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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사도행전13:4-)

 

이 세상은 우리 하나님의 창조물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세상은 사탄의 지배하에 놓여 있는 듯이 보입니다. 그도 그럴것이 하나님의 제일 계명인 서로 사랑하라가 아니라 사탄의 제일 대표적인 작품인 ‘효율성’이라는 괴물에 지배받고 있기때문입니다. 조금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돈이라는 척도로 평가받습니다. 이게 돈이 되냐 아니냐로 평가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탄의 지배를 받는 듯이 보이는 겁니다. 쓸모가 없다고 판정받은 사람은 어떻게 해야 되나요?

 

마음이 따뜻해 진다? 흐뭇하다? 뭔가 보람이 느껴진다? 좋아요, 좋은데 돈이 안됩니다. 돈이 안되니까 당연히 쓸모가 없는 것이고 그러면 효율적이지 못한 것이고 결국 별 볼일 없는 일이 됩니다.

 

물론 돈이 중요하기는 합니다. 이게 없으면 우리네 삶이 얼마나 비참해 질지 불편해 질지 우리는 잘압니다. 예수믿는 우리 역시 먹고 입고 잘 곳이 있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오히려 너무 잘 알아서 탈입니다. 그러나 돈이 모든걸 해결해주는 만능의 열쇠는 아닙니다. 그리고 행복을 살 수도 없습니다.

 

재벌들이 더 부자가 되려고 보다 못한 기업들을 망하게 하고 자그마한 이득에도 눈을 돌리는 것은 그들의 마음이 만족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욕심은 결코 만족을 모르는 상태에서 나옵니다. 만족이 없는데 무슨 행복일까요? 그래서 불행합니다.

 

그렇기에 돈이 인생 제일의 목표도 될 수 없습니다. 돈은 행복을 위한 수단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전부도 아니고 만능도 아닙니다. 그리고 당연히 목표도 아닙니다. 돈이 있으면 펀리합니다. 약간의 행복비슷한 것도 살 수 있는 듯이 보이지만 돈으로 산 행복은 절대로 오래가지 못합니다. 만족이 없기 때문이지요.

 

보통 사람에게 인생 제일의 목표는 행복입니다. 사랑하는 이들과 행복하게 사는 겁니다. 행복과 편리는 사실 좀 많이 다르기는 하지만 사람들은 점차 행복과 편리를 혼동하기 시작했습니다. 편리할수록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편리가 행복은 아닙니다. 편리하고 행복은 전혀 다른 개념입니다. 제가 한때 동경했던 삶이 있습니다. 느림의 미학, 한걸음 늦게 가지만 그래서 조금은 느리지만 더 친밀하고 더 마음이 편하고 그래서 더 깊은 정을 느끼고 결국 더 행복하고...

 

우리가 더 잘 먹고 더 많이 쓰고 살기 위해서는 지구의 유한한 자원을 더 많이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사용하다가는 가까운 미래에 지구는 빈껍데기만 남을 수 있습니다. 뿌연 연기와 냄새나는 물, 어디에서나 맡을 수 밖에 없는 유독성 물질들...

 

제가 이런 말씀을 계속해서 드리는 이유는 이겁니다. 우리네 기독교인이 세상을 향한 자세가 바로 이런 급격한 성장과 약탈적 경제 그리고 끊임없는 경쟁과 이로인한 스트레스로부터의 자유. 우리 성도의 지향점이 바로 이와 같아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 천상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을 일시적으로 사탄의 지배하에 두셨습니다.

 

그래서 사탄을 일러 ‘공중권세 잡은 자’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사탄이 이렇게 권세를 잡을 수 있는 것은 사실은 인간들의 탐욕 때문입니다. 욕심이, 우리네 인간들이 가진 욕심이 스스로 죄를 불러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담이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놓여 있는 공중이고 그 공중권세를 마귀가 잡고 있습니다.

 

우리의 눈은 온갖 아름다운 것, 가지고 싶은 것을 보면서 욕심을 냅니다. 그리고 그러한 욕심에 방해되는 것들을 부수고 속이고 훔치고 빼앗으려 합니다. 결국 욕심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막히게 하고 세상의 권세와 법칙을 숭배하게 만듭니다.

부러움에서 질투로 그리고 강탈로 마침내 살인으로 욕심은 우리로 하여금 점점 더 깊은 악의 구렁텅이로 빠지게 합니다.

 

돈에 대한 숭배는 곧 하나님의 자리, 인간의 경배와 숭배를 받을 자리에 돈을 놓은 것이고 결국 하나님을 대신하게 하며 그 돈 뒤에서 하나님 대신에 마귀가 인간의 숭배를 받으려 하는 음모가 있습니다. 이게 바로 맘모니즘입니다. 다르게는 사타니즘입니다. 돈을 사탄의 다른 얼굴이라고 하면 너무합니까?

 

이런 욕심을 가장 효과적으로 채울 수 있는 것을 우리는 ‘경쟁력’이라고 부릅니다. 성경에서 죄라고 하는 것의 이름은 놀랍게도 ‘효율’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엄밀히 말하면 사람과 사람을 서로 싸우고 미워하고 증오하고 갈라서게 만들고 모든 것을 해체시키고 분리하게 합니다.

 

가령 학생들은 지금 등교를 하지 않습니다. 온라인 개학을 하고 있습니다. 방송으로 공부를 대신하는 것이지요. 아침 8시경에 조례를 하는 모양입니다. 하루 종일 한 오후4시까지 강의를 보고 내준 과제를 다음날 밤 12시까지 제출합니다. 애들이 나름 괜찮게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몇몇 친구들은 이런 기회에 ‘치고’ 나간답시고 학원에 다닌답니다. 아니 전염의 우려 때문에 학교까지 온라인으로 대체하는 마당에 학원은 또 뭡니까? 솔직히 공부 조금 더해서 뭐할겁니까?

 

우리나라 학생들은 너무 많이 공부하고 너무 많이 시달립니다. 그럴 필요가 없는데 말이지요. 자기 혼자만의 이기심으로 공동체를 위험에 처하게 하는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습니다. 정말이지 씁쓸합니다. 해서는 안되는 행동입니다.

 

지금 제일 관리가 안되는 곳이 바로 클럽, 술집입니다. 심지어 입대를 앞둔 대구의 19세 청소년이 부산까지 원정을 와서 클럽에 가는 바람에 클럽 입장객 460여명에 대한 전수조사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이걸 보고는 참 가지가지한다고 또 욕을 합니다.

 

공동체의 안전이 위협받는이때 클럽에서 부비부비 쫌 안하면 어떻게 됩니까? 발정과 욕망 때문에 남은 아랑곳하지 않는 사회의 정 반대가 바로 기독교 사회관입니다. 남을 배려하는 겁니다. 나의 욕망을 억누르고 제한하고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겁니다.

 

사탄이 주는 욕심과 미움과 질시는 마침내는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인 인간을 분리시킵니다. 하나님과 그의 자녀들을 분리시킵니다. 둘 사이에 죄의 담을 쌓습니다. 이제 그것을 다시 합치고 이제 마귀의 지배법칙인 경쟁과 효율이 아니라 사랑과 믿음의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저는 그걸 선교라고 전도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가치관으로 세상을 물들이고 움직이게 하는 것을 전도라고 부릅니다. 그 전도의 끝이 바로 지상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걸 우리가 하는 겁니다.

 

보다 직접적으로 예배당에 데리고와서 앉혀 놓는다고 전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며 그런일에 도움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나가면 선교고 안으로는 전도? 어쨌든 전도는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모든 행동을 말합니다.

 

우리는 소망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우리가 하늘 아버지를 사랑하며 기쁨으로 인내하고 기다린다면

우리 하나님이 재림하셔서 심판하시고

그의 편에 서 있는 우리에게 잘했다 칭찬하시며 하나님의 나라에서 함께 하게 될 것을 믿고 소망합니다.

 

서로 경쟁하고 그래서 짓밟고 매몰차게 떨치고 홀로 뛰어가야 차지할 수 있는 아름다운 것들, 탐스런 것들을 혼자 차지하지 않고 함께 가서 나누는 그런 삶이 결국은 느리지만 아름답고 결국은 모든이가 행복해 지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런 나라에서

내가

내 가족이

내 사랑하는 이들이 속해서 보호받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늙었다고 해서 버려지지 않고 약하다고 해서 무시받지 않으며 약하다고 해서 억압받지 않는 그런 사회에서 우리가 비로소 행복함을 느끼고 살 수 있음을 믿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70대 이상의 노인에게는 치명적이라고 하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젊은이들, 건강한 이들에게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기사도 기억합니다. 실제로는 젊은이들이라고 안 걸리는게 아니고 아프지 않은게 아니고 다같이 위험하기는 하지만 면역력이 약한 노인들이나 환자들이, 이미 질병이 있는 자들이 더 위험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 이들이 잘 죽어요.

 

한때 영국이 그리고 지금은 스웨덴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집단면역. 이름은 그럴듯한데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국민의 60%가 바이러스에 걸리면 집단적인 항체가 생성되어서 더 이상 그 코로나 바이러스가 두렵지 않게 되는 그런 이론입니다.

 

그래서 한때 영국은 코로나에 대해서 특별히 경각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영국의 황태자와 수상이 코로나에 걸리자 정책 방향이 달라졌습니다. 남의 문제일때는 추상적이고 그래서 별 신경도 안썼지만 내 문제가 되니까 이것저것을 모두 하게 됩니다. 지금은 저들도 코로나에 대해서 열심히 싸우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스웨덴은 지금도 여전히 집단면역이란 이론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 웃긴건 이 집단면역이론이 성공하고 있다고 저들이 주장하는 겁니다. 그런 한편에선 무려1500명 넘는 사람들이 죽었어요. 아마 대부분 노인들인 모양입니다. 특히 요양원에 있는 노인들. 세상적으로 쓸모를 따져서 별 쓸모가 없으니까 죽어야 합니까? 우리도 언젠가는 늙을텐데요.

 

이런 저들을 보고 심지어 어떤 우리나라 사람이 말합니다. 복지비가 많이 드는 노인들을 이 기회에 죽이고 세금 내는 젊은이들의 나라로 만들려 한다고. 저는 솔직히 여기에 대해서 자세하게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만일 그런 목적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래서 집단면역론을 들먹이고 국가적으로 꿈쩍도 하지 않는다면 정말이지 무서운 나라입니다.

 

겉으로는 쿨한 척, 세련된 척하지만, 생명을 한없이 존중하고 약자를 배려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듯이 보여도 철저하게 강자존 만을 지향하는 서구사회의 냉정함을 몸서리치게 느낍니다. 적당히 이기적이고 적당히 속물적이지만 그래도 전체적으로 아직까지 명분을 따지고 대의를 가지고 행동하며 정이 있는 사회에 제가 살고 있다는게 너무나 감사합니다.

 

적당히 대의명분을 따지고 정이 있는 사회가 아니라 속까지 철저하게 사랑이 넘치고 하나님의 대의에 헌신하는 사회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속한다면 우리는 훨씬 더 안정하고 행복할 것입니다.

 

저는 아직 젋습니다. 그러나 제 부모님은 젋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 권사님들은 그 헌신으로 정점에 달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단지 늙었다는 이유로 힘이 없다는 이유로 약하다는 이유로 죽음의 위험 앞에 방치된다면 그런 사회에 우리가 산다면 생각만으로도 끔찍합니다.

 

노인은 우리 모두의 미래입니다. 모든게 불공평하지만 죽음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평등합니다. 보통의 죽음 앞엔 늙음이라는 과정이 있습니다. 아무리 부자라도 권력이 있어도 피할 수 없습니다. 필수코스입니다. 이걸 밟지 않고 죽음에 들기가 어렵습니다. 백발에 주름투성이 얼굴과 약해진 근육과 뼈가 있습니다.

 

젊을 때 자식을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쳐 헌신하고 자기의 꿈과 젊음과 알찬 속을 다 희생하고 키워낸 자식들에게 버림받는다면 정말이지 끔찍합니다. 기회는 이때다 하고 아무 쓸모없는 노인들을 이번 기회에 싹다 정리하자는 생각을 가진 사회라면 너무 너무 끔찍합니다.

 

모든 노인들을 요양원에 몰아넣고 죽기만을 기다리기에 너무 지치고 돈이 많이 드는데 이번 코로나가 싹 해결해 주어서 너무 잘됐다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몸서리 처지는 일입니까? 그 동네에서는 요양원에 마스크 한 장도 배부하지 않았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저는 기독교가 바로 이런 가치관 인간을 쓸모로만 판단하는 가치관에 정면으로 반대하고 도전하는 것을 전도라고 부릅니다.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주님의 그 원칙이 경쟁과 미움과 질시를 이기는 세상을 만드는 것을 전도라고 부릅니다.

 

마귀의 지배가 아니라

마귀가 만든 원칙에 의해 움직이는 능률 중심의 사회가 아니라

적자생존의 원칙이 아니라

사랑과 양보 그리고 겸손의 법칙이 지배하는 나라,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그 품안에서 서로 행복하게 사는 그런 나라를 만드는 것을 전도라고 부릅니다.

 

제가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할 때 의료보험에 대해서 정말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리고 의아했습니다. 저들은 보험에 따라 갈 수 있는 병원도 따로 정해두었습니다. 보험에 따라 보상범위도 다릅니다. 그리고 보험이 있어도 의료비가 엄청나게 비쌉니다. 왜 저들은 의료보험을 그러니까 전 국민 의료보험을 주지 않을까? 개인들의 경제적 능력으로 스스로 보험을 들게 할까?

 

보통 저들의 보험료는 일년에 천만원입니다. 처음엔 저도 농담인줄 알았는데 아닙니다. 정말이지 끔찍하게 비쌉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직장에서 해고당하면서 보험이 없어지고 그래서 병원에 가지를 못합니다. 그런데도 저들은 절대로 남의 의료비를 대신 내 주고 싶지 않다고 ‘왜 내가 저들의 것까지 내야 되냐?’면서 국가 공공의료를 부정합니다.

 

마치 자기는 늙지 않을 듯이

자기는 해고당하지 않을 듯이

자기는 절대로 가난해지지 않을 듯이

자기는 아프지 않을 듯이.

 

기독교도들이 세운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한다는 나라에서 철저한 개인주의가 판을 칩니다. 개인주의하고 이기주의하고 다르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개인주의가 좋다고까지 서술한 우리네 교과서도 있습니다. 그러나 개인주의가 너무 철저해지면 그게 바로 무한이기주의가 되는 겁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자본의 논리가 인간을 대신하게 되면

돈이 말을 하게 되면

개인의 사정은 숨을 죽입니다. 그러면서 얼마나 많은 약한 이들의 피와 눈물을 흘리게 만듭니까?

 

지금도 진행 중에 있기는 하지만 미국에서 코로나로 희생된 이들의 70%가 히스페닉계와 흑인들이랍니다. 그러니까 멕시코같은 스페인계열과 아프리카계. 이들은 돈이 없고 의료보험이 없을 뿐만 아니라 질 좋고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지 못하고 제대로 위생에 신경을 쓰지 못하고 그래서 바이러스에 쉽게 노출되고 병에 걸려도 병원에 가지 못하고 그래서 쉽게 희생되는 겁니다.

 

유럽과는 또 다른 정말이지 자본주의 원조 국가다운 처방입니다. 돈없는 자는 다 죽어라! 살 수 있으면 재주껏 살아남아라!

 

하하, 농담입니다. 설마 이 지상에서 민주주의, 사람이 주인이라고 하는 사상을 가진 나라에서 그럴 리가 있을까요? 믿음의 조상들이 목숨내놓고 대서양을 건너서 절반이 그해 겨울에 얼어 죽고 굶어 죽은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한 신앙의 조상을 둔 나라에서 그럴 리가?

 

그들의 동전이나 지폐에는 우리가 잘아는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IN GOD WE TRUST. 우리는 하나님이 존재하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습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돈을 가지고 저들은 지금 지옥을 만들려고 합니다.

 

물론 그렇지는 않겠지요. 그래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혹 그런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얼마나 몸서리 쳐지는 일일까요? 현세의 지옥입니다. 그래서 이번 사태를 겪고 우리나라 사람의 2/3가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의 선진국이라고 서구에 대한 콤플렉스를 극복했다고 말한답니다. 뭐 이걸 전화위복이라고 봐야 하는건지...

 

그런 사회를 반대하고 사랑과 관용이 판치는 나라, ‘나 혼자’가 아니라 ‘더불어 함께’의 나라를 만들자고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요 그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려는 노력이 전도입니다.

 

천국은 정말 멀리 있지 않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칙을 가지고 세상을 다스리는 원칙으로 삼는다면 그게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됩니다. 아니라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소망하며 그에게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간다면 그게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이며 그러면 나의 아버지 하나님 그가 다 이루십니다.

 

약간은 모자라고 약하고 무능해 보이기도 하고 사람만 좋은 그래서 쓸모도 별 없어 보이고... 그런 모든이를 포용하고 보듬는 사회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어 집니다.

 

오늘 본문에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안디옥은 예루살렘을 제외하고 제일 먼저 하나님의 교회가 왕성히 선 곳입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에서는 예루살렘과 콘스탄티노플과 안디옥과 로마와 알렉산드리아가 ‘총대주교구’라고 불렸습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로마교회와 같은 역할을 한 교회의 총본산이 다섯곳이 있었는데 그 중에 한 곳이 안디옥입니다. 로마 교회의 법왕이나 다른 교회의 총대주교나 똑 같습니다. 이 교회의 초대 담임이 바로 바나바고 막내 부목사가 사울입니다.

 

본문에 의하면 안디옥 교회에 교사들과 선지자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교사나 선지자들을 모두 목사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안디옥 교회에는 담임목사 외에도 많은 교역자들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모든 것을 나타내는 기록문서가 아닙니다. 그래서 여기 나온 다섯명 이외에도 교역자들이 더 있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일단 여기 세어보니 총 다섯명입니다. 본문 중에 한사람인 ‘헤롯의 젖동생’ 이란 말은 당시 갈릴리와 베레아를 다스린 헤롯 안디바의 유모의 아들을 말합니다. 아마 헤롯과 함께 왕궁에서 자라고 어린시절을 보낸 사람인 모양입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한 어머니의 젖을 먹고 왕궁에서 같이 자랐지만 한 사람은 하나님의 적으로, 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종으로 가는 길이 나뉜겁니다.

 

특별히 사울, 바울은 자기를 일러 교사로 세움을 입었다고 말했는데 교사는 목사 중에서도 가르치는 자를 말하는 거지요. 선지자는 옛날 구약의 선지자와 같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해석하고 가르치는 자를 말합니다. 신약시대에는 사도직분과 마찬가지로 아주 초기의 잠깐을 제외하고는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직분입니다. 마찬가지로 목사가 이를 행합니다.

 

보시면 바나바를 제일 먼저 언급하고 있고 사울을 제일 나중에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나바를 제일 먼저 언급한 것은 그가 그 교회의 담임목사이기 때문입니다. 사울을 제일 나중에 언급한 것은 글쎄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제일 후임 교역자라서가 아닐까요?

 

일반적으로 앞의 세명을 선지자로 뒤의 두명을 교사로 봅니다. 왜냐면 원문에는 각각 세사람의 이름과 두사람의 이름 앞에 그러니까 첫 번째 바나바 앞에 그리고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 앞에 ‘테’라고 하는 불변사가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누가 선지자고 누가 교사고 하는건 오늘 우리에게 큰 의미가 없기는 합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에서 선지자와 교사가 분리되어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이미 목사들 안에서도 직분이 나뉘어 있었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잘하는 것을 하도록 특화되었다고 하는 거지요.

 

물론 당연하게도 바나바가 선지자라고 해서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사울이 교사라고 해서 하나님과 직접 영교하거나 기적을 행하지 못한다는 말도 아닙니다. 다만 더 잘하는 것, 더 중점 두는 것으로 나뉜겁니다.

 

아주 작은 교회라서 어쩔 수 없이 담임목사 혼자서 사역하는 교회가 아니라면 목사들이 자기가 더 잘하는 것, 더 중점을 두는 것으로 나누는 것도 좋다고 봅니다. 제가 총신대 신학대학원에 다닐 때 한 학년 밑에 전도사님이 한분 있었어요. 그런데 이 친구가 말을 심하게 더듬어요. 그래서 저희들이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설교를 어떻게 할 수 있지? 아니 저런 친구를 왜 합격시켰지?

 

그래서 동기생 중 한명이 그 전도사님에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사역을 하려고 하느냐? 그러니까 대답이 뭐겠습니까? 문서 사역. 그래요, 그러면 되겠네요. 말을 심하게 더듬는다고 해서 세상적으로 별볼일 없다고 포기하는게 아니라 그가 할 수 있는 사역, 말을 더듬어도 무관한 사역인 문서사역은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겁니다.

 

바로 이렇게 하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재주를 자기의 사역에 사용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자기가 가진 재능은 사실은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하라고 주신 것이기 때문에 모든 처지에서 재능이 쓰임이 있습니다.

 

그냥 주신게 아닙니다. 목사뿐 아니라 우리 각자는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한 개 이상의 재능,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쓰일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말로 ‘쟤는 도대체 무슨 재주가 있나?’ 하면서 한탄할 정도라도, 밥벌어 먹는 재주말고도 아버지께서 사용하시고자 주신 그런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곰곰이 스스로를 살펴보아 내가 무엇으로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까? 내가 무엇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이바지할까를 생각해 보세요.

 

이렇게 안디옥 교회의 교역자 이름들이 직분별로 나온걸 보면 안디옥 교회의 규모가 제법 컸던 것 같습니다. 이제는 예루살렘 교회가 아니라 안디옥 교회를 중심으로,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의 시대가 왔다는 겁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고 스스로를 선택 받은 자로 여기면서도 그리스도를 못박은 유대인 대신에 하나님의 택하신 세계인들을 위한 선교가 시작되게 된 것입니다.

 

안디옥은 지금 시리아에 속하고 그 나라의 수도도 아닙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슬람 국가인 시리아에는 안디옥 정교회의 신자 75만명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이 통계는 2008년의 통계이고 최근의 중동 정세상 아직까지 그들이 한곳에 정주하지는 않을 것 같기는 합니다만 그들이 면면히 그 전통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 안디옥 교회의 초대 목사와 부목사에 대한 기록인 겁니다. 그런데 이어진 구절이 심상치 않습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원문에는 주를 섬겨 앞에 ‘그들이’ 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주를 섬기고 금식할 때에’ 라는 말이 됩니다. 여기서 그들은 목사들뿐만 아니라 전 안디옥 교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섬긴다는 말은 예배와 각종 일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겁니다. 안디옥 교인들은 목사들과 함께 다양한 일들로 하나님을 섬겼고 함께 금식하며 기도했는데 이때 성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제가 이 구절을 보면서 든 생각이 이겁니다. 앞으로는 개척을 할 때 꼭 부목사를 내보낼 것이 아니라 담임도 나가야 하는구나?

 

앞에도 말씀드렸습니다. 안디옥 교회가 매우 큰 교회라고. 그런데 그런 큰 교회를 두고 담임이 막내 부목사를 데리고 선교하러 가는 겁니다. 개척하러 나간다고 봐도 됩니다. 왜냐면 그들이 가장 교회를 잘 세우고 전도를 잘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자기의 큰 재능을 주시고 그 재능을 자기를 위하여 한껏 발휘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나중에 보면 현지인들이 바나바를 그리스의 최고 신인 제우스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울을 헤르메스라고 부릅니다. 그런걸 보면 바나바는 말이 사울처럼 그렇게 많지 않았던 모양인데도 하나님은 그를 불러 이방에 교회를 세우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겉으로 보는 것하고 하나님이 보시는 것 하고는 전혀 다릅니다.

 

사울이 엄청나게 못생겼다는 말씀은 예전에 드렸지만 하나님은 그의 속 중심에 보석처럼 빛나는 신앙 열정과 그것을 위한 지식을 보시고 준비된 자를 사용하신 겁니다.

 

‘따로 세우라’는 말은 원문에 충실하게 재해석하면 ‘어떤 특별한 목적을 위해 경계를 지어 다른 것으로부터 구별하다’는 뜻입니다. 예로부터 하나님은 자기의 사람을 세우실 때는 세상과 구별을 짓기를 요구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혼탁한 욕망의 법칙에 휘둘리지 않고 하나님의 법으로 자기를 제어할 수 있도록 요구하신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자기의 욕망과 이기심으로 정신없이 이전투구를 벌일 때에 하나님의 법을 따라 스스로 삼가고 나아가도록 하신 것이지요.

 

사실 모든 것에 하나님의 뜻이 중심입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진짜로 아쉽고 이해가 안되는 상황이지만 우리의 열심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여 뽑아서 자기의 일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늙고 힘이 없고 돈도 없어서 나는 할 수 있는게 없어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는 교회의 사역에서 가장 중요한 사역의 하나입니다. 기도는 만능이지요. 그런데 왜 할게 없다는 말입니까? 기도하는데 특별한 재주나 힘이나 잘남이 요구되지 않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믿음으로 하는 겁니다. 믿음만 가지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기도를 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뽑아서 일을 시키실 때는 어떻게 알 수 있지요? 오늘 본문에서처럼 금식하며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어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집중하지 않고 세상과 짝하여 정신없이 돌아간다면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에 있는 하나님의 영에 아무리 신호를 보내도 이게 중간에 가로 막혀서 차단이 됩니다.

 

약간 비유가 이상합니까? 하나님은 사탄에게 일정한 기간 동안 공중권세를 허락하셨습니다. 여기서 공중이 어디냐? 바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상과 하늘나라 사이의 공간?

 

그런데 이것을 막는 것은 실제로 사탄이 아니라 사탄의 공작으로 퍼진 우리네 욕망이라는 겁니다. 욕심이 죄가 되고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분리된 우리 인간들이 사망에 이르므로 결국 우리의 마음속에 성령님이 계신게 아니라 욕망 덩어리가 있고 이걸 눈으로 보면서 하나님과 차단되는 겁니다. 그래서 눈을 조심해야 하지요.

 

4절부터 보면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타고 구브로에 가서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행원으로 두었더라”

 

본절에서 다른 부분은 다음에 보고 제가 집중할 것은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그래요 모든 일에 성령께서 보내시고 감동시키시고 선택하시고 세우시고... 그런겁니다. 우리가 자가발전으로 무언가를 해보려고 한다면 이게 참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제일 집중해야 할 것은 성령의 인도를 구하는 겁니다. 그럴려면 기도하고 금식하는 것입니다.

 

금식은 너무 힘들어요. 그래요 여기서 금식은 결국 육체의 혈기를 줄이기 위한 기도의 한 방편이지 특별한 다른 의식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금식이 힘든 분들은 스스로 육체의 소욕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뜻을 더 알기 위해 겸비한 자세로 기도하면 됩니다.

 

제가 오늘 드리고 싶은 설교의 주제가 바로 이겁니다.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따로 세우라’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기 위해서 도대체 무슨 일을 해야 할지를 모릅니다. 어떤 준비가 필요한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노력도 해보고 간구도 해보고 그래도 안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이 바로 선택이란 부분입니다.

 

우리가 너무 오랫동안 인간중심의 사고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런 노력없이 선택받고 구원받는다는 게 이해가 안됩니다. 선택받으려고 하면 뭔가, 우리가 먼저 뭔가를 해야 할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 부분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전적 주권을 믿습니다. 선택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거지요. 도저히 그럴듯하지 않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입은 거지요. 세상적으로는 정말 별볼일 없는데도 하나님은 충분히 들어 서십니다. 그래서 그 은혜에 감사하고 그리고는 주안에서 기뻐하면 됩니다. 다만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따른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경외한다면서 그의 명령을 어길 수는 없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도 하나님의 그 선택하신 은혜에 감사해서 그를 경외하며 그의 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겁니다.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그래도 노력합니다. 장애가 있습니다. 그래요, 당연하지요. 그래서 더 잘 지킬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겁니다.

 

죄많고 허물투성이인 우리가 하나님의 눈에 들어서 그럴듯해 보여서 선택받을 수 있을까요? 그냥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말에서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자발적으로 믿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믿도록 예정되었고 그 예정이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선택입니다.

 

아무런 공로없이 선택을 받은 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 하나님의 성도로 있습니다. 물론 아직도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지만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바로 그 자리.

 

부산에서 졸지에 코로나에 감염된 자가 부활절 예배를 드린 것으로 부산의 교회들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대구에서 부산의 병원에 온 코로나 환자에게 감염된 딸에게 전염된 아버지가 교회 부활절 예배에 갔다가 160명 교인들과 함께 예배했기에 그 교회가 폐쇄되고 전수조사에 들어갔다고 난리가 났습니다.

 

사람들이 일제히 교회를 욕하고 난리였습니다. 참 씁쓸하지요. 그런데 감사하게도 그 교인으로부터 감염된 다른 교인이 없답니다. 뭐 한 몇일 더 있어야 정확히 알 수 있겠지만 일단 그렇네요.

 

그동안 청정지역으로 있다가 하필이면 본당 예배의 재개를 앞두고 이런 일이 벌어졌네요. 그래요, 한 주를 더 연기해도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령님께서 특별한 일을 위하여 따로 세우신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는데 무슨 두려움이 있을까요?

 

성경에서 감동이라고 하는 것을 제가 다시 생각합니다. 감동이란 말을 원문적으로 풀이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내재하시는 성령을 깨우다’라는 말입니다. 뭔가 말이 될 것 같기도 하고 안될 것 같기도 해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 하나님의 성령이 내재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성령을 하나님이 깨우신 것입니다. 뭐 신앙 양심이라 해도 좋고요.

 

세상에 있어도 세상의 법칙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법을 지키는 이를 신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신자가 일상 생활에서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가운데 바른 일만을 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성도가 됩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이 다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런 신자와 성도가 모인 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움직이는 법이 있습니다. 그 법이 바로 하나님의 명령, 성경이지요. 그런 성경에 비추어 모든 것을 판단하고 절대적인 선악의 가치를 믿습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판단의 중심이 됩니다. 그런 나라를 만들기 위해 전도가 필요하고 선교가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계속해서 확장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하나님의 가치와 세상 가치가 치열하게 싸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약해서가 아니라 그가 우리에게 정금같이 연단되기를 원하셔서 순수한 믿음의 나라를 만들기 원하셔서 시금석을 두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기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필요한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가 보호받고 사랑받을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온 세상이 코로나 때문에 흉흉합니다. 들리는 소문이 끔직합니다. 일촉즉발의 위기에 처해 있어보입니다. 이럴때에 하나님의 나라에서 산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그래서 우리가 이땅을 하나님의 나라로 만드는 일에 더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세상 욕망이 우리를 흔들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 더불어 세상을 이길 하나님의 백성이고 자녀로 선택된 자들입니다. 오늘날은 성령의 시대입니다. 그는 안 계신 곳이 없으시고 못 하실 것이 없는 위대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가 우리의 마음속에 내재하십니다. 그가 우리의 속에서 하나님의 영과 끊임없이 영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하고 금식하며 그에게 집중할 때 하나님의 인도를 받습니다. 그가 하시는 대로 순종하기만 하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런 이천년 전의 바나바와 사울의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 과학 만능 물질 만능의 시대에도 역시나 변하지 않는 진리이자 구원의 끈입니다.

 

뭔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더 좋게 하시려고 한 주를 더 가정예배로 드리게 하신 모양입니다. 그러므로 한 주 더 기다립시다. 하나님이 이 사태가 끝나고 얼마나 더 큰 은혜를 주시려고 이런 식으로 기다리게 하시는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섭리를 믿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우리가 만세 전에 선택된 것을 믿습니다. 오늘 코로나 하에서도 여전히 그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믿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이끄십니다. 내 주의 은혜와 복주심이 우리 성도들과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2020년 4월 26일 주일 설교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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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찬송가를 틀어놓고, 가정예배를 드린다는 심정으로 글을 올립니다. 그동안 목사님이 혼자라도 실망하지 말고, 의미 있는 주일을 보내라고 매주 당부하셨는데, 잘 지키지 못했습니다. 늦잠 자버릴 때도 많았고요.... 그리고 이건 정관누리교회에서도 유명한데 저는 주말에 아플 때가 많았습니다. 이번 주도 어김없이 통증이 몰려왔지만, 더 이상 질 수 없다고 다짐해서, 부산 시내 한복판까지 마스크를 착용하고 기분 전환을 하고 책을 여러 권 사 왔습니다.

 

이 설교에서 저는 참 인상 깊었던 점이, 하나님이 바라보는 "나"는 세상의 평가와는 다르다는 기독교의 귀중한 가르침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세상에서 별 볼일 없고, 능력도 없고, 아 더 쉽게 말해 돈도 잘 못 버는 사람이 있다고 쳐요. 으이구, 한심하게 그게 뭐니. 그것이 오늘날 자본주의의 평가일테죠. 그 지배력은 강력해서 주변에서도 쉽게 그렇게 판단을 내릴 겁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전혀 다르게 말합니다. 너는 특별하고, 강하고,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펼쳐나가는 성도란다. 그러므로 당장 일어나서 너의 소명을 좇아서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는 환경이 불행해서 못해요. 라고 말하자 단호하십니다. "전혀 그렇지 않아." 하나님의 사람은 불행 속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을 마주합니다. 그것이 성도의 품격이라고 써도 좋을 겁니다. 우리의 신앙이 믿음이 자라고, 행함이 함께 하여, 그 영혼이 하나님의 성품으로 닮아갈 수 있기를 이 시간 기도합니다. / 2020. 04. 26. 시북 (허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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