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4년6월29일/베드로의 권면 2편(베드로후서1:6-11)/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4. 7. 13. 02:13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4년 6월 29일 주일 예배

 

베드로의 권면2 (베드로후서1:6-11)

 

- 목사님의 요청으로 갱신 및 모바일 줄맞춤 작업을 시도하였습니다. 2014. 09. 22. 알림.

 

우리는 지난주에 이 앞 절의 본문까지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서 베드로가 권면한 몇 가지 덕에 대해서 더 알아보려고 합니다. 이 권면이 하나 하나 다 실천하기가 어렵고 매우 큰 힘을 써야 비로소 이룰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한꺼번에 이야기하면 혹시라도 ‘아이고, 나는 도저히 못하겠어!’하실 분이 있을까봐 두주에 걸쳐서 끊어서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우리는 지난 주에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더할 것을 요구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계속해서 베드로는 절제에 인내를 더하라고 요구합니다.

 

제가 지난 주에 말씀을 드리지 못했는데 우리말 표현 ‘더하라’는 말이 영어 성경에는 ‘보충하라’는 말로 되어 있습니다. 비슷한 것 같지만 ‘더하라’는 말은 한 개가 두 개로 열거되고 세 개가 되고 네 개가 되는 식이라면 ‘보충하라’는 말은 처음의 성질인 믿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뒤에 추가되는 성질들이 믿음과 동일한 중요도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뒤의 성질들이 보충해서 더욱 더 믿음이 강해지는 그런 식입니다.
그러니까 ‘보강한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이렇게 용어의 정리를 하고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1.절제에 인내를
성경은 우리에게 계속해서 절제에 인내를 더하라고 말합니다. 인내는 ‘~의 아래에 머물러 있다’는 뜻입니다. 즉 힘들고 어려운 상황 아래서 피하지 않고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렵다고 지금의 자리에서 벗어나서 도망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인내는 단순히 주어진 운명에 순종하며 참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내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굳은 믿음으로부터 나옵니다. 내가 이 어려운 상황을 인내하고 이기면 결국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에게 놀라운 생명의 면류관을 주실 것을 믿는 믿음이 있기에 현세의 어려움과 핍박을 기쁨으로 이길 수 있습니다. 만일 이 어려움이 끝도 없이 우리의 삶 동안 계속된다면 세상의 그 누구도 인내하지 못할 것입니다.

 

며칠 전 기사를 보면 우리나라가 지금 10년째 OECD국가들 가운데서 자살률이 1위랍니다. 정말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자살을 염두에 두고 계신 분들에게 간절히 고합니다. 우리의 현재 어려움에는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 우리의 처지가 가장 밑바닥이므로 앞으로는 올라갈 일만 남아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참된 하나님의 품안에서 그분의 보호와 인도를 받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무서운 결단을 내리기 전에 희망을 버리지 마시고 가까운 교회로 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기의 어려운 사정을 솔직하게 이야기 하고 도움을 구하십시오. 하나님의 자비를 요청하십시오. 뜻밖의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나를 이대로 두시지 않고 나를 구원하실 것을 내가 믿습니다. 그래서 소망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믿음의 성도들이 가지는 특권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정을 하나님 아버지에게 차근차근 아뢸 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우리의 사정을 아뢰고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를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단코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구원하실 것입니다. 조금 세월이 흐르면 옛날을 기쁜 마음으로 회상하며 지낼수 있는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왜냐면 내가 그를 사랑하고 그가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이지요.
그러한 사실, 하나님과 나와의 사랑의 관계를 나는 철저하게 믿고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 때문에 우리는 핍박과 환란에도 불구하고 인내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현재의 어려움과 핍박이 무한정 계속되지 못한다는 것을 내가 너무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얼마만큼의 기간이 지난 후에 나는 하나님과 더불어 승리할 것을 확실히 알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일의 결말을 안다면 전혀 걱정하거나 슬퍼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낙망하며 좌절하는 이유는 일의 결말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승리할 것이 예정되어 있다면 중간에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못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또한 이러한 인내는 믿음을 지속하는 능력이며 세상의 핍박과 시련에 저항하는 능력이 됩니다.
베드로가 이 성경을 기록할 당시는 네로의 극악한 핍박 때문에 성도들이 힘들어 하고 심지어 신앙에서 떠나는 이들까지 생겨나는 와중에 교회 내적으로는 이단들이 발호해서 신자들의 믿음을 흔들고 있던 시절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지식에 자기 절제를 더한 사람들에게 이러한 절제를 끝까지 유지할 인내를 더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박해의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날 올바른 믿음을 떠나서 이단이 되는 자들은 보통 인내하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이단에 빠지는 이들이 이단에 들어가는 이유가 자기의 삶이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내가 하나님을 바르게 믿는다면 이렇게 어려울 리가 없다. 뭔가 나에게 아니면 나의 신앙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나의 삶이 이렇게 어렵고 환란이 닥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주위에서 이단들이 “네가 제대로된 , 올바른 교회에 다니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너에게 어려움을 주시는거야. 그러니 말세를 맞이해서 참된 믿음을 고수하는 우리에게 와야만 이 어려움이 해결된다”라고 유혹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이단에 빠진 사람들은 인내하지 못한 이들입니다. 이단에 빠진 사람들을 보면 신앙생활을 잘 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남들보다 더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싶어 하고 하나님의 일을 즐겨하는 그런 이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남들보다 더 어려움을 당할 때에 신앙이 흔들리게 되고 마침내 인내가 흔들리고 이단으로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이단에 빠진 이들을 보면 일이 잘풀리거나 경제상황이 좋은 이들보다 일이 안 풀리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들이 많이 빠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단에 빠지게 되면 이전의 어려움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종국적으로 이단에 빠진 이들은 경제적인 형편이 나아지지도 않습니다. 이단의 교주나 집단이 감언이설로 몇푼 가지지 못한 이의 쌈지돈까지 훑어 가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단은 그 교리자체가 비윤리적이며 비도덕적이기에 경제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성적인 문제까지 야기될 확률이 높습니다. 심지어 범죄에 자기도 모르게 관련되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이단을 따라 다니다가는 패가망신으로 끝날 것입니다.

 

나중에 아주 오랜 세월 후에 이단의 실체를 깨닫고 떠나려고 해도 빠져나가기가 어렵습니다. 뿐만 아니라 빠져나간다 해도 이단에게 허비된 자기의 젊음과 인생자체는 되돌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나에게 주어지는 환난과 고난에도 인내하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결국 나를 그냥 두지 않으시고 승리하게 하실 것이며 그의 자비와 인애로 나를 돌아 보실 것입니다.

 

2.인내에 경건을
이러한 인내를 더한 성도들에게 베드로는 경건을 더하라고 권면합니다. 경건은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으로 그의 뜻 아래 겸손하게 복종하는 삶의 태도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경건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에게 취해야 할 바른 태도를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한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교만이라고 하십니다. 교만은 패망의 지름길입니다.
인내에 경건을 더하라고 강조한 것에는 특별한 연유가 있습니다. 자기 의지가 강해서 인내를 잘하는 이는 인간의 의지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보다 자기의 의지를 더 앞세울 우려가 매우 높습니다. 의지가 굳다고 해야 합니까 아니면 개성이 강하다? 그래서 인내에 경건을 더하라고 한 것입니다.

 

이슬람 교도들은 신에 대해서 매우 두려워하고 그 앞에서 전전긍긍합니다. 단식을 하고 구제를 하고 기도하고 경을 읽고 하지만 결국 그들은 천국에의 확신을 가지지 못합니다. 그래서 무조건적인 천국행을 약속하는 순교나 성전에 자기의 목숨을 내어 거는 것입니다.

 

반면에 기독교도들은 하나님을 너무 가볍게 여깁니다. 마치 하나님의 역할은 인간에 대한 무한 용서만 있는 것 같이 행동합니다. 그래서 그의 계명을 제대로 지키지도 않고 멋대로 살면서도 뻔뻔스럽게 하나님의 복을 갈구합니다.
이슬람교도와 기독교도의 신관이 조금 섞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슬람 교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 기독교도는 하나님의 엄위함을 조금 더 인식해야 합니다.

 

요즘 보면 인간들은 무슨 불치병 치료제를 개발하고서는 걸핏하면 신의 영역을 정복했다고 자화자찬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치료제를 개발한 만큼 더 많은 질병들이 계속해서 생겨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희귀질병이라는 많은 병들을 알고 있고 이들에 대한 약은 아직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입니다. 반면에 신은 무한한 존재입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과 인간을 구분하는 기준이 죽음인 것 같습니다.
인간이 가장 정복하고 싶어 하는 것이 바로 죽임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신의 영역을 정복해 나간다고 하는 인간은 과연 죽음을 정복했습니까? 아무리 최첨단의 의료장비와 보약으로 치댄다고 해도 결코 하나님이 정하신 죽음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죽음은 인간의 경건을 위해서 하나님이 남겨 놓으신 마지막 표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처음 인간은 항생제를 개발하고 마치 이것이 만능인 것처럼 생각하고 사용했습니다. 이제 항생제가 듣지 않는 괴물이 탄생했고 인간들은 될 수 있으면 항생제를 사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넣어준 인간자체가 가지고 있는 면역체계를 강화하려고 시도하게끔 되었습니다.

 

이걸 보노라면 마치 그 옛날 인간이 조잡한 기술, 구운 벽돌과 끓인 역청으로 바벨탑을 만들면서 스스로 신이 되려고 했던 것이 떠오릅니다. 우리 하나님은 말씀 하십니다. “나의 이름을 만홀히 여기지 말고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하나님 앞에 경건하지 않은 인간에게 내일은 없습니다. 마치 눈앞의 한가지 문제를 해결하고 자신이 신이라도 된 듯이 생각하는 인간은 그 문제 때문에 더 심각한 새로운 문제들을 만들어 냅니다.

 

장기를 이식해서 병자를 치료할 수 있게된 인간은 이식할 장기가 부족해지지 산사람을 죽여서 장기를 적출하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그래서 장기이식용 인간을(?) 만들려고 하는 또다른 시도가 행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또 다른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가 생기겠지요.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경건을 잃어버린 인간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뚫었다고 생각하는 하늘은, 바벨의 꼭대기는
신으로 통하는 문이 아니라 혼란과 비극으로 통하는 멸망에의 문이라는 사실을 명심합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시하신 명령은 하나님이 우리를 억압하고 괴롭힐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앞으로도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가장 좋은 상태가 되도록 하시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이야 말로 전지전능하신 신이기 때문이지요.

 

3.경건에 형제우애를
여기서 말하는 형제는 혈육을 의미하기 보다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를 말합니다. 그래서 형제우애는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계명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야 말로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계명이지요.
형제를 사랑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형제를 있게 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고 형제의 모습 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또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경건할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형제를 사랑하라는 당부를 하는 것입니다.
절제에 인내, 인내에 경건까지를 더해서 자기 자신이 완비된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자기의 완비된 상태에서 남을 사랑하는, 남에게 영향을 미치는 적극적인 상태로 나아가야 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눈에 보이는 형제를 미워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
그 형제를 형제되게한 하나님은 미워하면서 형제를 사랑한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서로 형제되었는데 이제 하나님을 빼고 형제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형제우애는 형제에 대해서 애정을 가지고 따뜻하게 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베드로가 경건에 형제우애를 더하라고 한 것은 당시 초대교회 신자들 중에서는 경건이 어떠한 외부활동도 없이 , 심지어 형제도 돌아 보지 않고 자기만의 내면세계에 갇혀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하나님의 말씀이면 되지 무슨 빵이 필요하냐고 생각한 경건파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베드로가 경건에 형제우애를 더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도 반드시 먹어야 살고 먹는 것 말고도 성도에게 이 땅의 삶에서 필요한 것들은 많이 있습니다. 더하여 경건한 삶이 가난한 삶을 의미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가령 내가 경건한 태도를 유지한다고 형제들과의 인사를 생략하고 심지어 아는체 하지도 않고 마치 없는 사람처럼 안면을 경직시키고 입을 다물고 있다면 이것도 형제사랑이 아닙니다. 변화산 위에서 하나님을 만났다면 우리는 산 아래에 있는 현실의 삶을 사는 이들에게 관심을 가져야합니다.

 

금식과 단식을 밥먹듯이 하는 경건한 성도(?)가 가난해서 굶주리는 형제에게 왜 금식하지 않느냐 왜 단식하지 않느냐라고 이야기하며 그 형제의 굶주림을 간과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예수를 잘못 믿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형제들이 서로 사랑하며 하나님이 주신 시간과 건강과 물질 속에서 서로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형제가 서로 연합하여 웃으며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경건을 이유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는 제대로된 신앙이 결코 아닙니다.

 

4.형제우애에 사랑을
처음 ‘믿음에 덕을 더하라’로 시작된 베드로의 엄청나게 수많은 요구는 이제 사랑을 더하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사랑은 우리가 잘 아는 ‘아가페’를 말합니다.
이 아가페사랑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세상에 보여주신 것으로 전적인 희생을 내포하며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부터 시작하는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 것이 합당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에 여러 가지 기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기준에 따라서 행동해야 할지를 생각해 본다면 바로 이 아가페사랑이 우리 삶의 궁극적인 기준이 될 것입니다.

 

성경에 없는 어떤 일이 있습니다. 세상의 도덕과 법률에 위배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딱히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지침도 없습니다. 그때는 우리가 ‘이것이 과연 하나님의 사랑에 합한 것인가?’를 따져보고 하나님의 사랑에 비추어 해야 되겠다고 생각되면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죄를 짓는 것은 아닌데 하나님의 사랑에 비추어 좀 마음에 꺼리는바가 되면 해서는 안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삶과 행동의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처음과 끝이 되시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우리 성도들이 갖추어야 될 가장 중요한 덕목은 믿음과 사랑입니다. 덕과 지식과 절제와 인내와 경건과 형제우애를 더한 성도가 마지막으로 더해야 할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믿음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므로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 당연한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
믿음과 사랑은 결코 뗄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대로 행한다면 우리는 이 땅에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지 않을 수 없고 그러한 사랑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빠진다면 이야말로 허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5.소경은 보지 못한다
우리네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베드로가 말한 여러 가지 덕을 완벽하게 다 갖추는 것은 사실상 어렵습니다. 물론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세상에 발을 딛고 산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만만하지 않기 때문에 성경이 요구하는 여러 덕목들을 온전히 실천하는 것이 참으로 힘이 들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갖추지 못한다면 성경의 표현대로 소경이되는 것입니다. 요즘 성경에는 시각장애인들의 주장을 반영하여 ‘맹인’으로 되어 있는데 뭐 이름이야 어떻든 간에 앞을 보지 못한다는 거지요.
성경에서 말하는 맹인은 진리 보기를 거절하거나 보지 못하는 자들을 은유적으로 표현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소경은 아예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눈앞만 보고 멀리 보지 못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영적으로 어두운 세상에서 영안이 열려 있지 않기 때문에 죄악으로 어두워진 세상을 멀리 바라보지 못하고 오로지 눈앞의 것으로만 보며 이를 보고 근심하고 탄식하며 욕심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정신 바짝 차리고 세상에서 살아나가려고 해도 결코 이 세상을 보지 못합니다. 겨우 눈앞만 바라보다가 결국은 우리를 향해 오는 어려움과 장애를 보지 못할 것입니다. 스스로 빛이 되지 못했기에 어둠을 밝히지도 못하고 스스로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사실상 캄캄합니다. 사탄의 공중권세 잡음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하나님의 빛과 차단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에게 속하지 않고 하나님에게 속한 성도들에게는 여러 가지 장애가 놓여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삶을 어둡게 할 것들이 널려 있습니다. 이때 성도는 마땅히 영안을 뜨고 하나님이 제시한 길을 보며 하나님을 믿음으로, 사랑 가운데 인내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조금 앞에 있는 승리가 보이지 않으므로 낙망하며 탄식하는 것입니다. 이 어둠이 언제 끝날지 알지 못하여 광명에의 발걸음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도 좌절하여 그 자리에 주저앉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영안이 열려 있다면 우리의 눈앞에 있는 장애 뒤에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승리가 멀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지만 우리의 영안이 열려 있지 않기에 우리는 가까이 다가온 하나님의 자비와 승리를 보지 못하고 두려워하며 불안에 떨고 있는 것입니다.

 

머지않아 하나님이 주신 영광의 빛이 어둠을 몰아내고 우리를 비추일 것이며 우리는 그 하나님의 품안에서 승리할 것을 믿읍시다. 하나님의 빛과 우리를 막는 것은 우리의 죄악입니다. 우리가 그 죄악을 회개하고 하나님과 나사이의 벽이 허물어 진다면 그 놀라운 빛에 우리가 거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죄 때문에 사이가 멀어졌던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고 얼마던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저하지 말고 주님 앞으로 나아갑시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자기의 피를 흘리셨음을 알고 믿읍시다. 그를 앎으로 하나님의 평강과 은혜에 참여합시다.

 

승리에의 소망을 가지고 믿음에 덕과 지식과 경건과 절제와 인내와 형제우애와 사랑으로 무장함으로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여 최후의 승리를 쟁취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4년 6월 29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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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자기만 아는 성도이기 보다는, 타인을 생각할 수 있는 성도. 나만 구원받고 잘 살면 되는 것이 아니라, 너의 고통을 함께 아파할 수 있는 성도. 그래서 종종 목사님은 교회를 두고서, 운명공동체 라는 말을 사용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우리가 같은 운명이고, 같은 배를 타고 있다면, 서로가 도와가면서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격려하고, 돌아보고, 일으키는 것. 그런 소소한 바람들이 이루어지는 교회가 된다면, 얼마나 멋있을까. 싶었습니다.

 

베드로의 마지막 부탁은, 다른 것이 아니라, 결국 성도들이 서로 도우면서 힘내어 살아가는 멋진 교회를 만들어 가자, 우리가 그 몸이 되자 라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오늘은 짧게 여기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