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바알세불 (마태복음12:22-37)
현대로 오면서 사람들은 점점 더 심해지는 경쟁과 스트레스 때문에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매우 피폐해져 있습니다. 배신도 당하고 뒤통수도 맞고 사기도 당하고 경제적으로 육체적으로 또는 시험에 떨어지고 등등 각종 위험요소들이 많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조금이라도 스트레스를 안받고 유유자적하게 사는 것은 사실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현대인이 받는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세상이 물질적으로 발전하면 할수록 영적으로는 피폐해집니다. 곳곳에 우리를 힘들게 하는 요소들이 쫙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정신병이 많아 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많아지는 추세입니다. 우울증도 많아지고 조울증도 조현병도 많아 집니다.
그런데 이러한 질병들은 그래도 병명이 있지요? 그런데 이상하게 귀신들린 이들도 많아집니다. 그러나 귀신들림이란 병명은 없습니다. 이건 초과학적, 초자연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실증적 과학적 데이터를 가지고 논하는 의학에서 다루기 곤란한 문제입니다. 물론 귀신들렸는지 단순히 정신병인지는 판단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대부분은 ‘귀신들림’이라기 보다는 정신병이겠지만 믿는 성도가 볼 때 명백히 귀신들린 이들도 있는 것이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귀신들림에 따른 증상이 가지가지입니다. 그리고 입증하기가 매우 곤란합니다. 그래서 당연히 현대 의학으로는 낫게 할 수가 없습니다. 처방약이란게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한때 이 한반도에 자살이 유행한 적이 있음을 기억합니다. 그때는 정말 유명한 인물들이 막 자살했고 대중들은 이 소식을 듣고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과연 그들은 무엇 때문에 자살을 했을까요? 이 현상을 보고 어떤이는 한반도에 자살을 유발하는 귀신의 영이 횡행해서 그렇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 자살의 귀신을 물리치려고 미국유학도중에 귀국한 목사님도 제가 알고 있습니다.
글쎄요? 세상을 너무 단순화하는 면이 있는 것 같습니까? 뭐 그래도 우리는 그 이유를 알지는 못하지만 유명인들이 그렇게 한꺼번에 연달아 막 자살한 일은 그때 말고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왜 그때 그렇게 자살이 많아 졌고 유행했는지 아직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지금도 유명인은 아니지만 자살이 끊이지 않습니다. 끔찍한 일입니다. 물론 모든 자살이 귀신에 씌여서 그런건 아닙니다.
제가 앞에서 언급한 우울증이나 조울증 그리고 조현병같은 이러한 병들은 그 본인뿐만 아니라 주위의 사랑하는 가족들까지도 힘들게 하고 마침내 가족관계를 파괴하는 무서운 위험을 내포합니다. 사실 이런 병들은 역시 물질계의 일이므로 약만 꾸준히 먹게 되면 일상생활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전혀 이상이 없는 상태로 갑니다.
제가 알고 있는 어떤 성도는 조현병이었지만 지금은 전혀 이상없이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습니다. 한때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고 정신병원에 몇 달간 입원도 했지만 지금은 여상한 상태로 돌아 왔습니다. 물론 제가 기도로 낫게 한 것은 아닙니다. 의사가, 약이 했습니다. 저는 단지 심방만 갔고 그가 나음을 입은 것은 크게 보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러한 정신병이나 혹은 귀신들림은 최근에 많이 보이지만 그렇다고 최신의 질병은 아닙니다. 아주 옛날부터 많았던 병입니다. 무려 2000년 전 예수님 당시의 중동에서도 여전히 귀신들린 이는 많았나 봅니다.
오늘 본문에 역시 예수께서 ‘귀신들려 눈멀고 말 못하는 이’를 고쳐주시는 기사가 나와 있습니다. 주님의 사역 중에서 많은 부분이 바로 귀신을 쫓아내고 사람들을 치유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옛날의 귀신들은 아직도 여전히 우리곁에 있고 사람들을 괴롭힙니다. 다만 여기서 귀신에 대해서 말씀드리면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 귀신이 아닙니다. 이 ‘귀신’은 명칭은 ‘신’이 붙었지만 결코 신이 아니고 사탄의 졸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어두운 부분에 관여하고 끊임없이 악과 불행을 확대 재생산합니다.
제가 여기서 귀신에 대해서 장황하게 말씀드렸지만 저도 귀신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영의 세계는 깊고 다양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게 하시는 것만 알아도 충분합니다. 그 나머지는 아마 우리가 영이 순수한 영이 되면 알게 될 겁니다. 지금처럼 영과 육이 붙어 있는 상태에서는 너무 자세히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제가 귀신에 대해서 설교하려는 것이 아니라 귀신이 나온 본문을 설교할 뿐입니다.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십시다.
1.귀신들려 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
22절에 “그 때에 귀신 들려 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며 보게 된지라”
우리는 이 본문에서 귀신이 들려서 이 사람이 눈을 못보고 말을 못한 것인지 아니면 귀신이 들렸다는 말은 그냥 관용어처럼 붙은 수식어고 단순히 눈을 못보고 말을 못하는 자인지를 잘 알 수 없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병을 귀신의 장난으로 여겼기에 ‘귀신들린자’라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진짜로 귀신의 장난으로 말을 못하고 앞을 못 보는지가 본문에서는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을 고치는 상황에 대한 묘사가 없어서 더 짐작하기가 어렵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고 외침으로 낫게 했는지 아니면 단지 흙을 이겨서 눈에 바르고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신 것인지 아니면 귀와 눈을 손으로 어루만져서 기도하심으로 낫게 하신 것인지에 관한 기사가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기사 병행기사는 아니고 비슷한 기사입니다. 즉 별개의 사건을 서술한 기사인데 누가복음11:14에 보면 “예수께서 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시니 귀신이 나가매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는지라 무리들이 놀랍게 여겼으나” 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즉 여기서는 말을 못하는 것 즉 벙어리가 된 것이 귀신의 작용 때문이라는 것이고 그래서 귀신을 쫓아내니까 벙어리가 말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물론 이 기사와 본문의 기사가 같은 사건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마 이 본문의 장애인 역시 귀신 때문에 장애가 왔고 그래서 귀신이 쫓겨나자 장애에서 벗어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병에 귀신이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도 곤란합니다. 솔직히 거의 대부분의 병이 병균이나 바이러스와 관련이 있지 귀신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본문의 병자는 귀신 때문에 장애가 온 겁니다. 그래서 귀신을 쫓아내자 장애에서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세상의 의술이나 병원도 하나님이 내신 것이고 그것을 충분히 이용하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모든 병에 귀신의 작용이라고 생각해서 기도만 하고 의술을 도외시해서는 안됩니다. 여호와의 증인인가 하는 사람들은 수혈을 거부해서 죽는 일이 일어나는데 이는 정말 어리석은 일입니다. 자기의 신념 때문에 자기가 죽는 것은 그래도 참을 만 하지만 자기의 신념 때문에 자녀나 부모의 목숨을 버리게 만드는 것은 정말 참기가 어렵습니다.
수혈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뭔 상관인지 모르겠습니다. 이 사람들은 병역도 거부하니까. 그래서 저는 이 사람들은 군대에 보내서 군사훈련에서 집총훈련은 빼고 지뢰제거 같은 거를 시키면 좋을 것 같습니다. 평화를 지키고 사람의 목숨을 지키는 지뢰제거, 위험하니까 사람들이 하기를 꺼리는 일을 솔선수범하도록 해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기네의 평화에 관한 신념도 지키게 해 주는 일을 하면 참 좋겠습니다.
그게 아니면 노역이나 취사 같은 걸 하게 하는 거지요. 공병대 있쟎아요. 진지공사니 하수도 공사니 또는 소록도같은데 보내서 대민지원을 하게 하는 그런 것, 요리 아니면 세탁, 목욕탕 관리 같은 그런 일을 하게 하는 거지요. 총을 잡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은 많습니다. 다만 그것이 너무 편해서 병역을 이행하는 데 있어 다른 병사들이 불공평하다고 느끼게 되면 곤란합니다. 여하튼 평화를 사랑한다면 그들에게는 그런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2.귀신의 본질
자,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시다. 본문의 귀신들렸다는 말은 귀신의 세력하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덕분에 귀신의 세력에서 벗어나자 저절로 앞도 보고 말도 하게 된 것입니다. 귀신은 사람을 괴롭히는 일을 주로 합니다. 그런데 그런 귀신을 영험하다고 섬기는 무당들을 보면 정말 아찔합니다.
게다가 그런 무당들이 귀신을 이용해서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는 굿은 정말이지 이론적 모순입니다. 귀신에 내편과 니편이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 모든 귀신들은 사탄의 졸개이지 편을 나눌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신이 아니라 귀신이 이유, 우리가 신이라 하지 않고 악마라고 부르는 이유는 비윤리적이고 남이 잘되는 것을 못보는 본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들은 절대로 사람을 이롭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귀신이나 악마를 이용해서 뭔가를 해보려고 가까이하는 자는 반드시 끝이 좋지 못합니다. 절대로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사탄이나 귀신이 건드리지 못합니다. 다만 우리가 지레 겁을 먹는다든지 그들의 틈입을 허용한다면 문제가 달라 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깨어서 성령이 내재하시도록 그의 보호와 인도를 바라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주님안에 있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마귀는 우는 사자처럼 우리를 삼키려고 틈을 노립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일입니다.
3.메시야로 인정한다는 것
여하튼 이런 놀라운 기적을 보고 사람들은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라고 말합니다. 좀 이상한 표현이지만 제대로 말하면 ‘아마 다윗의 자손일 것이다’ 이런 정도의 표현입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니까 메시야가 맞는 것 같다는 고백입니다. 이들은 예수가 메시야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마 메시야일 것이라고 거의 확정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메시야로 공인하는 것에는 난색을 표합니다. 왜냐면 그가 메시야로 공인을 받게 되면 사람들에게 엄청난 후폭풍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지금 유대종교로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의 기득권이 뒤집히고 전혀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약한 자들의 세상이 되고 부자들과 권세자들의 희생을 요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로마와 싸운다고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요구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역사하는 것을 보니까 메시야인 것 같지만 그래도 어깃장을 놓는 겁니다. 일부러 진실을 외면하고 몽니를 부리는 겁니다.
백성들과는 전혀 다른 잃을 것이 너무 많은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메시야 되심을 부인하는 것에서 나아가 이런 가소로운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들이 말해놓고 자기들도 안믿을 이야기입니다.
4.성령을 거스리며 사함을 받지 못한다
24절에 “듣고 이르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억지도 정도가 있는 것이지 이 사람들 정말 너무 막무가내입니다. 이 사람들은 지금 질투와 욕심 때문에 진실을 외면하고 억지를 부리고 있습니다. 고집쟁이들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이들이 자기의 질투 때문에, 기득권에 대한 집착 때문에, 자기가 가진 것을 지키려고 진리를 외면하고 굽은 것을 곧다고 하고 곧은 것을 굽었다고 하는 웃기는 행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그 옛날 예수를 부인한 바리새인들과 같은 이들입니다.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합니다.
바알세불은 ‘파리의 왕’ 또는 ‘똥의 왕’이란 말입니다. 아마 파리가 분뇨위에 주로 있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파리와 그걸 동일시한 모양입니다. 왜 파리의 왕이 귀신의 왕이 되었느냐하면 파리가 주로 병을 옮긴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당시 사람들이 모든 병을 귀신의 소행으로 여긴 것과 마찬가지로 파리가 가는 모든 곳에 병이 생기니까 이 말들이 서로 통하게 되었고 그래서 바알세불이 ‘귀신의 왕’도 되고 ‘파리의 왕’도 되고 또 ‘똥의 왕’도 된 겁니다. 그러니까 당시 유대인들이 사탄을 경멸조로 이렇게 불렀다는 겁니다.
나아가 유대인들은 지금 예수님의 역사를 사탄의 역사로 폄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크게 책망을 받는 겁니다. 성령을 거스리면 너희가 결코 사함을 받을 수 없다. 이렇게요.
5.사탄이 사탄을 쫓아 낼 수 있을까?
주님은 26절에 “만일 사탄이 사탄을 쫓아 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어떻게 그의 나라가 서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너무나 당연한 진리이지만 저는 여기서 한가지를 짚고 넘어 가야겠습니다. 소위 굿이란거. 귀신을 물리치고 액을 물리치고 하는 목적으로 하는 굿은 실제로 전혀 효험이 없습니다.
귀신을 물리치기위해서 귀신의 힘을 빌린다는게 절대로 말이 되지 않습니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 아니라면 이건 전혀 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귀신이 귀신을 무너뜨리기위해 서로 싸운다?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중지란으로 스스로 망하는 겁니다.
그래서 굿을 하면 처음에는 효과가 있는 것 같아도 결코 오래 가지 않고 결국은 더 심해 집니다.
다만 무병이라고 해서 내림굿을 한 사람이 무당이 되는 일이 많은데 이는 사탄이 자기의 세력을 확장하기위해서 하는 일일 뿐입니다.
어떤 탈렌트의 이야기입니다.
이유없이 아프고 뭐뭐하고 해서 용한 무당에게 갔더니만 내림굿을 해서 신을 받아야 된다고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고 해서 돈을 주고 내림굿을 했답니다. 그래서 스스로 무당이 된 겁니다.
비교적 유명한 텔런트가 내림굿을 통해서 무당이 되는 일이 흔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동안 방송과 신문에서 떠들썩 했는데 그러나 그는 3년 후에는 무당을 그만두고 자기가 그때 정말 잘못했다고 지금은 동네방네 외치고 다닙니다. 자기 말로는 그거 하는 바람에 프로그램 섭외도 끊기고 ‘신세’만 조졌다는 거지요. 당연하게 신기도 없고 무당질도 못한거지요.
우리는 그런 일을 당하면 덜컥 겁부터 냅니다. 귀가 얇아가지고 자기가 가진 신앙이 없으니까 줏대가 없이 마구 흔들립니다. 이 사람 말을 들으면 이 말이 맞는 것 같고 저 사람 말을 들으면 저 사람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어째야 좋을지 모릅니다. 아! 내가 무당이 되지 않으면 죽고 집안이 멸문하겠구나! 이런 황당한 생각을 하니까 사탄이 그 틈을 노리고 그를 조종하려고 자기의 졸개를 삼으려고 침투한 것입니다. 내림굿도 그냥 해주는게 아닙니다. 돈도 엄청나게 주고 하는 겁니다. 욕은 욕대로 보고 돈은 돈대로 날리고 뭐하자는 겁니까?
그럴 땐 무당이 아니라 용한(?) 목사를 찾으세요.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세요. 그리고 기도하세요. 무병이고 뭐고가 다 맥을 못춥니다. 사람을 조종하려는 귀신의 장난은 하나님의 성령 앞에 아무것도 아닌게 됩니다. 성령의 역사는 그 모든 것을 태워버리고 압도하고 묻어 버립니다. 무단 4000명을 모아서 단군교를 만들고 이적을 행하던 김해경 씨가 도중에 강제적인 하나님의 힘으로 무당을 관두고 목사가 된 것은 당연한 수순입니다. 그는 지금 또 다른 귀신과 싸웁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인 중에서 자꾸 일만 있으면 점쟁이를 찾고 굿을 하고 부적을 하고 하는데 제발 그런거 하지 마시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하세요.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고 나를 지켜보시며 보호하시고 나의 간구와 기도를 들어 응답하십니다.
물론 목사들 중에서 일부는 전혀 영성도 없고 하나님과의 교통도 없어서 무당에 비해서 못미치는 것 같아서 우습게 여겨지는 이도 있기는 합니다. 그래서 용한 목사를 찾으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주께서 가장 싫어하는 것이 우상을 섬기는 겁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우상을 놓은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아이콘입니다. 자기의 형상을 가진 우리 인간들이 사탄에게 귀신에게 엎드려 경배하는 것을 그냥 보아 넘기실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사악한 사탄 앞에 굴복할 수 없습니다. 결코 굴복해서도 안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형상을 주신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입니다.
6.하나님의 나라를 임하게 하려면
28절에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여기에 아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고 이땅에 오신 주님은 그의 모든 사역이 하나님의 나라를 만드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가 메시야로 인정받기위해 오신게 아닙니다.
성경에서 복음서에서 제자들은 그가 메시야임을 굳이 밝히고 있지만, 초대교인들에게 예수가 메시야인 것이 중요하지만 오늘 우리는 그가 메시야라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만일 그가 메시야가 아니었다면 우리가 그를 알지도 못했을 것이고 그를 믿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다른겁니다. 뭡니까? 예수가 이루고자 했던 하나님의 나라!
그래요,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더욱 공고히 하는 것이 우리에게 더 중요합니다. 우리 주님에게도 당연히 그가 메시야로 인정받는 것보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는 것이 더 중요했는데 성령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 가운데 임하게 하는 일이라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일반적으로 지리적인 영토를 가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히려 사람을 다스림으로 성립합니다. 그 사람이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가지고 살게 되고 하나님의 명령을 법으로 인식하고 살게 된다면 그게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되겠기 때문입니다.
7.사탄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당연하게도 물리적인 천국은 존재합니다. 하늘 왕국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하늘에 존재합니다. 삼층천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려고 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마귀의 백성이 살게 되면 그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만일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어떻게 그의 나라가 서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이 세상은 하나님이 일시적으로 공중권세 잡은 사탄에게 내어 주셨습니다. 왜냐면 이 세상의 사람들이 죄를 저질러서 하나님과 분리되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심으로 죄없다 함을 입은 우리 거룩한 무리, 성도들이 이 세상에 더 많아 진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더 굳게 서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사탄의 영향력하에서 사탄의 법칙대로 산다면 그게 바로 사탄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하나님과 화해하고 다시금 하나님의 법으로 자기의 법을 삼고 마음에 하나님을 모신자들이 많아 진다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더 굳게 서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어린양 그리고 성도들이 다시금 재림하게 될 때까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사명이 되는 것입니다.
사탄은 자기가 이 세상의 권세를 잡은 왕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세상에 죄인들밖에 없을 때는 그게 당연한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귀신의 지배하에 귀신의 영향하에 온갖 더러운 죄를 저지르고 살았지만 결코 그걸 더럽다고 자기가 불행하다고 깨닫지도 못하고 그렇게 살아 갑니다. 찰나의 쾌락과 욕망에 사로잡혀서 정신없이 남을 짓밟고 빼앗고 울리면서 그렇게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사탄의 법이 다스리는 나라, 사탄이 다스리는 나라 그게 바로 지옥입니다. ‘인세의 지옥’이라는 말은 그래서 더 섬뜩합니다. 지금 우리는 인세의 지옥을 만들 것인가 지상 천국을 만들 것인가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어쩌면 이미 지옥도가 만들어 졌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직은 늦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 하나님의 공의를 따르는 이들이 있는 한 완전한 지옥은 아닙니다.
주께서 이천년 전에 오셔서 이 땅에 하나님의 법이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기 시작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나라를 더 확장하고 굳게 세우는 사명을 갖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귀신에 사로잡힌 자는 가장 직접적으로 지옥도를 보여주는 존재입니다. 그의 모든 혼과 이지를 다 상실하게 하고 그냥 꼭두각시처럼 조종하며 해악을 끼치고 사람들에게 피눈물을 흘리게 합니다. 사탄의 나라에서 백성들은 존중받고 행복할 권리를 가진 대상이 아니라 마귀의 지배하에 신음하며 눈물흘리며 원망하며 서로 싸우는 그런 존재, 악의가 더 높아 질수록 사탄을 기쁘게 하는 그런 존재가 됩니다. 그러므로 결코 사탄의 나라의 백성들이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무당의 말을 들어서 복을 받는 다는 개념은 그래서 거짓입니다. 처음엔 잘되는 것 같다가도 귀신은 궁극적인 인류의 파멸과 그로인한 절망과 분노를 가장 좋아하는 존재입니다. 그들의 목적은 모든 인류를 타락시키고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고 그래서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싫어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믿는 이가 잘해야 합니다.
본연의 자세도 성도를 대적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체면상 그걸 노골적으로 표하지는 못하고 있을 때 성도가 목사가, 교회가 불신자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행동을 함으로 그들에게 공식적으로 우리 성도들과 교회를 욕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 주는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화려하거다 쾌락적이거나 색욕적이거나 욕망을 충족시키는 그런 곳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궁극적인 행복과 사회구성원 다수의 더불어 사는 것을 추구하는 나라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본성상 깨끗하고 웃고 감사하는 그리고 잘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 신민들인 우리 역시 그렇게 되겠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세상에서 과거처럼 귀신을 쫓아내는 놀라운 역사를 잘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요즘에도 물론 축사의 이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제가 그런걸 몇 번이나 경험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너무 평안하고 복된 환경가운데 믿게 되어서 그런 이적이 별로 필요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가 필요할 때도 있는 법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가졌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셨느냐 아니냐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충만히 임하셨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겠지요.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성령의 역사를 믿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고 더욱 굳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임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이 오늘 우리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과 사랑가운데서 올 한 해도 승리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과 즐거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것이 나에게 가장 중요한 사명임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렇게 그렇게 올 한해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승리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7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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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읽고 있는 책의 구절을 빌립니다. "공포심이 없어지면 사람은 본디 가지고 있던 생물로서의 예민함을 잃어버립니다. 쾌적함과 편리함을 추구하는 가운데, 인간은 근거 없는 안전 신화 같은 것을 만들어냈지만, 결국 그 때문에 몇십 만, 몇백 만이 넘는 소중한 목숨을 위험에 노출시키는 아주 커다란 실패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강상중 선생님의 글입니다. 일본 원전 사고에 대한 이야기지요. 인간의 교만에 대한 경고이자 반성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나만은 다를꺼야, 괜찮을꺼야 라는 신화에 기대려고 합니다. 그래서 무당이 주는 달콤한 말에 넘어가는 건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저는 두려운 마음, 겁나는 마음, 공포 같은 감정을 느낄 필요도 있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젊은 날에 저는 두려움을 없애는 것이 바람이라고 종종 써왔는데... 두려울 것 없는 삶이 너무 위험하고 교만한 생각이었다는 반성이 이제서야 들었습니다. 오히려 사람은 실수를 하고, 실패를 하고, 냉정히 자기반성을 하면서 성숙해져 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아픔이 우리를 건강하게 할 수도 있다는 역설입니다.
아픈 시간을 보낼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을 마침내 이겨내고, 견뎌내고, 행복의 문을 열 수 있는 것이 사람이 가지는 놀라운 힘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지지 않기를 바라며, 오늘 승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권사님께서 늘 이렇게 격려했습니다. 찬송가 마귀들과 싸울지라 를 힘차게 불러보아라 라고. 삶이란 힘든 과정 속에서도 즐거움도 함께 있는 소중한 경험. 그러므로 매일을 그렇게 아끼며 보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2017. 02.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