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전정판,시편121:1-8)/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8. 1. 9. 02:55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전정판) (시편121:1-8)

 

대망의 2018년이 되었습니다. 작년에는 대망의 2017년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 전에는 당연히 대망의 2016년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마 그 전에도 역시 대망의 몇 년이라고 했을 겁니다. 그래요, 우리는 항상 새해를 맞을 때마다 큰 꿈을 가지고 그 꿈이 올해는 반드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대망의 새해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뭔가 막연히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마구 마구 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새해에 꿈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지도 모릅니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해마다 가슴으로 꿈을 꿉니다. 체게바라의 말이 생각납니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에 불가능한 꿈을 꾸자” 뭐 전 솔직히 리얼리스트도 아니고 꿈이 불가능하다고도 생각지는 않지만 이 말이 서로 모순인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우리 성도에게 필요한 말 같습니다. 이 사람은 사회주의자인 주제에 묘하게도 낭만적입니다. 저도 옛날 휴대폰 대리점에 써져 있는 이 글귀를 보고 참 충격을 세게 받았습니다.

 

우리가 비록 현실 세상에 두 발을 딛고 있지만 우리의 눈은 하늘을 향하여 있어야 하는 우리 성도들과 그의 말이 비슷한 것 같습니다. 그래요 우리는 분명한 생활인이기는 하지만 세상에 안주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나아가는 이상주의자들입니다. 그리고 그 진군은 우리의 삶이 끝날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꿈을 꾸는 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네 삶은 순례자의 삶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 천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순례자. 순례자에게는 순례길의 끝에 목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순례를 마치게 되면 순례자는 집으로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네 인생길이라고 하는 순례길은 그런 일반적인 순례와는 전혀 다릅니다.  이 순례길의 가장 큰 특징은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길을 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순례길에 도데체 무엇이 있는지 무슨일이 생길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 누구도 두 번 순례길을 가는 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게 인생이라는 순례길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묘사하는 순례길보다 훨씬 더 위험하고 흥미진진하고 역동적이며 또 공포스럽고 진지합니다. 두 번은 없습니다. 누가나 단 한번만 이 길을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목적지에 다다르면 돌아오지 못합니다. 중도에 쓰러지거나, 끝까지 가서 하나님과 기쁨을 함께하거나가 있지 다른 길은 없습니다. 중도에서 포기하면 무저갱의 불길이 우리를 삼키려고 준비하고 있을 뿐입니다.

 

오늘 본문1절에서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라고 하는 데 여기서의 산은 시온산을 말합니다. 성전이 있는 산을 시온산이라고 하고 유대인들의 정신적인 지주라고 보면 됩니다.
그러니까 이 시가 순례시인데 오랜 순례길을 거의 다 마치고 이제 멀리서 시온 산이 보이는 광경을 상상하면 됩니다. 그러니까 저 멀리 유대광야 건너편에 희미하게 솟아오른 산지가 있습니다. 그 중에 성전을 품고 있는 시온 산이 보입니다.

 

순례자는 지금 자기 순례길의 최종 목표인 성전이 있는 시온 산을 멀리서 바라보고 나의 도움이 저 성전의 하나님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껏 인생의 순례길에서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저 시온 산을 올라 최종적으로 성전에 오르기까지 남은 여정도 지켜주실 것을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이제까지 나를 지켜주신 나의 하나님을 감사하며 찬송하고 또한 인생의 남은 길에서 나를 지켜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꿈을 꾼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우리에게 시간이 있는 한
우리에게는 여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살아 있는 한 꿈을 꿀 수 있습니다. 나이가 많다고 해서 지금 몸이 허약하다고 해서 돈이 없고 인신의 자유를 구속당하고 있다고 해서 여건이 불리하다고 해서 꿈을 꿀 수 없는 게 아닙니다. 살아 있는 한 우리 모두는 꿈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꿈을 향하여 나아갈 자유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년 새해를 맞이하면서 꿈을 꾸고 희망에 불타오르고 그런겁니다.

 

젊은이들만 꿈을 꿀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늙은이도 어린이도 누구나 꿈을 꿀 수 있습니다. 다만 그 꿈이 하나님의 품안에서 실천될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내가 잘해서 지금 여기에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내가 조금만 유리해지고 여유가 생기면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잘해서 라고 생각하는 교만을 저지르기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에 아무런 문제가 없으면 교인들이 목사를 찾지 않습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으면 기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지금의 평안을 있게 하셨다는 것을 까맣게 잊습니다. 그러다보면 생각지도 못했던 위기의 순간이 닥쳐 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지켜주시는 하나님을 갈구합니다. 가끔가다가 찾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항상 지키고 보호하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나 된 것은, 내가 이제껏 무사히 살아온 것은 나의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심 때문임을 한시도 잊지 말고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인생의 순례 길을 무사히 걸어서 지금 성전을 바라볼 수 있음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입을 열어 그리고 행동으로 시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설 때까지, 우리 순례 길의 최후의 순간까지 결코 방심하지 않고 긴장을 풀지 않고 나의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구해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로 인생이라고 하는 순례길입니다.

 

우리는 광활한 대지를 어디나 걸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데나 걷다보면 그게 길이 될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성도들에게 주어진 길은 좁은 길입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는 아주 좁은 길입니다.

 

이 길은 찾는 이가 적답니다. 그리고 멋있어 보이지도 않습니다. 어쩌면 걷기가 힘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길의 끝에는 황금빛 찬란한 천성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생명의 면류관이 기다립니다. 그곳에 가면 우리가 순례길에서 만났고 또 헤어졌던 그리운 이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먼저 간 성도들이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립니다. 지금 그 곳에 우리를 위한 아름다운 집이 지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좁은 길을 묵묵히 그러나 소망을 가지고 걷는 것입니다.

 

우리네 삶에서 도움이 절실히 필요할 때 우리를 도울 도움은 다른 곳으로부터 오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기를 위할 뿐 우리를 도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떤 착한 이는 우리를 도우려는 마음을 먹을 수도 있지만 인간의 힘으로 우리의 운명을 바꾸어 주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병이나 자연재해나 전쟁같은 것들 우리가 도저히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것들로부터 우리를 도우기 위해서는 내가 아는 누구누구가 아니라 인간 아무개가 아니라 천지의 대주재요 전능자인 나의 하나님이 간절히 필요합니다. 그 도우심을 바라고 나는 지금 산을 바라봅니다. 그 산이 품고 있는 성전을 바라봅니다. 그 성전에 좌정하고 계신 나의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산은 거대한 모습으로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산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넉넉한 품으로 우리를 포용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은혜가 그와 같습니다. 우리가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며 기도하면 우리가 회개하고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아버지께 나아가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한다면 그는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시고 그리고 우리에게 안식과 위로를 허락하십니다.

 

참고로 요즘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 영이신 하나님을 우리의 생각대로 형상화해서 건물에, 토지에, 어떤 시설에 제한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꾸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려 합니다.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받으라는 인간 누구의 말에 복종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성령의 임하심을 사모할 뿐입니다. 보혜사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품으로 이끄실 것입니다. 그가 우리의 기도를 도우시며 말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보살피며 위로하시고 그리고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인간은 뇌가 상하면 회복되지 않습니다. 죽은 뇌세포는 재생되지 않는 답니다. 치료방법이 없습니다. 뭐 뇌의 앞부분, 옆부분이 상했다고 회백질이 어쩌고 저쩌고 할 때 우리는 절망했습니다. 분명히 우리 하나님이 낫겠다고 하셨는데 현실은 점점 더 나빠졌습니다.

 

서울대 병원에만 가면 뭔가 방법이 있을 것 같아서 갖은 수를 써서 베트남에서 베트남의사까지 대동해서 서울대 병원으로 이송했지만 정작 서울대학병원에서 전혀 치료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냥 기다리랍니다. 그리고 장기로 가야 된답니다. 아이는 보지 못하고 움직이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데 때로 경련을 일으키며 고통하는데 그냥 기다리랍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눈앞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게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불가능이 없으신 전능자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의 꿈을 제한할 필요가 없습니다. 안된다고 미리 단정할 필요도 없고 낙심할 필요는 더더욱 없습니다.

 

또한 우리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어떤 곳에 제한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영이시기 때문에 당연히 볼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순수한 영이 되지 않은 다음에는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요즘 우리는 구약시대와 달리 온 천지에 계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어디서나 언제나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성전은 시온산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네 순례길은 저 천성을 지향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며 우리의 정욕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대의를 위해 기도한다면 반드시 그 기도를 들어 주실 것이며 그 나머지는 저절로 더하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제가 이스라엘을 잘 모르기는 한데 멀리 시온산을 바라보는 위치까지 와도 절대로 순례길이 끝이 난 것은 아닙니다. 그 사이에 유대광야가 있답니다. 그러니까 거대한 메마른 황야가 놓여 있다는 겁니다. 그 광야를 건너고 그리고 산으로 올라가야 비로소 예루살렘의 성전에 다다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네 순례길이 완전히 끝이 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아직도 가야할 길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성경에 보면 하나님에 대해서 두가지로 표현합니다. 하나님과 여호와, 하나님은 원어로 하면 ‘엘로힘’입니다. 여기서 여호와란 표현은 언약의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길을 간다면 그가 우리를 보호하고 인도하며 살릴 것을 약속한 그 언약의 하나님을 말합니다. 여기 보면 나의 도움이 바로 그 여호와로부터 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지 않고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길을 따른다면 그는 결단코 우리를 모른다 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실 것입니다.

 

보통 이런 형식의 시는 서로 서로 교대로 노래를 부르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가령 앞부분에서 순례자가 노래했다면 그에 대한 답으로 제사장이 노래하는 그런 , 그렇지 않으면 이 순례자가 노래하고 다른 순례자가 답하고 이런 식으로 서로 서로 교대로 노래를 부르면서 자기의 신앙과 호소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3절부터는 ‘나’가 아니고 ‘너’에게 무엇 무엇을 해주시는 하나님 여호와에 대해서 말합니다. 먼저 3절에서 여호와는 우리를 실족지 않게 하시고 졸지도 않고 우리를 지키신다고 말합니다. 실족한다는 말은 원래 비틀거리다. 흔들리다는 말에서 나와서 잘못 디딘다는 뜻입니다.

 

순례자가 시온산을 향하여 올라갈 때 자칫 잘못 발걸음을 내디디면 실족해서 산 아래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질 수 있습니다. 특히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산길에는 황량한 산길이 끝없이 이어지기 때문에 실족했을 때 나무를 붙잡고 추락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구불구불 계속해서 산을 올라가고 또 한쪽이 깎아지른 절벽이기 때문에 자칫하면 크게 다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은 결코 졸지 않고 우리를 지키신다는 겁니다.

 

사탄의 이름은 훼방자, 참소자입니다. 여기서 그의 이름 ‘훼방자’라는 것을 보면 이것은 우리의 앞길에 뭔가 장애물을 두거나 함정을 만들거나 덫을 놓아서 우리로 하여금 실족하게 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넘어지면 우리는 죄악의 깊은 구덩이로 또는 절망의 골짜기로 떨어지게 되는 것이며 심지어는 모든 힘을 다 잃고 다시는 산을 오를 엄두를 내지 못하게끔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지키시는 자는 결코 잠시도 졸지 않고 불꽃같은 눈동자로 우리를 지키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성경에서 하나님의 보호를 설명하면서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는다는 말을 자꾸 반복하는지 이해가 되십니까?
당시 사람들은 자기네 신이 평시에는 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뭔가를 아뢰고 그 신이 들어주기 위해서는 당연히 신을 깨워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네들의 제사나 종교의식은 매우 시끄럽고 음란하며 위험했습니다.

 

이들이 신을 깨우기 위해 소리를 지르고 악기를 동원해서 시끄럽게 하고 자기몸을 자해하고 사람을 불태워 죽이고 성적인 행위를 하고 하는 것들이 다 자기네 신을 깨우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은 결코 주무시지도 졸지도 않기 때문에 우리네 기도를 듣게 하기 위해 깨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성을 보인답시고 자기 몸을 자해하거나 시끄럽게 타악기로 울리거나 소리 높여 뛰놀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 악기로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 나쁜게 아닙니다. 다만 그렇게 하지 않아도 우리의 기도를 듣지 못하는 일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자해함으로 정성을 보인다는 생각은 이교의 풍습이고 사탄의 방식이므로 절대로 해서는 안됩니다.

 

참고로 어떤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건 성경이 아닙니다. 그냥 어떤 이의 경험담입니다. 단군교 교주로 있다가 목사가 된 어떤 분의 경험담입니다. 사탄이 세상을 높이 날아다니다가 타악기가 울리게 되면 자기를 부른다고 생각해서 내려온답니다. 그래서 무당들이 징이나 북이나 장구를 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부 목사님들은 교회에서 드럼을 치지 못하게 합니다. 하하. 뭐 그 사람 말이지만 본문 당시의 이교도들의 생각과 비슷하네요.

 

당시에 순례자들은 무력이 없기 때문에 밤에 잘 때는 악한 짐승에게 상할까봐서 순번을 정해서 불침번을 서고 때로는 호위병을 돈으로 사서 이들의 호위를 받으며 순례길을 다녔습니다. 그만큼 순례길이 위험합니다.

 

우리네 인생길도 마찬가지로 위험합니다. 도저히 안치 앞을 볼 수가 없습니다. 잠시도 멍하게 있다가는 자칫 큰일이 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순례자들도 그러했기에 안전을 위해서 노력한 것입니다. 그러나 호위병이나 불침번이 있다고 해서 이들이 모든 위험으로부터 안전했던 것은 아닙니다. 이들 역시 피곤하고 지치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졸거나 잘 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큰 위험에 노출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므로 지치거나 곤할 수도 없고 그래서 피곤을 풀기위해 졸거나 잘 필요도 없습니다. 그는 절대로 이런 식의 순간적인 자그마한 실수조차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품에 있는 한 언제나 안전하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 하나님은 엄청나게 세심하게 우리를 배려하셔서 아주 적은 부분도 놓치지 않고 지키시며 보호하십니다. 요즘말로 하면 최선의 서비스를 제공하십니다. 자기에게 가까이 오기를 힘쓰는 주의 성도들을 보호하십니다.

 

5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맹수의 위협이나 도둑들 강도들의 위험 그리고 실족에 대한 위험뿐만 아니라 우리네 순례길에서 늘상 만나는 작렬하는 태양빛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시는 우편 그늘이 되신답니다. 그늘이된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와 가까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항상 계셔야 그늘이 유지될 것입니다.

 

작렬하는 태양은 앞서의 위험에 비하면 그 위험도가 작습니다. 그러나 이 햇빛은 순례길 내내 우리를 괴롭게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겨울이라서 햇빛이 엄청나게 귀하고 좋지만 여름 사막에서 작렬하는 태양은 결코 만만하지 않습니다. 이 태양빛이 너무 심해서 순례자들은 간절히 오아시스를 원합니다. 그 오아시스가 되어 주신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뭐합니까? 그냥 쉬는 거지요. 그러나 여기서 잘 쉬어야 순례자들이 다시금 힘을 내어서 순례길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설마 오아시스에서 천년만년 살 걸로 생각하시는 분은 안계시겠지요?

 

사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나는 것은 지극히 어렵습니다. 그리고 오아시스에서 영구히 머물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오아시스가 나와 항상 함께 있다면 그리고 그 오아시스가 나를 중심으로 계속해서 나의 순례길을 따라 움직인다면 우리네 순례길이 얼마나 쉽고 편안해 질까요?

그리고 왼편이 아니라 오른편이란 말은 우리에게 여호와의 권능과 그가 우리와 매우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여기 6절에 낮의 해와 밤의 달이 우리를 상치 못한다는 말을 한번 살펴 봅시다. 낮의 해와 밤의 달을 한꺼번에 해석해서 조금도 쉼없이 틈없이 우리를 완벽하게 보호하신다는 말이 됩니다. 또 다르게 보면 낮의 해는 육체적인 어려움을 밤의 달은 정신적인 어려움을 상징해서 영육간에 우리를 지키신다는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여하튼 밤낮 영육간에 우리를 완벽하게 보호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하나님, 우리가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은 아주 큰 어려움에서나 겨우 우리를 살리는 그런 분이 아니라, 평소에는 우리에게서 관심을 끊고 주무시거나 조는 그래서 그를 깨우기위해 우리 몸을 자해하고 불태우고 소리치며 음탕한 행위를 하고 시끄럽게 중언부언해야 하는 그런 분이 아니라 세밀한 가운데서도 우리네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그는 대충대충이나 설렁설렁이 아니라  매우 세밀하게 그리고 정교하게 우리를 살피고 보호하신다는 겁니다. 아주 적은 어려움도 그가 계시므로 우리가 이길 수가 있다는 말도 됩니다.

7절에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말씀처럼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신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글 성경에서 너무 오버한 겁니다. 원문에는 환난으로부터 지킨다는 말만 있지 환난을 면하게 한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도들도 당연히 이 세상의 불행과 고통을 겪을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해서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그 모든 환난에서도 우리 성도들이 그 환난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도록 그리고 그 환난이 결국은 우리를 더 성장시킬 수 있는 영혼의 훈련이 될 수 있도록 하신다는 겁니다. 일시적인 어려움은 있지만 결국 주의 성도가 궁극적으로 승리할 수 있도록 하신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지금 일시적으로 환난을 당하는 성도가 있다면 인내하시길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 환난을 통하여 우리가 더 성숙하고 유능한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도록 훈련시키고 그 훈련이 끝날 때까지 우리가 좌절해서 중도에서 포기하지 않도록 지키실 것이며 그리고 결국은 승리의 면류관을 차지할 수 있도록 지키실 것임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환난은 주로 육적인 고통이나 불행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지키신답니다. 그러므로 영육간에 형통하도록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앞의 6절에서 영육간의 일을 지키신다고 하신 하나님은 여기서 다른 단어를 사용하여 한번 더 자신의 약속을 강조하십니다.

 

끝으로 우리 하나님은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라고 하십니다. 출입은 문자 그대로 나가고 들어옴을 말합니다. 아침에 일터로 나가서 저녁에 집으로 들어오는 과정을 모두 포함해서 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우리네 일상생활에서 지키신다는 약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순례시의 특수성에 비추어 이 순례길에서 성전에 들어가고 그리고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모든 과정을 의미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생이라는 순례길 전과정을 통하여 그가 지키신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2018년을 맞이 했습니다. 이 위험하고 불가측적인 세상 삶은 우리가 그 옛날 위험을 무릅쓰고 시온산을 향해 가는 순례길과 같습니다. 솔직히 이 세상살이 자체가 순례길입니다. 보이지 않는 위험과 고독한 먼 여정이 우리를 기다립니다. 우리는 순례길 도중에 사람과 환경과 재해와 여러 뜻하지 않은 일을 만나기도 하면서 때로 순례자들끼리 만나서 동료들끼리 앉아서 작은 행복의 시간을 보내기도 합니다만 인간은 근본적으로 고독하고 슬픈 존재입니다.

 

그리고 뭔가 돌아가려고 하는 귀소본능을 가집니다. 어디로 갑니까? 하나님께로 우리의 영이 나온 곳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은 어디서 나왔나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기를 불어 넣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육체가 다하면 영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의 영과 한몸이 되는 것입니다.

 

처음 우리는 친숙한 사람들과 함께 순례길을 떠납니다. 그러나 길이 계속될수록 시간은 흐르고 우리는 자라거나 늙어가며 어느 순간 우리 주위에 우리와 친숙한 이들이 점점 적어지다가 마침내 시온산을 바라보는 순간에는 전혀 새로운 사람들로 에워싸인 우리를 봅니다. 물론 세월이 흐르면서 그 새로운 이들과 다시 친숙해집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는 신앞에선 단독자로 저 세상으로 갑니다. 이를 군중속의 고독이라고 해도 좋고 영원한 타인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세월무상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순례길의 끝이 반드시 있다는 것과 이 순례길을 가는 동안 내 하나님의 보호와 돌보심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사실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해서 유산이라도 많이 남겨 주려고 아등바등합니다. 좋은 교육을 시켜서 저들이 보다 편하게 순례길을 걷도록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저들에게 남겨 주는 것입니다.

 

젊은이들 가운데 하나님을 부끄러워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세상 앞에 당당히 기독교인임을 나타내기를 부끄러워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왜냐면 세상의 동료들이 하나님을 폄하하기 때문에 공공연히 하나님의 편을 들고 하나님의 존재를 주장하며 동료들과 친구들과 하나님 때문에 싸우고 그의 보호와 돌보심을 옹호하는 것이 부끄럽게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부인하면 그도 역시 우리를 부인하여서 이 순례길에서 보호와 돌보심을 철회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 거친 광야에서 살아날 수 있을까요? 이 광야에서 우리네 자녀들이 어떻게 보호받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부끄러워하면 그 역시 우리를 공공연히 보호하기를 꺼려하고 우리의 존재를 부끄럽게 여길 것입니다. 많은 기독교 가정에서 믿음이 잘 계승되지 않음을 봅니다. 내 주위의 불신자들을 두고 우리가 전도한다고 거리에서 외칠 필요가 없습니다. 먼저 해야 할 가장 확실한 전도는 우리네 가정을 온전히 주님 앞으로 돌리는 것이고 우리네 자녀와 배우자가 하나님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 믿음의 용사가 되도록 교육하며 교훈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가족들이 우리의 자손들이 하나님의 보호와 위로가운데 있을 수 있습니다. 이 험난하고 가변적인 순례길에서 든든한 보장이 되실 주님을 우리의 보호자로 삼을 수 있습니다. 뭐가 뭔지 모르는 미망 속을 헤매는 우리네 인생길에서 순간순간 선택을 요구하는 갈림길에서 우리의 인도자가 되실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모두가 함께 한 하나님을 섬기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품안에서 보호받고 그의 평강을 힘입어서 올 한해도 기쁘고 즐거운 믿음생활을 하고 강철같은 의지로 궁극적으로 승리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8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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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멋지고, 폼도 제법 나고, 어딘지 있어보이고, 그렇게 반짝이는 넓은 길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곳으로 끝내 나를 인도하시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에 훨씬 더 갈등하고, 괴로워하며, 힘이 드는 곳으로 나를 인도하셨습니다. 내 욕심이 완전히 무너져 버리는 순간. 그제서야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제 일어나 함께 걸어가자. 저 좁은 길로, 용기 내어, 매일 매일 살아가보자. 라고 말씀하십니다.

 

어쩌면 그럴테지요. 하나님은 세속적인 성공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고난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며, 우리를 부자로 만들어 주는 요술램프 같은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주와 함께 길을 가는 것"을 원하고 있음을 이제서야 깨닫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우리가 기도하는 삶이며,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입니다. 앞이 너무나 캄캄해도, 주님을 향한 믿음을 잃지 않고, 오늘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침묵하실지도 모릅니다. 방황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말씀하신다고.

좁은 길로 힘내어 가라고. 이웃을 아낌없이 사랑하라고. 그리고, 소명을 다해서 열심히 살아가라고.

 

그렇게 2018년을 성실히 보내게 된다면, 다시 일어선다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동행 속에서, 영혼이 성숙해가는, 진짜 귀한 삶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예배자가 될 수 있기를 저는 이 시간 간절히 눈물로 기도합니다. / 3개월 만에 돌아온 2018년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