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10월 6일 주일 예배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 (사도행전15:1-21)
오늘 저는 우상의 제물에 대한 우리 기독교인의 태도에 대하여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추석이나 명절 때 우리는 우상의 제물에 대해서 상당히 곤욕을 치릅니다. 먹을 수도 그렇다고 안 먹을 수도............
사실상 우리는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 상당히 정리되지 못한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므로 먹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과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한 그 말씀에 따라서 우상의 제물도 먹어서는 안된다는 입장입니다.
제가 추석도 지나고 나서 갑자기 우상의 제물에 대해서 설교하는 것이 좀 뜬금없다고 여기실 수도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제가 신우회의 회장님의 의문에 대한 답을 했다면 오늘은 우리 지수 형제의 블로그 독자의 반론에 대한 재반론의 성질을 가집니다.
처음 지수 형제가 제 설교를 자기의 블로그에 올리면서 이런 말을 한게 기억납니다. 제 설교에도 댓글이 달리면 좋겠다고.
이제 처음으로 설교에 댓글이 달렸습니다. 비록 그 내용이 저의 설교내용이 틀렸다고 반박하는 것이긴 하지만 제 설교를 읽었기 때문에 그런 식의 반박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너무 기쁩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이들 중에서도 이 설교를 보는 이들이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니까 어깨가 무거워집니다. 이제는 교우들을 넘어서 외부의 인물들에게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끼치게 되었으니까요. 감사한 일입니다.
이분은 제가 제사 음식을 먹어도 된다고 한 것에 대해서 상당히 신랄한 비판을 가했고 또 성경구절을 인용했었는데요. 처음에는 그냥 넘어갈까도 생각했지만 혹시라도 다른 성도들이 보고 오해할까봐서 제가 더 자세하게 성경을 풀어서 설명해야 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목사는 설교로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설교가 저의 반론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반론을 위해서만 설교를 할 수는 없으므로 겸사 겸사 이 본문의 모든 부분을 살펴보려 합니다.
먼저 제가 생각나는 일이 있습니다.
아주 어릴 때 제가 다니던 교회의 부목사님이 이런 설교를 했습니다. 한마디로 하면 믿음이 굳센 자는 우상의 제물을 먹고 믿음이 강하지 못한 자는 우상의 제물을 먹지 않는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의 내용이 있었겠지만 저는 그건 다 잊어버렸고 그 말만 생각납니다.
저와 어머니, 어머니의 친구 분이 예배 후에 같이 집으로 오면서 그 부목사님의 설교를 비난하면서 씹었던 기억이 납니다. “아니, 우상의 제물을 먹지 않는 것이 믿음이 약한 표시라니 말도 아니야”
열한살의 꼬맹이가 뭘 안다고 목사님의 설교를 비판했는지.............
그때 저희 집에서는 제사와의 투쟁 중이었습니다. 제사를 폐하고 기독교식으로 바꾸는 중이었습니다. 친척들을 설득하고 있는 중이었지요. 장손의 장남이었던 저에게 이 문제는 매우 민감했었습니다.
우선 그 블로그에서 반론을 펼친 분이 자기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든 구절은 사도행전15:20과 29절에 나옵니다.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이 말은 누구의 말일까요?
이 말씀은 야고보의 말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아니라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
이 사람은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신 후에 예루살렘교회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신의 형제라니! 굉장한 타이틀이지요.
그러나 이게 하나님의 말씀도 아니고 바울이 한 말도 아니고 단지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기술한 것에 불과합니다. 즉 성경의 기본적인 입장을 밝히는 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야고보의 앞에 발언했는데 11절에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그 다음에 야고보가 일어나서 발언한 내용이 바로 이것입니다.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야고보는 단지 이방인 교회에 유대의 율법 중에서 이건 지켜주면 좋겠다는 입장을 표한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총회장의 권고? 아니면 총회장의 제안정도?
그런데 이 제안이 채택되어서 29절에 보면 이걸 예루살렘 교회의 공식입장으로 정한 편지를 안디옥교회에 보냅니다. 그 성도들이 이 편지를 읽고는 다 기뻐했다고 합니다. 요즘 말로 하면 총회결의 사항입니다. 성경의 근본 교리가 아니라.
그러므로 당시 상황에서 유효한 것에 불과합니다.
즉 이 말은 당대의 문화가운데서 행해진 총회의 결의사항이지 구원에 이르는 근본 교리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해 보면 간단하게 답이 나옵니다.
아직도 우상의 제물을 꺼려함으로 먹지 않는 성도는 있지만 목매어 죽인 짐승의 고기인지 이 고기가 피를 가지고 있는지를 따지면서 음식을 가려 먹는 이는 없기 때문이지요.
더구나 한국의 전통 음식인 선지국은 아주 많은 이들이 전혀 거리끼지 않고 잘 먹는 음식입니다. 참고로 전 피국이라서 징그러워서 안먹습니다만. 맛은 좋다고 합디다. 제가 양지에 있는 총신 신대원을 나왔는데 신학교 식당에서 선지국이 자주 나왔었습니다. 전도사님들이나 목사님들이 저 빼고는 다 잘 먹습디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이었던 야고보의 입장에서 이방으로 뻗어 나간 기독교회의 일치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예루살렘교회와 안디옥교회가 분열된다면 이는 매우 치명적인 일이기 때문이지요.
참고로 나중에 로마제국 내에 다섯 개의 총 대주교구가 만들어졌는데 예루살렘과 안디옥도 여기에 속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두 교회가 결국은 갈렸다고 봐야 합니다.
이야기의 발단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15:1에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유대로부터 온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갈라디아나 안디옥같은 지역의 이방인 교회에 와서 예수를 믿음에 더하여 모세의 율법을 지키고 게다가 할례까지 받아야 비로소 구원받는다는 거짓교리를 전파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 기독교인들이 크게 불안해 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유대의 정결례를 지키고 게다가 엄청나게 고통스러운 할례까지 요구되는 상황에 처하자 멘붕이 온 것입니다. 이건 분명 바나바와 바울의 선교에 크나큰 장애입니다. 그래서 이걸 해결하기 위해 역사상 최초의 공의회가 예루살렘에서 모였고 여기에 바나바와 바울을 비롯한 이방 교회의 대표들이 참석하여 의견을 개진하고 회의를 하게 된 것입니다.
‘교회가 유대를 벗어나서 이방인들 가운데서도 힘차게 뻗어 나가는데 과연 우리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 것인가?’
이렇게 해서 이 구절이 나온 겁니다.
먼저 여기서 ‘어떤 사람들’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온 자들입니다. 이들은 스스로를 야고보에게서 온 것으로 자처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거짓입니다.
야고보가 수장으로 있는 예루살렘교회의 교인이었던 것은 확실하나 야고보가 그런 소리하라고 보낸 적이 없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24절에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지시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혼란하게 한다 하기로”
몇몇 사본들은 ‘어떤 사람들’이란 문장에 ‘믿는 바리새파 중에’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 중에 기독교로 개종한 이들이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교리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이들은 여전히 유대의 전통에 대하여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새롭게 교인이 된 이들에게도 유대의 율법적 전통을 강요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텃세? 아니면 기득권을 고수하려는 몸부림? 아니면 민족에 대한 뜨거운 사랑으로 모든 이들을 유대화시키려는 행동?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말이 자칫하면 이방인들에 대한 전도의 문을 닫히게 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야고보의 이름을 팔며 신입교인들을 겁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신칭의,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기독교의 근본교리를 위협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바나바하고 바울이 이방 교회의 대표자들하고 같이 공의회에 참석해서 명확한 입장을 정리하려 한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15:1의“어떤 사람들”을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로 칭했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한다고 비판했습니다.
이들이 예루살렘 교회의 교인인 것은 확실하지만 율법과 할례를 요구한다면 우리의 형제가 아니라 거짓형제이며 도둑처럼 몰래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교회에서 분란을 일으키고 선교의 문을 막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적입니다.
이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은 이렇게까지 주장합니다.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구원’이란 이 말은 신약에서 모두8번 나오는데 (본절과 같이 부정 과거 수동태 부정사로 쓰이는 경우에는) 모두 메시야를 통한 구원을 나타내는 데만 쓰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주장은 그리스도 보혈의 능력을 거부하는 반그리스도적인 주장이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능히’라고 번역한 것은 그들이 ‘그렇게 하면 절대로 구원 못받아!’처럼 강변했기 때문입니다. ‘아마 구원에 지장이 있을걸’이 아니라 ‘절대로 안된다’
이래서 바나바, 바울을 비롯한 그쪽 교회의 교역자들과 이들 거짓 형제들 사이에 구원에 관한 논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안디옥 교회에서는 바울과 바나바하고 몇몇을 예루살렘에 보내어서 물어 보기로 했고 이 문제로 각지의 사도들이 모여들고 예루살렘에 역사상 최초의 공의회가 열려서 회의를 합니다.
이 공의회에서도 역시 바리새파 교인들이 일어나서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합니다.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서 자기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최종적으로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고 말합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야고보가 일어나서 앞서의 말을 하는 것이지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서 2절에 보면 이러한 유대주의자들과 바나바,바울과의 다툼이 매우 심했던 것 같습니다.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고 되어있는데요 여기서 ‘다툼’이란 말은 ‘폭동, 반란, 소요’같은 것을 나타낼 때 쓰는 단어인데 이는 그만큼 의견의 다툼이 격렬했던걸 나타내는 것이고 ‘변론’은 학문적 탐구를 통한 철학적 토론이나 신학적 논쟁을 말합니다.
성경은 고상하게 표현합니다. ‘적지 아니한’
이 다툼이 너무 격렬해서 마침내 예루살렘 공의회가 소집되는 것입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느냐 아니면 율법도 지키고 할례도 받아야 되느냐? 예루살렘에 입성한 바나바와 바울들이 사도들과 장로들과 교회 앞에서 선교보고를 하고 있을 때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서 할례문제를 제기합니다. 자, 또 다툼과 변론이 일어 납니다. 왜냐면 이게 당시에 엄청 민감한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잘 보면 성경은 바리새파 출신의 교인들을 ‘바리새파’라고 칭합니다. ‘파’는 ‘분파, 편당’이라는 의미인데요 이들이 상당히 편협하고 유대인과 무할례자의 구별을 당연시했으며 주께서 헐어버린 담을 다시 쌓기 때문에 누가는 부정적인 의미가 있는 단어를 일부러 사용한 겁니다.
이들은 교회내의 편을 가르는 자이고 분란을 일으키는 자라는 것이지요.
한참 화기애애하게 하나님의 이방에 행한 역사를 이야기하는 도중에 더 참지 못한 바리새파들이 일어나서 찬물을 끼얹는 것입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율법도 지키고 할례도 받아야 구원을 받아요’
5절의 ‘일어나’는 ‘돌발적으로 벌떡 일어나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베드로가 일어났을 때의 단어하고 다르게 쓰였습니다.
이들은 ‘할례주고... 지키라고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의 마땅하다는 ‘의무이다. 반드시 해야한다’는 매우 강경한 표현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하는 제안이 아닙니다. 반드시 해야된다고 지금 땡깡을 부리는 거지요.
그래서 베드로하고 야고보의 말이 이어집니다.
베드로가 말한 것 앞에는 몇몇 사본에 ‘영으로’란 말이 있습니다. 즉 베드로가 자기의 개인 견해를 단순히 말한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성령의 인도를 따라 말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여기에서 ‘12년전에 자기가 성령의 인도로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한 일을 너희가 다 알지 않느냐, 그리고 이미 다 끝난 일을 가지고 새삼스럽게 다시 왈가왈부하느냐’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간 과정은 복잡하니까 다 생략하고 베드로의 말을 번역하면 이런 뉘앙스가 있습니다.
설교가 길어지니까 또 중간 생략하고 마지막으로 야고보의 주장을 봅시다.
19절에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그렇다고 해서 야고보 자기 의견이 아니라 이 말은 원문상으로 ‘내가 판단한다. 심판한다’는 말입니다. 야고보는 자기의 견해를 최종적으로 밝히기 전에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고 말합니다. 왜냐면 공의회의 의장으로 최종적 입장을 밝히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는 비유대인들에게 율법을 강요하지 말고 최소 의무조항으로 네가지를 지키게 하는 것이 옳다고 말합니다.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 그리고 목매어 죽인것과 피를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상의 더러운 것은 우상에게 바쳐졌던 제물을 말합니다. 고기 같은 것이지요.
여기서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은 어떻게든 우상과 접촉함으로 그 우상을 숭배하게 되거나 그 제물을 먹음으로써 마음이 우상에게로 기울어 질 수도 있는 관계로 금지된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우상의 제물을 먹는데 어떤 죄책감도 없었으며 우상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을 때라도 연회나 축하연을 할 때 우상의 신전을 사용하는 일이 있었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우상과 접촉하게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음행 역시 우상숭배와 관계가 깊지요. 당시의 사람들은 우상 신전의 신관들과 주로 성관계를 합니다. 신전 창녀? 창남?
그래서 우상 숭배가 주로 음행으로 연결되곤 한 것입니다. 신과 접해서 복을 받는다. 예언을 받는다. 액운을 떨쳐낸다? 등등의 명목으로. 여기서는 일상의 음란한 삶도 멀리하라는 말도 됩니다만.
이래서 이방인들이 우상의 제물을 먹거나 음행을 가까이 하게 되면 혹시라도 옛날로 돌아가기가 쉽다는 겁니다.
그래서 금지.
나머지 두 개는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 이건 유대의 정결례에 나오는 식법입니다. 제 생각에는 피가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해서가 아닐까요? 하하, 농담입니다.
야고보의 이 말은 앞서 말씀드린대로 총회의 결의 사항이 되기는 했지만 결코 성경의 근본 원리가 아닙니다. 당시 유대 기독교인과 이방 기독교인들간의 관습이 서로 달라서 완전히 조화되지 못한 상황에서 서로간의 원활한 교제와 신앙의 덕을 세우기위해 자제해 줄 것을 당부한 것에 불과합니다.
21절에서 야고보는 이와같이 자기가 말한 이유를 나열합니다. 한마디로 각지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있는데 유대인들은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앞서 말한 율법을 지킵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자가 된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이 혐오하는 그런 행위를 계속하면 덕이 되지 못하고 주께로 돌아오는데 걸림돌이 되기 때문에 형제의 유익을 위해서 최소한 이 네가지는 지켜주자고 말한 것입니다.
한쪽에선 혐오하는 행동을 다른 한쪽에서 태연하게 한다면 이건 교제고 뭐고가 안되는 거지요. 교회의 일치와 화합은 물건너 가는 것이며 이방으로 향한 선교의 장이 막히는 것입니다. 특히 할례는 쫌 끔찍하고 무섭지요. 그런데 그걸 요구한다면..............
야고보가 이처럼 합리적인 안을 내어놓았고 이러한 내용을 편지로 접한 안디옥과 소아시아의 교인들은 당연히 기뻐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야고보는 우상의 제물을 먹지 말라는 짐을 이방 기독교인에게 지우려고 한게 아니라 여러 가지 이방의 기독교인들에게 지워진 무거운 짐을 줄여 주려고 이 말을 한 것입니다.
사실 당시의 유대교는 이미 구약의 정통 신앙을 떠나서 민족주의적 인본주의적으로 변질되었답니다. 성경의 일부만을 지키고 이를 자기민족에게 유리하게 해석해서 세계의 보편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유대인들만을 사랑하는 매우 좁은 하나님 관념을 가진 것입니다.
이렇게 따지면 우리 역시 제사 때문에 많은 논란을 빚고 있습니다. 제사는 세계에서 거의 유일한 풍습입니다. 이미 중국에도 없어졌고 일본에도 없어졌고 ....그런데 우리만 명절 때만 되면, 제사 때만 되면 믿는 이들과 믿지 않는 이들이 섞여 있는 집안에서는 제사문제로 난리가 납니다. 또 친척들을 방문했을 때 제사 음식이나 차례음식을 먹는 문제로 갈등을 빚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우리에게도 해결이 시급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럼 제물을 먹는 문제에 대해 성경은 뭐라고 말할까요?
고린도 전서 8장에 아주 잘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거 앞부분에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중요한 뒷부분은 오히려 대충 할 수 밖에 없어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상의 제물 문제로 몇주를 할애하기도 어렵고 하니..........
바울은 본문에서 우상 제물 문제에 있어서는 지식보다 사랑이 중요함을 강조하면서 원칙적으로는 우상의 제물도 먹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4.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그러나 동시에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미칠 영향도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7.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당시의 사람들은 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그 음식을 나누는 것을 우상제사에 참여하는 것으로 여겼고 이러한 관습이 믿음이 약한 이들에게는 걸림돌이 충분히 될 수 있으므로 약한 형제를 배려하는 차원에서 먹지마라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8절에서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 라고 말합니다. 마치 니가 알아서 해라는 것처럼 들리지요?
말은 그런데 자기는 우상제물을 먹을 수 있는 자유와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므로 그걸 먹어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당연한 지식을 행함으로 약한 형제가 혹 실족한다면 자기는 영원히 고기(우상의 제물)를 먹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먹어라 는 말이야 먹지 말라는 말이야?’
우리는 이렇게 반문할 수 있습니다.
‘먹어라’는 말은 원칙이고 ‘먹지 말라’는 말은 권고사항입니다. 왜냐면 형제가 혹시라도 내가 먹는걸 보고 실족할 수 있으므로 형제를 배려하는 차원에서 안 먹는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8장에서 우상의 제물에 대해서 장황하게 말한 바울은 혹여 교인들이 우상의 제물을 먹으면 죄를 짓는 것으로 오해할까봐서 다시 고린도전서10장에서 말합니다.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냐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냐”
바울은 무엇을 기대하고 묻는 겁니까? 우상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답을 듣기위해 이렇게 묻는 겁니다. 우상의 제물에 무언가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래놓고는 또 장황한 설명이 이어 지지요?
같은 말입니다.
“24.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 8장의 결론과 같은 말입니다. 그래놓고는 바울은 또 교인들이 우상의 제물을 먹음에 무슨 의미를 부여할까봐서 예문으로 자세히 말합니다.
“25.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왜 먹는데요?
여기 있잖아요. “26.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라” 우상의 제물이라고 해서 우상의 것이 아니라 그것도 하나님의 것이다.
“27.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할 때에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그럼 도대체 바울이 주장하는 게 뭡니까? 정말 이랬다 저랬다 이거 뭡니까?
바울은 결코 이랬다 저랬다 하지 않습니다. 우상의 제물은 아무것도 아니므로 네 맘껏 감사함으로 먹어라 그러되 믿음이 약한 형제도 배려해라. 네 맘껏 먹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겁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느 정도입니까?
아직도 우상의 제물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제사때 귀신이 내려와서 제물을 먹었기 때문에 이 음식을 우리가 먹으면 앙화가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수준입니까? 이 음식을 먹는 것이 제상에 참예하는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먹지 마십시오. 그러나 실제로 그러한 생각을 가지는 것은 결코 그리스도인의 정상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약한 형제를 배려해서 행동하는 것은 맞지만 언제까지나 옛 습관에 젖어서 제사에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에 참신은 하나님 한분밖에 없고 천지 만물과 그 안에 충만한 모든 것은 우리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주실 때 감사함으로 먹고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상의 제물에 의미를 부여하고 제사에 의미를 부여할수록 사탄은 이것으로 믿는 성도들을 괴롭히고 넘어뜨리려고 발악을 할 겁니다. 이제 돌아가는 여론의 추이를 보니 믿지 않는 이들도 추석이나 설에 제사(차례)를 지내지 말자는 쪽으로 기우는 것 같아 보입니다. 물론 이들이 하나님을 참신으로 인정해서가 아니라 워낙 제사가 비합리적이고 분란을 야기하니까 불신자들도 견디지 못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만.
저는 우리 교우들은 충분히 장성한 믿음의 분량안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혹여 이 글을 보는 모든 이들도 보다 성장한 믿음의 분량으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언제까지나 어린아이의 신앙으로 있지 말고 좀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일을 감당하는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웃기지요? 이렇게 결론을 내리니까 마치 제가 30년 전에 비난했던 그 목사님하고 똑같이 설교하네요. 기도하겠습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10월 6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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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백운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한메일 / stronghjs@네이버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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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본문과는 별로 상관없는 이야기가 되겠지만, 저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믿음이 장성하고, 자라있으면, 소소한 것은 그다지 상관이 없게 되는구나. 많은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행동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면 되는구나 싶었습니다. 넓게 바라본다면, 하나님은 인간이 자유롭고 행복하게 사는 것을 원하시지, 규율에 얽매어서 끙끙대는 삶을 원하는게 아니구나 싶기도 했습니다.
가령 할례의 경우 유대인은 율법으로서 여전히 지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현대 기독교에서는 바울과 베드로의 "믿음이 중요하다"는 게 받아들여져서, 할례 없이도 교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억할 것인가, 교단의 입김 혹은 전통 (당시에는 할례를 해야지! 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을 생각할 것인가의 입장에서, 바울이나 베드로는 "본질적" 접근을 중시했다고 볼 수 있고요.
제가 기억하는 말 중에 하나인데, "믿음을 갖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힘은, 어떤 환경 앞에서도 주저앉거나 좌절하지 않더라." 수년전 제가 일하던 가게의 사모님이 한번씩 했었던 말인데, 가끔씩 생각나곤 합니다. 믿음 혹은 신념을 가진다는 건, 결국 환경 앞에 제약당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예컨대 의사 빅터 프랭클이 보았던 경험인데, "자신이 배가 고픔에도,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눠주는 것"은, 아마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경이로운 선택이라고 생각하고요.
한편, 엔도 슈사쿠의 침묵이라는 책에서는, 약한 인간에 대하여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가령 "의지가 약해 종교적 신념을 지킬 수 없는 기독교인을 나쁜놈이라고 볼 수 있는가?" 예를 들어, 신은 응답하지 않는 것 같고, 거센 환경의 폭풍 앞에서 베드로 처럼 신을 부정하고, 후회하고, 고뇌하는 인간을 통째로 담고 있습니다. 결국 이 소설은 다른 측면에서 생각을 요구하는데요. "나의 신앙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남을 내버려 둘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나의 신앙이 부정당하더라도, 남을 구할 것인가." 저는 가끔 이렇게 기독교에서 금지된 질문을 던져보곤 합니다.
저는 앞으로도 겉과 속이 다른 그럴싸한 기독교인이 되는 것만은 피하고 싶습니다. 때로는 삶이 엉망진창이라 후회스럽고, 스스로의 나약한 모습에 실망하고, 초라하게 비춰지는 현실 앞에 서야 하지만, 그 중심에 "타인을 생각하는 여유"를 잃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고 싶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믿음은 흔들림 앞에서도 주께 구하고, 받을 것임을 확신해야 하는게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잘나든, 못나든 예수님은 전혀 개의치 않을 것임으로, 변함없이 정직하게 질문하고 고민하며, 올바른 행동을 행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나니아 연대기의 작가 C.S.루이스의 말을 덧붙이며 잡문 마칩니다. "문학과 예술에서까지 독창성을 따지는 사람은 결코 독창적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진실을 말하려 한다면 (그 진실이 이전에 얼마나 자주 이야기되었는지 관계없이) 열에 아홉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독창적인 결과가 될 것이다." 언제나 진실은 힘이 있으며, 본질을 생각하는게 강력한 거 같습니다. 왜 그랬을까를 고민하는 시간은 그래서 참 의미 있는 게 아닐까 싶네요. / 2013. 10.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