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시작하기 전에(마태4:1-)/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5. 1. 4. 17:35

 

시작하기 전에 (마태4:1-)

 

이제 새해가 밝았습니다. 마치 꿈결같이 2015년이 왔습니다. 돌이켜보면 예전에 2010년이 넘어 가면 인류의 생활이 완전히 달라져서 공상 과학만화처럼 된다는 생각을 한 적도 많았습니다.
집집마다 로봇트가 인간을 대신해서 일을 하고 자동차는 땅이 아니라 하늘을 날고 음식은 각종 영양소를 모아놓은 알약으로 대체되고...

 

그러나 조금의 차이는 있지만 인간의 삶은 여전히 크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비가 오면 우산을 쓰고 추우면 두꺼운 옷을 입고 불을 필요로 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조금씩의 변화를 느끼고 있습니다.
무슨 변화냐?
우리네 삶의 환경이 조금씩 나빠진다는 것이지요.

 

분명히 세상은 변화하고 진보하는 것 같은데 인간의 삶의 질은 나빠집니다. 우리는 한때 세월이 흐를수록 인류의 삶은 무조건적으로 좋아진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고 오히려 인류의 삶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다고 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특히 정신적인 황폐함은 심각한 지경입니다.
장기밀매라는게 생겼지요
드디어 이 땅에도 인육 캡슐이라는게 등장했어요
이혼이 보편화되었고 우울증과 암은 무슨 감기처럼 흔해 졌습니다.

 

아예 가정을 가지려고 하지 않는 이들도 많아졌고 여건상 가정을 가질 수 없는 이들도 많습니다. 골목마다 바글거리며 떠들고 놀던 아이들의 목소리는 이제 들리지 않습니다. 한국은 점점 늙어지고 있고 활력을 잃었습니다.
그런가하면 동성애자들이 공공연히 자기들의 권익을 운운하며 데모를 하고 조금씩 조금씩 자기들의 목표를 이뤄가고 있습니다.

 

한국인이라는 생물학적인 종은 이제 종말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누구도 이러한 추세를 되돌리기는 어렵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 먼 남의 나라 이야기 같습니다.
그런 한편으로 숫자가 줄어져 가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갑을간의 싸움이 한창입니다. 얼마 남지 않은 먹이를 가지고 서로 먹기위해 피터지게 싸웁니다.

 

이제 금수강산이란 말은 정말 아득한 옛말이 되었습니다. ‘뭐를 물처럼 쓴다’는 말도 이제는 없어질 것 같습니다. 우리는 물을 돈을 주고 사먹습니다. 심지어 마시지 못하고 그냥 사용하는 물에도 돈을 냅니다.
발암물질 덩어리인 시멘트로 지은 집에 들아가서 살고

방사능 덩어리인 수산물을 먹습니다.

 

각종 맛을 내는 첨가제는 각종 유해논란의 와중에 있습니다. 짐승들의 사료인 유전자 조작 옥수수는 인류의 건강에 치명적일 확률이 매우 높음에도 불구하고 거대 자본의 조작에 의해 계속해서 널리 퍼지며 재래종의 건강한 먹거리를 몰아 냅니다.
예전에는 없었던 황사현상이 이제는 당연하게 되었습니다. 공기 중에 떠도는 각종 분진과 유해물질은 우리네의 건강을 점점 위협합니다.

 

예전에는 공기와 물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공기와 물도 경제적인 형편에 따라 사람을 차별합니다.
우리네 삶에서 필수적인 전기는 한편으로는 인류의 생존자체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전에 당연히 누렸던 것을 누리기위해 엄청난 돈을 지불합니다. 심지어 목숨을 담보로 삶의 질을 유지합니다. 그러나 사정은 점점 더 나빠집니다.

 

이렇게 인간의 삶이 나빠지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개와 고양이같은 짐승들의 권익은 높아 지고 있습니다. 자기 자식을 문 개를 차에 메달고 달려서 상처를 입힌 이에 대해서 개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차에 메달고 달린 사람을 비난합니다. 그것도 압도적인 비율로. 사람이 사람보다 개를 더 걱정합니다.
물론 그 사람은 나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만일 그 개가 자기의 부모나 자식을 물었다면 가만있지 않을 사람들이 남의 자식이 다친 것에는 전혀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습니다.

 

막장을 치는 아침드라마는 최고의 시청률을 자랑하고 있고 막장이 아니면 아예 쳐다 보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언론은 연일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보도를 쏟아 냅니다.
우리는 이것을 인간의 이기심이 만들어낸 추악한 욕망이 가져온 비극이라고 할 수도 있고
돈을 섬기는 물신주의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결국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이대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처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인간이 가졌던 가장 처음의 상태로 되돌아 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던 상태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새해를 맞이하면서 이 본문을 다시 한번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세례를 받고 광야로
오늘 본문의 앞에서 주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먼저 요단강으로 가셔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죄를 씻는 의식인 세례는 주님에게는 전혀 필요가 없는 것임에도 그는 기존의 전통을 따라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이때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셨고 예수에게 임한 성령은 주를 광야로 이끄셨습니다.

 

참고로 저는 광야를 우리네의 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막에 귀신이 산다고 생각했고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려고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사막에서 수도생활을 했습니다. 심지어 세례 요한도 사막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본문의 광야가 사막이지요.

 

물도 없고 나무도 없는 곳, 듬성 듬성 풀이 조금 나있고 때때로 관목이 조금 있는 곳을 우리는 사막으로 봅니다. 여기에 사람들은 살지 않고 유목민들만이 양떼를 몰아서 다닐 뿐입니다. 세상과 격리되어 하나님께만 집중하기에 적합한 장소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사막은 없습니다. 대신에 산이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스라엘의 광야가 우리네 산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께 집중하기위해 가끔씩 산으로 갑니다. 기도원이 아니라 야산에 가서는 한적한 곳에서 몇날 몇일을 침낭 속에서 자면서 기도합니다. 그러다가 세상으로 내려오면 정말 세상이 새롭습니다.

 

성령께서 예수를 이끌어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곳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게 하시려고 한 것입니다.
예수는 먼저 사막에서 40일간을 지내시면서 금식하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공생애를 시작할 수 있는 영적인 힘을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착각하는게 있는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자연적으로 예수님은 성령이 충만해서 이적을 막 베풀고 놀라운 권능을 행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당연히 그럴 수도 있겠지만 성경은 다르게 말합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기전에 이적을 행하신 기록이 없습니다.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 가정경제에 도움을 주기위해 돌로 떡을 만들거나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서 제공한다면, 팔지는 않고 자기 가족들의 먹거리로 제공한다고만 해도 부모님들의 짐을 얼마나 가볍게 할 수 있겠습니까?
갈릴리 바다에 가서 물고기를 엄청나게 잡아서 판다면 또 얼마나 부자가 되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식의 기사는 보이지 않습니다. 단지 12살에 성전에 가셔서 성경공부 열심히 한 기사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은 공생애 전에 이적을 행하시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 기사가 없거던요.
그러므로 주님의 이적은 공생애를 시작하신 후입니다. 가나의 친척 혼인잔치에 가셔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게 제일 첫 번째 이적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이적을 행하신 능력은 사막에서의 금식기도 부터입니다. 물론 엄밀히 따지면 세례를 받고 나서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셨다는 기사가 있지만 그 직후에 성령에 이끌리어 사막 안으로 들어가서 기도하신 거지요.
이 40일의 금식기도가 예수님을 능력의 구주로 만든 것입니다. 흔히 소설에서 말하는 각성? 내속의 능력을 깨닫고 드러내는 것?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꼭 예수님이 마귀의 시험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그냥 의례적으로 통과해야 하는 관문입니까?

 

글쎄요, 오늘 본문의 내용을 보면 그걸 시험이랍시고 찾아온 마귀가 불쌍해 보일 정도로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을 간단하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칩니다. 그런데 그 과정을 주님이 아니라 우리가 겪는다고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정말 놀라운 것들이 그 안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1.마귀는 디아블로스다.
먼저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 예수님에게 제일 첫 번째로 꺼낸 문제가 바로 돌덩이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한 것입니다. 누구의 소유도 아니고 아무 쓸모도 없는 돌맹이로 떡 한덩이 만들어 먹는게 무슨 큰일입니까?
절대로 큰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왜 하필이면 마귀가 주님에게 떡을 만들라고 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건 예수님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황금이나 보석이 아니라 바로 떡 한덩이라는 것을 마귀가 잘 알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주님이 40일동안 금식하며 기도했기 때문에 엄청나게 배가 고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요, 마귀는 우리에게 무엇이 약점인지를 정말 잘 알고 있습니다. 굶주린 자에게는 먹을 것으로 파고들고

 

돈이 없는 이에게는 돈으로
명예에 목말라하는 이에게는 명예로
여자를 좋아하는 이에게는 여자로 유혹합니다.
권력을 좋아하는 이에게는 권력으로 시험합니다.

 

이렇게 마귀는 어떻게 하면 우리를 가장 효율적으로 굴복시킬지를 알고 있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유혹에 넘어지기 쉽습니다. 시험인줄 뻔히 알면서도 방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것은 결국 인간의 욕망이 불러오는 유혹입니다. 마귀는 실제로 우리에게 실제적인 위해를 가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 속해 있으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한 몸이므로 마귀는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우리를 손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디아블로스는 ‘중상하는 자’라는 말입니다.‘ 참소하는 자’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죄를 보고 이를 살짝 비틀어서 하나님에게 우리를 내어줄 것을 요구합니다.

 

“하나님, 당신은 공의의 주재이십니다. 그러므로 죄가 있는 자는 벌을 받아야 되는데 저 사람은 당신의 법을 어겼습니다. 그러므로 저 사람을 저에게 내어주십시오. 제가 저 사람에게 하나님의 법도를 가르치겠습니다” 라고 한다면 공의의 하나님은 거부하실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 죄인입니다. 단 한번도 크든 적든 죄를 저지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설사 죄를 짓지 않은 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아담의 후손으로 원죄 아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인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고통아래 떨어질 , 죽을 운명에 처해진 이들입니다.
그걸 해결하기 위해 주께서 오신 것이지요.

 

2.이적은 누구를 위함인가?
왜 주님은 사탄이 떡 한덩이를 만들어 먹으라고 하는 것을 거절하셨지요? 인간이 비록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하는 것은 맞지만 육신을 가진 한 우리는 떡도 필요합니다. 더구나 오랜 굶주림 끝에 사막에서 아무도 보는 이가 없는데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권능을 발휘해서 민생고를 해결하는 것이 그렇게 큰 일일까요?

 

아닙니다. 더구나 유대의 떡이나 돌맹이나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내가 권능으로 떡 한덩이를 만들어 먹는다고 누가 피해를 보는 일도 없습니다. 오히려 떡을 먹음으로 힘을 차리고 주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으니까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 시험을 물리칩니다.

 

먹을 수 있는 떡과 먹을 수 없는 돌덩이는 엄연히 다릅니다. 다른 것을 다르게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깨지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을 아버지와 동등됨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질서에 순종하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잘 보시면 주님은 그의 공생애 기간 동안 단 한번도 자신을 위하여 이적을 행하신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그 십자가의 수욕을 당하실 때도 아버지에게 기도하셨지 직접적으로 이적을 행하심으로 십자가 고난을 물리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사는게 얼마나 큰 일입니까?
바람과 파도도 순종하게 하는 이능은 또 얼마나 굉장합니까?
자기를 위하여는 떡 한덩이를 만들지 않았지만 배고픈 백성들을 위해서는 오천개도 넘는 떡덩이와 수천마리의 물고기를 만드신 주님이십니다.

 

이적은 교회의 건덕을 위해서 주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걸로 이적팔이를 해서 빌딩사고 큰 건물을 지으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걸로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서 대신 영광을 받으라고 주신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자신을 위하여 떡 만들기를 거부하신 것입니다.

 

3.인간의 허영심을 자극하다
다음으로 마귀가 잘 쓰는 수법이 뭡니까?
마귀는 시험의 첫머리에 항상 이런 말을 붙입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하라”
마귀는 주님의 허영심을 자극하려 합니다. 인간적인 욕구를 이기신 주님에게 이제는 보다 고차원적인 것으로 시험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럼 보여봐라.”

 

우리 믿는 성도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드러내고 싶습니다. 자랑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힘으로 이런 이런 멋진 일들을 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로 내가 승리하고 출세하고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나는 출세하지 못했고 성공하지 못했고 승리하지 못했다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나에게는 너무 큽니다. 그를 믿는다면,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지켜봅시다.

 

4.하나님을 의심하게 하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매우 간단합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보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귀에 들리거나 그분의 모습을 직접 내가 보지 못한다고 해서 내가 아버지의 법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인 성경66권이 있습니다. 나는 육신의 눈을 떠서 말씀을 읽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것을 하고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을 하지 않습니다. 네가 이렇게 하면 내가 이렇게 해주겠다고 하신 약속의 말씀들이 성경에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렇게 준행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고 나아가 하나님의 존재에 회의를 느낍니다.
그가 계신다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본문에서 마귀는 예수님에게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면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고 합니다. 물론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그가 너를 사랑하신다면 발끝하나 상하지 않을거라고 말씀까지 근거로 제시합니다.
네가 뛰어내려서 상하지 않았다면 너는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고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걸 증명하기위해서 뛰어 내리랍니다.

 

하나님까지 시험하게 만듭니다.
성전꼭대기가 단순한 건물 옥상이 아닙니다. 성전 자체도 높았지만 성전의 한편 꼭대기는 사실상 성전밖의 골짜기 아래까지 보이는 곳입니다. 밑을 내려다보면 어질어질할 정도로 높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뛰어 내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네 믿음과 하나님의 사랑과 심지어 하나님의 존재까지도 시험의 대상이 되는 것이지요.

 

5.말씀으로 서로 공방을 주고받다
자, 그런데 웃기는 게 있습니다. 예수님이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실 때 사용하신 것은 물리적인 힘이 아닙니다. 누구의 영화처럼 손에서 거대하고 성스러운 빛이 레이저처럼 나와서 마귀를 물리친 것이 아닙니다. 거대한 바람을 부르고 땅을 흔들어서 마귀를 물리친 것이 아닙니다.
웃기고 맥 빠지게도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칩니다. 그런데 마귀 역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님을 시험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에게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대적에게도 성경말씀은 위력을 떨칩니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우리는 마귀를 일러 ‘세상권세 잡은 자’ 라느니 ‘공중 권세 잡은 자’ 라느니 하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마귀는 천하 만국이 자기의 것이라고 자랑합니다. 원래 이 세상은 아버지의 것이므로 아버지께서 주실 수 있는 것이지 마귀가 줄 수 있는 것은 아님에도 마귀는 이것을 마치 자기 것 인양 자기말만 잘 들으면 자기가 줄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마귀가 하나님이 기록한 말씀인 성경에 기속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지배아래 있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욥기에 보면 나옵니다. 그는 하나님의 궁정에 가서 보좌에 계신 하나님께 참소할 수 있을 뿐이지 하나님의 자녀에게 직접적으로 해악을 끼칠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므로 우리에게 죄가 있다면, 그리고 우리의 죄를 위한 죗값을 대신 지불한 보혜사가 계시지 않는다면 ,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변명해 줄 변호사가 계시지 않는다면 공의의 법칙대로 죄인을 내어주어서 벌을 받게 하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된 우리의 죗값을 위해서 주가 오신 것이고 그래서 그를 믿는다는 것이 복음이 된 것입니다. 믿기만 하면 피로 씻음을 받을 수 있고 다시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그 풍성함을 누릴 수 있다는 소식이 바로 복음이지요.

 

주님은 마귀가 자신에게 경배하면 천하만국을 준다고 하자 ‘사탄아 물러가라’고 강경하게 호통을 치셨습니다. 여기서 사탄은 ‘대적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대적자라는 말이 아닙니다. 사탄은 그럴 깜냥이 되지 않습니다.
다만 아버지께서 세상을 구속할 구주로 보내신 주님의 구속사역을 훼방할 대적자라는 말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것이며 세상 끝날 때까지 때가 차기까지 일시적으로 하나님이 마귀에게 맡겨두신 것입니다. 이제 주께서 이 땅에 오셔서 세상에도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사명, 주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도 역시 이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라는 것입니다. 증인이 되라는 것도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라는 말입니다.
때가 되면 사탄은 결박되어 무저갱에 던져짐을 잘 알기에 그 전에 하나님의 아이콘인 사람들을 미혹하여 스스로 높아 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 부질없는 것이지요.

 

사탄은 피조물이지 창조자가 아닙니다. 그가 부리는 모든 재주도 하나님이 만들어 넣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조주의 아들인 우리가 피조물에게 고개를 숙여서 뭔가를 얻겠다고 한다면
피조물에게 뭔가를 얻겠다고 창조주에게 드려야 할 경배를 드린다면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6.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마귀가 보여 준 것은 천하만국과 그 영광입니다. 이 구절을 우리는 그냥 넘어가기 쉬운데 이 세상에는 영광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은 사실 영광보다 비참하고 억울하며 안타까운 일들이 더 많습니다.
마귀는 주님에게 천하의 영광을 보여주며 네가 온 이 세상은 너무나 영광스러우므로 괜히 ‘이 세상을 구속하네 뭐네’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을 하는 겁니다. 이렇게 좋은 세상에 무슨 구속이 필요하냐?
그냥 이왕 세상에 온 거 한세상 행복하고 즐겁게 살다가 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압니다. 이 세상에 얼마나 비참하고 불행하며 억울한 일이 많은지를 하나님의 빛이 비춰져야 할 곳이 얼마나 많은지를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썩어서 부패해서 냄새가 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에게 어둠을 밝힐 빛이 되라 하셨고 썩는 것을 막는 소금이 되라 하셨지요.

 

이 세상이 비록 물질적으로는 초고도의 문명과 영광을 자랑하는 것 같지만 사람들의 값은 점점 땅에 떨어져만 갑니다.
웃기게도 돈을 빌려 쓰고 갚지 못한 자들을 잡아 장기를 빼내서 팔아먹는 끔찍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과학의 발달은 인간을 이롭게도 하지만 그 인간이 마귀의 지배를 받게 되면 과학으로 인세의 지옥을 만들어 내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한번 터지면 백년이상 사람과 땅과 생물들을 황폐케하는 원자력 발전소에서 나오는 전기를 이용해서 우리는 현대 물질문명의 이기를 즐기고 있습니다. 목숨을 담보로 삶의 질을 유지하는 셈입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의 구속이 필요 없습니까?
구원이 필요 없습니까?

 

겉으로 보기에 화려하면 할수록 그 그림자는 더 큰 법입니다. 그걸 바로 잡기위해서 그리스도의 구속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걸 바로잡기 위해서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가 확대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할 말은 진짜 많지만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가 은혜를 더 사모하면 할수록 마귀의 시험은 더 커집니다. 그러나 그 시험을 이겨야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기의 자녀로 삼으셨는데 이건 말로만 자녀가 아니라 실제적인 보호와 인도를 뜻합니다.

 

세상에 나가서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기도하고 마귀의 시험을 이기신 것처럼 우리가 새해를 기도함으로 시작하기를 바라고 우리의 욕구와 허영심과 정신적이며 영적인 욕망을 이겨내기를 바라며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서 실천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의 왜곡은 마귀의 특기이며 엄청난 차이를 가져옵니다.

 

새해를 기도로 시작하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욕망이 가져다 주는 약점으로 인한 시험을 이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임하게 하신 주님의 뒤를 따라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도록 힘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내 스스로 하나님의 법을 지키며 그의 공의를 실천하는 성도가 됩시다. 하나님은 올해도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의 앞서 가셔서 우리의 길을 대로처럼 열려지게 하시며 놋쇠빗장을 꺾으시고 우리의 길을 평안케 하실 것입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5년 1월 4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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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이번 설교를 올리면서, 데살로니가전서의 쉬지 말고 기도하라 는 이야기가 생각나더라고요. 늘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어떻게 사람이 쉬지 않고 기도할 수가 있을까? 라고 말이지요. 생각해보면, 자주 기도하기를 힘쓰라는 뜻으로 이야기 했던 거겠지요. 먼저 기도하고 시작하고, 기도하고 행동하는 습관은 의외로 참 중요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2015년 새해는 기도와 함께 하는 한 해가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