 배부르다면, 그건 부끄러운 일 아니겠어요. 마찬가지로 일하는 사람들이 힘들어하고 고생하는데, 지주들만 "살아있네~" 라면, 이 역시 어딘가 곪아가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균형이 무너진 셈이니까요. 균형이야기 한다면, 광해군의 중립외교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를테면, 광해군은 "전하~ 명분을 따라야 합니다" 라는 신하들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중립외교 : 즉, 명과 금(후에 청나라) 사이를 줄타기 하면서, 백성이 살아야 함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역사는 잔인하게 뒷이야기를 말해줍니다. 광해군 이후, 조선은 결국 명분을 좇아 명나라만 그렇게나 좋아하다가, 청나라가 직접 조선에 쳐들어오며 병자호란의 대굴욕을 경험하게 되니까요. 조금 차갑게 본다면, 기득권들은 지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배부르게 잘 살면서, 권력이나 휘두르면 끝"이지, 그 외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셈입니다. 현실을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았으며, 백성들이 어떤 처지에 있는지 관심도 없습니다. 그저, 대동법만 막아내면 좋겠다는 거지요.

 

 그런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원래 임금이 아니었던 하선은 정말이지 그 속이 너무나 매력적인 인물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생명이 얼마나 귀중한 줄 알았고, 불의한 일에 분노할 줄 알았으며, 스스로 생각할 줄 알았습니다. 도부장이나, 허균이 그 모습에 충분히 홀딱 반할만 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오늘날 머리 좋고, 권력 있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저질스러운 행태는 계속될지도 모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무엇을 무기로 삼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설령 부족한 모습이 있다 하더라도, 분명히 할 말을 할 수 있는 마음가짐과, 더러움에 동화되지 않겠다는 인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우리는 호민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결국 그 한 사람의 호민(하선)은, 한 사람의 임금(광해군)과도 같은 희망이 될 것입니다.

 

 백성들의 것을 빼앗을 줄이나 알았지, 그들에게 해주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사는 게 원래 다 그런 것이라며 합리화하며 힘있는 사람에게 굴종하는 삶을 당연시 여길 것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당당히 서서, "너 인마 가져가는 것은 그렇게나 많은데, 약속과 의무는 하나도 안 지키네, 뭐? 원래 큰놈이 다 먹는거라고? 그건 정말 아니잖아."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까. 부도덕한 반칙을 막아낼 힘은, 엄정한 사람들의 눈에서 나옵니다. 이제 21세기가 막을 열었고, 또한 여전히 기득권은 백성을 우습게 알고 두려워하지 않을지라도, 현명한 사람들이 늘어나고, 자기 생각을 정직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된다면, 적어도 눈물짓는 사람들의 고통을 바로 잡아낼 수 있는 희망이 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사회를 열어가는 건, 우리 모두의 몫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 2013. 09. 리뷰어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