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경철 선생님의 역사에세이, 히스토리아에 관한 리뷰입니다. 이 책은 다양한 역사적 사건과 풍경들을 통해서, 한 번쯤 생각을 전환해볼 수 있습니다. 또한, 각각의 내용을 곱씹어보기에도 좋은 단편들이 잘 묶여 있습니다. 서론은 행복에 대하여 생각해 볼까 합니다. 행복이라는 개념어는 서구에서 수입된 것이라고 합니다. 영어의 happiness 혹은 프랑스의 bonheur 같은 단어는 어원을 살펴보면 "(신이 허락한) 좋은 시간" 이라고 합니다. 조금 단편적으로 접근하면, 사람들은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 행복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어쩐지 우리가 종종 생각하는 행복의 기준인, 풍요롭고 넉넉한 삶과는 다른 느낌이 있는데요. 그 까닭은 위의 영단어를 번역할 때, 정확한 뜻을 옮기기 어려워서, 일본 사람들이 물질적 풍요와 관련이 있는 두 글자, "행과 복" 을 붙임으로서 신조어 "행복"을 만듭니다. 이러다보니, 행복이라는 게 막연하게 다가오고, 마치 무엇인가를 이루거나, 가져야만 가능한 것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 본질적 의미는 그토록 간단한 것이었다니!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 그게 행복이었다니! 저는 이제까지 행복에 관하여 장황하게 써놓았던 이야기들을 빠르게 복기해 봤습니다.
저자 : 주경철 / 출판사 : 산처럼
출간 : 2012년 05월 10일 / 가격 : 18,000원 / 페이지 : 352쪽
첫 번째 재검토, 90년대 인상적인 재난 영화로, 딥 임팩트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대개 재난영화들이 그렇듯이, 최악의 상황에서도 멋지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는데요. 이 작품에서 묘사된 행복은 이렇습니다. "엄청난 행복,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은, 바닷가에서 함께 했던 시간들로 묘사됩니다. 잊을 수 없는 완벽한 행복이라고 표현되었지요." 주경철 선생님이 어원적으로 접근해보았던, 서구인의 사고방식과 무서우리만큼 정확하게 들어맞습니다.
두 번째 재검토, 행복은 혼자 오지 않는다라는 책에서, 저자는 무인도에 갈 때 단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친구 한 명을 고르겠다" 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이렇게 받아들이곤 했습니다. "그래, 오랜 친구야 말로 정말 귀중하지, 혹은 함께 이야기 나눌 친구가 있음으로서, 나라는 존재 의미를 발견할 수 있기에" 행복과 가깝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르게 접근해봐도, 인간이 고독에 빠져있으면 비참한 상황에 내몰리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손을 맞잡고 살아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 커다란 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제와서 수년전 책 내용까지 들춰보니, 이 저자의 선택이야 말로, 좀 더 현실적인 대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행복의 어원 - 좋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곁에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아무리 내가 좋고, 스스로를 사랑한다고 해도, 생일 파티를 한다며, 케이크와 초를 사서, 나홀로 파티를 열면, 이것이 행복이라 할 수 있을까요? 좋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는, 그래서 친구 한 명이 그토록 귀중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행복이 "좋은 시간을 맞이하는 것" 이라는 서구적 개념을 이해하자, 조금은 세상이 다르게 보였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좋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풍요로운 머니가 필요하다고 생각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참 죽이 잘 맞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음에 새삼 감동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행복이라는 신조어가 수입되기 이전에, 우리 조상들이 생각하던, 비슷한 기능의 단어는 뭐가 있었을까요. 주 선생님은 "안심", "안락"이라는 단어를 소개하며, 이것이 좋은 삶의 기준으로 여겨졌다고 합니다. 즉 한국적 상황에서 선조들은, "사회와 나 자신이 안심하고 안락하게 살면, 좋은 인생" 이라는 기준이 있었습니다. 역시나 물질적인 느낌은 의외로 많지 않습니다. 여기서, 조금 더 과감하고 냉정하게 접근한다면, 많이 가져야 행복에 가까워 질 수 있다는 것은 최근 시대에 거의 주입되고 있는 자본 중심의 세계관이 아닐까 라는 상상력이 발휘되었습니다. 어쨌든 한국적인 "편안하고 즐거운 마음" 이 되었던, 서구적인 "좋은 시간을 맞이하는 것"이 되었던 간에,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몇 가지 중요한 힌트가 소개됩니다. 놀랍게도. 심리학자들의 주장은 비슷합니다.
"가까운 친구를 잘 사귀어라 (사람의 중요성), 현재의 불행, 좌절, 실패는 위장된 행복일 수 있으니 전화위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라 (긍정적 인식), 자신을 비하하지 말고 쓸데없이 남을 비판하지 말라 (외부적 기준에서 벗어나기),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취미 활동을 개발하라 (놀이의 힘)" 등 입니다. 심리학 교수셨던 김정운 교수님의 책제목을 가져오면, 좋은 삶이란, "노는 만큼 성공" 인지도 모릅니다. 제가 책에서 행복을 논했던 불과 3page 가지고, 길게 늘어뜨려 쓸 수 있는 까닭도, 재능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노는 데 강하기 때문입니다. 즐거웠던 경험이나 추억을 남겨놓는다는 측면에서, 틈틈이 파고있는 블로그도 어느덧 5년이 넘어가게 되었고요. 어쨌든 행복 외에 다른 대목도 하나 정도는 더 소개하고 마쳐야 겠습니다. 문자 해독률의 발달 입니다.
요즘 청춘들과 마찬가지로, 저 역시 미래를 그다지 밝게 보지는 않습니다. 발전은 거의 한계치에 다다르고 있고, 일자리는 늘어나기 어렵고, 오로지 생존부터 생각해야 하는 젊은이들이 도처에 많이 있습니다. 암울한 미래가 펼쳐질 가능성이 좀 더 높아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에도 놀라운 일들이 몇 가지가 있는데, 인류는 문자가 발명된지 거의 5천년만에, 인류 전체가 읽고, 쓰고, 셈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고 합니다. 대략 2030년 경에는 전 세계적으로 젊은 세대가 모두 글자를 깨치게 된다고 예상됩니다.
이게 왜 중요한가요? 한 역사가가 말했습니다. 문자와 숫자를 모르는 사람은 (다시 말해 배우지 못하고 어리석게 살아간다면) 어디에서 날아올지도 모르는 주먹질을 당하며 사는 것이라고 냉정하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람들이 점점 똑똑해져가고, 생각하는 능력을 기르고, 주변 환경을 제대로 알고 통제하게 된다면, 끌려가는 인생이 아니라, 발전 가능성이 있는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문자 해독률이 높고, 기술이 발전된 스마트 강국인, 미국이나 한국만 봐도, 요즘 국가에서 하는 말을 그대로 믿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바꿔 말해, 조작 당하기 쉬운 인간이지만, 현실을 느낀 대로 바로 보게 되는 인간도 새롭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안 들키면 괜찮아" 라는 치졸한 말을 해대는 사람들이 아니라, "양심껏 살아가는" 멋진 사람들의 시대가 열릴 수 있지 않을까 희망적인 미래를 그려볼 때도 있습니다. 저는 루쉰의 이 말을 좋아합니다. 기억 나는대로 써본다면 - 길이 처음부터 있는 게 아니다. 한 사람, 두 사람이 새롭게 길을 가다보면, 점점 사람들이 그 길로 다니게 되고, 그렇게 길이 생기는 것이다.
히스토리아 책에서 제법 반복되는 주제이기도 하지만, 보통 학살 같이 끔찍한 일을 저지를 때는, 똑똑한 사람, 지식인들을 먼저 처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들만 없애버리면 나머지를 훨씬 장악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식인도 아니고, 똑똑하지도 않지만, 그래도 누구보다 글자 읽기를 좋아하는 편입니다. 리뷰를 마치며,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의견을 가지고, 표현을 할 수 있는 사회가 된다면 그 미래가 밝아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부터가 다양한 이야기들을 앞으로 계속 소개해 나가면 좋겠다는, 므흣한, 아니, 훈훈한 상상을 해보니 괜히 즐거운 기분이 들었습니다. 오늘 리뷰는 여기에서 마칠까 합니다. 잡문을 즐겁게 봐주시는 분들께, 항상 감사한 마음입니다. / 2013. 10. 리뷰어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