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로마서12:9-13)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제일 곤란한게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주일 성수? 십일조? 전도? 선행? 구제? 삼위일체 교리? 아니면 자꾸 성경을 믿으라고 하는데 정작 믿을 수 없는 그런 마음? 말도 안되는 기적들? 천지창조?
개인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 제일 곤란한게 이겁니다. 형제를 사랑하라.
솔직히 나의 입장에서 저 형제는 정말 주는 것 없이 미워서 전혀 사랑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자꾸 형제를 사랑하라고 합니다. 그래도 형제를 사랑하라는 말은 양반입니다. 심지어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고 합니다.
말도 안됩니다. 원수를 찾아가서 원수 갚지 않고 봐주는 것만 해도 어딘데 그가 잘못되었을 때 가서 먹이고 마시우게 까지 한다니 말이 안됩니다. 누구 말처럼 저는 뭐 땅파서 나눠줍니까? 서로 살기 어려운 처지에 주님은 자꾸 저보고 나눠주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성자 하나님이시니까 가능해도 오장육보가 다 있는, 오욕칠정이 다 있는 먹어야 사는 우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되는 말씀입니다.
말도 안되는 본문은 또 있습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북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합니다. ‘저주하지 말라’까지는 그래도 지킬 수 있겠는데 축복은 또 뭡니까?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억지로 한 축복이 하나님에게 상달되겠습니까? 그리고 혹시라도 우리의 축복이 응답되어서 그가 잘되면 우리는 뭡니까?
이렇게 성경은 우리의 기대수준을 계속해서 뛰어 넘고 있습니다. 소극적인 금지에서 시작해서 적극적인 이행까지를 요구합니다. 평범한 인간인 우리로서는 도저히 따를 수 없는 그런 수준입니다. 그래도 우리가 한번 본문을 자세히 살펴봅시다. 우리 주님이 설마 도저히 불가능한 과제를 제시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뭔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고 한번 성경본문을 살펴봅시다.
9절에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이 말씀이 상당히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여기에는 한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이 곧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한다고 하는 가정입니다. 사랑하는 것하고 악하고 선하고의 관계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악인도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진실된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육욕에 의한 사랑이든 허영에 의한 사랑이든 착각에 의한 사랑이든 사랑자체에는 진실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사랑에는 거짓이 없다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자 그런데 선악에 상관없이 생각 있는 보통의 인간이라면 사랑이 가능합니다. 왜 그런데 우리 주님은 마치 사랑이 악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고 선에 속한 것처럼 말씀하실까요?
먼저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할 때 사랑은 아가페적 사랑을 말합니다. 아가페적 사랑하니까 생각납니다. 하나님의 사랑. 그래요 이 사랑에는 거짓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이신 하나님의 속성이 바로 거짓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문장을 제대로 다시 번역한다면 ‘사랑은 가장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사랑하지 않는데 사랑하는 척 가식적으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우리 주님이 계속적으로 형제를 사랑하라고 하니까 실제로는 전혀 사랑하지 않음에도 사랑하는 척 하는 일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가짜로 사랑하지 말라는 말이 나오는 겁니다.
왜냐면 앞부분에 긍휼을 베푸는 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섬기는 일이 가르치는 일보다 낫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제하는 것이 다스리는 것 보다 낫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을 불쌍히 여기고 온유한 모습을 보이며 위로하고 구제하는 모든 것에 거짓이 들어 있다면 그가 하는 행위로 하나님의 칭찬을 듣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책망을 받고 그가 기대한 상급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교회를 속이고 기망하는 것에 대한 벌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뭐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한 말인데 여기에서 당부가 되고 있습니다. 이게 앞에 문장하고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지요? 그런데 사실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아가페적 사랑이 나온 때부터 눈치 챘을 수도 있지만 여기의 악은 악마를 말합니다. 그리고 선은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리고 ‘악을 미워하고’란 말을 다시 번역하면 ‘계속해서 악을 몹시 미워하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제까지도 사탄을 미워했겠지만 이제부터 더 사탄을 미워하고 선에 속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본성 자체가 악을 미워하는 겁니다. 그리고 ‘속하다’란 말은 아교로 딱 붙어있다는 말입니다. ‘인격적인 결합’ ‘결혼’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가 그리스도와 어떻게 결합해야 하는 지를 잘 말해 줍니다.
10절에 보면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하며”
형제를 사랑하여 할 때의 사랑은 ‘아가페’가 아니고 ‘필라델피아’입니다. 이 말은 사랑이라고 하는 뜻의 ‘필로스’와 형제라고 하는 뜻의 ‘아델포스’의 합성어로 형제애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애하고’란 말은 역시 ‘필로스’와 가족간의 사랑을 뜻하는 ‘스토르게’가 쓰였는데 ‘가족을 알뜰히 사랑하는 것같이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형제애는 우리성도들이 ‘가족’이라는 것을 가정하고 하는 겁니다. 그래요,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몸 즉 지체입니다. 우리는 한 하나님이 만드신 형제요 자매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서로 경쟁자가 아닙니다.
서로 사랑해야 되는, 그것도 ‘먼저 사랑해야 되는 가족’입니다. 가족은 운명공동체입니다. 가족 중에 누구라도 수입을 가지고 오면 그걸 가지고 가족이 다 같이 먹고 사는 겁니다. 그런 이들 사이에는 경쟁이 있기가 어렵습니다.
사실 먼저 인사하고 먼저 다가가고 먼저 섬기고 먼저 낮아지고 이런건 정말이지 현대인들에겐 생소한 것입니다. 현대인들에겐 서비스업종의 사람들에게 단련된 듯이 대접받기를 좋아하지 먼저 말을 걸고 친절을 베풀고 하면 숙이고 들어가는 듯이 생각되어 집니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건 가족 간에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형제간에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사랑이란 속성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사랑 자체가 선을 내포하는 겁니다. 왜냐면 사랑이신 하나님이 곧 선이시기 때문이며 그의 제자된 우리들, 그의 자녀된 우리들은 서로 사랑할 것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에는 거짓이 없는 것이지요.
다음은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하며” 라고 합니다. 그러나 원문의 뜻은 조금 다릅니다. ‘존경을 방편으로 하여 서로 더 낫게 여기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니가 낫니 내가 낫니’하는 경쟁심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경쟁해봐야 서로 외모나 돈이나 지위를 가지고 경쟁하는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눈에는 결코 대단한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돈을 주시고 지위를 주시고 권력을 주시는 이유는 항상 말씀드리지만 이 세상을 더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이웃을 섬기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신 하나님의 것을 내가 잠시 맡아서 관리하며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여 이용하는 것 뿐 입니다. 그러므로 자랑하거나 그것을 가지고 비교하여 교만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물질은 하나님 안에서의 행복한 삶이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 공동체에 속한 우리가 행복해 지도록 주께서 그런 것을 주신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런 수단보다는 ‘목표’인 우리의 행복이 충족되냐 아니냐가 하나님에게 중요한 것입니다.
여하튼 여기서 보면 우리 성도들은 절대로 교만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본문은 계속해서 서로 사랑하고 서로 존경하고를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그것도 먼저 할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의 속성과는 전혀 반대되는 것이지만 성도는 날로 새로워져야 되고 바뀌어야 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우리네 삶의 태도도 바뀔 수 밖에 없겠지요?
어렸을 때부터 워낙 경쟁이 체질화 되어서 그래서 도저히 그리스도의 이 말씀을 지키기가 어렵지만 한번 새 사람된 기념으로 이 말씀을 실천해 보십시다. 아마 우리도 몰랐던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은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입니다. 부지런한 것과 게으른 것은 서로 반대되는 개념이니까 한번만 쓰도 되지만 성경이 이렇게 거꾸로 또 한번 쓴 것은 강조의 뜻이 있습니다. 왜냐면 이게 아주 중요하기 때문이지요.
여기의 게으른 자는 ‘천성이 나태하고 일하기 싫어하는 자’ 라는 의미보다는 ‘불만 때문에 행동이 느린자’라는 의미로 쓰여 집니다. 그러니까 주를 섬기는 일에 뭔가 불만이 있어서 느릿느릿한 것은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주를 섬기는 일에 불만이 있습니까? 하기 싫은데도 이거해라 저거해라 하니까 충분히 그럴 수는 있지만 불만을 품어서는 안됩니다. 주를 섬기는 일에 열심을 다하면 우리 주님의 내리시는 한없는 위로와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하라고 하신 것을 이룰 수 있는 힘도 주십니다.
우리가 주를 섬기는 일에 부지런하고 열심을 품는다면 주께서도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일에 열심히 그리고 부지런히, 빨리 주실 것입니다. 나는 주님을 부끄러워하는데 그는 나를 부끄러워 하지 않기를 바라거나 나는 주를 섬기는 일에 게으른데 그는 나를 지키시는 일에 부지런하기를 바란다면 이 얼마나 아이러니 한 일입니까? 염치가 없으면 짐승이라고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참, 여기서 부지런히 주를 섬기라고 했다고 해서 이걸 예배로만 생각해서 하루종일 교회에만 있다든지 아니면 하루 종일 기도하고 예배하는 일로만 시간을 보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주를 섬기는 일’은 크게 보아서 우리네 모든 삶을 다 아우르는 말입니다. 즉 주를 섬기는 영적인 예배와 기도 찬송뿐만 아니라 세상 삶에서 맡겨진 직업에도 최선을 다해서 부지런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직이 아닌 일반 직업 역시도 하나님의 부르심 즉 소명이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재능, 은사를 최대한 활용하는데 부지런해야 하고 그런 일에 열심을 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를 섬기는 일입니다.
다음으로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소망 중에 즐거워한다는 것은 곧 소망을 방편으로 하여 즐거워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주가 결코 이대로 나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실 것을 알기에 그런 소망이 있기에 지금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며 환난과 핍박이 몰려와도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망은 믿음이 전제되지 않고는 가질 수가 없습니다.
‘환난 중에 참으며’ 이 말은 환난 중에 도망하지 말고 그곳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핍박을 받을 때 우리는 도망갈 수 있습니다. 거대한 핍박에 맞서 싸우기보다 그걸 피해버리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도망가지 말고 핍박에 맞서서 인내하라는 말씀을 주십니다. 솔직히 핍박이 왔을 때 도망가서 피해버리면 되는데 그 자리에서 그걸 맞서서 투쟁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그런데 우리 주님은 지금 그 어리석은 일을 하라고 하시는 겁니다. 왜냐면 그 환난을 이겨내고 얻을 거대한 상급이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면류관을 주신다고 하지요? 면류관은 왕의 상징입니다. 우리가 승리하고 나면 왕이신 주님과 더불어 이 세상을 다스릴 것입니다. 주께서 그런 권위를 우리에게 허락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하게 쉽게 주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환난을 왕될 시험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우리 주님의 시험에 통과해야만 우리는 비로소 정금같이 나올 수 있습니다.
제가 이 기회에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개 교회에서 혹여 문제가 생기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주 큰 교회로 도망을 가 버립니다. 더 이상 자기에게 신경을 쓰지도 않고 봉사하라고 조르지도 않고 인간관계로 귀찮게 하지도 않는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주일교인이 되어서는 거대한 교회의 익명의 일원이 되어서 삽니다. 이것도 매우 위험한 행동입니다. 이것은 환난 중에 참는 행동이 아닙니다.
그리고 모든 열심 있는 성도들이 탈출하고 나면 나머지 교인들은 사탄의 공격 한방에 무너집니다. 떠난 교인들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교인들인 경우가 많고 진실된 신앙을 갈구해서 바르게 살려고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런 열심있는 이들이 떠난 교회에 영적인 침체가 올 확률이 높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실된 성도들은 개 교회를 사수해야 합니다.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성도에게 주신 귀한 사명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무 나 자신만을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참고 인내하다 보면 하나님은 우리 때문에 나 때문에 그 교회를 살리시고 놀랍게 역사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개 교회를 사수한 우리에게 노고를 치하하시고 보상하실 것입니다.
사실 성도들의 탈진, 좌절, 낙심같은 일은 항상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일단 우리 성도들이 이런 일을 겪고 나면 뭔가 새롭게 해보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새로운 걸 시도해 보려고 해도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끔찍합니다. 그래서 핍박 중에라도 우리 주님이 성령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소망을 가져야 만이 우리가 인내할 수 있고 이겨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모든 환난에는 끝이 있습니다. 그리고 환난의 끝에는 우리가 그토록 고대하던 승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나 고수했던 하나님의 임재가 있게 될 것입니다. 악인을 심판하고 의인을 높이 세우시며 위로하시고 상급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이 환난에는 핍박이니 박해니 투옥이니 조롱이니 가난이니 병마가 있답니다. 가난과 병마가 이 환난과 핍박에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이러한 것들 가운데에서 우리가 고통받을 때 우리 주님이 함께 계셔서 이것을 이겨내게 하시고 여기에서 빠져나오게 하시며 궁극적으로 승리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에게는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질 것입니다.
살아서도 당연하게 하나님의 상급과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나는 두렵지 않습니다. 외롭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 나의 아버지와 여기에 함께 합니다. 그래서 기뻐하며 즐거워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절대로 나를 모른다 하지 않으시는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할렐루야.
그리고는 ‘기도에 힘쓰라’
기도하는데에 계속해서 전념하라, 또는 기도하기위해서 계속해서 분주하라. 참고로 이 말 때문에 하루 종일 기도만 해서는 안되는 것을 아시지요? 우리의 삶이 우리의 삶속에서 스스로를 증거 하게 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고 하셨는데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세상 사람들 앞에서 거룩한 산 제물로 보여지게 되기를 원합니다. 산증거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에 힘쓰는 것입니다.
열심히 기도해도 그 모든 기도를 나의 욕망과 부족을 채우는 것에 할애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는 아닙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십시오만 연발하는 기도는 기도로서는 좀 부족합니다. 이제는 성숙된 신앙으로 주께서 하신 기도를 하는 겁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그런 것들은 그 나머지는 주께서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왜냐면 슬프게도 또 당연하게도 우리에게는 그런 것들 물질이 없으면, 먹을 것 입을 것 잘 곳이 없으면 생존이 어렵기 때문에 당연히 우리 주께서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잘먹고 잘살라고 하시는게 아니라 그걸 먹고 입고 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할 일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굳게 믿고 하나님의 대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이 말을 다시 풀어서 번역한다면 ‘성도들에게 없는 것 그래서 필요한 것에 대해서 살피고 관심을 가지라 또는 함께 겪어라’ 는 말입니다. 아니 남에게 필요하고 없는 것을 살피고 공급하는 것은 몰라도 굳이 함께 그 부족함을 겪을 필요가 있을까요?
‘공급하다’는 말에는 ‘참여하다’ ‘함께 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핍절에 대해서 공급하다보면 다같이 부족해 지고 그래서 결국 그 부족함을 같이 겪을 수 밖에 없겠지요. 이렇게보면 우리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요구하는 기준이 너무 높아서 도저히 충족시킬 수가 없어 보입니다. ‘내 먹고 살기도 바쁜데 내가 저 사람 것까지 신경 써야 돼?’
그런데 성경은 자꾸 저 사람이 아니라 나의 가족이요 형제라고 말합니다. 그래요, 교회 안에 있는 우리가 형제와 가족임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우리 주님이 주신 말씀을 도저히 준행하기 어렵습니다. 여기서 바울의 권면이 너무 아득하게 높은 경지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내 마음에 들어오시고 나를 감동 감화시키시면 그게 됩니다. 그래서 성령의 역사인 것이지요.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여기서 힘쓰라는 말에는 계속해서 열심히 대접하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누구 특정인에게 어떤 특정한 시기에만 반짝 손대접에 열심을 내지 말고 그걸 꾸준히 계속하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손은 손님을 말하지만 나그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손이라고 할 때는 몰랐는데 나그네라고 하니까 생각납니다. 나그네와 과부와 고아는 성경에서 말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대명사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에서 손은 손님뿐만 아니라 가진 것 없는 가난한 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들을 계속해서 대접하고 또 대접하고 꾸준히 하라는 말입니다.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한 아브라함처럼 손 대접하기를 힘쓰는 것은 우리가 복을 받을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본문을 보면 정말 성도들에게 많이 양보하고 낮아지고 마음을 비우라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나면 우리에게는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본문이 간단하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선하시고 인자하시기 때문에 우리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를 위해 낮아지고 마음을 비우면 그는 우리를 기뻐하시고 높이 들어서 사용하실 것이며 우리의 비워진 주머니를 가득 가득 채우실 것입니다. 너무 속보입니까?
여하튼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들어서 손해나는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다주고 나면 나는 뭐먹고 사노?’라고 한탄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주님이 자기의 말을 듣고 준행하는 자에게 얼마나 잘해 주시는 지를 체험하고 나면 이런 기회가 더 없나 하면서 찾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이야기하듯이 하나님은 공짜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이 세상의 모든 가난하고 선한 이들은 우리 주님이 먹이십니다. 그런데 내가, 우리가 그 일을 한다는 것은 우리가 주님의 대리인으로 행동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우리의 것을 먼저 사용하고 주께서 그 모든 것을 나중에 우리와 회계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이자는 제가 항상 이야기하듯이 무려 삼십배 육십배 백배가 됩니다.
그리고 주의 일을 제대로 감당하면 그는 쌓아놓도록 주시지는 않지만 충분히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주십니다. 많이 받고 싶으면 일을 더 많이 하면 됩니다. 그러면 일용할 양식도 따라서 늘어나기 때문에 더 많이 주실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답니다. “떡을 취급하면 손에 떡고물이 묻지 않을 수가 없다”
맞는 말입니다. 청지기는 아마 그 떡고물로 살겁니다. 그런데 요즘은 사실 떡고물이 아니라 떡자체를 어떻게 해볼려는 사람들이 많아서 탈이지 원래 떡고물이 묻는 것은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자기의 성실한 청지기에게 주시는 특권입니다.
많은 떡을 취급할수록 떡고물도 더 늘어날 것입니다. 수고한 소에게 망을 씌우지 않는 것처럼 그는 우리가 그의 일을 제대로 하기만 하면 결코 모른다 하지 않으십니다. 그는 후하고 풍족히 주시는 관대한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서로 높아지려고 하지 스스로 먼저 낮아지고 머리를 숙이고 먼저 남에게 굽히기를 원치 않습니다. 뭐라도 잘났다고 하는 말을 들어야 내가 뭐라도 저 사람보다 뛰어나다는 평가를 얻어야 마음이 편하지 그렇지 않으면 속으로 앙앙불락하고 안식을 취하지도 못합니다. 별것 없는 것 같아도 복수의 칼을 가는 겁니다.
말로서 명예에 대해서 맘을 비웠다고 하는 사람조차도 은근히 남이 나를 알아주고 나의 필요성을 인정해 주고 나의 노고에 대해서 칭찬하는 것을 즐깁니다. 당연히 비난하고 무시하는 것보다 알아주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물질에 비교적 초연한 성도들일수록 명예에 더 집착합니다. 물질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에 가치를 두기 때문에 이런 분들이 더 많이 명예에 집착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런 성도들에게 성경은 지금 서로 먼저 섬기고 서로 먼저 다가가고 굽히고 좋은 낯으로 말을 걸 것을 요구합니다.
사실상 우리 주님의 과한 요구는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이런 거. 너희가 적극적으로 가난한 이에게 먼저 찾아가서 형제여 돈이 필요하지 않소 하면서 도움의 손길을 베풀어 주기를 원하는 그런거.
“세상 모든 사람에게 먼저 머리를 숙이고 모든 이에게 도움과 친절을 베풀면 나는 어떻게 삽니까?”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되갚을 수 없는 가난한 형제에게 한 것이기 때문에 이들이 은혜를 갚는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지요? 주기만 하고 들어오는 것이 없으면 어떻게 하지요?
그러나 이런 걱정을 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 주님이 살아 계시고 성령이 역사하신 다는 사실을 믿지 못한다는 비신앙입니다. 성경의 말씀을 믿지 못한다는 불신앙입니다. 당연하게도 불신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가져서는 안되는 가장 대표적인 태도이지요.
사실 우리 하나님은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보기를 원했고 그의 음성을 듣기를 원했고 체험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우리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에서 갈등하며 끝없이 회의하고 의심해 왔습니다. 실로 믿음의 역사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숙해지면서 우리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조용한 중에 나를 만지심을 느끼며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느끼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습니다. 우연히 아주 우연히 그분의 말씀이 내 가슴속에 와닿는 것을 깨닫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성장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당장은 주의 말씀을 지킨다고 해서 어떤 혜택도 어떤 보상도 받을 수 없을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밑빠진 독에 끊임없이 사랑과 친절과 온유와 긍휼이라는 금덩이를 집어 넣는 것처럼 끝날 가망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믿을진대 이것도 믿어야 합니다. 그가 지금 나의 행위를 보시고 계시며 그가 다 갚아 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가 나와 내 가정과 내 후손에 복을 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왜냐면 지난 역사에서 우리는 이런 일들을 많이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며 , 믿음의 선진들이 경험했기 때문이며 우리의 삶속에서 그런 하나님의 산 증거를 체험했고 체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결코 낙망하지 말 일입니다. 계속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왜냐면 우리에게는 아직 살아가야 할 날들이 많고 주가 주신 사명이 남아 있기 때문이지요.
또 우리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자녀들도 있고 손자들도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체험을, 그 놀라우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우리가 후세에게 간증해야 합니다. 나아가서 믿지 않는 이들에게 증거해야 합니다.
먼저 우리는 산증거가 되어야 하며 그 산증거는 우리의 삶에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복을 받으며 그 놀랍고 위대한 은총을 찬양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너무 이상적으로 미리부터 가정하고 들어갈 필요가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성숙해지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성경에서 강조하는 성도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처음부터 납득하기 어려운 일을 반듯하게 완성하려고 무리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성도는 날마다 새로워지고 옛사람을 버리며 과거의 잘못을 고치며 보다 더 성숙한 신자로 거듭나야 합니다.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깊은 자리로 들어가야 합니다.
누군가는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해야 하고 누군가는 손을 대접해야 합니다. 이런 일은 우리 하나님이 복을 주시기위해서 만들어준 기회입니다.
요즘 보면 우리나라에서 이런저런 일로 기부문화가 상당히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제대로 된 사람에게 도움을 주기도 어렵고 또 모금된 돈이 대부분 선한 일에 쓰이기보다는 구제대상에게 전달되기 보다는 모금자들에게 쓰인다는 사실 때문에 말이 많습니다. 그래서 제대로 된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은 어쩌면 큰 은혜요 축복입니다. 정작 도움이 필요한 이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에게 당당하게 예금증서를 내밀고 예금을 찾을 수 있는 기회입니다.
당장 내눈에 보이는 것처럼 나의 물질이 나의 재화가 나가는걸로 그치는게 아니라 우리 하나님이 나간 것의 백배로 채워주실 복을 받는 원천이 될 것입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 자체로 선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선에 속합니다. 그러므로 그가 요구하는 일을 힘써 행할 것입니다. 그래요, 비록 우리가 성경의 모든 것을 완벽하게 지키기는 어려울 수 있으나 그가 요구하시는 일을 결코 시도도 해보지 않고 미리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주의 말씀대로 살았는데도 아직 큰 복이 없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조금 더 인내하고 참고 기다리십시오. 반드시 우리 주님의 복이 임할 것입니다. 그는 결코 자기의 자녀를 모른다 하지 않으십니다. 평소의 우리 삶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아 한걸음씩 한걸음씩 나아갑시다. 그래서 우리 주께서 요구하신 일들을 힘써 행합시다.
그럼으로 우리 주님의 보호와 인도를 체험하며 우리 주의 약속하신 구원에 들어가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아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8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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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누리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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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성숙한 신자가 되기 위해서 노력해야 겠습니다. 목사님이 즐겨 쓰시는 표현을 가져온다면 멋있는 성도가 되기까지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아! 물론 하나님이 보시기에 멋있는 성도!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렇게 자라나기까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당연히 세상의 일반 상식과는 참 다르기만 하네요.
주는 자가 복이 있구나 그런 상상을 해봅니다. 주는 것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겠구나. 그런 상상도 또한 합니다. 정작 가진 것이라고는 무엇도 없는 사람인데도, 나눠주는 것을 떠올리기만 해도 어쩐지 흐뭇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시간을 내주어 어려운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는건지도 모릅니다. 조용히 이야기를 들어주고, 맞장구 쳐줌으로써 이웃의 아픔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위로해 줄 수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주눅들지 말고, 힘내서 전진했으면 좋겠습니다. / 2019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