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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12월 15일 주일 예배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2 (마태6:1-)

지난주에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의 전반부를 설교했습니다. 전반부에서는 주로 기도하는 방식 중에서 행동양식을 이야기했다면 이번 주에는 내용편을 할려고 합니다.

그럼 과연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는 어떤 것일까요
여기 주께서 소개한 주기도문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 주기도문에서는 이렇게 기도를 시작하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여기서 ‘너희는’ 세상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는’ 사실 생략해도 전혀 문제가 없지만 굳이 ‘너희’라는 말을 넣은 것은 이 말을 강조하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즉 여기서 ‘너희’는 하나님을 믿는 천국 백성을 말합니다. 주님의 제자를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에게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가졌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아무나 기도할 수 있는게 아니라는 말이지요.

아니, 아무나 기도해도 되지만 하나님의 자녀는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왜 주님은 하나님의 자녀에게만 이렇게 기도하고 하셨을까요? 당연히 이렇게 기도해야 가장 잘 들어주시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이 가장 잘 들어주시는 기도의 비밀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한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주기도문의 내용이 무엇을 말하는지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이것을 중언부언 외운다면 이게 바로 사람들 앞에서 하는 외식된 기도라는 것입니다. 결코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반드시 주기도문 그대로 기도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런 방식으로’기도하라고 하고 있기 때문에 주기도문의 뜻을 참조하여 자기가 할 기도를 변형시키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사실 교회사적으로 주기도문은 매우 중요하게 취급되었고 세례를 받은 이들만이 주기도문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이런 제한이 없지만 그만큼 주기도문은 단순히 우리가 공예배시에 따라서 외우는 형식적인 기도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기도하라는 말에서 우리는 이 기도를 계속해서 쉬지 말고 해야 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 그럼 도대체 무슨 내용이 주기도문에 제일먼저 나옵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먼저 우리가 기도를 시작할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부르는 것은 우리가 섬기는 신에 대한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당신만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 어떤 다른 신이 아니라 오직 당신만이.

게다가 아버지란 호칭은 구약의 전통을 답습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매 순간마다 나를 사랑하시며 나를 보호하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친근감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라고 하지요. 나의 아버지, 내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라고 표현한 것은 주기도문이 공동체적인 의미가 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일 뿐만 아니라 내 형제의 아버지도 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만 잘살게 해달라는 기도는 들어 주실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그것은 곧 형제의 것을 빼앗아서 나에게만 달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늘에 계신’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거룩함을 나타내는 표현이지 결코 이 땅에는 계시지 않는다는 그런 표현은 아닙니다. ‘당신은 내 주위에는 계시지 않습니다’ 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지요. 지금도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이 계시면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어떻다고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주기도문에는 모두 6가지의 기원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앞의 세 개에는 모두 ‘당신’이란 단어가 나오고 뒤의 3개에는 ‘우리’란 말이 나옵니다. 
이말은 앞의 세가지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하고 뒤의 세가지에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의 기원은 바로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하는 대상이 그 어느 누구도 아니고 ‘하나님’ 당신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용된 말투가 조금 이상합니다.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좀 어렵게 이야기하면 명령형 부정과거 수동태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수동태는 수동태인데 신적 수동태로 사용되어 그 주체는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자기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고 영광을 스스로 드러내도록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바로 주기도문의 첫 번째 내용입니다.
우리 인간은 단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겸손하게 인정하며 동참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스스로의 이름을 거룩히 여겨야 만이 우리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통치를 받을 수 있지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가 뭔가 대단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면 된다는 말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이 높이시며 거룩히 여기도록 스스로 역사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기도의 내용은 “나라에 임하옵시며”입니다. 앞에서 제가 말씀드린 처음의 세가지 기원에 들어간다는 ‘당신’이란 말이 없지요? 그런데 원문에는  ‘당신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나라로 번역된 ‘바실레이아’는 왕국이란 말이지만 더 많은 경우에 왕의 통치나 왕의 권위 자체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의 통치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게 해달라고 간구하는 것이지요.

주께서 오신 이유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땅에 임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하나님의 나라가 이땅에 임하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기도의 내용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입니다. 여기서도 ‘당신’이란 말은 생략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뜻이나 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하늘에서는 이미 하나님의 통치가 완벽하게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데 이 땅에서는 아직 하나님의 통치가 완벽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 역시 완벽히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기를 간구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은 이미 하늘나라에서 완벽하게 거룩하게 임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것을 이 땅에서 이루어 달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 만이 우리네 인간들이 행복해 지겠기 때문입니다.
경쟁보다 협동을 미움과 증오보다 사랑을 그리고 정의와 공의를 가지고 이땅을 다스려야 우리 인간들이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너무 너무 경쟁이 심하고 계급간 세대간의 증오와 미움이 넘쳐 흘러서 제대로 나라가 굴러가지 않을 지경입니다.
남북간, 동서간, 신구간의 갈등이 위험수위에 도달했을 뿐 아니라 가진 자가 더 가지려고 없는 자들의 것을 무차별적으로 착취하는 구조이며 그들이 던져준 한조각의 빵을 향해서 수많은 이들이 달려들어 무차별적으로 물고 뜯는 그런 경쟁사회기 때문입니다.

경쟁에서 탈락한 젊은이들은 세상을 증오하고 이미 몸이 늙어 경쟁에서 낙오한 노인들은 비참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황은 정말이지 우리 주님이 만드시려고 하는 사회가 아닙니다.
젊은이에게는 희망을 주고 노인들에게는 안락함을 주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네 경쟁사회는 남을 돌아볼 여유 자체를 치워버립니다.

오로지 나, 내 가족만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에는 ‘나’가 아니라 ‘우리’가 강조됩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은 전혀 우리의 필요하고 상관이 없는 형이상학적인 간구가 주 내용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고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 지고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고........게다가 이러한 모든 간구에서 우리가 해야 될 것은 기도밖에 없네요.

우리가 노력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고 하나님의 뜻을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 자신의 통치를 이루고 자신의 뜻을 관철시켜달라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어뜻 보면 정말 말도 안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아주 합리적인 기도내용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면 그의 행사를 막을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사탄이나 악의 통치가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백성으로 삼아달라고 하는 자비를 간구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와 뜻을 이룰 능력을 가지신 분, 전능하신 천지의 대주재시기 때문에 그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더 이상 , 더 오랫동안 사탄에게 내어주지 마시고 하나님의 통치아래서 은혜와 공의로 다스려 지기를 원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행복해지는 가장 우선되는 선결조건인 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는 하나님에 대한 기도이면서 동시에 우리를 위한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당신에 대한 세가지 기도에 이어서 인간에 대한 세가지 기도가 시작됩니다.
주님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이 바로 이 말입니다.

이렇게 기도해놓고 이제 본격적으로 우리를 위해서 뭔가 빌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그런데 이거 너무 심한거 아닙니까? 돈을 빌려고 하면 좀 많이 빌어야지 ‘일용할 양식’은 너무 합니다. 겨우 먹고 살만큼만 내려달라고 기도한다니...좀 실망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으면서 겨우 하루 하루 근근히 먹고 살 만큼만 양식을 얻으려고 기도한다는 것은 좀 너무한 것 같지요? 그런데 이 기도는 기독교가 즉 우리 주님이 영적인 일에만 아니라 육적인 일에도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양식’이 그냥 양식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이지요. 이것을 크게 보면 현재의 양식, 그리고 과거의 모든 죄, 미래의 시험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어때요? 현재를 제일 앞에 두고 과거에 지은 죄를 사해주고 미래에 닥칠 시험에 이기에 해 달라는 기도는 결코 우리 주님의 기도가 적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양식과 죄와 시험.
가만히 살펴보면 이 세가지 기도는 우리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입니다.
“일용할 양식”이란 말에 우리들의 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일용할 우리들의 양식’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기독교는 공동체를 중시하기 때문에 나의 양식이 아니라 우리들의 양식입니다. 그러므로 나혼자만 잘먹고 잘살려고 하는 기도는 결코 상달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모두 좋지 못한데 나혼자만 좋을려고 한다면 이는 교회의 기본 취지가 절대로 아니며 우리 주님의 뜻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나와 너, 이웃들을 모두 포함합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서 제대로된 통치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진다면 나만 잘살고 나머지는 모두 못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이 다 잘살 수 있는 세상이 된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자, 그러면 원문을 자세히 살펴서 과연 일용할 양식이 무엇인지 한번 살펴 봅시다.
‘일용할’ 이란 말은 ‘존재하기 위하여 필요한’ 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우리에게 그날에 필요한 양식을 공급해 달라는 기도가 되는 셈입니다.

또 다른 견해로는 ‘내일을 위한’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에게 내일 필요할 양식을 공급해 달라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콥틱교회에서는 이렇게 내일의 양식이라는 뜻으로 이 기도문을 해석합니다. 뭐 오늘의 양식이나 내일의 양식이나 차이가 있을까요?

잠자기 전 침상에서 ‘내일 아침 눈을 뜨면 우리가 먹을 양식이 공급되도록 해주세요’라고 기도한다면 그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어차피 하루치의 양식만이 공급될 것이므로 매일 매일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똑같습니다.

썩어날 만큼 재물을 쌓아놓고 살도록 기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의 말씀처럼 재물이 산처럼 쌓여 있다면 주위에 나누어 보세요. 그러면 우리에게는 명예가 돌아오고 하나님의 귀한 일을 담당하게 되는데 그 직분의 이름은 청지기입니다. 선한 청지기. 이게 웃기게 보이지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재벌 회장들 보세요. 겨우 자기 자본2.5%만을 가지고 수십조, 수백조짜리 그룹을 좌지우지하잖아요. 수많은 사람들에게 월급을 주고 재화를 나누고 영향을 막 행사하쟎아요.

대주주들도 회장이 되려고 하는 이유가 엄청난 양의 떡을 다루다보면 떡고물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지요.
자꾸 나누다 보면 청지기의 직임이 점점 커져서 대통령이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반장에서 통장, 동장, 구청장, 시장, 지사, 대통령 이렇게 우리가 나를 비울수록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만족하시고 흡족하셔서는 점점 더 큰 청지기의 직임을 맡기십니다. 적은 일에 충성하니까 점점 더 큰 일을 맡기신다는 말씀을 기억해 보세요.

명예와 재물을 둘다 욕심내면 정말 패가망신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오늘 궁핍하지 않고 배곯지 않을 양식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그리고 남으면 나누어 주세요. 그러면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이 더 필요하다고 보고 더 많이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일용할 양식의 규모가 점점 커지는 것입니다. 모든 이들이 이와 같이 한다면 이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서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천국,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너무 이상적인 이야기라서 오히려 어려운 것 같습니까?
그래요, 맞습니다. 너무 이상적이라서 현실감이 없지요. 그러나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신 기도는 바로 그러한 이상적인 사회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주님께서 인간의 필요를 위해 가르친 기도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입니다. 과거에 우리가 지은 죄를 사하여 달라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여러 가지 반론도 있지만 문자적으로 본문을 본다면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의 죄를 용서받기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형제의 죄를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뜻이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는 형제의 죄를 용서하지 않고 보복하면서 하나님에게는 우리의 죄를 사해 달라고 빈다면 이건 정말 어처구니 없는 바램이겠지요.
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이가 일백 데나리온 빚진 동류 관리를 만나서 돈갚으라고 윽박지르는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사실상 우리의 죄를 사해주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만 우리가 빵만으로 살 수 없고 우리의 죄를 사함을 받아야 함을 인식해야 합니다. 육체만이 아니라 영을 가진 우리 인간은 우리의 삶이 다하고 육체와 영혼이 분리될 때를 생각하고 우리의 영을 멸망시킬 죄를 용서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면 죄를 가지고는 결코 우리 하나님앞에 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방해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죄이므로 우리의 죄를 사해주셔야 만이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서 이것저것을 구하고 또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될려면 먼저 우리들이 우리에게 형제들이 지은 죄를 먼저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적어도 기도할 때 형제의 죄를 용서하고 그를 위하여 오히려 기도할 필요가 있겠지요. 만일 형제가 그 용서에 적합하지 않다면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갚으실 것입니다.

기도할 때 육적인 것들만 줄창 구한다면 우리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너무나 지루하고 한심하여 한탄하고 하품하실 것이며 어쩌면 우리의 정신상태를 개조하려고 하실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채찍은 인간이 맞기에 결코 편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채찍이 내리기 전에 육의 일에서 벗어나서 영적인 순결을 위해서도 기도합시다.

참, 죄는 원문의 뜻으로는 부채를 말합니다. 빚. 그러므로 죄를 사해준다는 말은 빚을 탕감해 준다는 말이 됩니다. 우리에게 형제가 진 빚을 탕감해 주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탕감해 주신 그 엄청난 빚은 어쩔 겁니까? 그런이는 불의한 종이 되어 감옥에 갇힐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섯 번째로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이 말은 다시 원문의 뜻대로 적는다면 ‘우리를 시험 안으로 인도하지 마옵소서’가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직접 시험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탄이 우리를 시험하는 것을 허용하기 때문입니다. 시험은 유혹하다란 말입니다.

하나님은 사탄의 시험을 왜 허용하실까요? 그것은 우리의 죄때문일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게 정말 어려운 것이 여기에서 실패하면 우리는 패가망신하고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탄이 우리를 유혹하도록 허용하지 말아달라’고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시험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악에서 구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다만’이란 말이 어색하지요. 원문에는 ‘오히려’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마귀의시험이 빠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귀로부터 벗어나도록 해 달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사실 알게 모르게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탄의 유혹에 매우 취약합니다. 그러므로 항상 마귀의 시험에 들지 않도록 마귀로부터 우리를 구해 달라고 기도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주님이 가르친 기도는 하나님에 관한 세가지와 인간에 관한 세가지의 내용으로 되어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이란 말은 후대에 삽입된 걸로 보여집니다. 아마 기도나 찬미가 끝난 후에 송영을 부르는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서 후대에 추가된 것으로 보여지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겠습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주께서 가르치신 기도의 방법과 내용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기도의 내용이 많지 않고 간단합니다.
게다가 내용은 더 단순합니다.
거대한 부와 명예, 그리고 목숨의 연장이나 병으로 부터의 치유같은 것들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이 복잡 다단한 삶을 사는 인생에게 겨우 우리들의 일용할 양식만을 빌라고 할 뿐입니다. 그 나머지는 인생에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것을 빌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죄를 사하고 시험에 들지 않고 악에서 구하여 달라는 기도는 공고한 중에 있는 우리네가 관심을 가지기에는 너무 먼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기도 내용을 잘 보면
내가 아니라 우리를 강조하며
하나님의 의와 나라를 먼저 구해야만 우리의 삶이 나아질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을 위하여 우리 믿는 이들, 즉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가 생겨난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특별히 대단한 기도를 우리에게 가르친 것은 아닙니다. 그러함에도 그러한 기도를 실천하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의와 나라를 구하는 기도는 우리가 감히 꿈에도 하기 어렵습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께 구할 것이 너무 많고 부족한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울어도 못하고 고함쳐도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나라와 뜻에 어긋나는 기도는 아무리 중언부언해도 열심을 내어도 하늘보좌에 상달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의 기도가 우리의 성에 차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구하기 전에 이미 아시고 우리의 필요를 아셔서 채워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구하지 못한 것 까지도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인식한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법안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12월 15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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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설교 몇 편이 조금 밀려있는 상황이라서, 코멘트는 짧게(?) 덧붙이려 합니다. 함축적인 느낌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나의 이익만을 좇아서 살지 말고, 공동체를 생각하도록 하라. 이웃과 불화하면서 하나님과 친하게 지내려는 위선적 삶을 버리고, 먼저 가까운 이웃을 돌아보는 마음을 가지라.

이쯤되면 의문이 떠오르곤 합니다. "그러면 나의 삶은 누가 돌본단 말입니까. 누가 챙겨준단 말입니까." 주께서 기억하시고, 갚으시며, 일용할 양식을 챙겨준다고 합니다. 기독교인의 이상적인 삶이란, 어렵고도 멀다는 생각이 들고, 가끔은 "좁은 길" 비유도 생각납니다. 대체 누가 이런 삶을 살아가려고 한단 말인가요.

인간에 대해서는 두 가지 모순적인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족을 괴롭히며, 동족을 학대하는 동물은 인간 말고는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타인의 불행에는 귀를 귀울여주고 슬퍼해주지만, 타인의 성공에는 귀를 닫아버리고 질투를 하는 존재. 그것이 인간의 어떤 진실이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성공과 영광을 같이 누리려고 하지 말라, 역사가 가르쳐주는 교훈이다. 같은 엄격한 말들도 있습니다. 인간은 그토록 자신을 중시하며, 타인의 입장에 서보기를 어려워 합니다. 어쩌면,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아니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배가 고프고,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음에도, 동족을 보살피며, 동족을 챙겨주는 동물 역시도 인간 말고는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것을 떼어내, 다른 존재에게 나눠줄 수 있는 존재는 인간이기에 가능합니다. 오래된 농담처럼, 인간이야말로 천사같은 마음으로 살려고 노력할 수 있으며, 악마같은 마음으로 살려고 노력할 수 있습니다. 존재의 가능성만 놓고 본다면, 인간은 정말로 놀랍고 경이로운 존재입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으니까요.

저는 새해에 "아모르파티" -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 라는 말을 생각해 보곤 합니다. 존재로서 태어나서 살아가는 것 자체로 기뻐하며 즐거워 할 수 있는 1인치의 비밀을 발견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신은 인간에게 속삭이며 비밀을 가르쳐주는 듯 했습니다. "타인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봐~ 인생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봐~"

돌아보면, 언제나 구한 것에 비해서는, 참으로 너무 많은 것을 받아왔다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준비하는 시간을 통해서, 때를 기다리며, 그 시간이 지나간 후에, 받게 되는 것들도 많았습니다. 결국 사람이 그 마음 속에 무엇을 담고서 살아갈 것인가가 중요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과연 내 마음에는 신이라는 존재가, 타인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들어있던가? 라고 질문하게 되었습니다.

제발 나부터 라는 말이 맞다고 여전히 생각합니다. 나부터 행복해 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내 이웃이 즐겁고 건강하고 행복해야 한다는 것을 조금씩 배워나갑니다. 하나님이 그토록 공의와 이웃을 강조하는 것은, 나 하나가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것에 "하나님, 당신의 의지"가 들어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도 즐겁고, 너도 즐거운 세상을 위해서, 과연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저는 이 질문에 답을 구하는 한 해가 되고 싶습니다. / 2014. 01. 시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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