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처녀 비유 (마태복음25장)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열처녀 비유 역시 주님의 마지막 일주일 안에 성전에서 천국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실 때 나온 것입니다. 주님은 아마 마음이 급하셨나 봅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천국에 관해서 더 알려 주시기위해서 천국에 관한 많은 비유를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비유를 잘 보세요. 주님은 뭐라고 합니까?
천국을 장소나 건물이나 어떤 행사에 비유하는게 아니라 사람에 비유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천국은 장소입니다. 우리가 교회 이러면 건물을 상상하듯이 천국이러면 장소를 생각하지만 그러나 주님은 일관되게 천국을 사람에 비유하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의 열처녀 비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세요.“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혼인잔치도 아니고 신랑의 집도 아니고 신부의 집도 아니고 열 처녀와 같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천국과 주님이 말씀하신 천국은 뭔가 조금 다릅니다.
그래요, 천국은 사람입니다. 천국은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고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못하리니 네 마음속에 있느니라’ 그리고 천국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주님의 통치를 따르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지상에 있는 천국의 모형이라고 합니다. 예배당이나 건물이나 지역이 아니라 사람이 천국입니다.
우리가 흔히 열처녀 비유라고 하는 이 비유에서 열처녀는 신부가 아니라 신부의 들러리입니다. 보통 성도를 ‘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로 비유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신부의 들러리로 나오는 열처녀입니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신부가 아니라 들러리들이 주인공입니다. 분명히 혼인잔치를 배경으로 하는 비유이기는 하지만 신기하게도 신부는 본문에서 등장하지 않습니다. 원래 혼인의 양당사자인 신랑과 신부 중에서 신랑은 등장하는데 신부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신부의 들러리 열명만 나옵니다. 여기서 왜 신부가 빠져 있는 것이지요? 왜 들러리들이 주인공인 것이지요?
십이란 숫자는 유대인들의 관념상 가장 완전한 숫자로 생각되어지는 7과 12와 같이 완전한 수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숫자3과 사람의 숫자4를 합쳐서 7, 그 두수를 곱해서 12. 이 굉장한 숫자들과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이 완전수로 생각하는 것이 바로 10입니다.
우리도 그렇지요. 사람의 생각은 다 비슷한 모양입니다. 우리도 10점 만점을 많이 사용합니다. 더 크게는 10의 10배인 백점도 사용하지요. 그래서 유대인들은 회당의 설립기준을 성인 남자 열명으로 정하고 신부의 들러리도 보통은 열명을 기준으로 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역시 열명의 들러리가 나오는데 아마 신부가 아니라 들러리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신부는 한명이지만 들러리는 열명입니다. 그래서 ‘천국의 대중성’을 이야기하려고 여기서 보다 많은 숫자인 들러리들이 주인공인 것입니다. ‘천국의 대중성’이라고 해서 누구나 다 들어간다는 말이 아니라 한두사람이 아닌 다수라는 의미의 대중성입니다. 결국 천국도 하나의 사회여야 하므로 당연하게 많은 이들이 있어야 될 것입니다.
우리가 ‘천에 하나 만에 하나’란 말을 많이 쓰는데 그래도 천국인구가 천만? 백만? 그런데 이렇게 되면 지금 기독교인의 숫자보다 너무 적은데 이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요? 천에 하나 만에 하나가 관용어구라고 해도 약간 심각한데요. 교인이라고 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이 사실인 모양입니다. 우리 남한만 해도 예수믿는사람이 이단들 빼고 약 700만이니까 세계적으로 따지면 천국에 들어가기가 만만한게 아닌 모양입니다. 그렇다고 너무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건 순전히 제 생각이니까요.
성경은 다섯을 슬기로운 처녀로 나머지 다섯을 미련한 처녀로 묘사합니다. 여기서 슬기로운 것과 미련한 것의 기준은 등불 외에 따로 기름을 준비했느냐의 여부로 나눕니다. 성경본문만 보아서는 이 등이 횃불인지 아니면 등잔불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실외라는 점을 감안하면 아마 횃불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횃불은 특성상 한번 기름을 묻히면 약 15분 정도 타게 된답니다. 그래서 횃불을 들고 있을 때는 15분에 한번씩 기름을 공급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기 나오는 처녀들은 모두 횃불에 묻은 기름 외에도 여분의 기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그 기름의 양이 충분한가 아닌가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처음 횃불을 들고 있다가 신랑이 너무 늦게 오므로 기름의 사용량이 많아 진 것입니다. 그러다가 신랑의 등장이 너무 늦어지자 기다리다가 졸았다고 보아집니다. 그렇다고 해도 너무 오래 잤다면 횃불이 꺼져버렸을 것입니다. 본문에서 불이 꺼져간다고 한 것을 보아 이들이 존 것은 한번에 15분을 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설핏 졸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횃불을 들고 있는 상태에서 잠이 든다는 것은 말이 안되므로 아마 횃불거치대에 횃불을 거치하고 자기들은 앉아 있었을 것이고 그러다가 설핏 졸았다고 여겨집니다.
5절에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그리고 이 비유에는 다른 뜻이 숨어 있습니다.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주님인데 신랑은 주님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신랑이 더디 올새’라고 하는 대목은 우리에게 주님의 사정을 잘 나타내 줍니다. 주님의 재림이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더 늦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자기의 재림이 일반인의 생각보다 더 늦어질 걸 말씀하신 겁니다. 물론 주님의 제자들, 이 비유를 들은 제자들은 ‘신랑이 오는 것’을 아무도 주님의 재림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하늘에 올라가셨다가 나중에 재림하신다는 생각자체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재림에 대해서는 지난주에 말씀 드렸습니다.
여하튼 신랑은 밤늦게 까지 도착하지 않았고 그래서 미련한 처녀들뿐만 아니라 슬기로운 처녀들도 마찬가지로 너무 늦은 밤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다같이 졸며 자고 있습니다. 그녀들이 조는 것을 가지고 그녀들을 비난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그녀들은 하루종일 밭에서 일을 하고 각자 들러리 복을 입고 화장을 하고 장식한다고 신부보다 더 피곤했을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 힘써 일해야 먹고 살므로 삶의 무게에 짓눌려서 피곤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하나님을 섬기는 일까지 같이 하므로 더 힘듭니다. 믿지 않는 이들은 주중에는 일하고 주말에는 쉽니다. 자기를 위해서 여행도 가고 별거 다 합니다. 아니라도 하루 종일 자는 것 정도는 합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성도는 그게 안됩니다. 주중에는 세상에서 일하고 주말에는 교회에서 일합니다. 이거 쉬는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도 요즘은 토요일 휴무가 점점 많아져서 얼마나 다행인지.
예전에 제가 서울의 모 교회에서 사역할 때 어떤 분이 말합니다. “목사님, 저는 교회에 오기만 하면 졸아요. 정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주의 전에서 푹쉬고 세상으로 갈 수 있으니 정말 복된 것이지요”
이 분은 평소에는 불면증으로 잠이 오지 않는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 교회에 오기만 하면 그렇게 잠이 쏟아 진답니다. 만일 이분이 예배당에서까지 졸지 않았다면 정말 일상생활에서 견디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세상에서 힘들 정도로 열심히 일하고 주의 전에 일하러 오는 것은 아닙니다. 안식을 누리기위해 오는 것입니다. 그런 역할을 교회가 감당할 수 있어서 기쁜 것이지 목사의 설교를 제대로 안 듣는다고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들 역시 자기의 생업외에도 혼인잔치준비를 위한 들러리로서의 역할을 위해 할 일이 많았기 때문에 밤늦게까지 기다리기가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준비한 자나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자나 다 같이 피로할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당연히 늦게 오는 신랑을 기다리다가 졸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비유에서는 졸았다고 비난하는 내용은 없습니다. 다만 기름의 양이 문제지요.
그런데 밤중에 소리가 들립니다. 사실 신랑이 언제 당도할지는 잘 모르는 일입니다. 워낙에 변수가 많습니다. 그러나 보통은 해가 지고 난 다음 혼인잔치가 시작된답니다. 당연하게 신랑이 없는 혼인잔치가 있을 수 없으므로 신랑은 해가 지고 오래지 않아 오는 걸로 되어있습니다. 본문의 배경은 신부집이 아니라 신랑집이라고 하는데 글쎄요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요.
여하튼 신랑이 밤중에 온다는 소리가 들리고 졸며 자던 들러리들은 등불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갑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충분한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던 미련한 다섯 처녀의 등불이 꺼져가고 있습니다. 기름이 다된 모양입니다. 그래서 여분의 기름을 가지고 있던 다섯 처녀들에게 부탁합니다.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달라”
그러자 슬기 있는 자들이 기름을 나눠주지는 않고 자기들도 모자라니 기름을 사러 가라고 말합니다. 하하, 이들은 슬기 있는 자들이 아니라 우리식으로 말하면 영악한 자들이고 깍쟁이들입니다. 그 짧은 순간에 기름을 사가지고 온다는게 말이 안됩니다.
지금 신랑이 들이 닥친다는 전갈이 왔고 조금 있으면 신랑이 올터인데 그 사이에 한밤중에 어디서 기름을 산다는 말입니까? 그런 생각도 못하고 기름을 사러 갔다니 그래서 미련한 처녀들인 모양입니다. 영악한 처녀들이 계속해서 부탁할게 두려워서 귀찮은 처녀들을 떨쳐버리려고 한 헛소리입니다. 그 말을 그대로 믿고는 기름을 사러 갔으니까 말입니다. 끝까지 같이 죽자는 심정으로 기름 좀 빌려달라고 졸랐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솔직히 신랑일행을 맞이하는 예식이 몇분걸리겠습니까? 들러리들의 불춤이 있습니까? 횃불쇼? 한 오분 십분 좋아요 십오분이라고 칩시다. 겨우 기름한번 적시면 되는 정도인데... 그 차이가 누구는 잔치에 참여하고 누구는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는 엄청난 결과를 만드는 겁니다.
여기서 열처녀는 우리 모든 교인들을 말합니다. 할거 다해놓고 겨우 아주 미세한 차이로 희비가 엇갈릴 수 있음을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할거 다 해놓고 겨우 그 차이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너무 억울한 일입니다. 그게 ‘교인’과 ‘성도’의 차이입니다.
우리가 기름파는 사람이라면 한밤중까지 기름 한병 팔려고 문을 열어 놓고 기다리겠습니까? 그러면 혹시라도 강도가 들면 어떻게 합니까? 그리고 잠 안자고 기름 사러 오는 사람이 몇 명 있다고 기름 아깝게 밤새도록 기름을 켜놓고 문을 열어 놓습니까? 말이 안됩니다. 그런데도 이 처녀들은 능큼스럽게 따돌린 겁니다. 그래서 영악한거고 그 말을 또 믿고 그럴듯하다고 생각해서 사러간걸 보면 미련한게 맞습니다.
소리친 사람의 말처럼 금방 신랑이 들이 닥치는게 아니라 동구 밖에서 망을 보던 사람이 멀리서 신랑이 오는 것을 보고 급히 전갈을 보냈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옛날 풍경을 한번 보세요. 우리나라도 신랑이 사모관대를 하고 나귀를 타고는 고수들을 앞세우고 짐보따리를 짊어진 자들을 데리고 잔치집으로 오는 광경. 애들은 괜히 할 일도 없으면서 그게 보고 싶어서 우르르 우르르 뛰어다니는 광경을 생각해 보세요.
신랑이 너무 늦게까지 오지 않아서 사람들은 이제나 저제나 신랑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신랑이 와야 본격적으로 잔치를 시작할터인데 신랑은 너무 늦어 집니다. 사람들은 잔치집에서 잘 먹기 위해서 집에서 저녁을 거르고 와서 앉아 있습니다.
그러니 빨리 신랑이 오지 않으면 사람들의 원성이 심해질 터입니다. 그런데 그렇게나 기다리던 신랑의 행렬이 멀리서 보입니다. 아마 불이 켜져 있고 악기 소리가 들리고 그랬을 것입니다. 그래서 들러리들에게 맞으러 나오라고 소리친 것입니다. 신랑이 지금 대문 앞에 서 있는 상황은 아닙니다. 그래서 시간이 있다고 착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미련한 처녀인 모양입니다. 어쨌든 영악한 다섯 처녀는 미련한 다섯 처녀를 따돌립니다.
구원도 그렇습니다. 일단 때가 되면 구원은 정말이지 냉혹할 만큼 개인적입니다. 남의 공로로, 신앙좋은 누군가와의 친밀함으로 내가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미련한 처녀들이 기름을 사러 갔다와보니 이미 신랑은 입장을 했고 잔치집의 문은 닫혔습니다. 유대에서는 한번 혼인 잔치집의 문이 닫히면 잔치가 끝날 때까지는 문이 열리지 않는 모양입니다.
저는 이 비유에서 남겨진 처녀들이 그래도 다시 잔칫집으로 온 걸 보고 이들도 역시 신자이기는 하구나!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니라면 그냥 집으로 돌아갔겠지요. 그래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타이밍의 차이 이기도 합니다. 남겨진 신자들에게는 어쩌면 큰 환난이 그대로 닥쳐 올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두 번째 천국에 들어갈 기회를 위해서 고난을 이겨내야 하므로 첫 번째 성도들이 천국에 들어가서 행복하게 있는 동안에 바깥에서 그걸 이겨내는 일이 힘들건 당연합니다. 우리가 휴거같은 영화를 보면 나옵니다. 휴거되지 못하고 지상에 남은 성도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아가는지. 그래서 들어갈 수 있을 때 들어가야 합니다. 이건 설이 분분하므로 저도 확실하게 말씀드리기가 곤란합니다. 일단은 그렇게 정리합니다.
잔치는 주로 신부의 집에서 벌어 집니다. 신랑이 신부 집으로 친구들과 함께 오고 그러면 신부의 들러리들이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신랑을 맞이해서 함께 신부의 집으로 들어가고 문이 닫히고 잔치가 시작됩니다. 보통 신부의 집에서 열리는 잔치가 본문에서는 신랑의 집인 것처럼 묘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집에 늦게 온 신랑이 어딘가 이상합니다. 또 신부집이라면 들러리들의 외침에 신랑이 나와서 문을 열어 주지 않겠다고 하는 점이 말이 안됩니다. 남의집 문을 자기가 여니 마니 할 리가 없지요.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원래는 그 곳이 바로 신부집입니다. 그러니까 이 땅입니다. 이 세상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신랑이 옵니다. 주님이 하늘에서 재림하십니다. 그러면 이 세상이 잔치집 즉 천국이 되고, 신랑의 집으로 불려지고 그러면 그곳은 더 이상 세상이 아니라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그럴듯하지요.
유대와 그 일대의 잔치는 주로 밤에 시작됩니다. 낮에는 너무 더우니까 그런 모양입니다. 그리고 잔치를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 한번 문이 닫히면 잔치가 끝날 때까지 문을 열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냐면 낯선이들, 불량배들 또는 도적들이나 강도들의 침입을 막기위해서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이런일들이 많았나 봅니다. 워낙 치안이 확보되지 못하고 먹을 것이 없던 가난한 시절이니까 잔치집이라고 하면 온동네 거지가 다 몰리는 경우가 많았을 것입니다.
옛날 우리나라야 잔치집에 많은 사람을 불러서 음식을 대접하고 거지들도 한턱을 먹기위해서 백장을 친다고 합니까? 바글바글 모여듭니다. 그러면 주인은 그들에게도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줍니다. 경사스런 날이라서 모든게 좋게 좋게 해결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대는 다른 모양입니다. 초대받지 않은 사람이 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 아예 문을 닫아걸고 잔치 중에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답니다.
남은 처녀들이 돌아와 보니 신랑이고 사람들이고 모두 보이지 않습니다. 잔치집 안으로 들어간 겁니다. 게다가 문은 닫혔습니다.
들러리들은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라고 말합니다.
신랑은 이렇게 답합니다.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딴에는 맞는 말입니다. 그 옛날 신랑이 신부의 들러리들을 알 수가 없지요. 우리처럼 자유연애가 널리 퍼진건 정말 얼마 안됩니다. 신랑이 미리 신부하고 신부 친구들하고 교제가 있었다면 모르지만 일반적인 경우에 그러기는 어려웠을 것이므로 신랑입장에서는 모르는게 당연합니다. 신부는 혼인식준비로 나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방안에서 신부화장을 하고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제가 유대의 결혼식 풍습을 잘몰라서 묘사가 좀 부족합니다. 용서하십시오.
바깥에 있던 처녀들의 입장에서는 정말 골치 아픈 일입니다. 신부집이라면 신부의 아버지나 동생이나 식구 중에 누구에게 자기의 신분을 보증할 사람이 있어서 문을 열어 달라고 요구할 수 있겠지만 신랑집 식구들 누구하고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관례에 어긋나는 일을 억지로 허락하게 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관례처럼 내가 누구의 아들이요 내가 누구의 부모요 내가 누구의 아내요 남편이요라는 말로 출입증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천국입장은 철저히 개인의 신앙으로만 판가름납니다. 구원은 철저하게 개인적입니다.
그래서 신랑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신랑이 알면서도 일부러 그렇게 냉정하게 군게 아닙니다. 신랑은 진정으로 이 여인들을 알지 못합니다. 만일 들러리를 제대로 못했다고 일부러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면 신랑은 앞으로 고난이 많을 겁니다. 나중에 다시 만나서 그때 너무 했다고 한다면 서로 곤란하겠지요?
신부 들러리니까 문 앞에서, 들러리의 영접예식에서 보는 게 처음인데 그때 보지 못했으므로 신부 들러리라는 말을 해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요즘에야 먹을게 넘치고 유흥거리가 넘치니까 잔치에 참여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렇게 원통할 일은 없을 겁니다. 물론 들러리니까 친구의 결혼식을 보지 못하는 아쉬움은 있을 수 있지만 사진도 있고 동영상 촬영도 있어서 결혼의 광경을 더 자세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옛날에 그런게 어딨습니까?
친구의 결혼에 참예하지 못하는 것, 게다가 그 유흥거리며 맛있는 음식이며 친구들과 마음껏 먹고 웃으며 놀 수 있는 기회를 놓친다는 것은 정말로 큰 손실이자 안타까움입니다. 신부의 들러리들 역시 신부만큼 오늘을 기다려 왔을 것입니다. 더구나 문안에서 피리소리 북소리가 나고 손뼉소리에 웃음소리 더하여 맛있는 음식의 냄새까지 난다면 그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 잔치가 하루 이틀에 끝나는 게 아닙니다. 일주일 이주일 잔치가 길어 질수록 바깥에 있는 처녀들의 상실감은 더 커집니다.
더구나 자기들은 그 잔치를 위해서 수고한 사람입니다. 친한 친구의 결혼을 축하하기위해 들러리도 서기로 했고 잔치를 정말 고대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 시간에 가장 중요한 시간에 뭔가 어긋나서 잔치에 참예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요즘말로 하면 이 처녀들은 행사관계자입니다. 신부하고 절말 친한 사이인 들러리들입니다. 그런데 정작 일반 손님들은 잔치에 참여했는데 관계자가 잔치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것은 너무나 억울한 일입니다.
주님의 비유는 이렇게 끝이 납니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졸지 마라는 말은 아닙니다. 평소에 잘해라는 말입니다.
그래요, 우리가 할 일은 그 날과 그 때를 알아 내는게 아닙니다.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심지어 주님도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고 오직 아버지만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언제 그 날과 때가 올지 모르기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길게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이 언제 다시 오실지 알려고 할 필요도 없어요. 그냥 항상 그가 오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언제라도 맞이할 수 있도록 깨어 있으면 되는 겁니다.
여기서 ‘기름’을 사람들은 ‘성령’이라고 말합니다. ‘기도의 분량’이라고 말합니다. 모두 충분히 일리가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주님이 언제 오셔도 조금도 부족하지 않게 준비하고 있으면 됩니다. 그리고는 우리의 일상을 재미있게 살아 가면 됩니다.
과거에 열일을 제쳐두고 주님의 재림만 기다리는 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건 주님의 요구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지상에서 삶을 살아야 하는 매일 매일을 잘 살기위해 노력하고 걱정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더 가깝게는 우리가 이 세상에 와서 저 세상으로 언제 갈지 아무도 모릅니다. 올 때는 순서가 있었는데 갈 때는 순서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평생을 걸려 이루어놓은 거대한 부를 손가락하나 대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설마 노잣돈을 믿는건 아니겠지요? 저세상에서는 돈이 필요 없습니다. 지옥에서는 뇌물이 통하지 않습니다. 천국에서도 당연히 뇌물이 통하지 않습니다. 천국입장패스는 교인증이니 집사증이니 목사증이 아닙니다. 오로지 우리의 구원확인서만 필요합니다. 너는 내 백성이라는 인을 우리의 몸에 받아야만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 저 아시쟎아요. 제가 아무개 목삽니다” “몰라”
“저는 아시쟎아요. 저는 아무개 장롭니다” “아니, 몰라. 너 누군데?”
“왜 구원의 인이 없어? 나는 내 백성에게 인을 쳐서 구분하지. 그런데 너희에게는 인이 없구나. 오히려 네 몸에 원수 마귀의 인이 찍혀 있구나. 지옥불로 들어가라”고 내쫓으실지 모릅니다.
여기서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면 항상 깨어 있어야 함을 배웁니다. 그리고 그냥 깨어 있어서는 곤란하고 천국에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함도 배웁니다. 말세에 성령의 역사 없이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간 큰 신자는 없겠지요?
평소에는 태평치고 있다가 주님이 오신다고 할 때에야 부랴부랴 기름등불 준비하려고 하면 늦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명확한 사실이 있습니다. 천국은 누구의 공로로, 나 대신 누구의 공로로 갈 수 있는게 아닙니다. 내가 누구의 아들이라서, 내가 누구의 형이요 동생이요 내가 누구의 남편이요 이런 걸로는 갈 수 없습니다.
천국은 철저하게 개인적입니다. 이 말은 구원은 철저하게 개인적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더 중요한 사실. 천국은 사람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기뻐하며 그의 법을 즐거이 지키는 이들이 모인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저, 하늘에 가기 전에도 우리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 수 있습니다. 지상천국을 만들 수 있습니다.
단 하나님의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만 그게 가능합니다. 인간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없는 지상 천국을 만들려고 많은 이들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 목표는 결코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누군가에게 천국인 곳이 누군가에게는 지옥이었습니다. 이땅에서 모두에게 천국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참, 예수만 모시면 어디나 천국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여기서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제대로 따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인이기는 한데 신자는 아닌 이들, 교인이기는 한데 성도는 아닌 이들은 아무리 많이 모여 있어도 천국이 될 수 없습니다.
저의 오랜 숙원이 하나 있습니다. 동상동 산비탈에 도서관을 만드는 겁니다. 그러니까 찻길의 오른쪽 산비탈에 있는 동네. 그 동네는 한 채에 15평짜리 집들이 차도 들어갈 수 없는 골목에 빽빽이 들어차 있습니다. 다닥다닥 붙었다고 합니까? 집과 집사이의 간격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무지 무지 조밀한 집들입니다. 제 생각에는 그 집들을 만들어낸 기술은 세계 7대불가사의 중의 하나입니다. 사람몸하나도 들어가기 어려운 틈에 어떻게 미장을 했는지!
그 동네에 얼마 전에 차도를 넓히면서 평지쪽 길가에 ‘작은 도서관’이라는 예쁜 도서관이 하나 섰던데 제가 생각하기는 그곳은 그래도 제법 사정이 나은 곳이고 대로변 말고 산비탈로 좀 더 올라가서 완전히 그런 집들 사이에 도서관을 짓는 것이지요. 한 백여평 정도의 대지에 예쁜 삼층짜리 건물을 짓고 조경도 좀 하고 해서 아이들에게는 꿈을 키우는 도서관으로 엄마와 아기들에게는 문화공간으로 노인들에게는 휴식공간으로 삼을 수 있는 그런 곳을 짓는게 제 꿈입니다.
옛날부터 그곳을 일러 “무~ 조지고 입어 조지고”라고 말해왔습니다. 돈을 벌면 먹어서 다 써버리고 옷을 입어서 다 써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날 그날 하루 돈을 다 써버리는 거지요. 어차피 내일이란게 존재하지 않으니까 미래를 보고 저축하고 그런게 없이 그냥 있는대로 써버리는 겁니다. 그곳에 꿈과 내일을 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곳에 도서관을 짓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주일날은 도서관을 휴관하고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대신에 월요일은 문을 여는 거지요. 보통의 도서관은 주로 월요일날 휴관을 하니까 괜찮을 것 같습니다.
서울은 그래도 좀 낫지만 지방에서는 정말 징그럽게 취직하기가 어렵습니다. 제대로 된 직장 자체가 없으니까. 부산은 대구와 더불어 가장 늙은 도시 가장 가난한 도시입니다. 물론 부산 옆의 울산이나 양산 김해와 창원 쪽으로 공장과 연구소 기업들이 옮겼기 때문이지만 부산에서 미래를 꿈꾸는건 어렵습니다. 그 중에서도 동상동은 가장 어려운 지역 중의 하나입니다. 물론 부산에는 그곳 말고도 달동네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라면 그런 곳에 꿈과 희망을 전파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가치를 가지려면 그들에게 내일과 꿈이란 걸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동네에 요즘 빈집들이 많아진답니다. 제가 예전에 그 곳에 사는 아무개의 집을 찾아 갔는데 아무리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도저히 찾을 수 없어서 도로 집으로 돌아온 적이 있습니다. 안내를 받고 한번 간 적이 있는데도 혼자서는 도저히 찾을 수 없는 21세기의 신비. 그곳에 이정표를 만들고 쉼과 내일을 주고 싶습니다.
그 동네에 있는 학교들은 기형적입니다. 노인들은 많고 생활인들도 많이 있지만 어린아이는 점점 줄어 듭니다. 거대한 학교에 한 학년에 한반밖에 없고 게다가 그 한 반도 겨우 열두세명이랍니다. 이미 폐교한 곳도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참 역사가 오래된 동네입니다. 저는 동상동이라고 부르지만 요즘은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서동, 책書자입니다. 아마 안락서원 뒤쪽이라서 그렇게 지은 모양인데...웃기지 않나요? 책동네에 정작 책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곳을 탈출하려고만 하지 그 곳 자체를 개량하려는 생각은 없습니다. 사회의 부와 웃음이 그곳으로 스며들어가기를 원합니다. 추수감사절과 성탄절에는 주위에 떡도 돌리고 주민들과 함께 잔치도 하고 그렇게 되면 좋겠습니다. 그게 제 작은 소망입니다.
단순히 잘 살 수 있다는 그런 성공 신화 말고 얼마든지 우리가 여기에서도 행복하게 인간답게 살 수 있다는 생각을 불어 넣어 주는 거지요.
일단 제 꿈은 그렇고 천국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자녀들이 그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르기를 원하는, 하나님을 믿으며 그의 법을 실천하는 정의롭고 순박한 사람들이 모여서 만드는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법이 세상을 다스리는 그런 세상이 바로 천국입니다.
이 비유를 보고 솔직한 제 생각을 말씀드려볼까요?
저는 신랑이 뒤늦게 온 처녀들의 말을 듣고 문을 열어 주어서 함께 잔치에 참여했다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주님이시니까 모든게 가능하고 모두를 행복하게 만드실 수 있으니까 그 웃음과 풍족함에 더 많은 이들이 참여하면 좋겠습니다. 하물며 그렇게나 들어가고 싶어 하는 들러리들에게 문을 닫아 걸고 끝내 모른체 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것 같습니다.
물론 주님의 비유는 우리가 이미 충분히 인지를 했습니다. 노아의 방주에 문을 닫고 나서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천국문은 한번 닫히고 나면 절대로 열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미리 미리 준비해야 하는게 당연합니다.
그래서 준비하는 동안에 더 많은 이들에게 행복을 나누어 줄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때는 반드시 성령의 역사가 필요합니다. 죽은 동네를 살아나게 하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성도 여러분
저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만드는데 우리 함께 참여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이 땅에서 이룬 것들 중에 하나님에게 내어 놓을 것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성도들이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고 즐겁기를 원합니다. 항상 웃으며 감사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 감사와 웃음 그리고 즐거움과 행복을 나누어 줄 수 있기를 원합니다. 문닫아 걸고 우리끼리만 즐기지 않고 더 많은 이들이 우리와 함께 꿈을 꾸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되어 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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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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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인생은 타이밍이다 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할 수 있을 때, 잘 해야 하는구나 라는 생각도 듭니다. 저는 나이 먹어서도 방황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주일이 찾아오는게; 어쩐지 괴로웠고, 어떻게든 도망갈 핑계를 찾기도 잘 했습니다. 그러다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구나 다짐했지요. 내가 그토록 사랑받았고, 어려울 때마다 찾아와 주신 교회 식구들인데, 나 또한 열심히 신앙생활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는 2시간을 자든, 꼬박 불면의 밤을 보낼지라도, 어쨌든 교회에 열심히 참석하려고 노력합니다. 더 좋게는 미리 토요일부터 컨디션을 잘 조절해서, 주일날 예배를 잘 드릴 수 있도록 가끔은 노력할 때도 있지요. 노아처럼 되는게 무섭습니다. 그런 일은 앞으로 없었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기회가 가고, 서로가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어서 함께 즐거운게 정말 좋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래도 모든 사람들이 천국 갈 수는 없다고 하니, 가까운 사람들에게라도 전도도 하고, 내 삶이 좋은 모범이 되면 좋겠다 싶습니다. 모범, 참 어려운 말입니다. 그래도 그렇게 밝게, 재밌게 살면 충분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힘내셨으면 좋겠습니다. / 2016. 08.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