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악인의 형통을 시기하지 말라(시편37:1-18)/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9. 12. 16. 23:39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시편37:1-18)

 

한해를 마무리 하는 12월을 맞이하여 희망찬 새해를 맞이하기 전에 우리 성도들이 잠시 쉬어가면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번 한해에도 역시나 우리가 참 많은 것으로 하나님께 받았고 또 앞으로도 받을 것이지만 여전히 우리네 마음속에는 불평과 불만이 가득합니다.

 

평안해야지 풀어야지 하면서도 절대로 평안해 질 수 없는 많은 일들이 있음을 또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도저히 우리 마음에 맺혀서 풀리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요즘 세상에 절대적 빈곤은 아니라도 상대적인 박탈감이 많습니다. 비교대상이 너무 많아서 한두가지 예를 드는 것으로는 도저히 예를 일일이 다 열거하기가 곤란합니다.

 

아무개는 어디에 붙었고 어떤 대기업에 취직을 해서 돈을 얼마를 벌고 뭐가 어떻고 ... 이런 자랑을 왜 하는지 모르지만 은근히 비교가 되는게 속도 상하고 배알이 꼴립니다. 왜 세상에는 나보다 잘난 것들만 있는지...

 

더 노력하고 더 성실하고 그래서 더 잘된 것은 그래도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망나니로 살았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는데 나보다 훨씬 잘되는 것을 보면 도저히 이해가 안됩니다. 아니 수용이 안됩니다. 받아 들일 수가 없어요. 만일 그런 것을 받아 들인다면 하나님의 공의가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래서 더 속상합니다. 이런 부조리를 묵과하시는 하나님을 부인하고 싶지만 나는 하나님이 계심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이해가 안됩니다. 답답합니다. 도대체 우리가 항상 듣는 그 공의의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거지요?

 

그래서 나온 학문이 신정론입니다. 신의 정의? 하나님의 정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왜 그가 다스리는 세상에서 이렇게 불합리하고 부당한 일이 많이 있는 거지요?

 

그런데 이런 일들이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요즘에만 있는 것도 아닌 모양입니다. 옛날 이스라엘에도 이런 일이 매우 많았던 모양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 사이에서도 이런 일이 많았다는 것은 다른 나라에서는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흔했다는 겁니다.

 

그래요, 어쩌면 이게 바로 세상의 이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남을 속이고 착취하고 사기치고 하는 이들이

정직하게 살고 양심적으로 행동하고 하나님의 법을 준수하며 사는 이들보다 잘사는게 어쩌면 당연한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몇 년전에 조**이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다단계를 사기를 쳐서는 무려 6조인지 8조인지를 벌었답니다. 와 세상에...(좋겠다) 속으로는 나도 그렇게 사기나 쳐서 부자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이걸 투기라고 합니다. 질투. 남의 눈에 피눈물을 흘려도 안잡히고 잘사니까 나도 그렇게 되고 싶어한다는게 바로 여기 본문의 투기입니다.

 

솔직히 우리나라에서 큰 부자들, 높은 직위에 있는 이들의 대부분이 불법과 비리를 저지른 자들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세상이 막사는 사람들 위주로 돌아가는 듯이 보입니다. 이런 인간적인 일들 가운데는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공의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요, 악인이 형통하고 잘되는 일들이 너무 흔해서 당연한 듯이 보입니다. 그래서 양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 하나님의 성도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실에 절망하며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에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는 이들이 매우 많기 때문에 이런 말이 있는겁니다.

 

왜 불평하며 시기합니까? 악도 행하고 불의도 행하고 그래도 처벌받지 않고 더 잘살아서 불평하며 시기하는 겁니다. 시기는 질투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너무 재미있을 것 같은 악을 저질렀는데 잡히지도 들키지도 않고 별탈없이 잘만 살아갑니다.

 

우리는 뭐 악을 저지를 줄 몰라서 저지르지 않는게 아니지요. 악을 저지르면 하나님의 분노를 사니까, 하나님의 벌을 받으니까 저지르지 않는 건데 이 사람들은 악을 저질러도 불의를 행해도 전혀 처벌도 없고 더 잘삽니다. 그러니 화도 나고 불평도 생기고 시기도 나는 겁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의심까지 듭니다.

 

누구에게 화가 납니까? 나 자신에게요. 악을 저질러도 전혀 마음에 거리낌이 없이 뻔뻔하게 잘 살아가는 그들을 보니까 나 자신에게 화가 납니다. 나는 조금만 나쁜짓을 해도 마음이 쿵쾅거리고 형제에게 조금만 서운하게 해도 마음이 하루종일 불편하고 그런데 악당들은 그런게 전혀 없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악당들에게 벌 대신 복을 주는 하나님에게 화가 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불평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그런 이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고 시기하지도 말랍니다. 이 본문의 기자는 다윗입니다. 이스라엘의 대왕이지요.

 

글쎄요, 우리는 사실 그 정도로 성자가 아닙니다. 평범한 인간인 고로 화가 나지 않거나 불평하지 않거나 시기하지 않기가 정말이지 어렵습니다. 악인의 형통도 허허 웃고 지나갈 수 있는 여유가 없습니다. 부러워요, 그리고 화가 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하지 말랍니다.

 

2절에 그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그들의 성세가 결코 오래 가지 않을 것이기에 속상해 하지 말고 불평도 하지 말고 시기하지도 말라는 겁니다. 하하, 그런데 악인들의 형통이 그렇게 단시간에 끝납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무한대로 사는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순식간에 시드는 베인 풀 같지만 유한한 세월을 사는 인간의 눈으로 보면 저들의 형통이 얼마나 오래 가는지요?

 

우리나라를 보세요. 친일파가 등장한지 백년도 더 되었지만 이들은 해방된 나라에서도 여전히 떵떵거리며 삽니다. 사회 각계각층에서 요직을 차지하고 대대손손 잘 삽니다. 세상에! 오히려 독립군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 어렵고 가난하게 삽니다. 심지어 친일파가 독립운동가로 변신해서 선전되기도 합니다. 친일파 주제에 자서전도 있어요. 이런걸 보면 하나님의 공의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절대로 그렇지 않고 악인이 형통이 풀같이 채소같이 순식간에 베임을 당하고 시들어서 상할 것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 악인의 형통을 너무 부러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심하지 말랍니다. 과연 그럴까요?

 

식물이란 것은 그 뿌리가 물이나 땅에서 분리되면 급속하게 시들게 됩니다. 풀은 더 심하고 야채도 금방 상해서 먹지 못하게 됩니다. 그처럼 급속하게 악인이 쇠하는지는 솔직히 모르겠습니다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들이 망할 때는 번개처럼 망한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자, 그런데 우리가 한가지 생각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뭘까요?

바로 이 시의 저자가 다윗이라는 점입니다.

 

보통은 못살기 때문에 힘들기 때문에 이런식으로 불평하며 행악자들의 형통이 풀이나 야채처럼 번개처럼 사라진다고 스스로를 위안하는 정신승리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한자가 왕이라면 우리가 받아 들이는 자세가 달라집니다. 다윗 자신은 이스라엘의 대왕으로 그 강함과 부함이 당시의 중근동을 떨어 울릴 정도였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열등감이나 피해의식에 쩔어 있을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가 이렇게 서두를 시작한 것은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성경 주석가들도 이 시를 다윗이 언제 지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대부분 동의하기는 그의 인생 말년에 순수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도록 계도하려는 목적으로 지은 시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노년에 오랜 경험으로 보아 악인의 형통이 절대로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을 명확히 체감했기 때문에 지금 당장 어렵고 힘들어도 내가 저 악인보다 못하지 않은데 왜 하나님은 나에게 이렇게 박절하시냐고 불평하고 원망할 힘없는 백성들에게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혹 오해하실까 봐서 말씀드리는데 여기 나오는 ‘악을 행하는 자’와 ‘불의를 행하는 자’ 는 같은 말입니다. 그러니까 악을 행하는 자와 불의를 행하는 자가 따로 있는게 아니라 같은 대상을 약간 변형시켜서 두 번 연달아 부르는게 바로 이스라엘 사람의 언어 특징입니다.

 

예수님도 ‘베드로야 베드로야’ 이렇게 잘 부르지요. 바울도 같은 일을 단어를 달리해서 두 번 언급합니다. 이건 강조하는 의미가 있답니다.

 

행악자의 형통을 두고 불평하는 일을 그대로 둔다면 하나님의 공의가 이 세상에서 나타나지 않는다는 인식을 주고 결국 ‘하나님의 공의는 없다’ 나가서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인식을 심어 줄 수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으로 다스리는 신정왕국의 수립에 해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이런 시를 지은 겁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러니 불평하거나 투기하지 말라’

 

불평한다는 말은 얼굴이 마치 불타오르듯이 지나치게 흥분하고 화를 내는 것을 말합니다. 극심한 분노로 격정적이 된다는 겁니다. 투기한다는 말은 시기한다는 말인데 한마디로 부러워한다는 말입니다.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사람들 같지 않습니까? 나도 저렇게 죄를 짓고 그리고도 잡히지 않고 그리고도 떵떵거리며 살고 싶다는 심정이 그 안에 있는 겁니다. 제가 항상 하는 말입니다. 경상도에서 제일 큰 죄는 들킨 죄라고.

 

죄를 저렇게 짓고 악을 행해도 하나님도 나라도 아무도 그들의 죄를 징치하지 않고 오히려 형통하고 잘사는 모습을 보니 너무 너무 부러워서 기회만 된다면 나도 저렇게 죄를 짓고 싶다는 겁니다.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의 법이 널리 준행되는게 너무 너무 어려울 겁니다.

 

오늘 시인은 본문에서 악인의 형통을 불평하고 시기하지 말고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고 말합니다. 앞에 와 같이 ‘여호와를 의뢰하는 것’과 ‘선을 행하는 것’은 같은 말입니다. 신기하지요?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것과 선을 행하는 것이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죄인이 예수를 믿는 것이니까 어차피 죄를 계속해서 지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만 믿으면 선을 행하지 않아도 육신이 연약한 고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성도는 선인이어야 하며 의인이어야 합니다. 선을 행하는 자여야 합니다. 죄인도 악인도 예수 믿을 수 있지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더 이상 죄와 악을 저지르지 않는 것을 다짐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는 것이 바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는 사탄이 아니라 악마가 아니라 인간의 선성을 적극적으로 끌어내고 서로 사랑하며 의롭게 살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살면 자동적으로 인간은 행복하게 됩니다.

 

3절에는 네 개의 동사가 사용되었습니다.

첫 번째는 의뢰하라입니다. 여호와를 의뢰하라

의뢰한다는 말은 믿는다는 뜻입니다. 믿는다는 말을 좀 더 풀어보면 그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의뢰한다면 하나님의 안으로 들어가서 그와 인격적인 결합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고 하나님과 함께 하고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지도 않고 성령이 내 몸에 임하시지도 않았다면 그건 절대로 믿는게 아닙니다.

 

두 번째는 행하라, 선을 행하라

여기서 선은 우리가 아는 도덕적인 선뿐만이 아니라 온갖 종류의 아름답고 긍정적인 것들을 다 포함합니다. 그러므로 단순하게 도덕적인 선을 행하는 것에서 나아가 모든 종류의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행동과 아름다운 일들을 같이 해야 합니다.

 

도덕과 상관은 없지만 음침하고 부정적이며 비관적인 것들은 절대로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도라면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행동을 해야 하고 또한 밝고 긍정적인 삶의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행하라는 말은 원래 단어적으로는 건물을 만들다, 어떤 것을 생산하다, 나무가 열매를 맺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이런 일들을 행하기 위해서는 모두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을 행할 때는 즉석에서 일회용으로 할 것이 아니라 꾸준히 인내하며 노력해서 행동해야 한다는 겁니다.

 

어떤 것이든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한두번의 선한 행동으로 그쳐서는 안되고 장기간 오랜 시간 그리고 정성과 노력이 필요한 법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이런 식의 선한 삶을 요구하십니다.

 

세 번째는 거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땅에 거하라는 말은 자신에게 주어진 분복을 지키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태어나면서 땅을 유업으로 받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돈을 벌어도 희년이 되면 남의 땅을 도로 돌려 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에는 자신의 분수를 지키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끝없는 탐욕에 자신이 휘둘리게 되면 결코 행복한 끝은 없습니다. 탐욕은 결국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불행으로 몰고 갈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도로서의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분수를 지키고 탐욕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결국은 성실하게 노력하면서 차근차근 한발 한발 나아가는 수 밖에 없습니다.

 

네 번째는 삼으라, 식물을 삼으라

그냥 삼는게 아니죠. 성실로 식물을 삼으라고 합니다. 즉 먹고 살기위해서 성실하라는 말입니다. 세 번째 조건하고 일맥상통합니다. 우리는 매일 매끼마다 음식을 먹지 않으면 안됩니다.

 

가끔 금식도 하고 절식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인간은 음식을 먹어야 살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는 성실해야 합니다. 탐욕과 죄성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법으로 몸을 닦아 성실하게 살아가노라면 하나님이 복을 주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만일 성실한 삶을 사는 이에게 눈에 띄는 복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반드시 그의 후인들이 복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선을 행하다가 낙망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아는 것 역시 성도의 덕목입니다. 사랑하는 자식을 위해서 돈을 물려 주고 싶어서 노심초사합니까?

 

그것도 좋지만 자식의 미래를 위해서 많이 뿌리세요. 그러면 내가 지상에서 없어져도 하나님이 그 뿌린 것을 거두어서 먹게 하실 것입니다. 그게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결실로 자식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이제 4절을 보면 우리가 잘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이 보입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여기서 여호와를 기뻐하는게 어떻게 하는 겁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기쁘게 하라는 말인지 여호와 하나님 자체를 우리가 기뻐해야 한다는 말인지 정말로 애매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기쁨을 충분히 즐기라’는 말입니다.

 

가령 죄인은 그 마음에 죄성이 있기 때문에 죄악을 저지르지 않으면 전혀 즐겁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이 주신 선 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가족들이 서로 사랑하고 약하고 힘든 이에게 도움을 주었을 때 그가 감사를 표하고... 이런 것에 기뻐합니다. 가난한 아이의 얼굴에 천진한 미소가 떠오를 때 성도의 마음은 즐거워 집니다.

 

사람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고 핍박받고 고통받을 때 악마는 기뻐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런 사람들의 억울함이 풀리고 대접받고 평안을 누리고 그래서 사람들이 웃을 때 그 미소를 보고 기뻐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쁨은 그런 것입니다.

 

언젠가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술 먹고 룸싸롱에서 오입질하고 남들에게 고문하고 뇌물받고 음모를 꾸며 불행하게 만들고 갑질하고... 이래야 즐거운게 아니라 착하고 바르게 살면서 하나님의 법을 지키고 살면서 그 양심에 충만한 도덕감과 신앙심으로 나온 성령이 주시는 기쁨이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의 죄악된 쾌락보다 훨씬 더 뛰어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목사가 되기 전 20대 때에는 목사는 전혀 즐겁지 않고 기뻐하지도 않고 전혀 삶의 낙이 없다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목사가 되기 싫었습니다. 하루 종일 우울한 표정에 근엄하게 앉아서 깊은 사색이나 하는 모든 삶이 너무 무겁고 진중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제가 목사가 되고 보니까 목사들도 상당히 즐겁고 기쁜 일이 많습니다. 네시간이나 설득하고 기도하고 해서 자살 지망자를 막아 치웠을 때의 보람, 병든자에게 기도했는데 병자가 나았을 때의 기쁨도 있습니다. 죄인이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었을 때의 정신적인 승리감도 무시 못합니다. 하다못해 따뜻한 햇빛 아래서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을 즐기는 것도 죄악된 쾌락을 넘어서는 즐거움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사이의 진실 되고 정겨운 도움도 무시 못할 즐거움입니다. 성경을 공부하면서 때때로 깊은 진리를 깨닫게 될 때의 기쁨도 굉장한 것입니다. 여러 가지가 더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게 되면 하나님이 오래지 않아 우리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신다는 겁니다. 얼마나 기쁩니까?

 

아등바등 그 마음에 질투심을 가지고 남을 해하려고 음모를 꾸리고 궤계를 내어서 성취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마음의 선함과 감사를 보시고 내려주신다는게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우리 마음의 소원을 이루는 것은 솔직히 힘들지요. 하나님이 그 소원을 이루어 주시기 전에 우리가 노력해서 소원을 이루어 낸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 어쩌면 거의 불가능한 건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그게 소원이 되는 것이지 아무나 노력해서 쉽게 이룬다면 소원이랄 수도 없겠지요.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 마음의 소원을 이루는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쁨을 충분히 즐기고 그의 품 안에서 거하면 됩니다. 너무나 간단하고 쉬운 일입니다. 적극적으로 세상과 맞서 싸워서 뭔가를 이루어 내야 소원을 이루어 준다고 하시지 않고 단지 하나님의 품 안에 거해서 그가 주신 기쁨을 받아 누리기만 하면 소원을 이루어 주신다니 이것보다 더 쉬운 방법이 어디에 있을까요?

 

그런데도 놀랍게도 세상 사람들은 이런 간단한 하나님의 명령도 지키지 못합니다. 왜냐면 계속해서 바깥을 동경하고 죄를 저지르고 싶어하고 사탄의 쾌락에 목말라 하기 때문입니다. 잔잔한 기쁨에 대해서 사람들은 너무나 무관심합니다.

 

기쁨과 즐거움이라면 뭔가 쾌락과 범죄와 위험을 수반하는 마약과 같은 것을 상상합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사탄이 주는 즐거움은 일순간은 인간을 더 없이 황홀하게 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을 망칩니다.

 

그럼에도 당장의 쾌락을 위해 장래의 파멸을 감수하려 합니다. 정말이지 어리석습니다.

 

5절에서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맡긴다’는 말하고 ‘의지한다’는 말하고는 같은 말입니다. 이스라엘인들의 언어법이라고 말씀드렸지요. 강조하기 위해서 비슷한 단어를 나열하면서 권고하는 겁니다. 너무나 소중한 말이기 때문에 혹 백성들이 이 권계를 소흘히 할까 봐서 계속해서 거듭거듭 강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우리가 홀로 해결하기 위해 문제를 붙잡고 안달복달한다고 해서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니 문제가 생기면 제일 먼저 나의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에게 기도할 것이고 맡길 것입니다. 모든 문제의 근본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그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자꾸 뭔가가 꼬이는 것 같다면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불가능한 문제가 우리를 괴롭힌다면 하나님에게 맡겨야 합니다. 우리와 하나님의 문제가 풀리면 자연적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이건 절대로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약속하셨기 때문이고 우리가 하나님과 계약을 체결할 때의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네가 나를 의뢰하고 나의 말을 지켜 행하면 내가 너의 모든 것을 책임지고 평안을 주겠다는 그 말씀은 결코 변개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냥 이루시는게 아닙니다. 한번만 일을 이루어 주시는게 아닙니다. 우리의 나머지 모든 인생에서 그가 이루시는 역사가 끊임없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악인의 형통을 불평하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투기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불경하게 덤빌께 아니라 그의 주신 기쁨을 누리고 그의 명령을 지켜 행하면 하나님이 나머지 모든 것들을 다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기뻐하고 그에게 의지하면 주어지는 보상이 이게 다가 아닙니다.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빛같이, 정오의 빛같이 라는 말에서 우리는 이제 세상 사람들이 모두 볼 수 있는 놀라운 복을 받게 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의, 우리의 공의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의뢰하고 그에게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을 말합니다. 보통은 의로운 삶을 이야기할 수 있지만 죄많은 인간이 하나님이 경탄할만한 의를 드러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간단한 것을 주문하십니다. 그게 뭐냐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그를 의뢰하며 그의 품 안에서 기뻐하는 것을 의로 여기신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믿는 것을 우리의 의로 여기신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살기만 하면, 하나님을 믿고 그에게 맡기고 그의 명령대로 살기만 하면 하나님이 세상 모든 이들이 알 수 있도록 찬란한 빛같이 정오에 높이 솟은 빛같이 우리를 찬란하게 나타내실 것입니다.

 

저 사람이 하나님을 정말 잘 믿었구나! 세상에 저런 상황에서도 하나님만 의지하고 바라더니만 저렇게 큰 복을 받는구나! 저걸 보니까 정말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전능하신 우리의 경배를 받으실 아버지시구나! 이렇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째라고요?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악인의 형통함을 불평하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잠잠히 참고 기다리라는 말입니다. 참고 기다린다는 말은 원문상으로는‘ 희망을 가지고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머지않아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임할 것을 믿고 지금은 비록 이 모양 이 꼴이지만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그때에는 하나님이 의롭게 산 나를 결단코 모른다 하지 않으시고 세상 사람들 앞에 높이 들어 올리실 것을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정오의 빛처럼 세상 모든 이들의 눈앞에 들어 올릴 것을 믿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가운데 일을 이루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승리하며 세상에 다시 없을 복을 받는 놀라운 기적의 주인공이 될 거라는 것입니다.

 

어떤 희망을 가지고 기다립니까? 하나님이 절대로 오래 악인을 그냥 두지 않으시고 자기의 의를 드러내사 악인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는 겁니다.

 

어떤 희망을 가지고 기다립니까? 나를, 하나님을 믿고 잠잠히 기다린 나를 들어서시고 복을 주실 것을 믿는 겁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우리가 악인의 형통을 불평하다 보면 투기하는 자가 되고 그러다 보면 성공과 재물과 쾌락을 위해서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겠다고 덤빌지도 모르게 되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어봐야 별 수 없구나! 성공을 위해서는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겠다’고 마음먹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형통이란 말은 모든게 다 잘되는걸 말합니다. 뭐든지 척척척 이루어 지고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고 저 사람에게만 맡기면 모든게 해결된다는 정도가 형통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하는 형통은 그런게 아니라 그냥 물질적인 성공과 번영을 말합니다.

 

요즘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고 숭배하는 신이 바로 물신 돈 신입니다. 그러나 돈은 모든 것을 해결하는 만능 열쇠가 아니라 우리의 삶에 필요한 한가지 편리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돈을 모든 것의 으뜸으로 삼고 그 아래에 인간의 영혼과 정신과 육체를 둡니다. 심지어 종교인들 가운데서도 물질에 탐닉하여 사탄에 굴복한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 하늘 소망을 가졌다고 하는 성도와 목사들에게서도 이런 사람을 많이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만 사는게 아니라 저 세상 하나님의 나라가 있음도,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이 있음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보지 못해도 하나님이 계심과 성령의 역사하심을 믿습니다. 그런데 돈의 노예가 되어서 정신없이 탐욕을 부린다면 우리네 멸망이 번개처럼 우리를 잡아 먹을 것입니다.

 

너무 오랫동안 악인이 형통한 것을 보면서 이 땅에 하나님의 공의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사랑과 의를 믿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사탄을 숭배하려고 하는 움직임을 보일 수도 있습니다.

 

부러워서 악인의 형통이 너무도 부러워서, 자기도 어떻게든 성공하고 부자가 되고 출세하고 쾌락을 즐기고 싶어서 ‘나도 그렇게 해볼까?’ 하고 생각하는게 바로 투기 아닙니까? 이미 서양에서는 일부에서 사탄교의 광신자들이 나오는 실정입니다. 이게 바로 악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의가 정오의 빛같이 빛나는게 아니라 우리의 악명이 우리의 추한 모습이 온 세상 앞에 백일하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악마는 우리가 잘못되는 것을 보면서 기뻐하고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고 훼손되는 것을 보며 즐거워합니다.

 

사탄이 그렇게나 인간을 넘어뜨리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우리의 몸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품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아이콘을 파괴하려는 그 욕심 때문에 인간이 굴복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하나님으로 더불어 영화로워지고 하나님이 떠남으로 비천해 집니다.

 

9절에서 시인은 결론을 말합니다.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땅 이야기는 앞에도 한번 나왔습니다. 3절에 보면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 것이라”

 

오늘 본문에서 땅은 어떤 의미를 가집니까? 여기서 땅을 차지한다는 것은 소유가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이미 주어진 땅에서 하나님의 복을 받아 평안을 누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그들은 그 땅을 갈고 씨를 뿌리고 농사를 지어서 그 소출로 먹고 삽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땅을 주셔도 비가 오지 않거나 재해가 발생하면 소출이 없어지고 결국 먹고 살 수가 없게 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범죄하면 하나님이 땅을 주신 것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땅을 빼앗기고 포로로 잡혀가고 아니면 외적의 침략에 노출되어 죽고 고통당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주어진 땅에서 그 땅을 제대로 경작해서 평안한 삶을 누리는 것을 땅을 차지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차지할 것이라는 말은 미완료형입니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계속해서 차지한다는 말입니다. 땅을 더 더 더 얻어서 땅 부자가 된다는 말은 아니고 주어진 땅을 계속해서 경작하고 그 땅이 내는 소출로 가족이 서로 사랑하며 이웃이 사이좋게 행복을 앞으로 영원히 누리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악인은 지금 당장은 형통해 보여도 결코 그 형통이 오래가지 않는 반면 의인은 앞으로 조금만 기다리면 영원히 주어진 땅에서 평안을 누리고 행복하게 살겠다고 하는 말씀을 본문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아서 공의의 심판자가 없어서 악인이 형통한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그 뜻은 솔직히 우리가 잘 알 수는 없지만 악인의 형통이 오래가지 않고 심판을 당할 것과 의인의 고난도 오래가지 않고 머지않아 승리하고 복을 받아 누리고 행복하게 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영원한 복락의 조건으로 힘들고 어려운 것을 이루라고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단지 여호와를 소망하라고만 말합니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고 말합니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고 그를 의지하라’고 말합니다. ‘그를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너는 선을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요 우리가 악인의 형통에 대해서 불평하며 원망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의로운 분노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혹 우리가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고 질시하며 내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공의로움을 의심하거나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회의하게 된다면 그건 바로 악마가 노리는 것이며 우리로 하여금 악을 저지르게 하여 영원한 멸망으로 인도하는 일이 됩니다.

 

여기 본문에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들이 많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라는 겁니다. 그가 우리의 불평이 아니라도 악인의 행악을 심판하실 것이며 이 땅에 공의를 실현하실 것이며 그의 편에서 잠잠히 그를 믿으며 선을 행하는 성도들에게 누구라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큰 복을 허락하실 것임을 믿고 우리는 그냥 기뻐하며 묵묵히 삶을 살아가면 됩니다.

 

‘뭐뭐 해라’는게 아니라 ‘하지 마라’는 그래도 조금은 지키기 쉽지 않나요. 하나님의 품 안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그분에게 맡기고 기다리면 하나님은 놀라운 복으로 머지않아 우리를 들어 올리실 것입니다.

 

악인의 형통이 부럽습니까? 잘 생각해보면 악인의 형통이 결코 길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구상의 수많은 악당들 독재자들 그리고 사이비 이단 교주들을 잘 생각해보시면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지금도 엄격하게 시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의 우리를 향한 사랑과 성령의 역사를 의심하지 말고 믿고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품 안에서 살아간다면 머지않은 시간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믿음이, 공의가 정오의 빛처럼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이번 겨울은 참 따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조금씩 추워지려고 합니다. 뭐 그렇다고 굉장한 한파가 몰려오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행복하고 즐거운 연말이 되시기를 바라고 새해에는 더 하나님을 사랑하고 찬양하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2019년 설교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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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마흔이 다 되어가니 세상에는 정말 악을 마음에 품고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들은 거짓말을 쉽게 입에 올리며, 유혹적인 이야기로 선한 사람들에게 고통을 줍니다.

 

억울한 일을 만나거나, 때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만날 때,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의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모든 것이 협력해서 선을 향해서 갈 수 있고, 또한 범사에 감사하라는 성경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어려움에 낙담하지 말아야 하며, 다시 일어서야 하며,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믿고서, 삶의 참된 평화와 기쁨을 누리게 되어서, 자유함을 얻었다고 전해야 하겠지요.

 

큰 물질도, 높은 명예도 사실 하나님의 머나먼 관점에서는 극히 잠깐일 뿐이며, 시드는 꽃과도 같겠지요.

그러므로 성도는 나그네의 삶을 산다는 것을 생각하여, 하루하루를 기쁨으로 찬송하며 살아갈 때,

우리의 삶 자체가 누군가가 볼 때, 놀라움이 될 것입니다. 경이로움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평생을 감사와 찬송으로 변함없이 살아간다면, 악인의 길을 거들떠 보지도 않고,

할 수 있는데까지 선의 길을 향해서, 꾸준히 밀어붙여 나간다면, 그 성실함 진실함이 빛이 날 터이며,

우리가 비록 불완전하나, 하나님 품 안에서... 그 열심히 살아간 인생을 증거로 삼아서,

하나님의 놀라운 함께 하심, 동행함을 경험하게 되리라 저는 확신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 되어서, 세상을 능히 이기는, 멋진 하나님의 용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2019. 겨울날에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