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겨우 산꼭대기의 깃대 같겠고(이사야30:15-18)/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20. 8. 9. 00:26

겨우 산꼭대기의 깃대 같겠고 (이사야30:15-18)

 

할렐루야!

우리는 지금 시대 말의 상황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안심하십시오. 아직 끝은 아니고 또한 완벽하게 끝이 되려면 인간의 관념으로는 아득합니다. 아직 시간이 남았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승천하시고 벌써 이천년!

 

이 긴 기간이 말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시대를 가리켜 말세지말이라고도 부릅니다. 이제 거의 막바지에 다다랐다는 생각을 가지는 겁니다. 그러나 아직 끝은 아닙니다. 정확히는 이제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말의 시작지점.

 

지금 우리가 시대의 역사적인 변환점에 서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계속 가느냐 중단하고 멈추느냐의 기로에 있습니다. 어쩌면 위기의 순간이고 또 다르게 보면 역사적인 기회를 맞은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더 시간이 촉박합니다. 왜냐면 우리네 삶이 하나님 앞에서 바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남북이 분단되어 있습니다. 이런 분단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추가적인 비용이 너무 극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민족, 다른 국민들보다 더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경쟁도 더 극심합니다.

 

흔히들 말하지요? 현재의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단군이래로 가장 열심히 살았고 가장 많이 교육받았지만 너무 늦게 태어났다고. 그게 저들의 죄라고. 그래서 헬조선이 된 거지요.

 

그래도 하나님과 함께 한다면 이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총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심한 경쟁에 지쳐서 인간본연의 마음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나라 청소년들 정말이지 열심히 공부합니다. 이건 제 생각인데 그렇게 열심히 공부할 필요가 있을까요? 몸도 마음도 건강해야지 몸도 마음도 병들었는데 공부 뺑뺑이만 돌리면 다입니까?

 

카이스트 부설의 영재 고등학교가 있습니다. 이 학교 출신은 수능을 거치지 않고 일정 학점 이상만 받으면 카이스트 진학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공부는 엄청나게 잘하는 아이들이지만 마음이 건강하지 못해서 자살하고 자퇴하고 마음의 병을 앓는 이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뭐 이 땅에서 일어나는 비리나 부정부패는 너무 많아서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려울 정도입니다. 분명 장점이 많은 우리나라지만 사회 전반에 악습과 적폐가 너무 많습니다.

 

이건 조금 각도를 달리해서 드리는 말입니다. 우리네 마을에는 우리네 마음이 앞산과 뒷산에는 조금이라도 그럴듯한 바위나 동굴이나 샘이있으면 몽땅 우상을 섬기는 표식이있습니다.

 

심지어 이런 촛불로 인해 대규모 산불도 일어납니다. 우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우상의 문화속에서 그런 분위기에 절어서 자라왔습니다. 공영방송에도 무슨 왕꽃 무슨님이라는 황당한 드라마도 했지요?

 

저는 한번도 본 적은 없지만 제가 tv가 없어요. 그래도 기사에서 왕꽃 거시기로 떠드는 걸 봐서 제목은 압니다. 미신타파를 국시로 삼아서 자란 우리에게 이런 미신방송은 정말이지 기가 찬 시대를 역행하는 일입니다.

 

뭐 거창하게 이땅을 마귀의 땅이니 사탄의 영토니 라고 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런 땅에서 그런 문화속에서 자란 우리 성도는 이 땅을 정화하기 위해서 더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공격적인 선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르게 삶으로써 주위에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게 더 중요합니다. 이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 오셔서 구원하시고 복을 주실때의 약속입니다.

 

너희가 이후로도 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르게 살면 내가 너희에게 약속한 복을 영원히 보장할 것이지만 너희가 쉽게 나와의 약속을 버리고 세상으로 나간다면 너희의 부귀가 평화가 결코 길지 않으리라.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시대말적 상황에서도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성도의 행동입니다.이 땅이 더 이상 사탄의 요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땅이 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게 중요합니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죽은 양심이라고 어떤 사람이 말했지만 행동하지 않는 성도는 성도일 수가 없습니다.

성도라면 살아있는 성도가 아니라 이미 영적으로 죽은 성도이고 과거 한때 성도였던 빈 껍데기입니다.

 

물론 시대 말의 암흑 속을 사는

이 시대의 사람들이 모두

시대 말이라고

암흑 같다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의 대부분은 세상이 어떻게 되는지에는 거의 관심이 없습니다. 혹 관심을 가진다면 겨우 밥 먹고 차 마시고 할 말이 없을 때의 가십거리 정도지 진정으로 이 세상의 암흑을 한탄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려고 하는 경우는 참으로 드뭅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려고 하는 이들은 매우 적습니다. 그러나 수가 적다고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원래 세상은 그렇습니다. 댜수가 선을 행하려고 적극적으로 나서는 경우는 역사상 백년에 한번 수십년에 한번 정도지 절대로 자주 있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불공평과 억울한 일들이 매일같이 일어납니다. 이해관계가 충동해서 매일같이 서로 목소리를 높입니다. 물론 시대정신이니 대의니 하는 것도 있지만 하나님없이 대의를 떠드는 그 실체는 허무합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말씀만이 바로 인간의 궁극적인 행복을 보장하는 대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대의를 따라 행하는 자들이라면 비록 소수라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전체를 구원하는 그리고 선도하는 놀라운 일을 할 수 있는 법입니다.

 

오늘 본문의 시대적 배경을 살펴본다면 이사야 선지자가 애굽과 앗수르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살아남기위해 분주할때에 유다의 지배층에게 애굽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라고 경고하던 때입니다.

 

1.주 여호와가 말씀하시되

오늘 본문은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이같이 말씀하시되”라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원문에는 한 글자가 더 있는데 “왜냐면”입니다. 그래서 “왜냐면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이같이 말씀하시되”로 본문이 시작됩니다.

‘왜냐면’ 이란 말에서도 우리가 알 수 있듯이 지금 이사야는 왜 유다가 망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유다의 멸망을 막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그래서 본문은 ‘왜냐면’ 이란 말로 시작되는 겁니다.

 

그래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는지에 대한 원인이 있습니다. 그것은 거의 모든 경우에 ‘불순종’때문이지요. 뭐 다른게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에게 승급을 위한 시련을 주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정금같이 나오게 하기위해 시련을 주시는 거다’라고 생각할 때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제대로 순종하고 그의 뜻대로 살았다고 하는 자신감이 있어야 감히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를 빼고 우리들의 눈에 스스로 돌아보아 우리가 지금 제대로 살지 못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게 너무 많아 보일 때는 ‘아 우리가 지금 제대로 살지 못해서 제대로 살아라고 하시는 주님의 채찍이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우리네 삶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살아야 이런 시련에서 벗어나고 어떻게 해야 멸망을 막을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바로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제일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입니다.

 

이러니 저러니해도

하나님의 길로 돌아가지 않으려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갖고 있는 한

하나님의 뜻에는 반해도 내가 지금 누리는 쾌락을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한

절대로 하나님의 징계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여 멸망에서 피할 길을 알려고 합니다.

 

우리가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는 이유는

그 속에 우리의 앞길에 대한 지표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효율적인 피할 방법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상고하는 겁니다. 말씀 속에 앞으로의 진로가 있습니다.

 

일단 오늘 본문을 보면 먼저

‘주 여호와’란 말씀 가운데 바로 답이 있습니다. ‘주’라는 말은 온 우주에 미치는 하나님의 주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바로 이 세상의 모든 문제해결의 열쇠는 주가 가지고 계신다는 걸 의미합니다.

 

이사야 당시 유대는 지극히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길을 떠나 음란하게 우상을 위하고 통치자는 백성을 착취하고 선동해서 자기의 뜻대로 몰고 가고 애굽이냐 앗수르냐를 가지고 고민할뿐 모든 문제의 핵심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는 사실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애굽이냐 앗수르냐를 가지고 고민하는 이유는 어떤 곳과 친해야 백성들이 행복하고 나라가 보전될까가 아니고 어떤 곳과 친해야 내가 행복할까? 나에게 유리할까?

 

이방인들의 모든 것의 판단 기준이 바로 나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주 여호와’입니다. 인간의 이익으로 판단해서 인간에게서 해답을 찾으려 하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과 대의를 기준으로 판단하고 그래서 하나님에게 묻고 의지하라. 그래서 주 여호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문제해결의 핵심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입니다. 미국도 아니고 중국도 아니고 더더구나 일본은 아닙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고 바른 윤리적인 삶을 사는 겁니다.

 

애굽과 앗수르 사이에서 우왕좌왕 갈팡질팡하는 이들에게 그 누구도 아니라 하나님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갈팡질팡 사팔뜨기처럼 눈치를 보는이들에게 그 누구도 아니라 하나님.

 

가만 보면 참 황당합니다. 우리네 행위가 악한데 무슨 해답을 엉뚱한데서 찾으려고 하는지. 하나님의 눈에 제대로 살지 못하면서 누구를 믿는단 말입니까?

 

다음으로 ‘여호와’란 말에는 ‘언약의 하나님이 결코 우리를 잊지 않으시리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처음 우리와 언약을 맺으시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의 구원자로 세우신 그 약속이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시대는 변했지만 처음 우리와 맺은 하나님의 언약, 약속, 맹세는 지금도 여전히 효력을 발휘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고 그에게로 돌아가면 그는 자비로우사 우리를 사랑하시고 품에 안아 주시고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 바로 그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말씀 안에, 그의 말씀 안에 해답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주신 해답을 따라가면 됩니다.

 

2.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라는 말을 직역하면 ‘돌이킴과 휴식속에 구원이 있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조용히 있으란 말은 떠들지 말고 입 닫고 있어야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말은 ‘휴식’이란 말입니다. 불의를 보고 보고도 못본척 조용히 있게 되면 큰일 납니다.

 

한쪽에서 썩어 들어가는데 그걸 못본 척하고 가만 있는다고 해서 그게 저절로 낫고 회복되는게 아닙니다. 점점 더 썩어서 나중에는 도저히 고쳐서 쓸 수 없어 그냥 버릴 수 밖에 없게 되는 겁니다.

 

당연히 더 썩기 전에 말이 나와야 됩니다. 그래야 뭔가 조치가 들어갈 겁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죄에서 돌이키고 그리고 휴식하라 그래야 구원을 얻는 답니다. 돌이키는 것은 이해가 갑니다. 죄를 뉘우치고 회개해야 하는건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 휴식이라니?

 

이런 상황에서 휴식이 될까요?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조용히 있는다는 말은 평온함을 말하는데 ‘원래 있던 자리에 가만히 두는 것’을 말합니다.

 

원래의 자리,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자리에 가만히 두고 휴식하면 됩니다.

 

당시에 유다의 집권자들은 나라를 구원한답시고 애굽에 갔다가 앗수르에 갔다가 암몬과 모압과 에돔에 갔다가 했던 겁니다. 앗수르의 위협 앞에서 유다의 아하스왕은 외교를 통해 답을 찾으려 한 겁니다.

 

구원이 그런 외교에 있다고 보았다는 겁니다. 인간적인 노력에 있다고 본 겁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죄악의 자리에서 회개하고 돌아와서 하나님 앞에 뜻을 두고 가만히 있으라는 겁니다. 애굽도 앗수르도 구원의 방도가 아닙니다. 그러니 분주한 발걸음을 멈추고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말입니다. 그게 바로 ‘조용히 있어라’는 말 속에 담긴 뜻입니다.

 

무슨 문제가 있으면 돌이키고 하나님 앞에 가만히 엎드려 기도해야 하는 겁니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천지사방으로 뛰어다니고 분주하게 설쳐도 그걸로는 해결이 안된다는 겁니다. 모든 문제해결의 열쇠는 하나님입니다. 바로 오늘 말씀은 그걸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행동만 하고

회개하지 않고 방도만 찾고

삶도 형편없고 기도도 없는데

행위만 있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로.

 

다시 말해서 인본주의가 아니라 신본주의를 회복하라는 겁니다. 나의 무력함과 나의 죄인됨을 자복하고 다시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서 그에게 기도하며 의뢰하라는 겁니다.

 

그러려면 바르게 살아야합니다. 하나님은 죄와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그가 그 전능하신 ‘주 여호와’ 나의 아버지 하나님이 제시한 길을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로는 아직 부족합니다. 뒤에 하나가 더 있습니다.

 

3.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는다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는다는 말을 직역하면 ‘잠잠함과 신뢰함 속에 힘이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 당장 물이 차 오르는데 이대로 있다가는 숨이 막혀 죽을 수도 있을 텐데도 잠잠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그래요 일반적인 경우라면 그렇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뭐라도 해야 됩니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이지 두렵고 불안해서 견딜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잠잠함을 요구합니다. 잠잠하라고 말합니다. 왜 잠잠해야 합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잠잠해야 합니다.

 

그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결단코 이대로 두지 않을거라는 믿음이 있다면 그를 믿고 잠잠해야 합니다.

 

위기의 순간에 우리는 그 위기를 이겨내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광분하게 됩니다. 두렵고 불안해서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있다면 인간의 방책으로 뭔가를 해보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그에게 의지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지시하신대로 행해야 합니다.

 

인간이 꾀를 내어서 남을 중상모략하고 음모를 꾸미고 온갖 방책을 내보아도 거대한 위기 앞에서 그러한 계책은 효과가 없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위험 앞에서 나약한 인간의 방책이 얼마나 도움이 될까요?

 

그래서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우리가 주도권을 내놓지 않으려고 합니다. 내려놓음을 실행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다못해 부뚜막에 부지깽이라도 들고 휘두릅니다.

 

열심히 사는 모습이 좋지만 그 근본에 하나님의 역사와 권능에 대한 불신, 회의가 있는지 한번 쯤 살펴봄이 좋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겉모습에 너무 쉽게 믿음을 부여합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섬기는 우상을 보면 일단 거대하고 두 번째로 화려하고 세번째로 쾌락적입니다. 절에 가면 금칠을 한 부처상이 어마어마하게 크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제가 어릴 때는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제는 뭐만하면 세계최대니 동양최대니 국내최대를 입에 올립니다. 그리고 그 거대한 몸체에 금칠을 합니다. 보통은 단순한 ‘금메끼’ 정도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제는 순금으로 도금을 합니다. 그러니까 몇 미크론의 아주 얇은 초박형이 아니라 직접 손으로 순금을 쳐서 입히는 겁니다.

 

뭐 금값만 수십억에서 수백억이 들었다고 자랑합니다. 이 말에는 너희도 이렇게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 돈으로 좋은 일에 쓰려고 하는게 아닙니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온갖 사치와 향략을 누리려고 하는 겁니다.

 

이런걸 보면 사람들은 광분합니다. 누런 황금이 사람들의 이성을 상실시킵니다. 그래서 안목의 정욕입니다. 그러니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고 잠잠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보통의 인간에게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도 성경의 말씀은 명확합니다. 그 모든 것의 중심에는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신뢰가 있어야 된다는 거지요. 그런데 딱하게도 사람들은 동의하지 않는답니다.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고”라는 말은 직역하면 ‘너희가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내가 하나님보다 더 똑똑합니까? 더 능력이 많습니까?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우상처럼 단지 마음의 위로만을 주는, 우리가 부여한 상징물에 불과합니까?

 

아니요, 아니요. 그는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분, 절대로 우리가 그분의 전지전능하심을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온 우주의 주관자이요 창조주이십니다.

 

그걸 믿지 못하기 때문에 잠잠함과 신뢰함 속에 구원이 있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요, 그렇다면 혼자서 날뛰어 보세요. 온갖 기기묘묘한 책략을 내어 보세요. 어디서는 거짓말을 모략이라고 주장하던데 인간이 보기에는 기기묘묘한 계책인 것 같아도 하나님의 한번 손짓에 미치지 못하는 겁니다.

 

한때 유행했던 경구가 있습니다. 어록이라고 봐도 좋아요. 미국의 유명한 권투선수의 말입니다. ‘누구나 계획이 있다. 한 대 맞기 전까지는’ 뭐 링에서 이렇게 하고 그러면 저렇게 되고 그래서 나는 이렇게 싸우고 어쩌고 하면서 계획을 세워도 무지막지한 주먹에 한방 제대로 맞으면 그런 계책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아무리 난리를 치고 계책을 짜내고 누구는 모략이라고 합디다만 그래봐야 하나님의 한번 개입에 미치지 못하는 겁니다.

 

그가 한번 노를 발하시면 천지만물 산천초목이 벌벌 떨게 되어 있습니다. 그걸로 끝인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인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믿음이 절실히 필요한 것입니다.

 

유다사람들은 자기들이 뭔가를 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애굽에 돈을 주고 군대를 빌려와서 앗수르를 대적하고 주변 나라들은 서로 싸우게해서 우리의 안전을 보장받고 어쩌고 하는 계책이 그럴듯해 보여서 이들은 하나님을 뒷전에 두고 인간을 의지했습니다.

 

그럼 돈은? 돈이야 성전벽의 금을 벗기고 모자라는 건 귀족들과 부자들에게서 징수하고 그래도 안되면 백성들에게 세금을 매기고.

결국은 믿었던 인간에게 돈도 뺏기고 나라도 뺏기고 최후에 목숨까지 뺏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믿을 수 없는 인간, 자기의 이해관계를 따져서 이리 재고 저리 재는 인간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는 인생이 아니시고 부족함이 없으시므로 뭐가 나에게 유리한가를 따지지 않고 누가 올바른가만을 가지고, 누가 나의 법을 지키는가에 따라 선악간에 심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4.우리가 말타고 도망하리라 하니

여기에 대해 유다사람들은 뭐라고 답합니까?

“아니라 우리가 말타고 도망하리라” 하나님을 의뢰하고 잠잠하기 보다는 우리가 애굽하고 어찌해보려고 노력하다가 앗수르 군대의 침입이 있을 때에 정 안되면 말타고 애굽으로 도망을 가겠다는 겁니다.

 

우리 힘으로 앗수르 군을 막는다가 아닙니다. 애굽군대를 믿고 앗수르가 쳐들어 올 때 애굽군대가 막아줄거라고 믿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에 따르기보다는 내 멋대로 살다가 안되면 말타고 애굽으로 도망가면 된답니다.

 

굉장한 사람들이지요? 말은 이스라엘에서 매우 귀한 존재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유다는 말을 애굽에서 수입했습니다. 애굽에서 수입한 말을 타고 애굽으로 여차하면 도망가겠다는 겁니다.

 

물론 사세 부득하면 도망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말이 있다면 말을 타고 도망가면 더 좋을 겁니다. 그러면 말을 타고 도망갈 수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말을 유지하려면 돈이 많이 듭니다. 말먹이도 필요하고 말을 돌볼 사람도 필요하고 마굿간도 필요하고 전투마가 힘을쓰려면 건초만 먹어서는 안되고 뭔가 영양가있는 것을 먹어야 한답니다.

여하튼 말이 없는 사람은 앉아서 죽거나 포로가 되고 자기들은 말 타고 도망간답니다.

 

자기들은 나라를 사랑하지 않고 그냥 그 땅의 백성들을 착취하면서 살다가 사세부득하면 도망가면 된다는 지배층을 둔 백성들은 얼마나 불행합니까?

 

지배층들의 생각이 이처럼 비열한데도 사람들은 그런 지배층들에게 정의 대신에 한 조각 빵만을 원합니다. 구걸합니다. 그래서 그 나머지는 신경도 안씁니다. 이런 이기심이 판을 치니까 이스라엘이 멸망한 겁니다. 유다가 멸망합니다.

 

그래서 사회이 마지막 희망이 교회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기심이 판을 치고 이를 바로잡고 하나님의 심판을 외칠 선지자가 타락하고 교회가 부패하면 누가 저들을 바로 잡을 수 있을까요?

 

정치꾼들로는 절대로 안됩니다. 그들은 해결책이 아닙니다. 표에 집착하는 이들은 무엇이 정의인가 보다 무엇이 인기가 있나에 집착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하나님의 정의는 묻혀 버립니다.

 

그래서 표에 연연하지 않고 돈과 권세에 연연하지 않는 선지자만이 저들을 바로 잡을 수 있습니다. 어떤 불이익에도 굴하지 않고 비록 인기는 없어도 정의로운 말들을 할 수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서 겸손하게 엎드릴 것을 말하니 이를 듣지 않고 말타고 도망할 것이라고 대답한 이들에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 너희들이 그렇게 말했으니 정말로 너희들은 도망가게 될 것이다” 이 말을 보면 하나님은 뉘우치지 않고 뻔뻔스럽게 백성들은 두고 말타고 애굽으로 도망가려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양심적으로 살기를 싫어하는 이들에게

“그래? 그렇게 나온다면 너희의 요구대로 해주지. 이제 너희는 말 타고 애굽으로 도망가는 신세가 될 것이다”

 

말보다 더 빠른 짐승을 타고 애굽으로 도망갈 것이라고 대답하는 이들에게 그러면 더 빨리 쫓기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다의 지배층들은 정말이지 문제가 많습니다. 그냥 자기들의 음란한 쾌락과 이기심을 조금만 줄이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엎드려 간구하면 될 일을 끝까지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는 댓거리를 합니다.

 

제가 이 성경본문을 보면서 정말이지 우리나라하고 너무 똑 같아서 허탈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합니다. 한반도 유사시에 미국이나 일본으로 도망 갈려고 이중국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도 많이 있습니다.

 

검은머리 외국인의 부모들 중에는 이 나라에서 돈과 권세잡은 이들이 많습니다. 정말이지 웃깁니다. 진짜로 웃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래? 그래 한번 보자. 과연 제대로 도망칠 수 있는지”

 

5.한 사람이 천을

오늘 본문에서 나온 내용은 어디서 많이 본 말입니다. “한 사람이 꾸짖은즉 천 사람이 도망하겠고 다섯이 꾸짖은즉 너희가 다 도망하고”

 

원래 ‘한 사람이 천을 두 사람이 만을 대적하겠다’는 말씀은 레위기와 신명기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던 복된 약속이었습니다. 그 정도로 강하게 대적을 물리칠 수 있는 역사를 허락하셨는데 그건 하나님과 함께 할 때만,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런 기적적인 약속을 받은 민족이 하나님을 배신하게 된다면 하나님은 그 백성들을 징치하기위해 대적에게 그런 권능을 주어서 채찍으로 다스리겠다는 겁니다.

 

믿고 사랑했기에 자기 자녀들의 배신에 더 아파하시고,

돌아오도록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고 죄를 뉘우치도록

 

더 가혹하게

대적을 강하게 들어서

이스라엘 자손을 징치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정말이지 작은 나라입니다. 숫자도 영토도 정말이지 보잘 것이 없습니다. 그런 나라가 애굽과 앗수르 사이에서 살아 남으려면 모든 국민들을 군대로 모집해서 창칼을 들려준다고 해도 되는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팔이 이끌어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들은 그 전능하신 하나님의 팔을 오히려 간섭한다고 귀찮다고 배척하고서는 도망만을 생각합니다.

 

어느 나라든 안될 때에는 무지하고 이기적인 백성들과 뻔뻔하고 교활한 지배자들이 있는 모양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이런 곳에는 없습니다. 정의가 발붙일 곳이 없습니다.

 

정의가 발붙일 곳이 없게 되면 사람도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정의가 서지 못하는 곳에 촛대를 두시지 않습니다. 불꺼진 촛대는 빈 창고에 넣어 버리십니다. 그리고 발판은 허물어서 초지를 만드십니다. 세상은 더 캄캄해지고 사람들의 삶은 더 암울해지고 ....

 

하나님이 우리편이 되시면 한 사람이 천을 대신하고 두 사람이 만을 대신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의 적이 되신다면 그 앞에서 버틸 수가 없습니다. 세상 무엇을 가지고 와도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6.겨우 깃대 같겠고

환난 날에 도망을 다 가고 남은 사람이 “산 꼭대기의 깃대 같겠고 산마루 위의 기치 같으리라 하셨느니라”

 

산꼭대기에 깃대가 서 있다면 얼마나 눈에 잘 띄겠습니까? 그 정도로 살아 남은 자가 너무 적어서 눈에 확 드러난다는 그 정도로 남은 자가 적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산 마루위의 기치나 산꼭대기의 깃대나 같은 말이라고 보면 됩니다.

 

‘산마루’에서 ‘산’은 아주 낮은 산이나 언덕, 인간에게 버려진 볼품없다고 버려진 산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살아남더라도 인간들에게 무시받고 버려질 정도로 이스라엘이 미약하게 살아가게 될 것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살아 남은 자들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을 것을 말합니다. 이제까지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실력에 비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과분한 대접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한 사람이 천을 두 사람이 만을 대적할 정도로 강력한 나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힘이지 인간 이스라엘 자손들의 실력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걸 망각한 겁니다.

 

우리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아낌없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총때문임에도 마치 자기가 잘나서 그런것처럼 우리가 패역하여 하나님을 배신하고 세상으로 나아간다면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에게서 거두어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의 처지가 가련하게 될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법을 지키고 순종해야 합니다.

 

7.그러나 그가 기다리신다

그러나 아직 끝이 난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내리신 다음에도 여전히 우리가 회개하고 그에게로 돌이킬 것을 기다리십니다.

 

원래 언약이란 것은 한쪽에서만 일방적으로 지키는게 아니라 양쪽에서 같이 지켜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다면 우리만 아니라 하나님도 같이 그 언약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과 어떤 언약을 맺었는고 하니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며 그를 경외하고 그의 법을 지켜 행하면

그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시며 천국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이 바로 우리와 하나님의 약속 즉 언약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인간 이스라엘은 이미 하나님과의 언약을 저버리고 하나님보다 오히려 애굽을 더 신뢰하고 있습니다.

 

원래 가나안 지역은 전통적으로 북방의 메소포타미아와 남방의 애굽지역이 서로 기세싸움을 벌이는 곳입니다. 그 사이에 낀 가나안은 그 둘 중의 하나를 섬김으로 겨우 목숨을 부지하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좋게 말하면 등거리외교고 나쁘게 말하면 눈치보기입니다.

 

메소포타미아는 유브라데와 티그리스강이 흐르는 지역으로 지금의 이라크를 말합니다. 이사야 당시에는 앗수르가 있었고 그 다음에는 바벨론이 있었으며 그 다음에는 페르시아가 그 지역을 장악했습니다.

 

애굽에는 나일강이 흐릅니다. 두 나라모두 큰 강이 있어서 농사에 편리합니다. 농작물이 풍부합니다. 사람들이 모여들고 군대가 강해집니다. 그런 유리한 환경을 배경으로 강대국이 된 겁니다.

 

원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노예살이하다가 탈출하여 독립국을 세웠고 하나님만을 섬길 것을 다짐하며 나라를 이어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어떤 일이 있어도 애굽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심지어 군사적으로 꼭 필요한 말과 병거를 사는 문제로도 애굽으로 가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아마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믿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애굽은 사막가운데 나일강이 흐르는 비옥한 지역입니다. 그리고 우상숭배와 음란한 문화가 성했던 나라입니다.

 

뭐 파리하고 모기하고 개구리까지 신으로 섬기니까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는 우상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이 동네가 부유하고 문명이 발달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애굽을 탈출한 그때부터 계속해서 애굽으로 돌아가기를 원했습니다. 뭐 말만하면 애굽으로 돌아가야 된다고 불평을 했지요.

 

그것은 애굽에서 그들을 불러 내셔서 독립국을 세우게 하시고 가나안을 영토로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배신하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애굽과의 연대를 그렇게나 막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애굽과 앗수르 사이에서 홀로 서기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래도 북쪽의 형제인 이스라엘이 있었을 때는 서로 싸우기도 하고 때론 동맹도 맺으면서 의지했다면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망하고부터는 유다는 매우 극심하게 양쪽 나라 사이에서 눈치를 봅니다.

 

그리고 애굽은 이스라엘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아람 사람이지만 그들은 애굽에서 오랜 종살이를 거치면서 마치 애굽을 자기들의 모국으로 생각하는 경향까지 생겼습니다.

 

그래서 앗수르의 세력이 팽창하자 유다는 애굽만이 자기를 구원해 줄 수 있다고 여기게 된 것입니다. 아까 말을 타고 애굽으로 도망간다고 말씀드렸지요? 그 말도 애굽에서 사온 겁니다.

 

실컷 애굽에서 구해내서 나라를 세우고 하나님을 섬기는 선민으로 만드셨는데 세월이 흘러 다시 “나 다시 애굽으로 돌아갈거야”라고 한다면 얼마나 허탈할까요?

 

절대로 애굽으로는 돌아가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공공연하게 어긴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보호자이자 인도자이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동입니다.

 

사람들은 앗수르의 침입에서 살아 남으려면 애굽을 힘업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국제 정치적 관계에서 보면 나쁘지 않은, 충분히 할 수 있는 생각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왜 이스라엘은 세상나라보다 하나님을 의지할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이 왜 아버지 하나님을 잊었을까요?

 

이게 바로 오늘 본문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우리가 지금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위해 눈에 보이는 인간들을 의지하는 경우가 많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의지해야 할 이는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내가 목숨으로 값주고 산 얘들아, 나에게로 돌아와라.

너희가 이 세상에서

내가 만든 이 세상에서 행복하려면

나의 품안에 있어야 한단다.

그런데 왜 자꾸 뻗나가니?”

 

인간적인 방법이라고 말씀드렸지만 이게 하나님의 뜻에 합하다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이 명백하게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을 어기는 거라는 것. 인간중심주의는 필연적으로 자기 합리화를 수반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좋은 것은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하고 자기에게 유리한 것에 하나님의 뜻을 가져다 불여서 자기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것입니다. 미안한 말이지만 영악한 인간들은 자기의 이익과 쾌락을 하나님을 위하여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럼에도 마치 자기가 아직 하나님의 법안에 있는 것처럼 연막을 칩니다. 척하는 겁니다. 가증한 일이지요.

 

그래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가 다시 돌아올 것을 기다리십니다. 기다릴 수 없는 그런 상황, 이제는 포기해야 되는 상황에서도 우리가 너무 안타까워서 대문 밖에서 돌아올 탕자된 우리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8.정의의 하나님

오늘 본문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시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이 문장에서도 역시나 ‘왜냐면’ 이란 말이 맨 앞에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생략되었지만 원문에는 있습니다. 15절하고 같습니다. 그러니까 원문에는 “왜냐면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동그라미가 쳐진 부분15절 과 18절에 ‘왜냐면’ 이란 말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는 이유는

그가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가 돌아오기만 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지키기만 하면

우리에게 복을 주실 수밖에 없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나타내 보여줍니다.

 

왜냐면 그는 정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선한 이에게 복을 악한 이에게 벌을 주시는 정의의 하나님의 통치를 기다리는 자신의 자녀들을 결단코 외면치 않으시고 복을 허락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를 기다리고 소망하는 것입니다. 정의의 하나님은 선한 이에게 복을 주셔야 하고 악한 이에게 벌을 주셔야 하는 분이기에 그렇습니다.

 

온갖 어려움과 핍박 수모를 견디면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해온 성도들에게 상주심을 믿는 성도들에게 상과 복으로 갚아 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소망은 보답을 받기 보다는 배신당하고 외면받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세상에서는 착하고 소망을 가지며 하나님의 법을 따라 선하게 살려는 이들이 복을 받는 경우가 잘 없습니다.

 

왜냐면 세상을 지배하는 법칙은 사탄의 것으로 사탄은 경쟁과 효율과 이기심과 질투를 좋아하기 때문이며 쾌락과 황금을 사랑하기 때문이며 선하고 약한 이들이 눈물 흘리며 고통받는 것으로 기쁨을 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전능하신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시므로 결단코 변개치 않으십니다. 아무리 세월이 지난다 할지라도 처음에 하신 그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 집니다.

 

세상 속에서 쓸쓸하게 홀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아무도 나의 노고를알아주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면 정의의 하나님 그가 알아 주시고 그 하나님께서 우리의 노고에 답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 일입니다. 지금 당장 하나님의 공의가 서지 않은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의 성도들이 곳곳에서 그의 명령을 지키며 성실히 맡은 소명을 다한다면 이 땅을 향한 그의 인도와 사랑은 결단코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며 그의 날을 소망한다면 우리의 소망은 반드시 응답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을 소망하고 바라시기를 바랍니다.

 

시대말의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하나님과 함께하는 주의 뜻대로 사는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2020년 8월 2일 주일 설교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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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누리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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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지 않은지도 모릅니다.

또한 그 다수가 변질되는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하나님의 길은 즐거움과 즉각적인 짜릿함으로 구성되어 있기 보다는,

뿌듯함과 기다림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오늘날에는 더욱이 잘 선호되지 않을 거 같습니다.

 

그래도 우리의 시선이 하나님을 향하게 된다면,

오늘 설교의 희망적 내용처럼, 소망이 반드시 응답받는!

하나님의 복이 함께 하리라 믿습니다.

 

좁은 길이라 찾는 사람이 적지만!

그래도 올바른 길이라면, 그 길을 선택하는 용기가 우리에게 함께 한다면 좋겠습니다.

- 2020. 08. 시북 (허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