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4년 1월 26일 주일 예배

안식일에 주께서 하신일 (누가6:1-11)

오늘은 2014년도를 맞이 하여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것들 가운데 안식일, 요즘 말로 하면 주일에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에 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설교를 보시는 어떤 이들은 혹여 안식일이 주일이냐 이렇게 반문하실 분도 계신데 안식일이 주일이라는 말이 아니라 안식일이나 주일이나 이 날이 제정된 용도가 같기 때문에 이 구절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 하나님이 자기의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주심으로 자녀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휴식을 취하고 서로 사랑으로 교제를 나누고 또 약한자 병든자를 도우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날로 삼으신 것이지요. 그런 면에서 안식일이나 주일이나 별반 차이가 없으므로 저는 과연 우리 믿는 이들이 주일날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이 본문을 통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아니 세상의 거의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일주일 단위의 달력을 사용하고 주일을 쉬고 있습니다. 물론 개별적으로야 주일날도 쉬지 못하고 일하는 이들이 많이 있기는 하지만 명목상 주일은 쉬는날로 되어 있습니다.

일주일 단위로 날짜를 나누고 매 일요일을 쉬는 관습은 도데체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성경이외에 이러한 기원에 관해서는 전혀 알지를 못합니다.
자, 오늘의 주제는 이것의 기원에 관해서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는 주일날을 어떻게 보내기를 원할까 하는 점입니다.

구약에서 명시적으로 거룩하게 보낼 것이 정해진 안식일도 아니고 자연 발생적으로 우리 주님의 다시 살아나심을 기념하는 초대교인들의 습관에서 비롯된 주일은 오늘날 구약의 안식일을 제치고 굳건히 자리잡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오시기 전에는 안식일이 유대교의 성일이었고 성경의 기본원리였는데 우리 주님의 부활 이후에 한동안 안식일과 주일이 같이 지켜지다가 기독교가 독자적으로 발전하면서 마침내 주일이 안식일을 제치고 대세로 자리잡게 되었지요.

여기 본문에 보면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사이로 지나가실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먹었고 이를 본 어떤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일을 한다고 예수님과 제자들을 비난하는 것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나타내는 히브리어 단어들을 종합해 본다면 예수님과 제자들은 당시 밀밭의 옆으로 지나가고 있었던 것 같고 계속되는 전도여행으로 매우 지쳐서 육체적으로 궁핍한 상태였음을 할 수 있습니다. 배가 매우 고프고 지친 상태에서 양쪽으로 밀밭이 펼쳐진 곳을 지나면서 제자들이 고픈 배를 채울려고 밀 이삭을 잘라서 그걸 손으로 비벼 먹었습니다.

게다가 병행기사인 마가복음을 참조한다면 밀밭 사이로 길이 나 있었다기 보다는 밀이삭 때문에 길이 막힌 제자들이 길을 내기위해서, 그러니까 지나가기 위해서 이삭을 잘라서 길을 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비난한 것은 남의 밀이삭을 훔쳐 먹었다는 것이 아니라 밀 이삭을 잘라서 손으로 비벼서 껍질을 까서 먹었다는 행위에 있습니다.
즉 안식일에 금한 노동을 했다는 겁니다. 손으로 비벼서 먹는 행위는 탈곡입니다. 곡식의 껍질을 깐게 잘못이라는 말이지요.

우리 생각에는 남의 밀 이삭을 몰래 잘라먹은 것이 비난의 대상이 될 것 같은데 정작 바리새인들, 율법 잘지키기로 유명한 이들은 도둑질을 비난하기 보다는 안식일에 일해서는 안되는 규정을 어긴 것을 가지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의해 안식일에 추수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지만 손으로 배고픔을 면하기위해 남의 밀이삭을 따먹는 행위는 율법에서 허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스라엘은 굉장한 나라입니다. 배고픈 자들이 소량으로 곡식을 따먹는 행위는 절도가 아니고 하나님의 자비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엄청난 나라입니다.

낫을 이용하여 대량으로 이삭을 베어가는 행위가 절도로 여겨지고 금지되어 있지 배고픈 이들이 소량으로 곡식을 털어서 먹는 것을 금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먹은 행위가 아니라 손바닥으로 비벼서 껍질을 까서 먹는 행위 즉 추수노동을 한 것이 안식일 규정을 위반한 것이라고 비난한 것입니다.
그것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잘지키기위해 성경에도 없는 무려 39가지의 노동을 하지 못하도록 임의로 규정해 두고 있었습니다.
손으로 이삭을 자르는 행위는 추수금지 규정 위반
손으로 비빈 행위는 타작 금지 규정 위반
이삭 껍데기를 입으로 부는 행위는 키질 금지 규정 위반으로 간주된 것입니다.

법이 정말 황당하지요?
율법에서 금지되지 않은 행동이 인간의 자의적 해석으로 율법을 어긴 행위로 규정된 것입니다.
아니 그럼 배고픈 이가 이삭을 손으로 자르지 않고 발로 잘라야 합니까?
아니면 껍질을 까지 않고 까끌까끌한 껍질채로 먹어야 한단 말입니까?

그도 아니면 한명이 규정을 위반하고 이삭을 잘라서 비벼서 까주는 것을 먹어야 한다는 말일까요?
안식일에 노동을 금지한 진실된 목적을 망각한 망령된 행동을 지금 바리새인들은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애초에 하나님 아버지가 하신 가난한 자에 대한 배려가 인간의 교묘한 말장난으로 말미암아 부정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항의에 대해 주님은 ‘그래 내 제자들이 잘못했네. 너희들 앞으로 이런 일은 하면 안된다’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이렇게 반문하십니다.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예수님은 다윗이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는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되는 진설병을 먹고 자기 일행에게도 주었답니다. 배가 고픈 이에게 제사장만이 먹어야 되는 진설병을 먹게 한 것이 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배가 고파서 하나님의 전을 찾은 이에게 율법의 규정을 이유로 앞에 떡이 있음에도 주지 않아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그 떡이 제사장의 전용 떡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비록 그것이 또 다른 규정을 위배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우리 주님은 지금 자기의 제자들이 너무 배가 고프고 그래서 지쳐서 밀이삭을 조금 먹은 것은 율법에서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보호하려는 규정에 전혀 어긋남이 없고 오히려 당연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도 그걸 잘 알기 때문에 밀이삭을 자른걸 가지고 시비를 거는게 아니라 밀이삭을 비벼먹은 행위가 노동이라는 것을 가지고 시비를 거는 겁니다.

지엽적인 형식 준수가 배고픈 이에게 사랑의 손길을 베푸는 것 보다 더 우선합니까?
심하게 말하면 지금 사람이 죽어 가고 있는데 규정 타령만 하고 있을거냐는 말입니다.
율법의 형식적 준수만 강조해서 이들은 지금 하나님이 진정으로 율법을 주신 본래의 이유를 잊어버린 겁니다.

다윗의 기사를 이야기 하신 주님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는 말로 본 단락을 맺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인자를 위해서 있는 것이다.’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누가는 구구절절한 모든 설명을 생략합니다. ‘내가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나를 위해 있는 것이야 이걸로 충분히 설명이 되었을 거야’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이 안식일 논쟁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오른손 마른사람의 마른 손을 고친 일이 있습니다.
물론 그 사람을 고치려고 회당에 들어가신 것은 아닙니다. 들어가 보니까 그곳에 병자가 있었고 그래서 고쳤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가르치러 회당에 들어가신 겁니다. 그런데 아마 이 회당 안에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었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송사할 거리를 찾으려고 한 것을 보면 안식일 규정을 어기는 것으로 소문이 난 주님이 과연 진짜로 수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도 규정을 어기는지를 보려고 , 그래서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사람들이 오른손 마른 이를 데려와서 예수님의 눈에 잘 띄게 한 것이라는 의심을 할 수도 있습니다.

여하튼 예수님이 안식일 규정을 어기는 것에 불만을 품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지금 예수님이 과연 법을 어기는지 아닌지를 보려고 엿보고 있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내가 고발을 당하지 않기 위해 아픈 사람을 그냥 둡니까? 아니면 아픈 이를 낫게 하는 것이 내가 고발당하는 것 보다 더 중하기 때문에 나를 물어 뜯으려고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는 승냥이들 앞에서 병을 고치는 일을 할 것입니까?

오른손 마른 이는 나의 친인척도 아니고 친구도 아닙니다. 나와 전혀 안면이 없는 낯선이에 불과합니다. 이 사람이 돈이 많아서 이 사람의 병을 고쳐주면 엄청난 부가 보상으로 따르는 그런 일도 없습니다. 권력자라서 나에게 한자리 줄 수도 없습니다.
병자를 고치면 나에게 해가 있을 지언정 어떤 이로움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을 고칠 수 있습니까?

본문 8절에 보면 예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이런 불순한 음모를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을 일어서서 한가운데 서라고 하시고는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것이 옳으냐?”

답은 이미 나와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그 답을 몰라서 물어 본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지켜보는 사람들도 무엇이 정답인지를 다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옳다’는 말은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말이고 ‘율법에 적합하다’는 말입니다.
우리 역시도 주님의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별 말이 없지만 마가복음에는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란 표현이 있습니다. 분명히 사람을 살리는 것이 합당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주님의 이 질문에 답을 하지 않습니다.
오른 손 마른이는 당시의 의술로, 물론 지금의 의술도 마찬가지지만 도저히 낫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 오른손을 치료할 방법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지금 당장 그를 치료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안식일날 노동하지 말란 규정을 지키기위해 이 사람을 외면해야 합니까?

군중들은 때로는 무섭습니다. 자기에게 이익이나 손해가 나지 않는 일에는 철저하게 방관합니다. 어떨 때는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침을 튀기면 참견하다가도 또 어떨때는 아무것도 아닌 이유를 가지고 철저하게 한사람을 짓밟을 수 있는 잔인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내가 지금 오른손 마른 병에 걸려 있지 않기 때문에 병자의 고통에는 무관심합니다. 저 사람이 낫는 것 보다 안식일 규정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이 병자의 친구나 가족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군중들중에서 주님에게 병자를 고쳐달라고 부탁하는 목소리는 전혀 들려오지 않습니다.
모두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과 서기관 바리새인들간의 논쟁을 흥미롭게 지켜보지 여기게 끼여 들지 않습니다.

그건 나에게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심정적으로 주님의 말이 옳다고 생각한 이들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심정을 말로 표현하거나 행동으로 보여주지는 못하는 비겁한 다수가 됩니다.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이걸 지켜보던 사람들의 반응이 황당합니다.
11절에 “저희는 분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 것을 서로 의논하니라”
아니 이 사람들이 분기가 가득할 필요가 어디있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갈구하는 회당에서 하나님의 선지자가 났다고 기뻐해도 시원찮을 판에
치유 불가능한 병자가 치유되는 기적을 보고 하나님을 찬양해도 모자랄 판에

이 사람들은 단순히 안식일에 병자를 고쳤다고 지금 분기가 가득했답니다.
병행기사를 보면 아마 서기관과 바리새인뿐만 아니라 헤롯당원들까지도 이 논의에 참여한 것 같습니다. 여기서 처치할 것을 의논했다라는 말은 어떻게 죽일까를 논의한 겁니다.
안식일에 병자 한명 고쳤다가 지금 주님은 죽게 생겼습니다. 굉장한 사람들입니다.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오늘은 안식일이니까 배고파도 참아
오늘은 안식일이니까 구덩이에 빠져도 참아
만일 오늘안으로 건져 내지 않으면 죽는대도 ‘그러면 어쩔 수 없지’ 내 자식도 아니고 내 부모도 아니고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이가 죽든말든 내 알바 아니다는 심보입니다.

그래놓고 자기집의 소가 빠지면 안식일에라도 건져 낸답니다. 하하, 사람이 소보다 못합니까?
정말 유대인들에게는 그런 모양입니다. 내 소가 남의 목숨보다 귀하다고 여기는 모양입니다. 내 양 한 마리가 수많은 사람들 보다 더 중한 모양입니다.
이 무슨 황당한 경우입니까?

자, 이제 우리 얘기를 해봅시다. 주일날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합니까?
제가 여기에서 생각나는게 있습니다. 옛날에 제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매주 월요일마다 시험을 쳤습니다. 첫시간에는 국영수를 한주일에 한과목씩 치고 두 번째 시간에는 암기과목을 한과목씩 치는 겁니다. 그렇게 돌아가면 한달의 성적이 나옵니다.

따로 월례고사나 중간고사나 기말고사가 없습니다. 아마 당시의 선생님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주일이나 주말에 열심히 공부를 하게 해서 학생들에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여긴 듯 합니다.
저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교회에 다녔기 때문에 주일날은 시험공부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토요일날 모든 공부가 끝이 나야 합니다.

더구나 당시 제가 다니던 교회는 아침에 한번 저녁에 한번 예배를 드렸고 낮에는 여러 가지 활동들이 많이 있어서 주일날 공부를 한다는게 사실상 어려웠습니다. 아니 쉬웠다 해도 교회에 오지 않고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학생에 비해서 불리한건 사실입니다.

이때 기독교인 학생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이전에 교인들은 주일날 절대 돈을 사용하면 안되었기 때문에 심지어 교회에 오기위해 차를 타면서 돈을 지불하는 행위도 금지되었습니다. 무임승차가 아니면 걸어 와야 되는데 만일 집과 예배당이 멀다면?
부자라서 자가용이 있는 이들은 자가용을 타고 오겠지만 돈이 없어서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한다면 당연히 차비가 듭니다.

어떻게 하다 보니까 주일날 먹을 밥이 없어졌습니다. 쌀도 떨어 졌습니다. 그래서 쌀을 사야 하는데, 아니면 반찬을 장만해야 하는데 주일이므로 참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요? 굶고 다음날 그냥 학교에 가야 합니까? 학교에 갔다 오면 밥을 맛있게 해놓으께....어때요?
지금은 이런 걸로 고민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러나 당시에 이건 상당히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어떻게 행동해야 올바른 거지요?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 신학교에서 한방을 사용했던 전도사님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사람이 좋은 분이었습니다. 학교에서 치킨도 자주 사주고 하던 분이었지요.
그런데 이분의 부인, 즉 사모님이 유치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만 운영이 적자가 나서 빚이 너무 너무 많아 졌습니다. 하는 수 없이 이 전도사님은 신학교를 휴학하고 사모님과 당분간 별거하고 각자가 돈을 벌어서 빚을 갚기로 결심합니다.

막 방학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이 분이 제가 다니던 교회로 저를 찾아 왔습니다. 그때 저는 이분의 처지를 동정하면서도 주일날 돈을 쓰면 안된다는 규정(?) 때문에 이 분에게 나가서 식사를 대접하지 않고 그냥 교회에서 제공되는 국수를 배식받아서 같이 먹고 이분을 보내드렸습니다.

이 전도사님은 막 가정용 가스배달을 시작한 참입니다. 그래서 어깨가 다 까지고 파스를 부쳤다고 합디다. 그런분에게 힘내라고 제대로 된 식사를 대접하지 않고 그냥 국수를 먹여서 보낸게 지금생각해도 너무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그 전도사님이 그래요. 국수를 젓가락으로 집으면서 “옛날에는 이런 국수는 쳐다 보지도 않았는데....” 저야 국수를 좋아하니까 그냥 넘어 갔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이분이 국수를 정말 싫어했었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솔직히 이 전도사님을 본게 그때가 마지막이었습니다.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 지금도 소식을 모르지만 저는 분명히 형제의 괴로움보다 안식일 규정을 더 지킨 철없는 전도사가 된 거지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는 별 말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이 본문의 주님이 하신 일들과 그 말씀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알겠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계율입니까? 아니면 그 계율이 요구하는 실제의 취지입니까?
우리는 과연 네 형제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대 원칙에 맞게 행동했을까요?
이제 새로운 해를 맞아 우리에게 선택이 요구되는 시점이 온다면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인지, 그를 기쁘시게 하는 일인지부터 먼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전통이기 때문에 무비판적으로 따른다고 생각하지 말고 이것이 과연 우리 주님이 나에게 요구하시는 일인가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사랑이라는 성경의 대원칙에 나를 비추어 우리의 행동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만일 내 마음속에 형제의 고통과 위로받고 싶은 그 마음을 알아주기 보다는 그냥 귀찮은 이를 규정을 이용하여 빨리 보내고자 하는 마음이 아주 조금이라도 있다면 혹은 내가 싫어하는 이를 형식적인 율법조항을 이용하여 비방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가식의 옷을 벗어 버리고 진심으로 형제를 대해 봅시다. 그렇다면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또다른 놀라운 것으로 맛보여 주실 것입니다.

오늘 주님이라면 과연 이때 어떻게 행동하셨을까를 항상 생각하며 사신다면 주일날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를 일일이 규정으로 한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계명을 지킨다면 주일날 어떻게 보내야 할지는 저절로 명확해 집니다.
주님이 은혜를 생각하며 주께서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며 하나님의 진실된 뜻에 부합한 삶을 사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4년 1월 26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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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백운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한메일 / stronghjs@네이버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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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규칙이라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것 같습니다. 예컨대, "규정대로 하면 별 탈이 나는 법이 없지" 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조금 다른 각도에서 뒤집어보면, 규정대로만 하면 현실은 변함없이 유지될꺼야 같은 관점이 들어가 있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아마 본문에 나오는 "열받은 사람들"은 규정대로 하지 않는 저 예수라는 존재가 정말 싫었을 겁니다. 자기가 뭔데, 우리가 오래도록 지켜온 규칙을 깨려 하는가? 라고 따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일 중요한 것은 저기 저 사람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이야" 라고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이를테면, 이런 잘 알려진 이야기가 있습니다. 해변에서 어떤 사람이 파도에 밀려온 불가사리를 안타깝게 여겨서, 다시 불가사리를 바다로 던져줍니다. 멀리서 이 무의미한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이 슬쩍 물어보지요. 세상에 매일 같이 계속해서 불가사리가 해변으로 밀려 들어올텐데, 당신이 이렇게 불가사리 하나 바다로 되돌려 보내도 뭐가 달라진단 말입니까? 쓸데없는 일은 하지 말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불가사리를 던지는 남자는 짧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말이 옳소. 그래도 되돌아간 저 불가사리의 생명만큼은 달라지지 않았겠소." 이런 이야기들은 저에게 적잖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예컨대, 약 15년 전, 야학 시절을 생각해보면, 힘든 형편에서 어렵게 공부하는 사람들은 늘 있었습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도울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았고, 개인사정 때문에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들도 생길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규정대로라면, 어쩔 수 없어... 라고 말해야 겠지요.

그런데 어떤 분들은, 사비를 털어서라도, 시간을 내서라도, 조금이나마 더 도움이 되도록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면, 되돌아보면, 그런 신기한(?) 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진짜로 선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좀 더 나아진다면, 그것이 감동이고, 기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겸허한 감정들이 있고난 후에, 저는 더 이상 세상을 바꿔야 하느니, 사람들의 인식을 바꿔야 하느니 같은 표현은 잘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보다는, 한 사람이라도 이 힘든 환경에서 기쁘게 살아갈 수 있도록, 그 사람에게 소소한 행복이라도 줄 수 있도록, 한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려는 생각을 합니다. 혹자는 여전히 황당해 할 것입니다. "그런다고 무엇이 달라질 수 있단 말인가..." 맞습니다. 대부분은 해봐야 거기서 거기일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할 수 있는 작은 일이라도 해보는 것. 작은 발걸음이라도 내딛어 보는 것, 행동은 안 따라갈 때가 많지만, 적어도 그렇게 살려고 생각만큼은 해봅니다. 본디 기독교에서 생각하는 "한 사람"이란, 세상 무엇보다도 귀중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래서, 저는 규정으로 합리화, 정당화를 하면서 외면하기 보다는, 거기 그 사람에게 힘이 되었던가. 라는 질문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싶네요. / 2014. 시북.

by 시북 2014.02.03 17: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