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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능력을 믿습니까?

에스라8:21-31

 

우리 성도가 항상 하는 것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예배? 좋습니다. 당연히 해야하는 겁니다. 성경을 읽는다? 당연하지요. 읽어야 합니다. 착한 일? 이것도 당연한 겁니다. 한 개가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해야 하는 가장 간단한 것이지만 자꾸 잊어버리고 쉬는 것이 있지요? 기도입니다.

 

그래요, 기도는 우리 성도들이 해야 하는 그리고 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하지만 가장 강력한 수단입니다. 무슨 수단입니까?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수단.

 

이 땅의 우리와 하늘의 하나님이 서로 교통할 수 있는 가장 오랜 수단입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자주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 기도가 습관적으로 드리는 건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기도를 시작하자마자 냅다 달라고만 하는건 기도가 아닙니다. 그건 아이의 철없는 투정이지 하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물론 제가 다 알지는 못합니다. 그런 기도도 들으시고 역사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므로 우리가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거니까요.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아주 간단한 예화를 하나 들겠습니다. 너무 간단해서 ‘에게~ 이게 예화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묘하게 찔립니다.

나라에 심하게 가뭄이 들었습니다. 모두가 비가 오지 않아서 힘들어 합니다. 아이가 아빠에게 말합니다.

 

“아빠, 하나님은 성도의 기도를 다 들어 주신다고 했잖아요?”

"그렇지."

"그런데 비를 내려 달라고 왜 기도하지 않나요? 기도하면 하나님이 비를 내려 주실거예요."

"하하, 좋다. 그래 우리 비를 내려 달라고 기도하자."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비를 내려달라고 기도합니다. 아들도 같이 기도하고 아멘이라고 화답합니다. 기도가 끝이 나고 아버지는 외출을 위해서 집을 나섭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들이 아버지를 부릅니다.

“아빠, 비를 달라고 기도해놓고 왜 우산을 가지고 가지 않는 거지요?”

“이 녀석아, 하늘을 봐라. 저렇게 햇빛이 쨍쨍 내리 쬐는데 무슨 비”

“아니, 아빠. 우리 기도했잖아요. 비를 내려달라고. 그리고 기도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들어 주신다면서요?”

 

정말이지 말이 안되는 이야기입니까? 그래요, 역시 애가 철이 없지요? 하하. 그런데 혹시 우리가 기도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태도와 너무 비슷하지 않습니까? 기도는 하지만 그 기도가 이루어 질거라는 확신을 가지지 못하지는 않나요?

 

1.아하와 강가에서 금식을 선포하다

21절에 보면 “그 때에 내가 아하와 강 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 아이와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였으니”

 

지금 에스라는 아하와 강가에서 유대의 예루살렘으로 가는 대 장정을 시작하려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갈 수 있는 길로 간다면 무려 1500Km에 달하는 길입니다. 실제로 에스라는 이 길을 엄청난 금은보화와 9000명의 사람들과 함께 넉달에 걸쳐서 걸어서 갔습니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천리길, 약 400km인걸 생각해보세요. 거의 네배에 달합니다. 우리는 길가다가 호랑이와 산전들을 많이 만났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그 동네는 그정도가 아닙니다. 유목민들은 거의 반 산적이라고 보면 됩니다. 먹을게 없을때는 이웃의 것을 죽이고 빼앗고 하는 일은 여사로 합니다.

 

그런데 그런 끔찍하게 위험한 길을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가야합니다.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아호와 강가는 유브라데스 강의 지류인 강인데 그 강가는 유대인 포로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닙볼이라는 곳에서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그래야 유대인 포로들이 모이기 쉽기 때문입니다.

 

아하와 강가에서 예루살렘까지의 직선 거리는 900km입니다. 그러나 이 사이에 있는 아라비아 사막을 돌파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보통의 여행자들은 유브라데스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하란위쪽까지 가서 다시 가나안 옆의 왕의 대로라고 하는 국제 무역로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그러면 거리가 600km가 더 늘어납니다.

 

사람이 보통 하루에 3,40km를 걷는다고 보면 이 길의 여정은 4,50일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런데 에스라와 유대인 포로의 후손들은 무려 넉달에 걸쳐서 이동합니다. 틀림없이 여정에 엄청난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말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무사히 도착했습니다’로 끝이 납니다. 그 사이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손길이 그들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군대의 행군이 아닙니다. 아이와 노인과 여자가 포함된 집단입니다. 게다가 어마어마한 금은보화를 가지고 가는 중입니다. 더 황당한 것은 이들을 호위할 군대가 없다는 것입니다. 황당하지요?

 

요즘처럼 치안이 확보된 세상이 아닙니다. 사실 외국에 나가면 많은 나라에서 치안이 불안합니다. 그래서 엄청난 금은보화를 가지고 자체 무력이 없이 여행을 하다가는 큰일이 날것은 너무나 뻔합니다. 십만냥이 넘는 황금과 수십만냥의 은을 가지고 가는 길입니다. 무섭고 두렵고 떨립니다.

 

당연하게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먼길을 떠나기 전에 먼저 금식을 선포합니다.

 

2.믿음은 증명되어야 한다

에스라가 포로의 후손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가가기 전에 먼저 금식을 선포한 것은 사실은 걱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걱정이냐면 안전에 대한 걱정입니다. 이 많은 사람들이 과연 안전하게 예루살렘에 도착할 수 있을까하는 걱정.

 

이 엄청난 보물을 노리고 세상의 모든 도적떼들 강도들 그리고 거의 반 강도떼인 유목민 부족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는 걱정. 페르샤 제국은 아직까지 안정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애굽이 반란을 일으키고 있는 중입니다. 얼마전에는 바벨론유민들의 반란이 있었고 그리스인들도 끊임없이 반란을 획책합니다.

 

127개의 민족이 계속해서 반란을 일으키고 독립을 꿈꾸고...사막과 건조한 고원지대에 바위계곡너머에 도적들이 들끓습니다. 이런 길을 간다고요? 우리 하나님의 도우심이 그의 보호하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사실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할 때 아직 정주하지 못하고 목적지까지 이동할 때가 가장 취약하고 위험합니다. 자기를 도울이가 없고 모두가 적들이고 이방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의 원수들은 이때를 노리고 유대인들을 몰살시키려 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지금 페르샤의 ‘강건너편’은 애굽인의 반란 때문에 뒤숭숭합니다. 그러므로 결코 평화의 시기가 아닙니다. 그러니 정말이지 기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습니다. 그래서 먼저 에스라는 유대인 포로귀환자들에게 금식을 선포한 것입니다.

 

사실 엄청난 보물을 예루살렘까지 운반하는 일은 정말이지 위험한 일입니다. 힘없는 자가 보물을 가진 것이 죄라고 포로들이 그냥 빈손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도 인신매매나 대적들의 복수에 관한 걱정이 생길텐데 힘없는 자들이 보물까지 가지고 있으니 걱정은 당연한 일입니다.

 

22절에 “이는 우리가 전에 왕에게 아뢰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내리신다 하였으므로 길에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보병과 마병을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 하였음이라”

 

에스라는 왕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를 믿고 구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보호하신다고 자랑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하늘의 하나님이시므로 어디에 있든지 그가 보호하신다고 장담했습니다. 그는 유대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온 천지의 하나님이시므로 닙볼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도 여전히 그의 영향아래 있어서 보호받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놓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이 위험할 수도 있으니 보호할 군대를 붙여 주세요’라고 부탁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우리가 믿는다면 그 믿음에는 댓가가 따르는 법입니다. 말로만 믿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을 증거하지 못한다면 그게 바로 사기입니다.

 

“믿어라”

“믿습니다” 말은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을 증명하는 일은 절대로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에스라와 포로귀환민들은 전능의 하나님이 자기를 믿기 위해 기득권을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그 정성과 믿음을 보시고 반드시 보호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왕에게 그 믿음을 증명해야 합니다.

 

걱정이 안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기도하는 겁니다. 그것도 그냥 기도가 아니라 금식을 선포한 겁니다. 비상한 시기에 비상한 기도가 필요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만일 왕 앞에서 실컷 전능하신 하나님을 자랑하고는 “임금님, 우리들이 이 보물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가니까 우리를 보호해 줄 군대를 붙여 주십시오” 이렇게 말한다면 그 믿음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자랑은 거짓말이 되는 겁니다.

 

아닥사스다는 에스라에게 내린 조서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일러 ‘하늘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왜 그렇게 불렀겠습니까? 에스라가, 왕의 총애를 받는 에스라가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며 전능한지에 대해서 말했기 때문이고 또 실제로 그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 직간접적으로 보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은 그래놓고 실제로는 말한 사람이 그 전능하신 하나님의 보호를 믿지 않는다면 얼마나 웃기는 일일까요? 실컷 비 오도록 기도해 놓고 비 올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우산을 가지고 가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속 중심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세밀하게 우리의 중심 깊은 곳까지 살피시므로 그 앞에서 가리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리려고 생각하지 말고 그냥 속 깊은 곳까지 순도 100%로 믿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동자 앞에서 가식의 탈은 통하지 않습니다.

 

3.기도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23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이를 위하여 금식하며 우리 하나님께 간구하였더니 그의 응낙하심을 입었느니라”는 말에서 우리는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하나님이 기도에 응낙하셨는지를 모릅니다. 솔직히 너무 궁금하지 않나요?

 

그런데 오늘 본문을 잘 보면 전후에 관한 설명이 없습니다. 그냥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고 되어있고 바로 제사장과 레위인들 각각 12명을 우두머리로 세워 금은을 배정해서 운반하도록 하는 기사가 나옵니다.

 

환상 중에 그의 계시가 있었다거나 꿈으로 응답하셨다거나 아니면 말씀 가운데, 내 마음에 강렬한 무언가가 있었다거나 하는 기록은 없습니다. 다만 응답받고 난 다음의 기사들만 나옵니다.

 

기도했고 응낙 받았고 이제는 먼 길을 떠나기 위한 행정절차를 준행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응답의 방법은 우리가 정하지 못합니다. 그의 역사를 제한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기도가 응답받았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그러면 그 확신이 진짜냐 가짜냐? 그건 우리의 기도가 이루어지는지 아닌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알 수 있다기 보다는 증명할 수 있다고 해야 되지요.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더 복되고 귀한 겁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보는 것에 가장 큰 중점을 두었습니다. 들었을 때는 혹 우리가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거나 환청이라고 생각하며 의심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귀에만 이렇게 저렇게 들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으로 보았을때는 대부분은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감각 중에서도 시각이 제일 으뜸입니다. 오죽했으면 우리 속담에 ‘몸이 천냥이라면 눈이 구백냥’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주님도 우리에게 눈을 주의할 것을 신신 당부하셨습니다. 믿음은 바로 이런 겁니다. 그렇게나 소중한 시각으로 보지 못해도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부릅니다. 보고 믿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보지 못하고 듣고서 믿는 것은 정말이지 대단한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듣지도 못하고 믿는 것은 더 대단한 겁니다. 그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읽고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믿는 것은 더 없이 귀한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네 마음입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아니 보여도 하나님의 말씀만을 굳게 잡고 나아간다면 그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일을 차곡차곡하고 계심을 나중에 나중에 알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되는 것이지요.

 

물론 객관적으로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지 아닌지를 우리가 반드시 알게 됩니다. 왜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리냐면 자가발전이 매우 많기 때문입니다. 혼자서 흥분해서 마치 성령의 은사가 임한 것처럼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좀 죄송스럽지만 목소리를 깔고 소리만 냅다 지른다고 성령 충만이 아닙니다. 세밀한 가운데서 만져주심이 있고요 우리네 마음이 감동 받아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합니다.

 

이제껏 보지 못했던 것에 눈뜨게 됩니다. 비 갠 뒤에 운동장 한켠에서 맑게 졸졸 흐르는 아주 작디 작은 실개울에 햇빛이 영롱하게 반사되는 것이 전혀 새롭게 다가옵니다. 이런 고요함과 깨끗함이라니! 햇빛을 투과해서 파랗게 연녹색의 이파리들이 어찌 그리 평화스러운지요.

 

우리의 깊은 곳에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이 깨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네가 가지고 있는 모든 영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다만 그가 만져주시기전에는 봉인되어있습니다. 잠들어 있습니다. 이제 성령의 만져주심으로 깨어나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물들을 보고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에스라는 기도 응낙의 방식에 대해서는 적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기도 응답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기도 응답이라면 유대인들이 안전하게 예루살렘에 도착하게 될 것이고 그렇지 않고 에스라가 자가발전으로 혼자서 착각한 것이라면 가는 여정이 순탄치 못할 것입니다.

 

4.이에 예루살렘에 이르러

그가 진실로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사실은 그들이 무사히 예루살렘에 도착했다는 객관적인 사실로 증명되어 집니다.

 

원래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이 평안하게 정상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면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겁니다. 그들은 빈손으로 간 게 아니라 아닥사스다 왕과 7명의 귀족대표가 준 엄청난 재물을 가지고 갑니다. 26절에 보니까 은이 육백오십달란트고 은그릇으로 백달란트 금이 백달란트 그리고 금잔도 있고 보통 재물이 아닙니다.

 

일 달란트는 34kg입니다. 우리네식으로 하면 천냥입니까? 황금이 무려 십만냥? 무지막지한 재물입니다. 옛날 기술이 별로 없던 시절의 금은은 더 채취가 어려웠습니다. 유다가 망하기 전에 바벨론에 바친 조공이 겨우 금 한달란트에 불과했습니다.

 

나아만이 엘리사에게 가지고 간 예물이 은 십달란트지요? 당시에 이런 어마어마한 재물을 가지고 가는게 소문이 난다면 그 세계의 온갖 도적과 강도떼들 절반 강도떼들인 유목 부족들이 쉴새없이 쳐들어 올겁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새롭게 공동체를 공고히 하러 가는 것에 앙심을 품고 있는 대적들도 많이 있습니다. 비록 나라는 페르샤에게 굴복해 있더라도 그 민족들은 자치를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대적들은 충분히 있습니다.

 

사마리아도 암몬도 모압도 아말렉도 이스라엘에 망한 가나안 족속들도 원한을 품고 있습니다. 심지어 이스라엘과 원수지간이었던 앗수르나 바벨론도 유대인의 원수입니다. 이런 대적들의 준동도 막아야 하지만 군대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실제로 에스라와 그 일행들은 무려 넉달에 걸쳐서 아하와 강가에서 예루살렘까지 이동한 겁니다. 31절에 보니까 “첫째 달 십이 일에 우리가 아하와 강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갈새 우리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도우사 대적과 길에 매복한 자의 손에서 건지신지라”

 

이런 말이 있는걸 보면 절대로 평안한 여정이 아니었습니다. 길에 매복해서 뭐하겠습니까? 덮쳐서 죽이고 빼앗으려는 겁니다. 그런 모든 악조건을 이기고 무려 넉달만에 예루살렘에 안전하게 도착한 겁니다.

 

하나님이 에스라와 사람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낙하셨으므로 저들은 군대가 없어도 자기들을 보호하는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사실 우리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의 영이 먼저 알아채고 그가 허락하심을 기뻐합니다.

 

오늘날에도 거액을 운반하는 일은 매우 어렵고 위험합니다. 종종 사고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 옛날에 그 먼거리를 가면서 그 엄청난 재물을 가지고 가는데 안전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군대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놓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믿는다고 말해놓고 정작 실제로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왕에게 군대를 요청한다는건 정말이지 부끄럽고 황당하겠지요?

 

사실 당시에 페르샤의 왕은 에스라에게 군대를 내어줄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면 애굽에서 반란이 일어나서 모든 군대를 이끌고 애굽의 반란을 진압하러 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당시는 평화시가 아니라 혼돈의 시대요 반란의 시대요 그래서 각지에 도적이 들끓고 각 민족들의 분위기가 흉흉한 시절입니다.

 

에스라가 표면적으로는 예루살렘에 거하는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잘 지내는지 감독하러 간 것이지만 실제로는 강서편 지역의 반란 기미를 파악하고 그 지역을 안정화 시키려고 간 겁니다. 아닥사스다도 굉장한 왕입니다.

 

그래도 어느 정도 군대를 붙여줘야 강서편 지역을 안정 시킬텐데 군대를 전혀 주지 않고 대신에 재물만 잔뜩 안겨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게 합니다. 총애하는 신하라고 하면서 에스라의 하나님을 너무 믿습니다. 세상에 군대를 주지 않다니!

 

결론적으로 아닥사스다의 도박은 성공했습니다. 군대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었던 그의 신뢰가 옳은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실제로 애굽의 반란은 진압이 되었고 페르샤는 계속해서 번성했습니다.

 

복잡다단한 세상에서 모두를 만족시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솔직히 이 사람 저사람 신경쓰기가 어렵습니다. 여건도 안되고 힘도 없고 돈도 없어요.

 

그러므로 하나님 한분에게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이 사람 저사람 찾아가면서 잘 보이려 애쓰지 말고 하나님을 흡족하게 하는데 애쓰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모든 것을 해결해 주십니다.

 

왜냐면 그가 결국 우리 모두를 만드신 창조주이기 때문이며 그가 지금도 이 세상을 움직이시는 대주재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는 이제껏 수많은 기도를 해왔습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응답받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왜 응답받는 기도와 응답받지 못하는 기도로 나뉘는 걸까요? 무엇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요소가 되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을 근거로 보면 어렴풋이 그 기준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정욕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기도에 하나님은 응답하셨습니다.

 

주께서도 정욕대로 구하면 들어 주시지 않는다고 하셨지요.

 

이방 나라의 왕에게 하늘의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야 합니다. 아직 신앙을 가지지 못한 이들에게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시고 강대한 분이심을 나타내 보이려면 하나님이 역사하셔야 합니다.

 

군대도 없이 오로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만으로 넉달간의 여정을 무사히 이뤄내는 기적은 에스라를 위한 것도 아니고 왕을 위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전능하심과 그를 의지하는 자에게 사랑을 베푸시는 자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스스로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역사하셨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우리의 정욕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면 응답받지 못할 이유가 없겠지요?

 

두 번째는 의심하지 않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인고로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인간은 한순간 분위기에 취해서 우리도 믿지 못할 정도의 헌신을 보이기도 하지만 언제 그랬더냐는 듯이 순식간에 그 열정이 식어 버립니다. 그래서 열정이 식고 난 다음에는 후회하고 의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에게 기도할 때 믿고 의심하지 않아야 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적인 믿음, 약속에 대한 전적 신뢰를 보여야 만이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에스라는 보물과 백성을 호위할 군대를 모집하려고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여정을 앞두고 아하와 강가에 모여 먼저 하나님께 자기들을 보호해 주실 것을 기도했습니다. 그리고는 응낙받았다고 믿고 필요한 조치들을 해나갔습니다.

 

의심하지 않는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모든 일에 앞서서 기도부터 시작하는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그러니까 기도를 제일로 치는 이들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겁니다.

 

에스라는 먼 4개월의 여정을 앞두고 민족 대이동을 앞두고 반란이 일어나고 도적떼가 창궐한 길을 가야하는 여정을 앞두고 제일 먼저 금식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응낙받았다고 합니다.

 

뭐 해보다가 안되어서 기도하는게 아니고 제일 먼저 기도부터 시작합니다. 누가 왔는지 밥은 어디서 먹어야 할지 금은 기명은 누가 옮길지 정해야 합니다. 아픈사람도 살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일에 앞서 기도를 시작합니다. 끼니때마다 필요한 밥 때문에 골치가 아프지요. 그래서 바로 금식을 선포합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비로소 해야 할 바를 시작하는 겁니다. 그런 기도를 더 잘 들어 주십니다.

 

우리는 왕왕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지혜로 해보려다가 안되면 기도합니다. 물론 기도를 들어주시고 아니고는 정해진게 아니라 하나님이 마음에 달렸습니다. 그래서 예외적인 경우도 당연히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본문에 의하면 이런 식으로 모든 일에 앞서서 기도부터 시작하는 이들의 기도를 기뻐하십니다.

 

마지막 네 번째의 기도는 행동이 뒤따르는 기도입니다. 기도만 하고 가만 기다리는게 아니라 기도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넉달간의 위험한 여정을 지켜주실 것을 간구했다면 그리고 응낙받았다면 저절로 몸이 이동할 것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한 걸음을 떼기 시작해야 합니다.

 

천리길도 한걸음부터니까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안전을 지켜달라고 기도해놓고 움직이지 않으면 뭔가 반란이 진압되고 군대가 따라붙고 여건이 좋아지고 그런걸 기다리는게 아니라 기도했으니까 믿고 행동으로 옮길 때 들어 주십니다.

 

기도하고 움직였습니다. 노인과 아이와 여자들과 금은 보화를 가지고 군대도 없이 하나님의 손만을 의지하고 나아간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기들을 지키실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모든게 다 이루어지고 나서 비로소 움직이겠다는 말은 믿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보지 않고 믿는 것이 아니라 보고서야 믿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성도들은 기도하고 먼저 나아가야 합니다. 지금 나의 위에 여호와 하나님의 손이 함께하심을 믿고 행동해야 합니다.

 

이 네가지의 기도는 하나님이 안들어 주실래야 안들어 주실 수가 없습니다. 물론 다른 본문에는 또 다른 조건들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정도만 지켜도 하나님의 기적을 충분히 맛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보험영업이 정말 치열합니다. 무슨 보험 무슨 보험, 보험종류도 많습니다. 보장내용도 다채롭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보험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들 보험은 바로 믿음입니다.

 

비록 지금 당장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쥐어지지 않습니다. 실체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지켜보시고 역사하십니다. 믿음의 연조에 따라 보험기간이 오래 되었습니다.

 

이 보험은 종신보험입니다. 그러나 살아생전에 보험료를 납입하고 죽고 나서야 비로소 효력이 발생하는 종신보험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하나님의 앞에 설 때까지 효력이 있는 종신보험입니다. 그리고 무슨 문제가 생기면 기도라는 청구수단을 통해서 지불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기도하고 기도하면 들어 주십니다. 단 위의 네가지 방법을 이용해서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의 놀라운 기도응답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보험료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그리고 성도의 바른 삶입니다. 이렇게 보험료를 넣다가 혹 어려운 일이나 힘든 때가 오면 기도하십시오. 요구하십시오. 그러면 하늘 계좌에 쌓아두었던 보험금을 제깍 제깍 지급해 주십니다.

 

우리는 지금 비록 이 땅에 두발을 딛고 서 있지만 하나님과 영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은 이 땅에 제한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와 항상 함께 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눈앞에서 나쁜 일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창피하고 부끄럽고 면목이 없고...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 그를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도록 노력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의 능력을 맛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기도했다면 믿고 의심하지 마십시오

모든 일의 제일 앞서 기도부터 하십시오

그리고는 행동으로 옮기십시오.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실 수 있는 기회를 드리세요. 믿고 나아가서 행동으로 옮긴다면 막막한 일들이 실체가 생기고 불가능이 가능해 지고 놀라운 기적이 나타납니다.

 

기도하십시오. 믿고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그러기위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깨끗한 몸으로 서십시오. 매일 매일 하나님의 눈을 생각하며 겸손하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사십시오.

 

기쁨으로 놀람과 환희로 그가 주시는 기적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는 전능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할렐루야,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올리는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당신은, 여러분은 기도의 능력을 믿고 있나요?

 

- 홍종일 목사님 2020년 6월 28일 주일 설교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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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누리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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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저는 에스라의 믿음이 부러웠습니다. 지도자로써 두렵지 않았을까요. 강도라도 만나면 얼마나 곤란해졌을까 불안하지 않았을까요.

부모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노력할 때가 가끔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잘 모르겠습니다.

이렇게까지 고백하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에 대해서 잘 모르는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넓은 길과 좁은 길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선택을 해야 하기에 어렵습니다. 넓은 길은 화려하고 없는 게 없습니다. 재산이 수십, 수백억씩 있으면 잠깐은 든든할지도 모릅니다. 이것도 해줘, 저것도 해줘, 귀찮아의 시대가 열릴테고, 사람들은 밥도 이제 스스로 해먹지 않는 세상을 예측하는 시선도 있습니다. 점점 편리에 익숙해져간다는 의미 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편안하지 않다는 점이 어렵습니다. 옛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죽음을 의미했고, 매우 조심했습니다. 하나님이 친구라는 이야기를 이제는 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래도 유한한 인간과 세상 주관자인 하나님과의 차이는 까마득하게 다릅니다. 시편에서는 호흡이 있는 자들은 찬양하라고 썼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삶이 무엇일까 생각합니다.

 

나만 생각하는 삶에서 탈출하기 가 아닐까, 최근에는 이런 관점을 많이 가지게 됩니다. 나의 편리 속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내 뜻대로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오늘 본문의 표현을 빌린다면, 일단 멈추고 기도부터 하는 태도 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신앙이 자랄 수 있다면, 그 다음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지 않을까. 감히 그렇게 마무리 하며, 여백을 두고 이번 덧붙임을 마칩니다. - 2020. 07. 시북 (허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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