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고린도전서12:27-)/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6. 11. 17. 03:38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고린도전서12:27-)

 

우리가 항상 잘하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이야기, 가끔가다 반대로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그래요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교회입니다. 곧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입니다. 이 몸은 결코 홀로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이 몸 중의 어느것 하나라도 아프면 모든 몸이 아플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래서 유기체인 것이지요. 그러나 몸 중의 어느것 하나가 아프다고 해서 모든게 다 아프다고 볼 수 있을까요? 당연합니다. 몸의 어느 한 부위가 아프다고 해서 다른 부위가 아프지는 않겠지만 몸 자체가 활력이 떨어져서 힘들고 아픔을 느끼면 몸이 전체적으로 그 영향을 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서 서로 너무나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유기체라고, 한 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땅의 교회는 어떻습니까? 누구의, 어느 형제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고 있습니까? 누구의 슬픔이 나의 슬픔이 되고 있습니까?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유기체가 아닙니다. 그것은 몸이 아닙니다. 한 몸이 아닙니다. 그래서 결국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는 사실 지상에 보편적입니다. 모든 교회가 겉으로는 별개로 나뉘어 있지만 속으로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로 엮으셨습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서로 비난하고 서로 경쟁하고 무시하면 그건 한 몸이 아니라 경쟁자요 기업이요 그래서 교회가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면 손과 발이 경쟁하지 않고 눈과 코가 경쟁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 그런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하나님은 몇을 세우셨답니다. 28절에 보면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이 상당히 난해합니다. 과연 첫째 둘째 셋째 이런식으로 이런 사람들 가운데는 높낮이가 있는 것일까요? 능력을 행하는 것은 도데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여기 보면 방언 말하는 것이 제일 나중에 나오는데 그 정도로 방언이 다른 은사에 비해서 떨어지는 것입니까?
우리의 의문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먼저 바울은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몸, 우리가 참으로 많이 들어왔던 말입니다. 전혀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표기방법을 자세히 들여바 보면 약간 놀라운 부분이 있습니다. 뭔고 하니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한 부분에 정관사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게 뭐지요?

 

예, 그러니까 너희는 ‘그리스도의 그 몸’이란 말을 하지 않고 그냥 ‘몸’이라고만 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어에서 이렇게 사용한다는 것은 실제로 ‘한 그리스도의 몸’이란 말과 같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한 그리스도’를 강조하기위해 이렇게 의도적으로 기술한 겁니다. 두 그리스도의 몸이나 세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라 한 그리스도의 몸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확히 그리스도의 지체란 말이 됩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의 각 지체. 여기에 너의 몸이나 나의 몸이나 저 사람의 몸이 있는게 아니라 우리는 모두 하나란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뚱이가 여러개 있다면 그건 기형이고 괴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의 지체입니다. 엄청나게 많은 교회와 성도가 지체로 다 포함되어 있고 그 모든게 서로 정교하게 연결되어서 어디 하나도 아프거나 빠질 수 없는 바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섬기기위해 하나님이 몇을 세우셨습니다.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을 세우셨습니다.

 

여기서 첫째로 꼽은 ‘사도’는 우리가 흔히 12사도에만 국한해서 사용하지만 바울은 분명히 12사도가 아님에도 자기에게 이 칭호를 사용합니다. 그것은 아마 12사도 말고도 여러 교회를 설립한 담임 목사에게 이 칭호를 사용하는 관습이 당시에 있었던 모양입니다. 바울도 역시 그런 의미에서 사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이런 식으로 바울이 본문에서 ‘사도’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면 그냥 여기서 사도를 ‘목사’라고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의 그 12사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꼽은 선지자. 여기서의 선지자는 구약의 선지자하고는 다른 개념입니다. 대변자 또는 대리자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각 지역 교회에서 사도들에 의해서 권위를 위임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선포하며 지도하던 이를 말합니다. 이를테면 디모데나 실라같은 사람? 물론 주석서에서는 예언의 은사를 지닌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만일 예언의 은사를 지닌 사람이 ‘선지자’라고 한다면 바울의 앞서 말과는 달리 각 은사에 차등을 두는 것이 되기 때문에 저는 이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견해도 있다는 것을 아시면 됩니다.

 

여하튼 이 선지자 역시 목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서의 목사가 감독같은 위치라면 이 목사는 그 감독의 지휘하에 일선에서 목회를 담당하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교사. 이 교사 역시 목사를 의미합니다. 다만 그 중에서 말씀을 선포하고 지도하는 목사가 아니라 말씀을 가르치던 목사라는 겁니다. 구약의 그리스도교적인 의미를 설명하고 교회 안에 전승된 그리스도의 교훈을 가르치던 사람을 말합니다. 이 교사들이 일선 교회들을 사도의 소개장을 가지고 다니면서 일시적으로 그 교회에 체류하면서 숙식을 해결받고 가르침을 베풀고 그랬답니다. 그리고는 다른 곳으로 떠나는 거지요.
정해진 목양지가 없기 때문에 이 교사들은 선지자보다 다음 자리에 열거되었습니다.

 

여기까지가 목사를 말하는 것이고 다음은 은사를 받은 이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런 은사 중에서 제일 첫 번째가 바로 ‘능력 행함’입니다. 솔직히 뒤에 연이어 나오는 병고치는 은사도 능력이고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도 능력인데 이 말을 따로 기술한 것을 보면 여기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다. 뭘까요?

 

여기서의 능력은 기적이라 일컬어지는 모든 종류의 역사를 다 포함한다고 보면 됩니다. 그러니까 뭔가 신비한 하나님의 기적이지만 특별히 종류를 세분할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가령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예를 보더라도 모든 이들이 이걸 기적이라고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여기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걸 사람죽이는 능력이라고 세분할 수는 없습니다. 다른 때에는 다른 능력과 기적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여하튼 그런 이들을 바울은 은사의 가장 첫 자리에 언급했습니다.

 

은사를 행하는 이들 중에서 두 번째는 바로 병고치는 은사를 행하는 것입니다. 당시에 병원도 없고 뭐 있어도 그걸 병원이라고 하기도 곤란하지만 병원에 갈 수 있는 사람도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워낙 비싸니까. 그래서 이 은사가 꼭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서로 돕는 것을 들었습니다. 문자 그대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각종 도움을 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걸 사람으로 특화시킨다면  교회 안에서 구제를 담당했던 집사를 일컫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드는 것이 바로 다스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문자적인 의미로는 배를 조정하는 조타수를 말합니다. 배가 항해하기에 위험한 암초를 피하고 모래톱을 잘 통과할 수 있도록 키를 조종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걸 사람으로 특화시킨다면 장로를 들 수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바울이 은사의 배열 순서를 적은 것을 보면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하고는 전혀 다릅니다. 성경은 집사의 직분을 장로보다 앞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다스리는 자’는 초대교회 당시에 장로를 말하는게 아니라 지금의 장로를 말하는 겁니다. 교회 헌법에 장로에는 말씀을 전하는 장로와 다스리는 장로가 있지요? 목사 장로 말고 그냥 장로를 말하는 겁니다.

 

장로보다 앞선 집사를 말하는 성경이 이상합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초대 교회를 보면 집사들이 감독이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우리가 초대교회에 7집사를 잘 알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사도들을 제외하고는 제일 먼저 만든 직분입니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큰 논란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스데반과 빌립은 집사 중에서도 유명하지요. 그 정도로 집사의 직은 교회에서 우선시되고 귀하게 여겨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나오는 것이 바로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에서는 방언을 제일의 은사로 친 것 같습니다. 종교적 신비와 무아경에서 나오는 말들은 당시 교인들에게 굉장한 은사로 여겨졌고 그렇지 못한 자들을 깔보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방언 말하는 것을 가장 마지막에 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참고로 방언 앞에 무슨 말이 있습니까? 각종 방언. 그래요, ‘각종’ 이라는 말이 방언 앞에 있습니다. 이 말은 방언이 정해진 한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는 방언과 다른 방언을 말한다고 해서 그걸 이단이니 사탄의 방언이니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서 영분별이 필요한 것이고요.

 

자, 바울이 고린도전서에 열거한 하나님이 교회에 세우신 몇 사람에 대해서 알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사에 이어서 여러 은사를 열거합니다. 그런데 잘 보세요. 여기에 무슨 기준이 있을까요? 왜 바울은 직분의 순서를 이렇게 열거하는 겁니까?

 

그리고 첫째 둘째 셋째라고 서열을 매깁니다. 그래놓고는 그 다음은 이라고 했지 넷째 다섯째라고 하지 않습니다. 일이삼등 안에 못 들어가는 것은 그냥 순서를 매기지 않습니까?
올림픽처럼 일이삼등까지만 시상하고 4등부터는 등외로 아무 메달도 주지 않는게 당연합니까?

 

여기 잘 보시면 첫째 둘째 셋째라는 말 뒤에 ‘그 다음은’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능력행하는 자’ 라고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여기까지가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문자 그대로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병고치는 은사, 서로 돕는 것, 다스리는 것,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고 해서 마치 사물을 지칭하는 것 같습니다. 다스리는 자가 아니라 다스리는 것, 돕는 자가 아니라 돕는 것, 방언 말하는 자가 아니라 방언 말하는 것. 여기에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자, 우리는 이 말씀가운데 뭔가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이 말씀을 다시 봅시다. 그래서 우리가 알아낸게 있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열거한 은사의 기준은 교회에 얼마나 많은 유익을 끼치는냐로 열거했다는 겁니다.

 

여러 교회에 말씀을 전하고 목회 서신을 발하고 하는 사도, 그리고 개 교회에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 그리고 각 교회들을 방문하며 그리스도의 교훈을 가르치는 교사,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능력을 행하는 자, 그리고는 각종 은사들에 대해서 나열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능력을 행하는자 그리고 각종 은사들로 가다가 맨 마지막에 방언 말함이 나옵니다.

 

사실 방언을 말하는 것은 개인에게 유익이 있어도 교회적으로는 유익이 덜합니다. 그래서 공집회에서 방언으로 말하기위해서는 방언을 통역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방언의 기여도가 가장 적기 때문에 바울도 본문에서 맨 마지막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주님이 직분을 주시고 은사를 주신 이유는 명확합니다. 교회의 덕을 세우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데 기여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어서 29절부터 바울은 말합니다. “다 사도겠느냐 다 선지자겠느냐 다 교사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겠느냐” 당연히 다 사도가 아니고 다 선지자가 아니고 다 교사가 아닙니다. 다 능력을 행하는 자도 아닙니다.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방언을 말하고 그것을 통역하고 병을 고치지 못합니다.

 

오직 우리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에게만 그 은사를 주시고 그 직분을 주시는 것은 그것이 특별히 귀하고 우월해서가 아니라 서로 협력하여 선을 행할 수 있게 하되 주어진 사람의 개성과 재능에 가장 알맞게 사용하시기 위함입니다.

 

제가 예전에 집회에서 두 사람이 일어나서 서로 방언으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또 어떤 분은 그 방언을 통역하는 것도 본 적이 있습니다. 제가 자랄 때는 그런 이적들이 은사들이 그렇게 희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사실 잘 보기가 어렵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은사를 맨 마지막에 나열했지만 이것이 결코 그 은사가 귀하지 않다거나 성도가 사모할 필요가 없는 보잘 것없는 하찮은 것이라는 말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 은사들은 각자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이며 성령의 선물이며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유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그러한 은사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바울은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성경은 은사간의 우열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바울이 이렇게 말한 이유는 방언이 아니라 실제로 교회에 유익을 끼치는 은사를 더 사모하라는 말입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는 은사중에서 방언을 제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방언을 가지고 우쭐해서는 다른 은사를 경멸했는데 방언은 사실 교회의 유익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개인만 드러나는 그런 은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말한 겁니다.

이렇게 말하면 또 너무 방언만을 내려깎는 듯이 보이지만 원래 은사를 주신 목적을 잘 생각해 보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방언을 말하는 이는 개인적인 기도의 유익을 얻으면 됩니다.

 

그럼 바울이 말한 제일 좋은 길은 무엇일까요?
바로 이어서 나옵니다. 사랑.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가리가 되고..........바로 사랑이 제일 좋은 길입니다.

 

만일 우리 성도들 중에 나는 12장에 나온 은사중에서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되는 분이 있다면 그는 바울이 말한 가장 좋은 것을 하시면 됩니다. 사랑. 설마 나는 사랑의 은사가 없어라고 하실 분은 안계시겠지요? 누구나 자기를 죽이고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안되면 조금씩 조금씩 더 노력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도록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 마침내 사랑의 마스터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사랑의 사도가 되고 그는 사랑의 목사가 되고 그는 사랑의 성도가 될 것입니다. 그래요, 우리 서로 사랑합시다. 주님은 사랑을 가장 많이 말씀하셨지요. 우리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의 명령에 따라 서로 사랑합시다. 요한 사도는 말년에 설교를 시키면 소자야 서로 사랑하라는 말만을 했다고 합니다. 사랑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그정도로 귀중하고 가치있는 것입니다.

 

한참 열심히 직분과 은사를 나누더니만 결론은 사랑입니다. 그래요, 우리 서로 사랑합시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성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교회를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회를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나라를 사랑합시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정의를 사랑합시다. 우리 서로 사랑합시다. 이게 가장 가치있는 은사이며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이 세우신 가장 첫 번째로 높은 자입니다. 서로 사랑합시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6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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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한참 다양한 은사에 대해서 설명이 있는 것 같았는데, 결론은 기-승-전-사랑 이 되어버렸습니다. 저는 일하면서 유행가를 들어야만 하는데, 흘러나오는 노래 중에는, 너는 사랑을 어떻게 배웠길래, 그렇게 나를 곤란하게 만드냐고 투덜대는 재밌는 노래가 있습니다. 사랑을 잘 하는 것이 사실은 매우 귀중하고 특별한 은사임이 분명합니다. 작은 말 한 마디를 해도, 따뜻하게 배려심 있게, 그리고 상대방을 귀하게 대우하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11월 17일, 11월의 셋째 목요일, 바로 수능날 입니다. 저야 일을 마치고 늦은 새벽에 블로그 갱신을 하고 있습니다만... 저도 수능을 참 여러 번 쳤습니다. 목표하는 곳이 꽤 높았는데 결국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많이 놀았거든요. 하하. 그래서 홍 목사님이 저보고 수능은 이제 못 보더라도, 행복하게 살면 된다고 짧게나마 격려해주셔서 놀랐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지!? 라는 문제가 남겠네요.

 

오늘 설교본문에 의하면, 자신을 사랑하고, 그 마음 그대로 남을 아끼고 사랑한다면 정말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고, 귀 기울여 주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듣는 것, 그것이 사랑의 한 모습임을 저는 기억합니다.

 

그렇게 우리의 두 귀가 세상을 향해서 열려 있기를, 마음 속의 헤드라이트가 선하게 앞길을 비추고, 타인을 귀하게 비추고, 세상을 환하게 밝힐 수 있기를! 잘 듣고, 노력하며, 사랑하면서 살겠습니다. 그런 하루 하루가 되기 위해서! 잠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생각에 잠길 수 있는 새벽 시간이 있어서 다행입니다. / 2016. 11.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