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2년 4월 15일 주일 예배
개구리 재앙 (출애굽기8:1-15)
오늘은 출애굽시에 내려진 열가지 재앙 중에서 두 번째 재앙인 개구리 재앙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리가 아는 출애굽시의 열가지 재앙은 우리가 황당하게 생각하겠지만 모두 애굽의 신들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출애굽을 막는 애굽의 왕에게 그가 섬기는 신들을 치심으로 누가 진정한 신인지를 보이기를 원하셨습니다. 오늘은 그 재앙 중에서 두 번째 재앙인 개구리 재앙편입니다.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열 번째 재앙인 애굽의 장자와 첫째 짐승을 죽이기전에 모두 아홉가지의 재앙을 먼저 내리시면서 애굽의 바로가 회개할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홉 번까지의 재앙에서 직접적으로는 누구도 죽이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고통을 주셨고 회개를 촉구했을 뿐입니다.
우리가 알다 시피 이 재앙들에 등장하는 나일강이나 개구리, 이 같은 것들은 각각 애굽인들이 섬기는 신을 상징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여호와가 얼마나 위대한지 모르는 바로와 그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위대함을 보여주고 반대로 애굽인들이 섬기는 신들이 얼마나 형편없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애굽의 신들을 치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하나님은 직접적으로 애굽인들의 목숨을 치신 것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그들을 괴롭게 하셔서 애굽인들과 바로가 깨닫게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목숨을 거두어 가기 전에 경고와 기회로서 아홉 번의 재앙을 먼저 내리신 것입니다. 적어도 애굽의 장자들에게는 회개하고 목숨을 살릴 기회가 무려 아홉 번이나 있었습니다.
나일강을 피로 물들였는데도 여전히 하나님에게 굴복하지 않고 있는 바로에게 하나님은 두 번째 재앙을 내리십니다. 그것은 바로 개구리로 애굽 온 땅을 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재앙을 내리기 전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라고 이 재앙을 피할 길도 알려 주셨습니다.
솔직히 처음부터 애굽의 장자들을 죽여 버렸으면 아마 애굽인들과 바로는 바로 하나님앞에 항복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지루하게 재앙들을 내리고 바로가 항복하는 지를 확인하고 하는 여러 가지 복잡한 절차도 필요가 없어지고 히브리 노예들의 고통도 덜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악인이라도 가능하면 심판을 면하게 하려 하십니다. 과감한 징벌과 직접적 재앙으로 하나님의 정의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면 참 좋을 터인데 그는 끝까지 거듭 거듭 악인에게도 회개할 기회를 주려고 하십니다. 재앙을 내려서 그들이 고통받는 것보다 회개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공의아래 들어오는 것을 더 기뻐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 이 말은 ‘히브리 노예들은 바로의 백성이 아닌데 왜 붙잡고 있느냐?’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하나님은 세상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들은 나의 백성들이다. 그러므로 결코 너희의 통치아래 있지 않을 것이다. 이제 그만 나의 백성들을 놓아주어라” 고 말씀하십니다. 내 백성들은 세상의 법칙을 따르지 않고 나만을 섬길 것이니 그들을 놓아 주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법을 우습게 아는 경향이 있습니다. 돈이 지배하고 경쟁논리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사랑을 강조하고 희생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법은 전혀 경쟁력이 있게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때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고 너무 이상적이라서 현실에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허상처럼 보입니다. 남의 것을 빼앗아서라도 내가 잘먹고 잘살아야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 물러 터졌어요. 그래서 그의 법을 따르면 결국은 이 세상에서 도태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못하도록 하는데 따른 벌은 실제적입니다.
하나님이 이어서 하시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이 말은 내 백성을 보내면 그들이 해야 할 일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 자신을 섬기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신 가장 큰 목적이 바로 자기를 예배하게 하려 하시는 것이란 말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면 어떤 일이 생깁니까? 바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 지상 천국이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으로 세상이 다스려지는 것이 바로 천국입니다. 남을 짓밟아야 잘사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더불어 잘살도록 하는 세상이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진정한 천국이 이땅에서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가슴벅차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의 법을 따르기만 하면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언은 이어집니다.
“내가 치리라” 이 말은 단순히 때린다는 말이 아닙니다. ‘치명타를 가하다. 패배시키다. 상대방이 철저하게 피해를 입어 스스로 항복을 선언할 때까지 치고 때리다’의 뜻이 있습니다. 즉 바로가 하나님의 백성을 놓아 주지 않는다면 치명타를 가해서 스스로 항복할때까지 철저하게 두들기겠다는 하나님의 단호한 선언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재앙이 개구리를 통해서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개구리는 애굽인들의 신입니다. 그들은 개구리 모양의 머리를 가진 여신 ‘헤카’ 를 숭배했습니다.
성경에서 언급되는 이 개구리는 나일강 주위에 서식하다가 나일강의 물이 빠지기 시작하는 12월경부터 강변의 비옥한 토지위로 기어오르기 시작하는데 애굽인들은 이 개구리를 풍요와 다산의 상징으로 여겼습니다.
이런 개구리들이 올라오는데 바로가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개구리가 올라오는 만큼 애굽땅이 풍요롭고 다산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네가 섬기는 신이 자기들을 해롭게 하지 않으리라는 믿음도 한몫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는 개구리 재앙을 경고 받고도 전혀 뜻을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개구리는 매년 12월경부터 나일강에서 기어오르는 것이거든요. 그게 자연의 순리거든요.
뿐만 아니라 바로의 신하, 술객들도 자기들의 요술로 개구리들을 올라오게 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바로의 눈에 여호와 하나님이 그렇게 특별해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바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법대로 살고자 하는 소망을 무시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할 수 있는 것은 우리도 할 수 있고 그 개구리가 기어 올라오는 것은 풍요와 다산의 상징이며 자연적인 것이라고 강변하면서.
그러나 일단 개구리 재앙이 일어나자 땅으로 기어 올라온 개구리의 숫자가 너무 많습니다. 개구리의 수가 급증하여 오히려 애굽인들의 고민거리가 되게 만들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너무 너무 수가 많아지자 풍요와 다산의 상징이 아니라 징그럽고 귀찮고 생활에 방해가 되는 그저 그런 생물로 변해버렸습니다. 희소가치가 떨어지자 개구리는 단순히 사람들의 삶을 방해하는 것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애굽인들이 스스로 자기네 신을 경멸하도록 만드셨습니다.
모세가 아론에게 명령했고 아론이 순종하여 그 손을 펴매 애굽 온 땅이 순식간에 개구리떼로 뒤덮였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 즉각적인 순종은 지금 놀라운 이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평소에 인간들을 보면 도망가는 개구리들이 인간들의 처소로 몰려 듭니다. 그것도 너무 너무 수가 많아서 도저히 제어가 안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자연의 질서에 역행하므로 초자연적 현상이라 ,이적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애굽의 술객들 역시 독특한 방법으로 똑 같은 이적을 행했습니다. 바로이 요술사들도 개구리를 불러 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술법은 오히려 개구리의 수를 더했으므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것입니다. 바로에게 필요한 것은 개구리의 숫자를 늘리는 요술이 아니라 개구리를 물러가게 하는 요술입니다. 하나님의 재앙과 똑같은 재앙을 되풀이 하는 것이 아니라 개구리 재앙을 물리치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개구리를 물리치는 일은 요술사들이 하지 못했습니다.
개구리가 온 땅을 뒤덮자 즉시 바로는 모세를 부릅니다. 이는 개구리의 피해가 생각외로 커서 견딜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평소에는 풍요와 다산의 신으로 여긴 개구리들은 이제 다시 보니 결코 풍요와 다산을 가져오지 않고 아무렇게나 발에 밟히고 침구 속에서 기어다니고 음식가운데도 들어가고 하니까 , 신이 아니라 아무 생각없는 미물이고 풍요와 다산을 가져오기는커녕 귀찮고 골치만 아프게 합니다. 징글징글합니다. 이제는 개구리신은 보기만 해도 징그럽습니다. 그래서 바로는 모세를 불러서 개구리를 물리쳐 달라고 요청합니다.
“여호와께 구하여 떠나게 하라” 바로는 처음 여호와가 누군지 모른다고 이야기 했는데 재앙을 겪자 마자 바로 여호와를 찾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요술로 여호와의 재앙을 따라할 때만 해도 별거 아닌 것처럼 뻐기고 있었지만 개구리로 인한 재앙이 점점 심해져서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자 여호와만이 할 수 있다는 것을 시인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보통 그 마음이 완악해서 자기의 신념체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신을 인정하기를 꺼려합니다. 아니 싫어합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위대한 애굽의 왕인 내가 노예들의 신에게 무릎 꿇을 수 없다고 되뇌입니다. 자기네 신관들과 요술사들도 비슷하게 따라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가 특별할 것이 없다고 애써 여호와의 능력을 축소시키려 합니다. 그러나 그러나 개구리들이 온땅을 뒤엎고 도저히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들끓게 되자 , 자기네 요술사들이 신통력을 발휘하여 개구리들을 하숫가로 몰아내지 못하자 할 수 없이 굴복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상당한 의미를 내포합니다. 그것은 바로가 개구리가 땅으로 몰려 나온 것이 하나님 때문임을 인정한 것입니다. 자기들의 신, 개구리 머리 신인 헤카가 하나님의 조종을 받는 것을 인정한 것입니다. 위대한 바로의 신인 헤카가 노예의 신인 여호와의 조종을 받는 무능한 존재임이 드러난 것입니다. 아니 너무 너무 삶에 걸리적 거리는 개구리들은 그들이 과연 풍요와 다산을 약속하는 신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불러 일으킵니다.
그리고 이 재앙이 여호와로 말미암았고 그러므로 물러나게할 이도 자기네의 신이 아니라 여호와임을 인정한 것입니다.
8절에 보면 “내가 이 백성을 보내리니”라는 말이 비로소 나옵니다. 그렇게나 많은 이적과 경고에도 꿈쩍도 하지 않던 바로가 히브리노예를 해방시키겠다는 최초의 약속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바로의 말을 듣고 언제 개구리를 물러가게 할까 정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는 지금 즉시 물러가게 해 달라고 요청하지 않고 내일 물러가면 좋겠다고 이야기 합니다.
“내일이니라”
바로는 지금 개구리의 재해로 힘들어 하고 있지만 당장 물러가게 하지 않고 내일로 미루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 까요. 당장 지금 이 순간에도 애굽땅에 들끓는 개구리들 때문에 견디기 어려운데 왜 그는 당장이 아니라 내일이라고 애야기 했을까요?
이는 혹시라도 자연적으로 개구리가 오늘밤에라도 물러갈까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개구리는 그들의 신이므로 헤카신에게 제사를 지내면 그 신이 자기들의 제물을 받고 물러갈까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발에 밟혀서 배가 터져 죽고 음식에서도 이불속에서도 튀어나오는 징글징글한 한갓 미물임이 밝혀진 상태에서도 바로는 아직까지 자기네의 신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는 비록 여호와에 굴복했지만 여전히 사실을 부인하고 이를 번복할 여지를 두려고 합니다. 악인들과 세상사람들의 죄악에 대한 기대와 욕망도 이와 같습니다. 그렇게 하루 아침에 그러한 악습과 죄악이 칼로 자르듯이 끊어지지 않습니다. 자기네의 신념체계가 하루아침에 변하기는 어렵습니다.
모세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개구리가 하수에만 있을 것이다” 이는 개구리를 부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개구리신인 헤카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하나님 여호와가 하실 수 있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간구하매”란 말에서 “간구”는 형식적이거나 의무적으로 기도한 것이 아니라 매우 열심히 간구했다는 말입니다. 이는 개구리 재앙을 멈출날을 자기가 마음대로 정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없이.
그는 날짜를 지정할 것에 대한 아무런 언급도 여호와로부터 받은 적이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개구리를 물러 가게 할 날짜가 내일이 될지 일주일 후가 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내일이라는 바로의 요청대로 그렇게 하기로 약속했고 이제 그 일을 위해서 형식적인 기도가 아니라 정말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기도가 끝나자 마자 개구리들이 물러가기 시작했습니다.
개구리들은 집에서 나와서 일정한 장소에서 죽게 됩니다. 그런데 갑작스런 개구리들의 물러남과 집단 폐사는 바로에게 다시금 억지를 부릴 마음을 품게 합니다. 바로는 분명히 ‘내일’ 물러가게 해달라고 했는데 개구리들은 오늘 물러갔거든요. 이래서 바로는 자기 신, 개구리 형상의 헤카신에 대한 미련이 남았습니다. 여호와에 대한 신뢰가 금이 갔습니다. 어쨌든 날짜가 안맞으니까...
이렇게 인간은 자기가 소중하게 여겼던 가치가 이미 쓸모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미련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죄악의 뿌리는 너무 너무 깊습니다. 하나님이 명백한 승리를 목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한 논리로 하나님을 부인하게 됩니다 .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이 깊숙한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무신론자들이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어렵습니다. 어떤 이유를 들어서라도 신의 존재를 부인하려 합니다. 조금의 논리적인 설명이 가능하기만 해도 이적을 부인하려 합니다. 그도저도 아니면 그냥 우연이라고만 생각하려 합니다. 그들은 신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적, 하나님의 손길 자체를 거부합니다. 자기의 행동과 신념이 다른 초월적 존재의 손에 의해서 좌지우지 되는 것 자체를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무더기로 쌓으니”
개구리가 무더기로 쌓인 것은 이들의 신이 가진 싼 몸값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풍요와 다산의 상징이 되려면 이 개구리가 그래도 희소해야 하는데 너무 너무 많아서 무더기로 쌓여 죽어 있으니 그들의 신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뜨거운 태양아래서 푹푹 썩어서 악취가 진동합니다. 도저히 고귀한 신의 사자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애굽인들이 그렇게나 신성시했던 개구리 신도 결국 죽자 악취를 내고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덧없는 모습으로 변할 뿐입니다.
그런데 바로는 개구리가 사라지자 다시금 히브리인들을 붙잡아 두려고 했습니다. 이는 그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이고 인간적인 욕망이 신에 대한 두려움을 이긴 것을 말합니다.
고대의 노예는 한사람에 은 삼십 세겔이었습니다. 소년은 은 이십 세겔. 그런데 이러한 노예가 무려 이백만에 달한다면 엄청난 손실입니다. 그래서 되도록 바로는 히브리 노예들을 풀어 주지 않으려 한 것입니다.
인간은 흔히 자기의 욕심 때문에 조금이라도 기회가 있으면 신과의 약속을 변개시키려 하고 자기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너무 다급해서 신을 인정하고 그에게 자비를 빌었더라도 한고비를 넘기는 순간부터 인간의 마음속에서는 욕심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이깁니다. 인간의 욕망과 죄성은 이정도로 끈질깁니다. 뿌리를 뽑기가 어렵습니다. 이제 바로는 이로 말미암아 더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됩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당장 하나님의 형벌이 멀어지고 숨쉴만해 지면 죄악의 욕망들이 꿈틀거리게 됩니다. 우리 역시 죄인이기 때문이지요. 우리의 눈이 세상의 온갖 좋은 것들을 보며 욕심을 내고 있기 때문이고 이러한 욕심으로 말미암아 죄를 짓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로서 마땅히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 본문의 개구리들은 애굽인들에게는 축복의 상징이었지만 실제로 이 신들은 애굽인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결국 애굽인들은 자기네 신들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있는 것이고 자기의 신들이 자기들을 보호하기는커녕 여호와의 신벌에 이용되고 형편없이 폐기처분되는 모습을 보고 우상의 덧없음을 느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을 직접 눈으로 보고서도 역사적으로 애굽인들의 신앙이 변질되거나 바뀌지는 않았습니다. 왜냐면 개구리신이나 여러 신들은 인간들이 의미를 부여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지도자의 뜻대로 상징을 조작해서 인간들을 통치하기 쉽게 하는데 이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신인 여호와 하나님을 자기들의 신으로 섬기기 시작하면 이제부터는 그 신을 조종하거나 상징을 조작하여 하나님과 사람을 움직이는 것이 불가능해 지기 때문입니다.
형편없이 썩어저 무더기로 쌓여있는 개구리들의 시체가 썩어서 악취가 온땅에 진동함에도 여전히 애굽의 신으로 남게 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적어도 개구리 신은 인간들을 조종하는데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애굽인들은 개구리가 집에서, 밭에서 나가서 집단 자살을 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뭔가 신들이, 개구리 신 헤카가 자기들에게 경고하는 것으로 여겼을 확률이 높습니다. 이와 같이 명백한 사실도 왜곡된 시각과 욕망을 가진 인간들에게는 소용이 없습니다.
죄성에 젖어 있는 인간은 눈앞에 명명백백하게 보이는 사실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는 더 큰 재앙을 불러오는 원인이 될 뿐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대적하려 하지만 인간은 결코 하나님의 상대가 될 수 없습니다. 한계를 깨닫고 그 앞에 무릎 꿇고 그의 명령대로 행하는 것밖에는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보통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재앙을 내리기 전에 우리로 하여금 피할 길을 주십니다. 이는 우리가 그 길에서 돌이키기를 원하고 그래서 재앙을 받지 않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일러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피조물을 신으로 섬기며, 오히려 섬겨야 할 창조주를 무시하는 인간들은 그 죄를 깨닫고 참된 신을 섬길 때까지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잘못된 지도자를 섬기는 백성들도 그 지도자의 무지와 욕심으로 함께 고통을 받을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신념체계는 그 정도로 무서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내 백성을 놓으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고 할 때 그 손실이 얼만지 내 자존심이나 왕권이 얼마나 상하고 위협받을 것인지를 계산하기 전에 하나님의 경고를 받아 들여야 합니다. 그 길만이 더 큰 재앙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지배를 받지 않고 세상에 있지만 하나님의 법의 지배를 받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법칙을 가지고 세상과 싸울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가지고 세상과 싸워야만 승리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우리의 모든 힘과 승리의 원천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번 한주도 하나님의 법으로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2년 4월 15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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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백운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한메일 / stronghjs@네이버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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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 오늘 저의 개인적 이야기들은 특별한 결론도 유도도 없습니다. 고민하는 부분을 털어놓을 뿐입니다.
명말, 청초의 중국 학자, 고염무의 정치 저작 "일지록"에 보면 매우 인상적인 대목이 나옵니다. "천하흥망, 필부유책" 이라고 주장했으니까요. 국가가 망한다고 해서 지도자의 탓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자신의 책임도 짊어질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대목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날 저와 같은 많은 20-30 젊은이들은 "ㅇㅇ탓이다" 라고 말하는 데 익숙합니다. 뿐만 아니라 나는 ㅇㅇ를 뽑지 않았는데, 어리석은 사람들 때문에 우리 모두가 고생이다 라고 변명하는데 능숙합니다. 냉정하게 말해서, 내 책임은 없다, 나는 모르겠다 라는 것입니다. 좋게 말하자면,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세상은 너무 하다 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 라고 말하면 조금 무거운 것 같기도 합니다. 1%의 탐욕과 오만이 얼마나 심각한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권력을 가진 자는 사람을 노예처럼 사고 파는데 능숙합니다. 사회적 약자는 자신의 소중한 성을 팔아서까지 연예계의 문턱을 밟아야 하는 걸까요. 언제부터인가 일부 사람들은 자신이 해서는 안 되는 일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자본을 가졌으므로, 신과 같은 위치가 되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교만", 다른 말로 "멸망의 길" 이라고 말합니다.
1926년 3월 중국에서 시위도중 류허쩐이 살해당하자, 사상가 루쉰이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멸망해 가는 민족이 왜 침묵하는지, 나는 그 이유를 알았다. 침묵이여, 침묵이여! 침묵 속에서 폭발하지 않는다면 침묵 속에서 멸망할 것이다" 2012년 4월 한국에서는 많은 어린 영혼들이 시스템의 감옥 속에서 정신적 살해를 당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목숨을 끊는 일들도 계속 들려옵니다. 세상이 잘못 되었다고 아무도 말하지 않고, 나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 라고 팔짱만 끼고, 나몰라라 하면서, 모두가 책임을 외면한다면, 국가가 그렇게 착취와 억압의 도구, 시스템을 유지하는 기능으로서만 작동한다면, 어쩌면 멸망의 길이 가까운 게 아닐까요.
숨긴다고 해서 영원히 감출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덮으려고만 하고, 고칠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선명한 대가를 치르는 날을 볼 것이라 나는 믿습니다. 루쉰의 말처럼 - "인간이 인간을 잡아먹는 세상이 과연 옳은 세상인가?" 광인들이 미친 듯이 날 뛸 때, 모두가 고개를 숙인 채 침묵한다면, 망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9번을 참고, 마침내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직접 사람을 칩니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9번의 옐로카드를 받았음에도, 사람의 오만함과 욕심은 꺾이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바나나를 손에 꼭 쥐고 놓지 않아서 사람에게 끌려갔다는 원숭이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 모두의 자화상은 아닌지 생각해 보았던 하루입니다. / 2012. 04. 18.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