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삶이 지난 평범한 날들과는 다르게, 소중하고 특별해지기를 소망합니다. 영화 이다는 한 소녀가 자신의 삶을 찾아나서는 이야기를 흑백으로 담고 있는 작품입니다. 처음에는 어디에서나 수녀로서 정해진 평범한 틀을 지키려고 하지만, 사건을 겪으면서 가치관이 달라지기도 하는 등, 그 동선을 생각해보면 인간은 정말로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구나를 깨우치게 됩니다. 비교적 짧은 흑백영화임에도, 로튼토마토 신선도 95퍼센트라고 하는데, 영화광인 저도 매우 강한 영감을 선물받은 귀중한 작품이 되어주었습니다.
예컨대 너무 힘들게만 느껴지는 날이 있기 마련입니다. 일하는 공간이 부쩍 부담스럽기만 하고, 부모님은 이제 나이드시고 오래도록 아프시고... 아, 그래, 이것이 살아가는 무게구나 하는 책임감이 느껴지고,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다는 곳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답이라고 일기장에 쓰는 것은, 열심히 더 열심히! 누구에게나 힘든 시기를 견뎌가며 반드시 꽃이 필 수 있음을 간직하고 유지하는 것. 그 강인함을 가져보려고 발버둥치는 요즘입니다.
※이 리뷰는 영화 본편에 대한 누설이 가득 담겨 있으므로 아직 영화를 보시지 않은 분은 반드시 주의하세요!
고아로 자란 안나라는 젊은 아가씨는, 수녀가 되기 직전 유일한 혈육인 이모 완다를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완다와 함께 지내볼 것을 권유받은 것이지요. 이모 완다는, 안나에게 비밀들을 하나 둘 털어놓습니다. 본명은 이다 라는 것이며, 유대인이라는 것. 그리고 부모님의 죽음의 과정을 전해 듣지요. 폴란드에 전쟁의 불똥이 튀었고, 결과적으로 많은 유대인들은 목숨을 잃어갔다는 것입니다. 예쁜 아가씨 이다는 부모님의 마지막 흔적을 찾아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고심하던 이모 완다는 마침내 이다를 도와주려고 매우 적극적으로 나섭니다.
여기서 첫 번째 비극이 드러납니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이다의 부모님만 죽은 것이 아니었고, 당시 이모 완다의 아들까지도 목숨을 잃었다는 것. 흐느끼는 완다를 수녀복의 이다가 말없이 꼭 안고 있는 것을 보고 있자면, 전쟁과, 유대인 학살의 비극을 생생하게 간접체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다는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요? 그녀는 당시 완전 갓난아기라는 이유로, 차마 죽일 수 없어서 성당에 버려두었다는 겁니다.
완다 이모는 누구였을까요? 그녀는 한 때 잘 나가는 판사 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 그녀는 현직에서 바람처럼 물러나서, 술집에서 남자를 꾀어내, 그저 하루 밤의 일탈을 즐기는 여성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쉴새 없이 담배를 물고 있고, 음주운전도 서슴치 않습니다. 그랬던 완다이지만, 예쁜 사촌 이다를 보면서, 삶을 즐겨보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명대사는 심금을 울리지요. 성녀 이다야, 성경책을 펴보라고, 예수님은 나같은 사람도 사랑하고 있다고. 담배와 술, 그리고 남자와의 일탈로 물들어 있는 완다지만, 실은 누군가 자신을 깊이 사랑해 주기를 원했던 것이 아닐까, 자신과 함께 생활할 가족이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라는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완다의 흐느끼던 대사를 잊지 못합니다. "내 아들, 그 아이를 나는 아직 잘 알지도 못했는데..."
이다 마저 수녀가 되겠다고 떠나가 버리고, 삶의 즐거움들로는 도무지 채워지지 않는 공허감을 매일 느껴가던 전직 판사 완다는 미련없이 세상을 자살로 마무리 합니다. 그리고 이다는 수녀원에 돌아오자 자신의 삶이 수녀가 되기에는 부족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신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 흔들렸던 걸까요. 예수상 앞에서 갈팡질팡 고민합니다. 다시 세계를 향해 자신을 시험해보는 이다의 두 번째 모험이 대단했습니다.
높은 하이힐, 근사한 원피스, 담배를 피워보고, 술을 마셔봅니다. 그리고 젊고 잘생긴 악기연주자와 함께 달콤한 하루밤을 보냅니다. 붉고 매력적인 머리카락, 아름다운 여성 이다로서 또 하나의 가능성이었지요. 그리고 그녀는 남자에게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될지를 적극적으로 먼저 물어봅니다. 돌아오는 것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집을 가지고 평범하게 산다는 것. 저는 이다가 춤을 천천히 배워나가듯이, 충분히 사람한테 사랑받을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거절하고 그녀는 다시 수녀원으로 돌아오는 선택을 보여줍니다. 자동차 라는 세상이 달리는 빠른 속도와는 반대방향으로 수녀복을 정갈하게 차려 입고서 뚜벅 뚜벅 걷는 것입니다. 가난을 향해, 정적을 향해, 소소함을 향해 살아갈 수 있다는 그 선택이 저는 매우 강렬했습니다. 사람은 있어야 할 곳을 향해, 저마다 길 따라 가기 마련입니다. 때로는 굽어가고, 돌아갈 지언정 말이에요.
저를 매우 아껴주셨던 할머니는, 손자를 두고 성직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게임하고, 영화보고, 만화보고 노는 것을 좋아하던 (가끔은 독서도 하는) 한결같이 탕자 같은 삶을 살아왔지요. 돈은 필요한 만큼만 벌면 된다고 생각하여, 욕심을 내 본 적도 없습니다. 이제와 프리터 같은 책임감 없는 지난 삶들이 용서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생각이 많이 교정되었습니다. 완다의 일갈이 진실이었기 때문입니다. 신은 그 누구라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왔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부터 어떤 태도로 살아갈 것이냐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오래도록 좋아하던 다행이다 라는 노래에서는, 고된 살아남기가 무의미하지 않게 된 것이 그대 덕분이라고 고백하는 참 아름다운 가사가 나옵니다. 그럼 그런 그대가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요. 그래도 신의 예쁨을 받고 있는 특별한 존재라는 이야기를 오늘은 또박또박 남겨두고 싶습니다. 방황하고, 두려워하고, 살아가기가 여전히 힘들어도, 그런 삶이라도 힘내어 간다면 버텨내 간다면 괜찮다는 위로를 남겨두고 싶습니다.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함부로 손가락질 하지 않기를. 오히려 자신을 정갈하게 가꿔나가고, 타인의 처지를 헤아릴 줄 알기를. 이다는 이모 완다를 이해하고 가슴에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했을테니까요. / 2017. 03. 10. 리뷰어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