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4년 8월 10일 주일 예배
민족의 파수꾼으로 세웠다 (에스겔3:16-)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더구나 세상이 점점 물질중심으로 변하고 사람의 도덕수준이 땅에 떨어지고 개개인이 양심이 마비되어 가는 세상에서는 제대로 사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그것은 일반 평신도뿐만 아니라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그대로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왜냐면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그렇게 살지 않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임을 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심판이니 저주니 징벌이니 하는 이야기는 누구도 좋아 하지 않습니다. ‘나는 너무나 깨끗하게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 저는 심판이 전혀 두렵지 않습니다. 저는 거리낄 것이 전혀 없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법대로는 살지 않으면서 복은 받기를 원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아서 오히려 벌을 받을 것이라는 말을 한다는 것은 섶을 지고 불로 뛰어드는 격입니다. 한자로는 명약관화. 그런 말을 하고나면 결과는 너무나 뚜렷합니다.
인간관계가 엉망으로 꼬이는 거지요. 아무도 그런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거든요.
그래서 이 땅의 목사들은 축복의 메시지만을 전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좋아 하거든요.
에스겔이 활동하는 이 시기는 아직 유다왕국이 완전히 멸망한 시점은 아닙니다. 벌써 두 차례에 걸쳐 바벨론의 침공을 받아 휘청대는 유다지만 완전히 명맥이 끊어진 것은 아닙니다. 아마 본토에서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눈물로 회개를 외치고 있을 것 입니다.나라의 멸망을 막으려고 혼자서 눈물로 회개를 외치고 있겠지요.
이미 유다의 모든 땅은 다 뺏기고 예루살렘성만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마치 후삼국시대 신라가 경주 일대만 유지하고 목숨만 붙어 있는 상황과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도 군대가 있어서 지켜내는 것이 아니라 고려와 후백제가 서로 견제하기 때문에 잠시 힘의 공백상태속에서 잔명을 부지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유다도 바벨론과 애굽의 힘겨루기 속에서 겨우 버티고 있는 상황입니다.
에스겔이 살던 갈대아 그발 강가는 바벨론의 포로가 된 유다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던 곳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았고 그래서 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들이 포로가 되기 전에는 유다의 귀족이거나 부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교만했고 지금도 여전히 오만합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히 자신을 내려놓지 않습니다. 자기의 잘못에 대한 질책보다 오로지 거짓으로 위안이 되는 축복의 메시지만 들으려 합니다.
복을 받기 위해서는 자기의 행동을 바로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행동은 그대로면서 오로지 복만을 받기 원합니다. 위로만 받기 원합니다. 괜찮아 괜찮아, 하나님이 복 주실거야! 지금의 어려움이 곧 끝이 나고 복된 나날이 올거야.
그래서 에스겔 선지자가 아무리 좋은 말을 해도 유대 포로들은 결코 회개하고 하나님앞으로 돌아 오지 않을 겁니다.
1차와 2차의 포로들이 잡혀 오고 난 다음 이제 시기상으로 최후의 이스라엘 왕국인 남 유다가 멸망하기 직전입니다. 동족인 북쪽의 이스라엘 열지파는 이미 망해서 포로가 되었고 흩어졌습니다. 이방인들과의 혼인정책으로 혼혈인들이 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겨우 남쪽 왕국 유다의 일부입니다. 유다도 이미 나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졌습니다. 저들의 멸망은 이미 정해졌고 오늘 내일하는 순간입니다.
이 순간에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민족의 파수꾼으로서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파수꾼은 뭐하는 사람입니까?
위험이 닥쳐 오는지 아닌지를 지켜보고 경고하는 사람입니다. 사실상 사람들은 파수꾼을 믿고 편안히 쉬며 일상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파수꾼이 잠들거나 임무를 소흘히 한다면 위험이 번개처럼 닥쳐왔을 때 아무도 그 위험을 경고하지 않게 될 것이고 무방비 상태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비참한일을 당하게 될 것이며 공동체는 멸망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주님의 명령, 파수꾼으로 세우겠다는 이 말씀은 과거 에스겔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닙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목사나 성도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들 각자는 모두 각자 각자 속한 공동체를 위한 파수꾼으로 세워졌습니다. 크게는 나라와 민족의 파수꾼으로 작게는 가정의 파수꾼으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물론 지역사회나 교회의 파수꾼으로 부름 받은 이도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각각의 위치에서 하나님의 파수꾼으로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위험을 경고하고 방지해야 할 책임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목사나 성도들은 하나님의 주신 시대적 징조를 잘 해석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뭔가 말씀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내리신 징조를 영적으로 제대로 해석해서 구성원들에게 경고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려고 하면 당연히 영안이 열려 있어야 하고 영안이 열려있기를 원한다면 성령의 충만을 힘입어야 합니다.
목사는 교인들과 교회전체의 파수꾼이며 성도들은 각 가정과 사회의 파수꾼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은 이 말세지말을 당하여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제대로 파악하고 믿지 않는 세대에 경고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왜냐면 우리가 여기 바로 이 공동체에 발을 딛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그 경계의 말을 듣느냐 않느냐에는 너무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명확하게 하나님이 주신 징조와 말씀을 패역한 세대에 전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실상 하나님은 패역한 세대가 에스겔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리라는 것을 아시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겔에게 말씀을 전하라고 하신 이유는 환난의 날에 변함없이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고 너희가 단지 듣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을 보여주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1.칠일 후에
오늘 본문에 보면 에스겔은 칠일동안 하나님의 어떠한 말씀도 전하지 않고 그냥 앉아 있었습니다. 이 칠일동안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어떠한 말씀도 주시지 않고 그로 하여금 마음을 추스릴 시간을 주신 것입니다.
15절에 보면 에스겔은 유다의 포로민들이 거주하는 델아빕에 이르러 그들 사이에서 두려움에 떨며 칠일을 지냈다고 합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유다의 포로민들을 위한 선지자로 에스겔을 세우셨고 그에게 전할 말씀을 입에 넣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선지자가 칠일동안 아무말도 전하지 않고 지내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휴식기간이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휴식하고 몸과 마음을 추스린 후에 우리는 분연히 일어나서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 중에서 ‘두려워 떨며 칠 일을 지내니라’는 말씀은 에스겔이 동족의 죄악이 너무 심하여 깊은 충격과 좌절, 낙담에 사로잡혀 두려워 떨며 지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죄악을 저지른 백성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진노가 너무나 명확하기 때문에 에스겔은 말문을 닫고 두려움에 떨며 칠일을 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침묵의 기간을 꼭 칠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칠은 완전수를 말하므로 반드시 칠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또는 한동안 에스겔이 동족의 죄악상에 놀라는 일에서 마음을 추스르고 새롭게 결심하고 일어날 동안으로 보아도 좋습니다.
‘이대로는 안된다. 그러나 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데 어찌 할까?’라는 마음으로 넋 놓고 앉았을 수도 있고 동족들의 삶의 현장에서 보고 들은 것으로 인하여 기가 막혀서 말을 잃은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저들의 죄상이 생각했던것보다 너무나 심각하고 상태가 완고하기 때문에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여하튼 에스겔은 이렇게 칠일을 있었고 하나님도 그 동안 에스겔을 일으켜 세우지 않으셨으며 그에게 새로운 말씀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이 너무 큰 충격에서 회복하도록 시간을 주신 것입니다.
칠일 후에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이 에스겔에게 임했습니다.
2.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에스겔은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지만 이제 구체적으로 파수꾼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에스겔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동족들을 깨우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원문을 조금 더 정확하게 번역한다면 ‘나로부터 오는 경고를 그들에게 주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들을 일깨우라는 말입니다. 깨우친다는 말은 빛이 번쩍인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말을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은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의 영적인 상태가 캄캄한 암흑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은 어때요? 우리 나라의 영적인 상태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징조를 제대로 볼 수 없을 만큼 캄캄하지 않나요?
우리의 작은 불빛만으로도 훨씬 밝아질 만큼 어둡지 않나요?
그렇다면 이제 저들을 깨워서 제대로 보게 해야 합니다. 이대로 가면 멸망할 것이라는 경고의 메시지를 제대로 전해야 합니다.
파수꾼은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를 제대로 해석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에게 제대로 알 수 있게 전하여 주는 것입니다. 악인에게 ‘(네가 악에서 돌이키지 않고 이대로 계속 악하게 간다면 )너는 꼭 죽으리라’는 말을 해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악인을 죽인다는 말을 하는게 파수꾼의 책무는 아닙니다.
오히려 악인을 회개하게 해서 그 악한 길에서 돌이키게 해서 이들을 살리려고 하는 사랑의 시도가 바로 파수꾼의 주 임무인 셈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고자 선지자에게 파수꾼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파수꾼의 역할을 맡은 이들은 많이 있습니다.
군인이나 경찰, 신문이나 방송의 기자, 사상가, 그리고 종교인. 특히 목사는 시대의 양심이 되어야 합니다. 물질만능에 쾌락위주의 삶에서 홀로 하나님과 영교하기위해 깨끗해야 합니다. 돈이니 권력이니 하는 것에 대한 욕심은 물론이고 명예에 대한 욕심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사회를 향한 파수꾼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공동체의 파수꾼이 될 수 있습니다.
만일 악인이 파수꾼의 경고의 말을 듣고도 행치 않아서 죽게 된다면 파수꾼에게는 하나님이 아무 책임도 묻지 않겠지만 만일 이 말을 하지 않아서 죽게 된다면 하나님이 파수꾼에게 핏값을 찾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내가 그의 죽음에 대해서 너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악인에게 죽음을 경고하여 그에게 돌이킬 기회를 주고 그로 하여금 다시 살아나도록 하려는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이 일을 우리가 담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성도들의 안위를 책임지고 우리 성도들은 민족 앞에 파수꾼의 책임을 감당해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인을 깨우칠 의무를 우리에게 지우셨지만 또 한편 의인이 자기의 의를 계속 지켜나가게 하는 책임도 우리에게 지우셨습니다. 지금 의인이지만 그가 악하게 되어서 멸망하게 되면 그 책임을 져야 한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의로운 이는 그 의로운 길을 계속 잘 가게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3.파수꾼에게 주어지는 댓가
이거 뭡니까? 믿는 성도가 파수꾼으로서의 책임만 잔뜩 지고 이에 대한 보상은 없나요?
글쎄요, 안타깝게도 본문에서 이러한 파수꾼에게 주어지는 보상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일시적으로 에스겔의 입을 봉하시고 그로 하여금 집안에서 칩거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꾸짖지 못하게 하십니다. 웃기지요? 그러나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버림을 의미하며 에스겔을 보호하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맞아 죽더라도 너는 나의 말을 이스라엘에 전하라는 계시라면 이는 에스겔에게 너무 잔혹한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유대가 멸망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바람에 국사범을 가두는 지하웅덩이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살해의 위협도 당했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대신에 혹시라도 대적들이 에스겔의 꾸짖는 말을 듣고 그를 죽이려 할까봐 입을 봉하신 것입니다.
처음 자기들을 꾸짖는 소리가 너무 싫어서 귀를 막고 악을 계속 행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회개시키려는 생각을 포기하고 그들을 멸망으로 내어주게 됩니다. 일단 하나님의 때가 되기 시작하면
멸망의 카운트 다운에 들어가기 시작하면
하나님은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니라 자기의 파수꾼들, 자기의 종들을 보호하시려고 이들의 입을 봉하시고 사람들을 꾸짖지 못하게 하시는 단계로 나가게 됩니다.
그러면 이들은 자기들의 귀를 거슬리게 하는 선지자를 해하지도 않을 것이고, 자기들의 악행을 비난하는 소리도 듣지 않고 ‘그래도 좋아 그래도 돼’라는 축복의 메시지만 듣다가 때가 차면 멸망에 이르도록 하시려고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까 제가 하나님의 일을 위해 핍박을 무릅쓰고 파수꾼의 책임을 다하는 자들에게 어
떤 보상을 주시느냐고 물었지요?
바로 기록에는 없지만 성경이 말하는 의미는 자신의 종,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는 파수꾼들에게 그 생명과 그 기업을 보호해 주신다는 것을 보상으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공동체가 멸망할 때 그 멸망에서 벗어나기가 사실상 어렵습니다. 나라가 망하고 외적이 쳐들어 와서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을 죽이고 있을 때 그 위기의 순간에 목숨과 재산을 구원받는 일은 보통의 기적이 아니고는 어렵습니다. 배가 가라앉을 때 그 와중에 혼자서만 살아 나오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하나님은 자기의 종을 보호하시기 위해 그 입을 닫아 꾸짖는 말을 못하게 하신다는 것을 보면 하나님은 자기의 자녀, 자기의 일꾼을 보호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보상이 너무 작아요?
그렇지는 않지요. 환난에서 나를 건지시고 나로 하여금 살길을 허락하시는데 목숨을 건져주시는데 그게 결코 작은 보상은 아닙니다. 무시무시한 살육의 시대에 예레미야도 다니엘도 그 세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도 어떻게 구원받았는가를 보시면 답이 나옵니다. 죽지 않고 산 것도 굉장한데 그를 높이셔서 그에게 새로운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보면 우리에게 주어질 보상이 짐작되어 집니다.
설령 보상이 없다 하더라도 우리가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하지 않을 도리는 없지요. 어쩌면 하나님은 부패한 전체 공동체보다 그 안에서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자기의 일꾼들을 더 소중하게 여기시며 사랑하시는지도 모릅니다.
4.들을 자는 들을 것이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백성들에게 철두철미하게 경고하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들을 악의 길에서 돌이키게 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내가 준 말을 전하면 들을 사람은 듣고 듣지 않을 사람은 안들을 거다’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들은 ‘반역의 무리’라서 원래 그렇다는 겁니다. 다만 너는 저들에게 내가 전한 말을 전함으로 이 어려운 때에 내가 저들을 버리지 않고 저들이 살아날 길을 제시했음을 증거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거면 족하답니다.
이제 우리 얘기를 한번 해봅시다.
오늘 하나님이 우리들의 입에 말씀을 넣어 주시고 이 말씀을 안믿는 이들에게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예수 믿도록 전도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럼 무슨 말을 하느냐 하면 악인의 길로 계속 행한다면 궁극적으로 너희가 죽으리라는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악한 길로 계속가면 결국 나라가 멸망하고 그때는 함께 불에 탈것을 말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계속하면 결코 너희가 제대로 살아날 수 없다는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만간 위험이 닥쳐 올테니까 너희가 파수대위에 서서 위험이 언제 오는지 지켜보고 경고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파수꾼이 성을 지키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단지 파수를 볼 뿐입니다. 위험이 닥쳐올 때 이를 먼저 알아채고 성안의 사람들에게 경고함으로 파숫꾼의 임무는 끝이 나는 것입니다.
파숫꾼이 직접 칼을 들고 적으로부터 성을 보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할 수도 없습니다. 단지 그는 성에 닥쳐오는 위험을 파악해서 성안에서 아무 방비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것입니다.
나라에도 교회에도 가정에도 이러한 파수꾼이 필요합니다.
나만은 깨어서 나라와 교회와 가정을 위해서 위험이 혹시라도 닥쳐 올까봐서 경계하며 살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에스겔 선지자는 선지자로서 민족이 파수꾼으로 부름받았습니다. 이미 망해가는 나라
이미 포로로 끌려온 백성들 사이에서 아직도 그에게 남아 있는 임무를 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제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민족의 파수꾼으로서의 임무를 주셨습니다. 참고로 파수꾼은 위험을 누구보다 먼저 발견하고 경고할 수도 있지만 우리를 위하여 오는 도움을 가장 먼저 발견하고 이를 전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은 목사건 평신도건 다 하나님이 세우신 민족의 파수꾼입니다. 그래요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의 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악과 혼란이 판을 치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준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악행이 영적 무질서와 도덕적 타락이 지속되면 머지 않아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파수꾼입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법을 기준으로 삼아 세상을 향해 경계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4년 8월 10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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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8월의 두 번째 설교문인데, 역시나 강한 메시지가 가득합니다. 회초리를 맞는 듯한 기분도 느껴집니다. 만약 주님의 매가 있다면, 그의 사랑의 매는 분명히 우리를 선한 길로 이끌게 하는 회초리에 가까울 것이라 생각합니다. 흔히들 21세기를 다원주의 사회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양한 원이 있고, 다양한 세계가 있어서, 서로의 영역을 존중해야 한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 목사님이 절에 가서 설교하기도 하고, 그 반대도 있고......
그런데 홍종일 목사님은 예전부터 이러한 움직임을 매우 경계하였습니다. 저는 지나치게 보수적인 시각을 가진게 아니냐며, 따져물었던 적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따져보면, 그만큼 성도는 스스로의 오만함을 내려놓고, 성경적인 원칙을 중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 좋아하던 찬양 시편 8편의 표현을 빌려오면,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기억하시고, 지키신단 말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오늘날 너무나 오만해져서, 순수한 사람은 바보로 놀리기 까지 하고 있으니......
어떤 나라든 망하기까지의 징조가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많은 나라들이 망해왔고, 새로 등장해 왔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아시아의 일등별로 빛나기 위해서는 더욱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는 멋진 강국이라는 오판이 우리를 병들게 해왔다면, 지금부터는 할 수 있다는 강한 자부심으로 무장해서, 앞을 향해서 성큼 나아갈 수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타인의 아픔을 들을 수 있는 자신감이 있기를, 그래서 눈물 짓는 일을 넘어서, 함께 더 나아가기를...
그런 조용한 기도가 어울리는 오늘의 설교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