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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위에 거하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에스라5:1-6:12)

 

코로나가 쉽게 종식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가만 앉아서 굶주릴 수가 없다고 해서 서서히 사회가 개방이 되는 추세입니다. 물론 우리는 아직도 마스크를 쓰고 있고 저도 마스크를 쓰고 설교를 하니까 정말이지 힘이 듭니다. 설교할 때 음성이 똑똑히 전달되도록 하기위해 소리를 높여야 되니까 더 힘듭니다.

 

그런데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도우심과 그의 보호하심을 우리는 느낍니다. 뭔가 문제가 생기고 위기에 처하게 되어도 사실 그 위기가 기회가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물론 그냥 위기가 기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위기의 순간에도 우리가 하나님을 더 열심히 찾고 그를 의지하고 바라면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감싸게 됩니다.

 

전화위복이란 말을 우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사용해왔습니다. 화가 변하여 복이 된다는 말의 실례가 이미 나타나고 있습니다.

 

코로나로 인한 전화위복의 예가 뭐가 있느냐고요? 이 사회가 더 맑아 졌고 윤리의식이 더 높아졌고 국민의 자긍심이 올라간 것? 서구를 부러워하는 문화적 사대주의를 극복하게 된 것은 그 중에서도 참 가슴뿌듯한 일입니다.

 

게다가 어려울 때 친구가 참 친구라고 누가 우리의 참 친구인지를 더 잘 알게 되었습니다. 나라와 나라사이에 친구가 없다고요?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동안은 평화가 오래 지속되는 바람에 그걸 잘 몰랐습니다. 이제 우리는 누가 우리의 진정한 친구인지 더 잘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국민들이 알게 모르게 가져왔던 패배주의를 극복하게 된 것도 큰 성과입니다. 말만하면 헬조선이니 헬반도니 했는데 사실은 이 땅이 헬조선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비하신 든든한 안식처임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위기를 맞이해서 세계각처에서 모국으로 특별기를 동원해서 사람들을 실어나르는 것은 나라의 존재의의를 느끼게 한 일이었습니다.

 

또한 목숨의 위기 앞에서 사람들은 이제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목숨 생명이라는 대전제 앞에서 인간은 보다 더 겸손해지고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할만큼 겸손하게 되었으며 사교와 음란과 이단을 가리고 그들과 구별 되이 거룩해지려고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갑갑하고 느리지만 우리는 이미 올바른 방향으로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앞으로 더 좋아질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을 바라고 나아가시를 바랍니다.

 

우리교회 입장에서도 8층의 신천지가 이사를 간 것은 정말이지 감사한 일입니다.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그들이 이사를 간다는 것을 생각이나 할 수 있었을까요?

 

이건 좀 그런데 제가 국민들이 정부에서 지원하는 재난지원금, 군과 시에서 주는 재난 지원금을 받고 사람들이 나라의 존재의의를 느꼈다고, 이걸가지고 뭐도 하고 뭐도 사고 했다는 말을 들으니 제가 다 기뻤습니다. 제가 무슨 대통령도 당수도 아니지만 우리나라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더 간절합니다.

 

걔중에는 이런 돈을 나라에서 주니까 나라가 돈이 어디 있다고 하면서 나라 망한다고 욕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들도 나라 망할까 봐 걱정하는 애국자들입니다. 이러나 저러나 애국자들이 많아져서 다행입니다.

 

애국심은 누가 강요하고 세뇌한다고 해서 생기지 않습니다. 세뇌가 일시적으로는 영향을 미쳐도 실제적인 혜택을 누리지 못한다면 위기의 순간에 사상누각처럼 허무하게 스러질겁니다. 저는 이런 말을 많이 들으며 자랐습니다. “나라가 내한테 해준게 뭐있노?” 하하 이제는 당당히 말할 수 있습니다. “해준게 없기는 왜 없노. 재난지원금도 받았고 근로장려금도 받았고 자녀장려금도 받았고 교복지원금도 받았고 받은게 한두개가 아니다”

 

참고로 교복지원금을 받으니 그명칭이 교복지원금이아니라 인재양성지원금입니다. 인재를 키우기위한 돈입니다. 우리 **이는 작년에 받았습니다. 우리 **이는 이번에 받았습니다. 그러니 둘다 이 나라의 인재로 키워지고 있는 겁니다. 앞으로도 하나님안에 거하고 그의 보호와 인도로 명실상부한 인재가 되기를 바랍니다.

 

1.중단된 공사를 재개하자 닷드내가 나아왔다

 

자, 오늘 성경 본문에서도 역시나 위기가 닥쳤습니다. 포로지에서 귀환한 유대인들이 성전을 지으려고 시도했다가 사마리아인들의 방해로 성전재건이 중단이 되었다는 말씀을 지난주에 드렸습니다. 그랬는데 한번 중단된 성전공사가 언제 재개될지 기약이 없습니다. 상황은 변함이 없고 백성들의 열정은 식었습니다. 세월은 흐르고 건물들은 점점 퇴락해 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가 하나님의 전을 다시 건축하자고 촉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너희는 이렇게 멋진 집에서 살면서 하나님의 전은 짓다가 말아 가지고 쓸쓸히 폐허로 변해간다고 외칩니다. 사실 공사가 중단되면 그 집은 세월이 가면 갈수록 망가지고 결국은 기왕에 지은 것도 다 부수지 않으면 안될 흉물로 남을 뿐입니다. 요즘도 그렇습니다. 콘크리트도 부식되지만 그 안에 철근도 녹이 습니다. 비와 바람이 외장공사가 되지 않아 보호받지 못하는 세멘콘크리트를 마구마구 못쓰게 만듭니다.

 

비록 사마리아인들의 방해가 있기는 했지만 성전은 무려 16년이나 공사가 중단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중단에 대해서 사람들이 원통해 하고 반드시 대적의 방해가 사라지면 어떻게든 다시 지을 거라고 결심했습니다.

 

그런게 벌써 16년의 세월이 흘러버렸습니다. 대적의 방해도 더 이상 없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성전재건에 대한 유대인들의 관심도 열정도 사그라져버렸습니다. 솔로몬 성전보다 세배로 크게 짓는다는 당초의 계획과는 달리 돈이 없어서 그 성전의 규모와 재료가 정말이지 초라할 정도입니다. 게다가 심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전이 없어도 전혀 불편함이 없습니다.

 

제사를 안 지내니까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더 편합니다. 제사의 제물값, 양과 소값도 안들고 비싼 기름도 필요없고 성전참배한다고 예루살렘으로 왔다 갔다 안해도 되니 교통비도 안들고 몸도 더 편하고 시간도 많아 집니다. 하지마라 하라 이래라 저래라 간섭할 사람이 없으니 세상에 이렇게 편할 수가!

 

하나님에대한 열심과 동포에 대한 사랑으로 일어섰던 유대백성들 이스라엘인들은 이제 마치 남의 일인 듯 열정이 식어버렸습니다.

 

처음에는 분명 대적들의 방해로 공사가 중단되었지만 대적들의 방해가 사라지고서도 이제 성전재건에 대한 관심은 사라졌고 하나님의 성전을 짖자고 나서는 사람도 없습니다. 괜히 나서봐야 반란주모자로 찍힐 수 있습니다.

 

바로 그때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가 일어나 하나님의 성전을 짓자고 촉구한 겁니다. 이 선지자들의 촉구가 있고 나서 성전을 짓자는 열기가 갑작스럽게 불타오릅니다. 그리고 공사가 다시 시작되어서 공사가 거의 완공 직전까지 가게 됩니다. 사실 성전자체 공사는 금방 끝납니다. 다만 외곽의 담장 그러니까 행각, 회랑부분이 남은 겁니다.

 

그런데 성전을 짓는 것에 대한 대적들의 방해가 완전히 사라진게 아닌 모양입니다. 유대인들이 다시 공사를 시작하자 이 소식을 들은 시리아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그들의 동관들이 다 나아와 “누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 성전을 건축하고 이 성곽을 마치게 하였느냐”고 묻습니다.

 

성경 본문에는 닷드내가 유브라데 강 건너편 총독으로 나오지만 닷드내는 강 건너편 총독은 아닙니다. 여기 본문에 나오는 ‘강 건너편’은 당순히 강건너라는 말이 아니라 페르샤의 20개 관구 중 하나의 이름입니다.

 

페르샤는 모두 127개의 민족을 단위로 하는 도가 있었고 그 127개 도를 관할하는 상급 지방자치단체인 20개의 관구가 있었습니다. 바로 강건너편 이라고 하는 관구의 총독은 닷드내가 아니고 닷드내는 시리아 총독입니다. 스달보스내는 총독을 보좌하는 서기관 또는 감시자입니다.

 

그러니까 닷드내가 시리아 사람이고 총독이기에 혹시나 페르샤에 반란을 일으킬까 봐서 그 비서겸 감시자로 중앙에서 파견한 관리가 스달보스내입니다. 당시 페르샤는 다민족 국가고 항상 각처에서 반란을 일으켰기에 그 민족 출신 총독에다가 중앙에서 감시자로 서기관이라는 명칭으로 감시자를 파견해서 반란 유무에 대한 보고를 받는 겁니다.

 

그리고 강 건너편 총독 그러니까 요즘으로 치면 ‘강 건너편’ 주지사는 ‘우쉬타니’라는 사람입니다. 당시에 바벨론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아마 우쉬타니는 유대의 성전건축과 바벨론의 반란이 혹 연관이 있는가 싶어서 시리아 총독 닷드내를 시켜서 사건을 조사하게 한 것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나아와’라는 단어를 본 기억이 있습니다. 4:2에 “스룹바벨과 족장들에게 나아와 이르되 우리도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는 구절의 ‘나아와’하고 본문의 5:3에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그들의 동관들이 다 나아와”라는 구절의 ‘나아와’는 같은 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전혀 다른 말입니다. 앞의 ‘나아와’는 남자가 여자와 사랑을 나누려고 나아온다는 뜻이고 여기 본문의 ‘나아와’는 가치 중립적으로 단순히 의문을 풀기위해 사무적으로 나아왔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한글단어로는 같아 보여도 원문으로는 전혀 다른 단어로 된 글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본문에서 닷드내는 유대인들과 뭔가 관계를 좋게 하거나 이들을 미워해서 음모를 꾸미거나 하려고 나온게 아니라 단순히 행정절차를 위해서 조사차 나왔다는 겁니다. 분명히 이전에 성전 건축을 못하게 중단 명령이 내려졌는데 갑자기 중앙의 허락도 없이 성전건축이 재개되니까 혹 반란과 연관된게 아닌가 싶어서 조사하라는 명령이 내려왔고 그걸 조사하기위해서 인근 지역인 시리아의 총독과 관리들이 나왔다는 겁니다. 따지고보면 왕실의 명령을 어기면 무조건 반역입니다. 왕의 명령에 거역하는데 무슨 핑계가 있나요?

 

2.닷드내의 나아옴이 전화위복이 되었다

 

제가 이 말씀을 장황하게 드리는 이유는 이 닷드내의 나아옴이 사실은 성전을 재건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페르샤의 지배를 받고 있는 입장에서 백성들이 자기 마음대로 성전을 중건할 수는 없습니다.

 

비록 백성들이 선지자들의 예언을 받고 열심을 내어 중단된 성전공사를 다시 재개했지만 완공해서 정식으로 허가받아서 그 기능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제사장들이 페르샤 제국내의 다른 지역 신전의 사제들처럼 면세 혜택을 받고 성전 제물에 드는 각종 비용에 대해서 면세 혜택을 받거나 중앙정부의 지원을 받거나 하는 일은 불가능한 겁니다.

 

중앙의 허락을 받지 않고 백성들이 임의로 공사를 끝내도 결국은 이게 말썽이 되어서 추후에 중앙정부에서 트집을 잡아 성전을 다시 허물 수도 있고 반란의 주동자로 몰아서 공사 주동자를 처벌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애써 일군 포로들의 터전이 무너지고 유대인들이 다시 포로로 끌려 갈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지금 유대인들은 민족자치를 허락받아서 페르샤의 허락하에 고토에 돌아온 것이지 결코 독립국을 건설한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행동은 페르샤 왕의 명령에 따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왕의 허락없이 성전공사를 재개한 것이 얼마나 큰 일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성전공사의 재개를 허락하는 조서는 다리오왕이 내린겁니다. 이 사람의 조서에서 유대인들은 공식적으로 성전재건을 허락받았고 또 성전건설을 위한 재정의 지원도 허락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다리오는 정말로 고마운 은인인 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리오가 참으로 마음씨가 좋은 사람이라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서에 나타난 다리오는 본문에 나타난 합리적이며 관대하고 은혜를 베푸는 그런 이미지가 아닙니다.

 

예루살렘 성전공사를 재건한 이때에 바벨론에서는 바벨론 유민들의 반란이 있었는데 다리오는 이 반란을 진압하고 그 주동자 삼천명을 사로 잡아서 큰나무로 배를 꿰뚷어서 죽이고 시체를 그 나무에 매달았다고 하는 기록이 있을 만큼 잔인하고 무자비한 사람이었습니다.

 

대제국의 왕이 권력을 유지하려는 욕망은 엄청난 겁니다. 페르샤의 왕들은 스스로를 세계의 왕으로 여겼습니다. 이런 식으로 자기를 자랑합니다. 가령 고레스를 비롯한 페르샤왕들은 스스로를 “나는 세상의 왕, 위대한 왕, 합법적인 왕, 바벨론의 왕, 쉐르와 아카드의 왕, 네 가장자리의 왕 고레스”와 같은 식으로 소개합니다.

 

그런 사람의 눈으로 볼 때 겨우 5만여 포로귀환민들이 뭔가 하는 일이 얼마나 보잘것없게 여겨졌을까요? 그리고 겨우 그 정도가 반란을 일으킨들 무슨 별다른 일이 생기겠나요?

 

또한 그런 보잘 것 없는 무리의 신이 무슨 능력이 있겠나요?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페르샤 중앙정부와 왕은 유대인들이 정부의 허락도 받지 않고 성전을 재건한 것을 가지고 매우 중대한 일로 여겼고 만일의 경우에 바벨론의 반란과의 연계를 염두에 두고 조사를 명하기까지 한 것입니다.

 

그런 대제국의 왕을 움직여 하나님은 자기의 일을 이루게 하십니다. 백성들에게 다시금 열정을 품게 하시고 모자라는 재정과 열정과 행정적 지원을 얻게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본 장의 기록입니다. 닷드내가 성전재건을 조사하러 갔을 때 왕실에서 이 성전공사를 전폭적으로 지지할걸로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어려운 일을 가능케 하셨습니다.

 

3.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면 형통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역사가 없었다면 유대인들의 성전재건시도는 바벨론의 반란과 연관된 것으로 몰려 민족이 아예 사라지는 대참사를 빚었을지도 모릅니다. 고레스를 비롯한 페르샤의 왕 특히 다리오 왕의 잔인함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이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왕조시대에 가장 큰 죄가 뭡니까? 역적모의, 반역입니다. 심지어 종이라도 역적모의를 밀고하면 면천을 시켜줬다는 놀라운 사실.

 

그 정도로 심각한 일을 초래할 사건이 벌어졌지만 결국 하나님은 그런 사태를 이용해서 자기의 일을 이루셨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 사람이 예루살렘의 성전재건에 있어서는 엄청난 은혜를 베풉니다. 그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람의 말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나요? 전혀, 불가능합니다. 생각이란걸 하는 사람의 마음을 무엇으로 사로잡을까요?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매달리면 그가 하십니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하나님이 하시면 안되는 일이 없습니다.

 

성경은 이를 이렇게 말합니다. 6:14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의 권면을 따랐으므로 성전 건축하는 일이 형통한지라” 여기서 보시면 학개서와 스가랴서의 예언의 말씀을 따랐기 때문에 형통했다고 합니다. 그래요,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다면 형통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이 복음인 이유가 있습니다. 이대로 따라하기만 하면 복을 받는 비결을 적어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대로 따랐더니 형통했다는 말씀은 성전건축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분야에서 다 적용이 되는 철칙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른다면 우리는 위기 속에서도, 불가능해 보이는 환경 속에서도 형통함을 볼 것입니다.

 

바벨론 유민의 반란이 일어났고 반란과 연관되었다는 누명을 뒤집어 쓰고 민족이 사라질 수도 있는 위험한 순간에 하나님이 역사하셨다는 이 기사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기에 이들이 형통하였다는 교훈을 얻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동했기에 형통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더 풀이하면 명령대로 행동했기에 하나님의 기적을 맛볼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일을 초자연적 현상을 통하여 하실 수 있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쏟아지게 하셔서 죄악을 살라버리실 수가 충분히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예로 잘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을 통하여 역사하시기를 즐겨하십니다. 자기가 창조하신 인간에 대한 사랑을 끊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기대고 의지하고 그를 바라야 합니다. 우리는 그걸 이용해야 합니다.

 

말씀에 따른다는 말은 순종한다는 말이고 이것은 명백하게 뭔가 행동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요, 순종은 행동을 당연히 포함합니다. 생각만으로 그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믿고 나가서 행동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형통을 가져온다는 말은 우리가 행동해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신 기적을 맛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행동하지 않는데도 하늘에서 복이 쏟아지는 일은 잘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에게 불가능은 없지만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인간을 통해서.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이렇게 이렇게 하면 내가 저렇게 해주께 이렇게 하시는데 당연히 따라야 합니다.

 

4.세월은 열정도 식게 만든다

처음 성전재건을 방해받을 때만 해도 성전재건의 가장 큰 장애는 사마리아인들의 고소와 페르샤 정부의 명령이었습니다. 공식적인 명령으로 내려온 공사중지 명령은 하나님의 성전공사를 중지해야하는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 5:2-3절에서 “이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가 일어나 예루살렘에 있던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건축하기 시작하매”

 

우리가 이미 아는대로 성전공사의 중단은 페르샤 중앙정부의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면 성전공사를 재개하기위해서도 여깃 페르샤 중앙정부의 허락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의 권면을 받은 총독과 대제사장이 일어나 페르샤 중앙정부의 허락도 없이 성전공사를 재개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시리아 총독 닷드내하고 그 서기관인 스달보스내가 여러 관리들과 함께 성전재건이 바벨론유민들의 반란과 관계가 있는지를 살피러 옵니다. 사실 다민족국가인 상황에서 바벨론인들의 반란은 페르샤에 매우 큰 골칫거리입니다. 바벨론은 그 당시 가장 강력한 민족입니다. 바벨론이란 말은 사실 로마란 말처럼 그 당시 문명의 총본산이었고 정통성의 근원이었습니다. 그러니 바벨론의 반란은 심각한 근심거리였습니다.

 

때마침 유대에서 중앙정부의 허락을 받지도 않고 마음대로 성전공사를 재개한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이들 유대인들은 무려 16년간을 성전공사를 중단한 채로 생활했는데 이들은 나중에는 성전공사를 재개해야 겠다는 생각조차도 잊은 듯이 자기들끼리 아무런 문제의식없이 잘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짓지 않고 자기들이 그 돈을 사용하니까 자기들은 사치스럽게 치장한 집에서 살고 오히려 하나님의 성전은 짓다가 말아서 점점 퇴락해갑니다.

 

그런데 무려 16년간이나 중단될 줄은 이들도 모르고 페르샤 중앙정부도 모르고 여하튼 그랬을 겁니다. 그리고 중앙정부의 허락없이 마음대로 성전을 짓는데 5:3절에 보면 “누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 성전을 건축하고 이 성곽을 마치게 하였느냐”

 

지으려고 마음먹자 금방 지을 수 있는 문제인데도 아무도 이 성전을 다시 지으려고 하지 않았다는 의심이 듭니다. 성전공사가 재개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조사하라는 명령을 받고 나와보니까 벌서 ‘마치게 하였느냐’의 상태입니다.

 

원래 성전을 다시 지으려면 왕의 허락이 있어야될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막상 자기들끼리 종교적인 열정으로 스스로 공사를 재개하자 번개처럼 성전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게 됩니다. 그러니 건축하고 이 성곽을 마치게 하였느냐는 말이 나오지요.

 

여기 본문의 성곽은 예루살렘 성벽을 말하는게 아니고 성전의 뜰을 둘러싼 담에 연하여 있는 행각. 회랑, 복도를 말하는 겁니다. 이 정도로 공사가 쉬웠다는 겁니다. 공사를 마음대로 재개했다는 놀라운 소식을 듣고 조사하러 가는 사이에 벌써 성전공사가 거의 끝나간다는 겁니다.

 

이처럼 쉬운 공사를 무려 16년간이나 중단한 것은 정말이지 이상합니다. 그래서 열정도 세월의 흐름에 따라 식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정황상 공사가 중단되고 주변 사마리아인이나 중앙의 페르샤 정부나 유대인들마저 성전공사의 재개에는 신경을 쓰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래서 짓다 만 성전은 비바람에 점점 퇴락해 갔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렇게 쉽게 공사가 재개될 수 있었다면 진작 공사를 재개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겁니다. 그러나 한번 돈맛을 알게된 유대인들은 더 이상 성전재건에 돈을 쓰기를 싫어한 것입니다.

 

굳이 성전이 없어도 문제가 없었다는 겁니다. 제사를 지내지 않으니까. 이제 유대인들, 사로잡혔던 자들의 후손들에게 성전은 문제가 아닙니다. 관심 대상이 아닙니다. 이들은 먹고 사는 문제로 골몰하고 정신없이 살아가는 거지 성전공사를 재개한다는 생각 자체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무려 16년동안이나 중단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겁니다. 이제 백성들의 열정과 신앙심이 다 식어 버렸습니다. 이때에 학개와 스가랴의 외침이 있었던 것입니다.

 

공사가 처음 시작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중단이 되었고 중단되었다가 다시 재개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닷드내의 말처럼 성곽공사까지 거의 마칠 정도였다면 실제로 성전공사자체는 그렇게 힘들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다만 백성들의 신앙 열정이 식었기 때문에 그렇게나 오랫동안 성전이 방치되었던 겁니다.

 

5.하나님은 순종하는 자에게 지혜를 주신다

이 부분은 세 번째 부분하고 비슷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자 형통하게 된 것처럼 우리가 앞으로 이 세상의 삶에서 형통의 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말씀의 권면에 순종해야 합니다.

 

당연한 말입니다. 그런데 과정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여기에 성령의 인도하심이 있습니다. 성령께서 주신 지혜가 유대인들을 위기에 처한 백척간두의 위기상황에서 벗어날 단서를 줍니다.

 

시리아 총독인 닷드내는 유대인들이 정부의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성전공사를 재개한 사건을 반란과의 연루에 혐의를 두고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5:3부터에서 “누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 성전을 건축하고 이 성곽을 마치게 하였느냐 하기로 우리가 이 건축하는 자의 이름을 아뢰었으나 하나님이 유다장로들을 돌보셨으므로 그들이 능히 공사를 막지 못하고 이 일을 다리오에게 아뢰고 그 답장이 오기를 기라렸더라”

 

뭐 단순한 문장 같아서 이게 왜 하나님이 주신 지혜인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하, 맞습니다. 그런데 원문을 참조하여 다시 해석하면 닷드내가 물은 것은 공사감독의 이름이 아닙니다. 이 성전을 그러니까 당국의 명령에 의해 중지된 공사의 재건을 선동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는 겁니다.

 

다르게 말하면 중앙정부의 명령에 반기를 들도록 주동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은 겁니다. 아마 그들의 이름을 파악하고 그들을 반란주동자로 처벌하려고 한 모양입니다.

 

그런데 유다의 장로들은 이런 기미를 바로 알아차리고 성전을 다시 짓자고 선동한 사람이 아니라 공사를 감독하는 공사감독의 이름을 아뢴겁니다. 그러니까 이들 공사감독은 도저히 반란을 주동할 정도의 위치에 있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에 이 이름을 알려줘도 전혀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가령 선지자나 총독이 이를 주도했다고 하면 당연히 저들은 종교적 광신으로 반란을 선동했다고 여길 겁니다. 총독이 이를 주도했다고 한다면 저들은 정치적 독립을 모의한 것으로 생각할 겁니다. 그러면 정말이지 문제가 커질 수 있습니다. 저들이 물어본대로 바벨론 반란과 연계가 있어 보입니다. 피지배민족들이 서로 연계해서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가봐도 깜이 안되는 인물, 단순히 공사현장의 기술 감독 이름을 댄 겁니다.

 

혹 감독님을 기분 나쁘게 할려고 한게 아닙니다. 영화감독이고 공사감독이지 반란을 기획하고 감독하는 이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왕족의 후예로 총독이나, 제사장이나 선지자로서 민중의 지도자나, 장로회 의장이나 족장협의회 회장 정도가 관련되었다면 절대로 무사할 수 없습니다. 사안이 커집니다. 보고자의 입장에서도 이런 큰 문제는 없는 것으로 여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지혜를 주셔서 유대 장로들은 아주 지혜로운 대답을 한 겁니다.

 

그래서 닷드내와 페르샤의 관리들은 도저히 독자적으로 이를 덮을 것이지 아니면 반란혐의로 확대할 것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고 그래서 왕에게 이를 보고하고 그의 결정을 구하게 된 겁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이 성전재건이 원래 고레스의 조서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보고합니다. 너네들의 초대왕이 명령하여 짓게 된 것이라는 말을 한 겁니다. 선왕의 명령을 후왕이 함부로 바꿀 수가 없습니다. 그게 가능했다면 왕의 명령은 수시로 바뀌게 되고 그러면 그 다음부터는 왕의 명령이 법령의 효력을 가지지 못하게 될 겁니다.

 

사람의 마음은 시시때때로 바뀌는 것인데 왕의 변덕으로 일시적으로 내린 명령에 다 순종하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왕이 내린 조서는 법령의 효력을 가지게 후왕들도 이를 지키는 것으로 합의가 된 겁니다. 왕의 권위를 위해서 그러니까 왕의 직 자체의 권위를 위해서 선왕의 명령을 후왕들도 존중하도록 한 겁니다.

 

잘 살펴보면 고레스가 이 성전을 짓도록 하라고 한 명령에 대해서는 말하면서 아하수에로 왕이 성전공사를 중단하도록 한 일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닷드내는 그런 조서가 실제로 있었는지 조사해 달라고 요청한 겁니다.

 

사실 우리가 시도도 하지 않는다면 현상이 바뀌지 않을겁니다. 뭣 때문에 안되고 뭣 때문에 힘들고 하는 것은 다 핑계입니다. 물론 그들의 핑계가 다 거짓은 아닙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을 간과합니다. 고의로 간과합니다. 왜냐면 하기 싫으니까?

 

하나님을 믿고 그의 명령에 순종하기만 하면 그가 다 하실 것이라는 철두철미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래서 그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행동으로 옮긴다면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면 일단 행동부터 해야 합니다.

 

미리 알아서 중단하고 미리 알아서 겁먹고 쭈그러진다는 것, 전문 용어로 알아서 긴다고 하는 것은 사실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별로 크지 않다는 것을 자인하는 꼴입니다. 하나님은 불가능이 없으시다고 해 놓고 이래서 안돼 저래서 안돼라고 스스로 한계를 그었기 때문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게 된 것입니다.

 

믿음이야 말로 우리 성도에게 주어지는 가장 최고의 능력입니다. 왜냐면 믿음 앞에 불가능이 없기 때문입니다. 회의하고 의심하고 재고하고 이런 것들은 과학자나 세상사람에게 필요한 것이지 성도에게 필요한, 요구되어지는 행동이 아닙니다. 우리 성도는 하나님의 명령이야말로 절대의 진리이며 우리 행동의 원천이라고 믿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6. 그가 역사하실 기회를 드려라

우리가 하나님에게 하는 기도를 잘 생각해보면 기도만 하고 행동하지 않았던 적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렇게 해 주십시오 라고 해 놓고서는 정작 자신은 그 일이 이루어지도록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뭐 알미니안처럼 우리의 노력과 하나님의 역사가 맞물려야 구원을 이룬다는 그런 말하고는 다릅니다. 이런거 한번 생각해 볼 일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에게 십억만 주세요. 그럼 그걸 가지고 제가 무엇무엇을 하겠습니다란 기도를 했다고 합시다. 아무것도 안하고 기도만하고 방안에 앉아 있다면 그래서 눈뜨면 자리에 돈십억이 놓여져있기를 바란다면 될까요 안될까요?

 

음 물론 그건 될 수도 있습니다. 제가 돈 좀달라고 기도하면서 좌광천을 걸으면서 기도했는데 문득 통장을 확인하고 싶어서 보니까 많은 돈이 들어와 있었어요. 이렇게 특별한 역사도 있지만 보통의 경우에 하나님은 인간을 통하여 역사하시고 그렇게 역사하실 기회를 우리가 드려야 합니다.

 

학생들의 경우에 열심히 공부하고 그러면서 좋은 대학에 합격할 수 있기를 기도하는 거지 일년 열두달 교회에 모여서 기도만 하는데 언제 하나님이 우리의 머리에 지식을 넣어 주실 수가 있을까요?

 

물론 하나님은 충분히 자기의 일을 기기묘묘한 방법으로도 이루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많은 부분은 하나님 자신이 만든 자연적인 법칙대로 순리대로 이루십니다. 대학가려면 공부를 해야 하고 풍년을 맞으려면 논에 모를 심어야 하고 과실을 따려면 나무에 물과 비료와 약을 쳐야 합니다.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떤 이가 큰 부자가 되기를 바라고 계속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회사에 다닙니다. 뭔가 연구하는 곳이 아니라 그냥 사무를 보는 곳입니다. 월급만 받아서는 부자가 될 수가 없습니다. 사무만 보고서 부자가 된다면 뇌물이나 횡령이 아니면 어려운 구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사람이 사업을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사업을 하기를 두려워했습니다. 또 사업할 재목도 안되었습니다. 혹시나 망하면 있는 돈도 없어지는데... 이게 이 사람의 변입니다. 하나님이 이 사람을 그 상태에서 부자로 만들어 주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로또에 주식에 뭐 방법은 많지만 보통의 경우에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역사하시지는 않습니다. 보통의 경우에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이 만드신 방법을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니까 성전을 완성하려면 공사장에서 직접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지금은 나라에서 금하는 일을 하면 안되지 않나요? 당연하지요. 그러나 나라에서 중지를 시켰지만 세월도 오래 지났고 왕도 새로이 등극했으므로 이전과는 다른 상황이 될 수도 있다는 거지요.

 

하나님이 이제 일어나서 나의 전을 지으라고 명령하셨으므로 뭔가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이 있을 것이라고 믿고 공사를 시작해 보는 겁니다. 지금 반란이 일어나고 그래서 잘못하면 반란에 연루되었다는 누명을 뒤집어 쓸 위험도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일체의 모든 과정을 주님께 맡기고 그가 하신 성전을 재건하라는 명령을 지켜 행하는 겁니다.

 

직접 일이 시작되기만 하면 뭔가 하나님의 계획하신 바가 있을 겁니다. 그건 우리의 적은 지혜를 넘어서는 것이므로 그가 시키시는 대로 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 머리로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나요? 그러면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세요. 그의 지혜는 인생이 도저히 따를 수가 없을 정도로 아득히 높고 깊습니다.

 

우리 속담에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일을 시작하면 이미 하나님의 명령이 이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일을 시작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나머지를 다하실 겁니다. 물론 그가 시키시는 일을 하는 겁니다. 그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가발전으로 어떤 일을 시작하면 그건 하나님이 책임지시지 않습니다.

 

닷드내의 상소를 받은 다리오왕은 유대인들의 변론대로 고레스가 내린 조서를 찾기 시작합니다. ‘무조건 다 죽여’가 아니라 그 말이 맞는지 실제로 고레스가 그런 조서를 내렸는지 찾기 시작합니다.

 

처음 관리들은 고레스가 유대인에게 내린 조서를 찾기위해 바벨론 궁의 보물창고부터 뒤지기 시작합니다. 페르샤의 왕들은 계절별로 각기 다른 궁에서 보냈습니다. 악메다 궁도 있고 수산 궁도 있고 바벨론 궁도 있고.

 

유대인들이 바벨론에게 멸망했고 또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고레스가 왕이 된지 첫해에 명령을 내렸으므로 당연히 바벨론궁에 있을거라고 생각해서 그 조서를 찾기 시작했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보통은 “임금님 찾지 못했습니다. 아마 유대인들이 거짓말을 한 것 같습니다”대부분의 관리들이 하는 일은 이와 같습니다. 왜냐면 그걸 찾아도 못 찾아도 관리들의 삶과는 전혀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걸 찾으면 돈 천냥에 높은 벼슬을 준다고 하는게 아닙니다. 임금님이 총애하는 누군가의 일도 아닙니다. 중앙정부에서 본다면 먼 변방의 소수의 포로의 후손들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그러니 귀찮게 뒤질 필요없이 ‘없습니다’ 라거나 ‘못 찾았습니다, 원래 없었던게 아닐까요?’ 이렇게 말하는게 더 빠른 해결책입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페르샤의 관리들은 그 조서, 고레스가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라는 명령을 담은 조서를 바벨론궁의 보물창고에서 찾지 못하자 멀리 떨어진 지역인 악메다궁의 보물창고에서 찾았답니다.

 

정말이지 굉장한 일입니다. 그 조서에는 진짜 고레스의 명령이 유대인들의 말처럼 적혀 있습니다. 성전을 건축하고 공사비와 제물비용을 제공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조서를 본 다리오 왕은 성전재건에 대한 허락뿐만 아니라 여기에 소용되는 재물을 줄 것을 명합니다. 게다가 성전에 제사를 지내고 또 성전을 유지하는데 들어가는 재물도 철저하게 줄 것을 명합니다.

 

보통 임금님이 명령을 내리면 처음에는 그래도 뭔가 좀 돌아가는 것 같다가도 임금님의 관심이 곧 식어버리면 없던 일이 되는게 한두번이 아닙니다. 당장 성전건축 중단 명령이 흐지부지 된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안하는것도 이런데 하는 것 특별히 뭔가 해야 하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왕의 명령을 준행하도록 하는 특별 명령까지 첨부된 명령서를 내립니다. 사실 다리오 왕은 아주 잔인한 사람입니다. 군대로 세계를 제패한 나라의 임금이 유순하고 부드럽기를 바란다면 말이 안됩니다.

 

그래서 어쩌면 유대인들은 다리오왕의 조서가 내릴 때까지 악몽에 시달리며 전전긍긍했을지도 모릅니다. 괜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전공사를 시작했다고 후회했을지도 모릅니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되도록 몰고 간 하나님과 선지자들의 처사에 실망과 분노를 발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다리오왕의 조서는 유대인들에게 가장 유리하게 내려왔습니다. 유대인들의 성전 재건을 막지 말라고 합니다. 유다의 총독과 장로들 그리고 유대인들이 단독으로 건축하도록 일체의 모든 간섭을 금합니다. 그리고 공사비를 왕실에서 부담하라고 명령합니다. 게다가 그 경비를 ‘끊임없이’주라고 명합니다.

 

게다가 제사 드릴 제물도 제공하도록 합니다. 6:9에 보면 “예루살렘 제사장의 요구대로 어김없이 날마다 주어 ”제사하게 합니다.

 

그리고 또 있습니다. 혹 이방인 관리들이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고 그 제사장과 제사 자체를 무시할까 봐서 소흘히 하지 않도록 하나님에 대한 명칭을 공식 문서인 왕의 조서에 ’하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늘의 하나님은 다신론자인 페르샤에서 최고의 신을 일컫는 말입니다. 어느 지역만을 다스리는 지역신, 어느 특정 분야만을 관장하는 무슨 바다의 신이니 비와 번개의 신이니 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을 최고의 신으로 불렀다는 겁니다. 온 천하를 다스리는 하늘의 하나님으로 언급합니다.

 

이런 식의 명령은 페르샤 모든 관리들이 하나님의 성전에 관련된 공사를 최대한 우선할 수 있도록 합니다. 그리고 왕이 중요하게 여기는 관심사라는 것을 내외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앞으로 페르샤 정부는 결코 예루살렘 성전과 제사장들의 제사에 대해 시비를 걸거나 심지어 뇌물을 걸지도 못하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왕의 조서를 변개하는 이에게 ”그의 집에서 들보를 빼내고 그를 그 위에 매어 달게 하고 그의 집은 이로 말미암아 거름더미가 되게 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왕은 사마리안인들 그리고 사마리아의 관리들이 이전에 예루살렘 성전재건을 방해한 것을 염두에 두고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신경을 씁니다. 게다가 혹 자기 다음대의 왕들이 이 조서를 무시하여 화를 당할까 싶어서 왕들이라도 이 명령을 변조하지 못하도록 ”그 곳에 이름을 두신 하나님이 그들을 멸하시기를 원하노라“란 말까지 덧붙입니다. 그리고 이런 명령을 신속히 행하라는 말로 조서를 끝맺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페르샤인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의 왕이 이렇게나 하나님과 그 제사장들에게 은혜를 베푼다는건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자, 이제 우리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본문은 단순한 옛 역사의 기술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와 그의 사랑을 느낍니다. 그가 인간의 욕망들 배후에 세상의 역사의 배후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역사하심을 느낍니다. 그의 섭리를 배웁니다.

 

아득한 엣날, 먼 곳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의 역사하심을 믿는다면 그때에 일어났던 하나님의 섭리는 지금도 변함없이 우리위에 거하실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항상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성숙되지 못한 육체의 눈만을 소중히 여기는 이들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참 미묘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느낄 수 있습니다. 바람처럼 기운처럼 우리를 둘러싸고 어루만져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의 숨결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에스라서는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 아무리 위급한 상황, 불리한 여건 가운데서도 자기의 명령에 순종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이들에 대한 도우심과 보호와 승리의 기록입니다. 그리고 그런 역사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임을 증명하는 문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모두가 성령의 의지로 기록된 것으로 읽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지를 천명합니다. 내 말에 순종하고 나를 믿고 나가는 이들에게 나의 보호와 인도가 있을 것이며 반드시 승리하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인 것입니다.

 

믿고 순종하여 승리하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2020년 5월 31일 주일 설교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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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누리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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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페르시아의 위엄 있는 왕이, 변방의 유대를 위하여 마음 쓰는 모습이 한 편의 예술 작품 같은 이야기 입니다. 게다가 그 나라의 공무원들이 애써가면서 오래 전 문서(고레스 왕의 이야기)를 찾아낸 것도 신기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잊혀지지 않고, 때로는 세월을 넘어서 그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도 듭니다. 목사님께서는 시작이 반임을 언급하셨는데, 제가 조금 덧붙여 본다면 시작하고 좀처럼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것이 있었는데, 세월이 흘러서 다시 진행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인생에는 1막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죠. 2막도 있고, 심지어 3막이 열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초점을 오늘에 맞추고 할 수 있는 일들에 집중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마음이 울적하고 공허하여 괴롭다면, 당장 몸을 움직여 30분, 그것도 힘들다면 10분이라도 꾸준히 산책하는 연습이 중요합니다. 사람은 머리만 계속 쓰다보면 병이 난다고들 하죠.

 

괴로운 현실, 인생의 고단함, 맞습니다. 살아가기는 충분히 힘이 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기도를 하고, 주어진 일에 끝까지 헌신할 수 있기를 응원합니다. 그 결과가 16년 후에 나타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노력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 살아간 긴 세월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나는 안 돼 라고 자꾸 파고드는 습관과 과감히 작별합시다. 결단은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오늘 자신의 인생을 아끼며, 세월을 소중하게 여기기를 응원합니다. / 2020. 06. 덧붙임 시북 (허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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