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iša Mihajlović
시니사 미하일로비치, 위대한 왼발로 불리기도 하는 그는 세계최고의 프리키커 중 한 명이었습니다. 프리킥으로만 해트트릭을 달성했던 전설의 사나이 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프리킥 지존 중 한 명인 미하일로비치 편!
프로필
이름 : Siniša Mihajlović (시니샤 미하일로비치)
생년월일 : 1969년 2월 20일
신장/체중 : 185cm / 78kg
포지션 : DF / MF
국적 : 유고슬라비아 (현재는 세르비아)
국가대표 : 63시합 10득점
미하일로비치, 프리킥의 신화를 쓰다.
미하일로비치의 프리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일반적으로 축구에서 프리킥은 30 미터 정도가 한계거리 라고 합니다. 이 이상의 거리라면 직접 슈팅보다는 크로스나 연계플레이를 노리는 것이 정석이겠지요. 하지만 이 사실은 적어도 미하일로비치에게는 예외입니다. 미하일로비치는 35미터 이상이라도 상관없이 거침없는 프리킥을 날렸고, 그림같이 공이 골문으로 날아갔습니다. 혹자는 그를 두고 40미터 이상이라도 프리킥 슛을 날릴 수 있는 선수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말 그대로 슈퍼 프리키커 였습니다.
강렬하면서도 정확하게 날아가는 멋진 프리킥으로 그는 많은 골을 넣었고, 전대미문의 프리킥 해트트릭이라는 역사도 달성했습니다. 긴 거리 프리킥을 간단히 왼발로 차는 것처럼 보이는데도, 스피드가 붙어 날카롭게 날아가면서 구석에 정확하게 꽂히기 일수였습니다. 말이 필요없습니다. 시작부터 동영상 한 편 보고 갑시다. 1분짜리 미하일로비치 프리킥 골 장면 입니다. 보고 나면 그가 왜 최고의 프리키커로 손꼽히는 지 느낌이 올 것입니다.
미하일로비치는 왼발의 대가이자, 테크니션입니다. 포지션은 수비수 이지만, 원래 윙어로 활약한 적도 있었고, 수비형 미드필더도 맡기도 했습니다. 미하일로비치의 등번호 11번은, 그가 원래 수비수만 맡았던 것이 아님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미하일로비치는 축구선수 생활을 시작한 이래 정확한 킥실력이 가장 큰 무기였고, 이 왼발 하나로 많은 골과 많은 어시스트를 창조했습니다. 그를 두고 위대한 왼발이라는 별명이 따라붙은 까닭입니다.
미하일로비치는 지금의 크로아티아에 속해 있는 부코바르 라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세르비아인, 어머니는 크로아티아인 이었지요. 미하일로비치의 사적인 모습은 상당히 슬픕니다.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그의 고향 부코바르는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의 경계선에 위치해 있습니다. 전쟁 전에는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서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이 함께 살아가는 지역이기도 했습니다. 90년대 초 크로아티아가 독립을 선언했고, 유고연방에서는 크로아티아의 연방탈퇴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내전이 발생 경계선 상에 위치해 있던 부코바르 지역은 당연히 비극의 전장이 되고 맙니다. 고향은 폐허가 되었습니다...
축구 이야기 중에 고리타분한(?) 역사이야기를 계속해서 조금 죄송하지만, 이왕 한 김에 끝까지 덧붙여 보겠습니다. 미하일로비치의 친구 중에는 세르비아 극우파가 있었다고 합니다. 덕분에 세르비아 극우파와는 반대쪽에 서 있게 되는 크로아티아 사람들에게 미하일로비치는 반감을 사게 됩니다. 전쟁이 끝나고, 미하일로비치는 고향을 방문하게 되는데 거기서 충격적인 것을 보게 됩니다. 자신의 사진에만 구멍이 뚫려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 일로 큰 쇼크를 받게 됩니다. 그 이후 미하일로비치는 내게 더 이상 고향 부코바르는 없다고 발언했고, 아예 나의 고향은 이탈리아 라고 말합니다. 여하튼 미하일로비치는 크로아티아에서 태어났지만, 국적은 세르비아이고, 이탈리아에서 거주하고 있습니다. 부인도 이탈리아 사람이지요. 개인적으로는 왠지 슬프게만 느껴집니다.
이러한 복잡하고 슬픈 정서적 영향으로 인한 것인지... 성격도 현역시절 한 성격하신 걸로도 명성(?)이 높습니다. 욱하는 성격으로 트러블을 일으키곤 했는데, 축구팬들 사이에서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가 프랑스 국대이기도한 비에라 에 대해서 인종차별적 폭언을 날린 것입니다. 이 소동으로 축구계는 홍역을 치루면서 한 바탕 난리가 났었습니다 :) 그런데 이런 정황도 있었습니다. 당시 비에라 역시 미하일로비치에게 고향 없이 떠돌아 다니는 것을 비아냥거리며 집시 라고 비하발언을 했다고 합니다. 이 말 들은 미하일로비치가 가만 있을 인물이 아니었지요. 결국 오가는 막말 속에서, 미하일로비치 드러븐 놈! 이라는 이미지가 굳혀진 것 같습니다. 게다가 미하일로비치는 늘상 크로아티아에 대해서 막말을 해왔으니까요. 어머니가 크로아티아 사람이었던,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에게도 문제성 발언을 했다가 뚜껑열린 이브라히모비치가 폭주했던 일화도 있습니다. 과연 미하일로비치는 트러블 메이커! 그에게 크로아티아 라는 이름은 고향을 없애고, 자신의 사진에 구멍을 뚫어버린 나라라는 각인이 크게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결론적으로 역사의 비극이지요... 자자 어서, 축구 이야기로.
1988년 미하일로비치는 FK 보이보디나(FK Vojvodina)라는 팀에서 축구선수의 본격적 커리어를 시작합니다. 조금 재밌는 뒷이야기가 있는데, 예전에 10대시절 미하일로비치는 강호 디나모 자그레브에서 테스트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실력으로는 출장기회도 없어' 라는 굴욕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_-; 하지만 세상 살이가 그렇듯이 테스트에 떨어졌다고 해서 그 선수가 영영 꽝이라는 법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보이보디나 에서 선수생활을 하면서 미하일로비치는 격렬하고 거친 수비로 상당한 실력을 인정받습니다. 이 동네 스타인 드라간 스토이코비치에게도 강력한 태클을 날려서 부상을 입히기도 했습니다 -_-;
결국 1990-91시즌 유고슬라비아 최고수준의 이적료를 기록하면서 명문 FK 츠르베나 즈베즈다 (=레드스타 베오그라드) 팀으로 이적하게 됩니다. 그리고 역시 뛰어난 활약을 펼쳐나가기 시작합니다. 이 당시 츠르베나 즈베즈다에는 사비체비치도 있었고, 그 멤버들이 화려했습니다. 1991년에는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까지 차지합니다. 당시 준결승 뮌헨전에서도 승리에 큰 공헌을 하는 멋진 활약을 펼쳤고, 챔스 결승전에서는 팽팽하게 0-0 으로 승부차기까지 갔었는데, 미하일로비치는 4번째 키커로 나와서 성공시키도 했습니다. 승부차기 5-3 츠르베나 즈베즈다 우승! 1991년에는 유고대표로도 데뷔전을 가집니다. 이제 엄연히 유고연방에서 손꼽히는 선수가 된 것입니다.
유럽 무대에서 눈부신 모습을 보여주었던 이 때의 츠르베나 즈베즈다 멤버들에게 많은 팀들이 눈독을 들이는 것도 당연했습니다. 결국 1992년 미하일로비치는 이탈리아로 무대를 옮기게 됩니다. 그를 잡은 것은 AS로마였습니다. 그리고 1995년에는 역시 세리에 A 소속인 삼프도리아로 이적하게 됩니다. 여기서 만난 인물이 바로 명장으로 이름이 높은 에릭손 감독이었습니다. 삼프도리아 시절부터는 에릭손 감독의 지휘아래 공격적인 수비수의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리베로였다고 볼 수 있지요. 정확한 패스와 롱패스를 멋지게 날리기도 하는 등 이제 그의 진가가 다시 한 번 빛나기 시작합니다.
에릭손 감독이 라치오로 팀을 옮기게 되자, 미하일로비치도 역시나 라치오로 이어서 팀을 옮기게 됩니다. 1998년 라치오에 몸담은 미하일로비치는 일종의 사기기록을 만들어냅니다. 12월 18일 경기였습니다. 전 소속팀 삼프도리아를 상대로 프리킥으로만, 3골을 넣는 경이적인 활약을 보여주었습니다. 세상에나 프리킥 해트트릭입니다. 첫 시즌부터 미하일로비치는 분명 거의 다 수비수로 출장했음에도 8골이나 넣었습니다. 1999-2000시즌 에릭손 감독이 이끄는 라치오는 26년만에 세리에 A 에서 우승을 차지하게 됩니다. 미하일로비치의 공헌도 대단히 컸습니다.
이후에는 에릭손도 떠나고, 미하일로비치도 30대가 넘어가면서 출장 기회가 줄었습니다만, 라치오에 만치니 감독이 부임해 왔습니다. 아직 30대의 젊은 감독이었지요. 그리고 미하일로비치도 다시 한 번 부활하게 됩니다. 주력 선수들이 떠나가면서 이제부터는 힘들 것이라던 라치오는 젊은 만치니 감독의 지휘아래 이번에는 4위를 기록하면서 또 한 번 놀라움을 안겨줍니다.
아무래도 미하일로비치는 감독을 따라다니는 증후군(?)이 있나봅니다. (웃음) 만치니 감독이 이후에 인터밀란으로 팀을 옮기자, 역시 이번에도 미하일로비치는 인터밀란으로 이적합니다. 인터밀란에서 현역 마지막 시기를 보냈습니다. 그의 마법의 왼발은 현역 마지막까지 열정적으로 불타올랐습니다. 코파 이탈리아 결승전에서도 로마를 상대로 프리킥 상황에서 득점을 올렸고, 마지막까지 열심히 뛰고 2006년에 은퇴했습니다. 마지막 시즌까지도 프리킥으로 골을 넣는 녹슬지 않는 실력을 자랑했습니다. 그가 프리킥으로 세리에 A 에서 넣은 골은 무려 27골. 세리에 A 역대최다기록 이었습니다. 그는 말 그대로 프리킥의 전설 이었습니다.
국가대표로서는 오랜세월 활약하면서 63시합에 출장했고 10득점을 남겼습니다. 인상적이었던 모습은 프랑스 월드컵. 1998년 월드컵에서는 모처럼 유고슬라비아가 참가하면서 이름을 내밀었는데, 첫 경기 이란전에서 전매특허인 프리킥으로 결승골을 기록하면서 귀중한 승리를 이끌었고, (중간에 독일전에서 자책골을 넣기도 했습니다만) 여하튼 유고 팀도 2승 1무의 훌륭한 성적으로 16강 진출. 16강에서 베르캄프 등이 이끌던 네덜란드와 혈전 끝에 아쉽게 패배했습니다. 다비즈가 종료직전에 골을 넣어서 1-2 로 아쉽게 탈락. 그는 국가 로서는 참 불운한 경험을 많이 가진 것 같습니다. 고향의 비극을 비롯해서, 국제무대 역시 내전으로 인해서 참가할 기회가 적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야기를 마치고자 합니다. 시니사 미하일로비치는 영원히 프리킥의 전설로 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상대팀 감독이 미하일로비치가 프리킥을 찰 때는, 골키퍼를 두 명 배치시켜달라는 웃지 못할 농담을 했을 정도로 그의 프리킥은 예술인 동시에 당대 특급 실력이었습니다. 아 여담으로 외모도 특급(?)이었나 봅니다. 젊은 시절에는 패션잡지의 모델도 했었는데, 인기 투표에서 압도적 1위를 기록한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여성 팬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던 모델 미하일로비치라... 그런데 이 모습은 왠지 개인적으로는 별로 와닿지 않는 듯 합니다 (웃음)
뜻밖에 여러가지 이야기로 길었네요. 간단히 말해 미하일로비치, 앞으로도 이만큼 프리킥을 잘 차는 선수는 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오늘 위대한 왼발로 통하던 프리킥의 전설 미하일로비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재밌게 읽어주시는 많은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짜증날 때는 마음 속으로 시원하게 프리킥 날리시고, 많이 웃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