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2년12월23일/왜 무화과를 저주하셨나(성탄절 설교)/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3. 1. 8. 21:44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2년 12월 23일 주일 예배 (청지기 교회 초정 성탄절 설교)

누가 성탄의 주인인가?

성도 여러분
제가 어릴적에 기억하기로는 그때는 예수믿는 사람들이 지금처럼 많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2월에 접어들자 마자 길거리에는 온통 캐롤이 흘러나왔고 방송에서는 성탄절 특집을 방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건 아니건에 상관없이 성탄의 즐거운 분위기가 가득했습니다. 마치 성탄을 축하 하지 않고 그대로 보내면 큰 죄를 짓는 것처럼 난리였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캐롤을 듣기도 어렵고 방송에서 성탄특집이라고 하는건 무늬만 성탄특집이지 전혀 성탄스럽지 않습니다. 심지어 교회에서조차 성탄절의 분위기는 줄어 듭니다. 청지기교회는 성탄찬송이 많지만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그렇지 못한게 현실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성탄절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주인공이 바뀌어 버렸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깜짝 놀란게 뭐냐면 바로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말을 공식적인 인쇄물에서는 잘 안쓴다는 겁니다. 그 사람들은 해피 할리데이, 행복한 공휴일이라고 합니다. 왜냐면 너무 기독교적이라는 지적에 따른 것 같습니다. 그때 즈음에 유대교에서는 하누카라는 명절이 있습니다. 그래서 디 오시라는 드라마에서는 크리스마카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물론 저희 딸의 학교에서 가져온 팜플릿에는 그 외에도 여러 종교의 명절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전 관심이 없어서...

여하튼 공식적으로는 크리스마스라고 지창하기보다는 그냥 해피 할러데이가 된거지요. 즐거운 명절.
물론 개인적으로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하지요. 아마 인쇄물같은데는 법으로 종교편향적인 표현을 자제하도록 한 모양입니다.

우리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안티 기독교인들이 늘어나서 성탄절을 비난하는 자들이 많아 졌습니다. 물론 이러한 안티 기독교인들이 많이 늘어난데는 교회와 목사들의 책임이 큽니다. 전혀 기독교인다운 행동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기독교와 목사를 욕하는 겁니다. 그런데요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욕 들으려고 이땅에 오셨겠습니까? 보통 일반인들도 생일에는 욕을 듣는 것이 아니라 축하를 듣는거지요.

우리 주님은 사람들의 욕을 들으려고 오신게 아닙니다. 그는 우리들에게 좋은 선물을 주려고 오신 겁니다. 무슨 선물이냐면 자기의 목숨, 순결한 죄없는 인간의 목숨을 주려 오신겁니다. 그리고 이 땅에 정의와 공의가 넘치는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서 모든 이들이 그 안에서 행복하게 살도록 하시기위해서 온 겁니다. 그런 일을 우리는 지금 하고 있습니까?

오늘  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의 승리의 행진과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을 기록한 본문을 가지고 말씀을 전하려 합니다. 이렇게만 보면 이건 영락없는 부활절 설교입니다. 물론 부활절에도 이 말씀을 전할 수 있습니다. 아니 부활절에 더 맞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그런 고정관념을 깨고 이 설교본문을 가지고 성탄절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주제는 누가 성탄의 주인인가?
제가 이 교회의 윗층에 갔다가 지난주에 주일학교의 설교를 옆에서 잠깐 들었습니다. 산타와 관련해서 누가 성탄의 주인인가 아이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가 서초동에서 사역할 때의 일입니다. 저는 매주 토요일밤은 항상 교회에서 자면서 주일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거의 대부분의 금요일밤에도 교회에서 잤습니다. 기도했겠지요. 그런데 그날도 예배당의 문을 닫기 전인 9시 경에 예배당에 들어갔습니다. 불도 꺼져있고 복도 저편에만 비상등이 켜져있어서 조용합니다. 당연히 경비하는 아르바이트생 말고는 아무도 없어야 되는데 그 학생은 사무실에 있습니다. 그런데 복도 저 끝에 한 사람이 서 있습니다. 저는 무심코 예배당에 들어섰다가 로비에서 저쪽 복도의 사람 그림자를 보고는 깜짝 놀라서 가만 있었습니다. 아마 그 사람도 저를 보고는 깜짝 놀란 것 같습니다. 가만 있더라고요.

조금 있다가 혹시 인사라도 해야 될 것 같아서 조금씩 조금씩 다가갔습니다. 그런데 가보니까 놀랍게도 산타 클로스입니다. 붉은 옷을 입고 고깔 모자를 쓰고 있습니다. 등에는 거대한 선물 보따리를 짊어 지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산타를 처음 보았습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특징이 있는데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인형이예요.
전 몰랐는데 그 교회는 매년 성탄절에 산타를 교회 복도에 세워두는 장식을 한답니다. 황당합니다. 성탄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세상도 아니고 교회 안에서 성탄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그래요 오늘 우리에게 물어야 될 주인이 나는 누구를 성탄의 주인으로 생각하는가입니다. 세상이 산타 클로스를 성탄의 주인으로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명백합니다. 백화점 같은곳에서 산타와 크리스마스 크리는 장식되어 있지만 아기 아기예수님의 나심을 생각나게 하는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말이 성탄절이지 무슨 성 니콜라스 축일같은 느낌입니다. 산타 클로스의 본명은 성 니콜라스입니다. 라틴어로는 상투스 니콜라우스. 로마제국당시의 소아시아, 지금의 터키의 주교인 성 니콜라스. 그런데 미국에 이주한 네덜란드 사람들이 붙여 준 이름이 오늘날의 산타 클로스입니다. 산타가 왜 이 성탄의 주인이 되었을까요?

그는 선물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의 가사를 한번 찬찬히 살펴 봅시다. 착한 아이는 선물을 주고 우는 아이는 선물을 안 주신답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이 가사는 좀 어폐가 있습니다. 왜냐면 산타 할아버지는 누가 착한 아인지 나쁜 아인지를 알고 계신답니다. 뭐 그럴 수는 있는데, 그렇다면 이상한 게 나쁜 아이에게 선물을 안줘야 되는데 우는 아이에게 선물을 안준답니다. 우는게 그렇게나 나쁜 일입니까? 부모들 입장에서 애가 시도 때도 없이 울어 제끼면 힘들고 귀찮기는 하지만... 여하튼 가사에서는 나쁜 아이에 관해서 어떻게 하는지에 관한 내용은 없습니다. 그래서 마치 우는 아이가 나쁜 아이인것처럼 여겨집니다.

안우는게 꼭 착한 것은 아닙니다. 아이라면 정말 아이라면 울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울면 선물을 안준다고 협박하면 아이는 절대 안울어야 되는데 이건 너무 가혹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산타는 벌을 주지는 않습니다. 단지 그가 내리는 벌은 선물을 안주는 것입니다. 전 오늘날 성탄절의 주인이 산타가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풍채가 좋지요. 항상 하하하 하고 호탕하게 웃으며 선물을 주고 갑니다. 우리가 잘못을 해도 선물을 안줄뿐 벌을 내리지는 않습니다.

그래요 무조건 주기만 하고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꾸짖지 않기 때문에 오늘날 산타가 바로 성탄절의 주인이 된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유형의 인간이거든요. 득이 되면 됐지 해는 절대로 안되는 사람, 바로 산타입니다. 그게 이 산타를 성탄의 주인으로 만든 겁니다.

대신에 우리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면서도 우리가 잘못했을 때는 채찍을 드십니다. 심지어 우리가 회개해도 용서는 해 주시지만 죄과를 치르게 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인기가 없습니다. 적당히 좀 그냥 넘어가고 약간 잘못한거도 자기편이 그런거니까 오냐 오냐해야 됩니다. 그래서 인기가 없는 것이지요.
또 착한 일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복을 주는 것도 아닙니다. 현대인에게 인기가 없을만 합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봅시다. 주님이 무엇 때문에 이곳으로 오셨을까요? 그분 역시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것도 자기의 가장 귀한 것. 바로 목숨을 주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초코렛이니 사탕이니 장갑이니 휴대폰이니 하는 선물을 주는 것이 아니라 너무 너무 크고 중한 것을 주러 오신겁니다.
바로 자기의 목숨. 그냥 인간의 목숨이 아니라 세상의 주인의 아들의 목숨.

그래서 그분의 죽음으로 사망권세를 깨트리려고 하신 것이지요. 사망의 권세아래 신음하는 우리를 해방시키려고 하신 것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는 말은 바로 주님이 우리에게 이 세상의 사탄의 법칙과 지배를 깨어버리고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주시기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실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는 것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것보다 더 크고 귀합니다.

그럼에도 주님이 인기가 없는 이유는 산타처럼 눈에 보이는 적은 것을 선물로 주시지 않아서입니다. 너무 크고 너무 귀해서 그래서 오히려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하는 사람들의 눈에 전혀 아무것도 주는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분의 생일인 성탄절에 엉뚱한 사람이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새벽에 예루살렘성으로 들어가시다가 무화과 나무를 저주한 기사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저주를 받은 무화과 나무는 즉시 말라 죽어버렸습니다. 물론 이건 이적입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자연법칙을 뛰어 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무화과 저주 사건이 주는 영적인 교훈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말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단순히 무화과 나무가  예수님으로부터 저주받았다는 것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자연히 이 무화과 저주사건이 주는 교훈하고는 관련있는 내용을 다루지도 않습니다.
뭐 우리 주님이야 신이시니까 그가 저주하면 무화과도 저주를 받습니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 역시 믿음만이 있다면 산을 옮길수도 있습니다. 다만 우리의 믿음이 거기에 미치지 못할 뿐이지요.

그런데 저는 오늘 여기서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예수님의 인간적인 면을 한번 짚어 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흔히 착각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신이기 때문에 배고프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고 고통도 없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분이 계속 신으로 있었다면 성탄절이 있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늘 우리는 한그루 무화과 나무로 부터 거슬러 올라가 주님의 사랑과 고뇌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마가11:1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 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니라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마태21:17-
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

참고로 말씀드리면 마가는 시간순으로 복음서를 기술했고 마태는 주제별로 복음서를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시간의 순서는 마가를 따르는 것이 보다 정확합니다.

1.예수님은 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셨을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무화과 열매를 얻지 못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서 무화과는 ‘가난한자의 양식’이라고 불려집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는 누구나 이 무화과를 따먹을 수 있도록 허락되어 있었습니다.

본시 무화과는 보통 3월말에 싹이 나서 5,6월에 열매를 맺고 8-10월 사이에 수확을 하게 됩니다. 박영국 목사님이라고 있는데 그분은 이 무화과를 파게라고 합니다. 음 본열매가 나기 전에 나는 것으로 누구나 따먹을 수 있는 것이라는 겁니다. 우리말로 하면 돌무화과 정도.

여하튼 성경의 표현대로 아직 무화과가 열릴 철이 아니므로  3월말에서 4월경에 열매를 구한 것은 시기적으로 너무 빨랐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활절이 4월초라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직 무화과가 열리지도 않았을 것이고 열렸다고 해도 그것이 익어서 따 먹을 수 있으려면 아직 몇 달 더 있어야만 합니다. 당연히 예수님도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고난주간 전에 이일을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무화과는  열매가 먼저 나고 난 다음에 잎사귀가 나거나 적어도 잎과 동시에 열매가 맺히기 때문에 푸른 잎사귀가 있다는 것은 당연히 열매가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사람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계절상으로는 아직 멀었지만 항상 예외라는게 있지않겠습니까?

무성한 무화과의 잎사귀는 ‘혹시’하는 기대를 가지게 만들 수 있습니다.
13절에 보면 “멀리서 잎사귀있는 한 무화과 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하여”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역시 이런 희망을 가지고 무화과를 살피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나무에는 비록 잎사귀는 무성했지만 어떤 열매도 있지 않았습니다.

자 여러분
이렇게 본다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얻지 못했다고 예수님께서 저주하신 것은  조금 사리에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본문의 저자인 마가역시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시 같은 13절 후반부에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그렇습니다. 무화과가 열릴 철이 아닌데 무화과를 얻지 못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여러 가지 궁금증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신적 예지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있는지 없는지를 알지 못하셨나, 제철도 아닌데 열매가 없다고 나무를 저주하시다니 정말 너무 한 것 아닌가’ 등등
여러 가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러한 궁금증에 대한 답변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무화과나무는 우리가 오늘 이야기할 내용의 시발점이 될 뿐입니다. 사실 이 무화과 나무 저주 기사는 이스라엘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의 급박성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소개됩니다.
그러나 단지 그것만으로 끝나서는 이 사건 뒤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인간적 고뇌에 일부러 눈을 감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2.예수님은 시장하셨습니다.
저는 여기서 왜 예수님께서는 무화과 나무를 보시고 열매를 얻으려 하셨는지에 한번 초점을 맞추려 합니다. 이때 열리는 무화과는 파게라는 것으로 사람이 먹을 수는 있지만 사람들이 먹기에 좋은 열매는 아닙니다. 그 열매는 이 파게가 다 떨어지고 난 다음에 열립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멀리서 무화과 잎사귀를 보시고는 혹시하는 기대를 가집니다. 왜 일까요?

마가복음에는 나와 있지 않은데 본문과 같이 무화과 저주사건을 다룬 마태복음21:1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라고 기술되어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구절은 “이른 아침” 과 “시장하신지라” 라는 구절입니다.

“이른 아침”은 히브리어로 ‘프로이’라는 말로 새벽3시에서 6시 사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실상은 문자 그대로 이른아침이 아니라 새벽 그것도 이른 새벽인 셈이지요. 그러므로 이른 아침에 이미 예루살렘성으로 향하는 도상에 계신 것을 보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아침식사를 하지 못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옛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유대인들도 하루에 두끼만을 먹었습니다. 그러니까 아침과 저녁만을 먹은 겁니다. 조선시대 후기까지 점심은 임금님이나 고위 양반들이나 먹었던 것이고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 중에서 점심때 참을 먹는 일은 있었지만 그런 일을 하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점심은 먹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하루에 세끼를 제대로 먹게 된 것은 비교적 근세에 들어와서의 일입니다. 세끼가 아니라 두끼도 제대로 먹기가 어려웠을 때입니다. 먹을게 없었거든요. 지독히도 가난했던 시절 굶어 죽지 않는 것 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시절에 점심은 사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역시 하루에 두끼만을 드셨습니다.

그래서 하루에 두끼를 먹었던 옛날에 한끼를 굶는 것은 상당히 고통스런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자세히 본다면 예수님과 제자들은 한끼만을 굶지 않았을 확률이 아주 큽니다. 두끼를 굶었을 확률이 있다는 거죠. 왜냐면 주님은 저녁때가 넘어서 예루살렘 성에서 나오셨기 때문입니다. 즉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는 이미 날이 저물어서 식사를 하실 수가 없었다는 말이지요. 저녁식사때를 놓친거지요. 그리고 아무도 주님에게 식사를 대접하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그는 노숙을 하셨을 것이거든요.

점심이 없는 시절에 두끼를 굶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지금 만 하루를 꼬박 굶고 계시다는 것을 뜻합니다.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배가 고픈겁니다. 그래서 설익은 무화과 열매라도 따먹으려고 무화과나무로 가까이 가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본문 11절에 “때가 이미 저물매 열 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과 마태21:18절의  “이른 아침... 시장하신지라” 라는 구절을 연계시켜서 로버트선이란 학자는 예수님과 제자들은 베다니의 길거리나 야외에서 노숙을 했을 확률이 아주 높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만일 주님이 베다니의 어떤 집에서 유숙을 했다면 당연히 그들이 주님에게 아침을 대접하지 않았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만일 노숙하셨다면 아마 저녁도 드시지 못했으리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때가 이미 저물매, 다시 말해서 저녁때가 지났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저녁을 굶고 베다니에 도착했는데 아무도 그들을 맞아 주지 않아서 노숙을 했고 그리고 아침 전에 예루살렘 성으로 가고 있습니다. 이게 바로 본문의 배경그림입니다. 예루살렘성은 지금 유월절 잔치기간입니다. 세계 각국에서 몰려온 유대인들 때문에 터져나갈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 역시 예루살렘에서 주무시지 못하고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베다니로 주무시러 나오는 것입니다.

3.그러면 왜 주님은 노숙을 하셨을까요
그것은 베다니에서  아무도 주님을 맞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주님께서 일부러 사람들의 집을 찾지 않으셨을 확률도 있기는 합니다. 가난한 베다니사람들에게 갑작스런 열세명의 식사준비는 굉장한 부담이었을 것입니다. 건장한 장정 13명의 두끼 식사를 준비한다는 건 왠만한 집에서도 부담이 되는 일입니다. 로마의 식민지 시절 베다니 같은 작은 동네에서는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마 주님은 그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 노숙을 택하셨을지도 모릅니다

여하튼 주님은 아무도 맞아들이는 이 없는 한적한 곳에서 추위와 배고픔을 이기셔야 했을 것입니다.  사막기후가 굉장히 좋지 못한 것은 낮에는 너무 덥고 밤에는 반대로 너무 춥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이 노숙할때는 상당히 추웠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의 겉옷을 잡혔다면 저녁이 되기 전에 가져다 주라는 구절이 생각납니다. 그 겉옷은 가난한 자의 이불이기 때문에 밤에 덮고 자야 되기 때문이지요.

더구나 저녁밥을 못먹고 노숙을 하게 되면 이상하게 더 춥습니다. 뱃속이라도 든든하게 채우면 한결 지나기가 나았을 터인데 그들은 지금 저녁을 굶고 노숙을 하는 중입니다. 그래서 새벽같이 일어나서 예루살렘 성으로 길을 재촉하는 겁니다.

주님이 배고프시다는 것을 우리는 상상이나 할수 있습니까? 물고기 두마리와 떡 다섯덩이로 장정만 5000이 넘는 무리를 먹이셨던 능력의 주님께서. 자기를 위해서는 한덩이 빵도 만들지 않고 그대로 주린배를 움켜쥐고 노숙했다는 것 참 서글픈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배고프셨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는 오병이어의 이적을 발휘하시는 분이지만 자기를 위해서는 돌로 떡 한덩이도 만드시지 않은 분이셨습니다.

백성들을 사랑하셔서 그들을 위하여는 두 번이나 떡을 계속해서 끊어지지 않게 해서 수천명을 먹이시고는 했지만 광야에서 40일간의 금식 기도 후에 사탄의 시험을 받았을때에도 결코 자기를 위해서는 돌로 떡을 만들지 않으신 분입니다. 그래서 완전한 신이지만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신 주님은 추위와 굶주림으로 고통받으셨습니다. 안먹으면 배고픈 거지요. 지금은 금식기도하는 중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가 하시려고 하는 일은 그러한 박정한 인간들을 위해 어떻게 하면 십자가를 지고 죽으실까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그는 죽으러 예루살렘성에 올라 오신 겁니다. 죽으러 가는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웃기지 않습니까?

우리를 위해서는 높고 영광스런 하늘보좌도 버리시고 낮고 천한 말구유에 오신분이시며 33년간 이땅에서 우리들에게 아낌없이 사랑을 주시고는 그것도 모자라서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신 그런 사랑의 주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해서는 어떤 이적도 베풀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떡 한덩이를 만드는 이적도 행하지 않으신 분입니다. 그건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어기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거라고 생각하셨을까요? 그래서 그는 아무도 대접해 주지 않는 베다니에서 춥고 배고프셨습니다.

주님은 자기의 가장 소중한 순결한 목숨을 우리의 죄를 위해 주시려고 하시고 계신데 사람들은 주님이 자기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고 산타만 좋아합니다. 그게 성탄절의 비극이지요.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차이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 보다 훨씬 더 비교할 수 없을만큼 더 귀하고 값진 것임에도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철저히 외면합니다.

4.사람들은 하루만에 그들의 태도를 바꾸었습니다.
여러분
불과 하루 전에 주님께서 예루살렘성으로  입성하실 때 그들은 어떠했습니까? 베다니 옆동네 벳바게 사람들은 주님에게 나귀새끼를 무상으로 제공했으며 ,제자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의 등에 펴고
나머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땅에 펴며, 가지를 꺾어서 깔았으며
순례자들은 종려가지를 흔들며  주님의 행렬을 열렬히 환영하지 않았습니까?

가난한 자들에게 겉옷은 어쩌면 재산목록 일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하여 자기의 겉옷을 벗어서 아낌없이 땅에 깔았던 자들이 이번에는 주님에게 한끼의 식사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한두명이 아닙니다. 적어도 수십만명의 사람들이 주님을 환영했습니다. 왜 사람들이 그를 환영했을까요? 그가 이번에는 반드시 왕위에 오르실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왕에게 잘보이기위해 자기의 겉옷을 벗었던 겁니다. 새로운 왕을 환영하기위해 종려 가지를 꺾어서 흔들며 그를 환영하고 따른 겁니다. 그리고 새로운 왕과 더불어 로마의 군대를 내몰고 그래서 새로운 세상이 올 줄로 여겼습니다. 성지순례를 다녀온 분들의 말에 의하면 벳바게에서 2-3분정도 차로 더 가면 베다니가 나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벳바게와 베다니는 바로 옆마을입니다. 베다니의 바로 옆마을인 벳바게에서 나귀새끼를 주님에게 제공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앞뒤를 따르면서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소리높이 외치며 주님을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갈릴리에서 유대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신 주님을 환영한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왕으로 대접했습니다. 온 예루살렘이 예수님의 입성으로 소동했습니다. 오랜 로마의 식민지에서 벗어나 독립왕국을 이루고 그 옛날 다윗같은 멋진 임금이 되어서 거대한 영토를 아우르는 거대한 왕국의 국왕이 되실 걸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정신없이 그를 따르며 환영한 것입니다.

그러던 것이 불과 하루 전인데 지금 주님은 몸 누일 곳을 찾지 못하시고 야외에서 유숙하시며 아침을 굶으시고 시장하셔서 무화과 열매를 찾으려 하셨던 것입니다.
도데체 하루만에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10절에 보면 “ 오는 우리조상 다윗의 나라여”라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는 처음 유대인들이 주님을 자기네를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키고 옛적 다윗 임금때의 강력한 나라를 만들 정치적인 메시야로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당시 유대인들에게 메시야의 오심은 너무나 간절한 소원이었습니다.

그만이 저 강대한 로마제국을 물리치고 이 땅을 새롭게 할 수 있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자기들을 위하여 빈들에서 잔치상을 베푸실 때 사람들은 모두 옛날 선지자들이 말하던 메시야가 바로 주님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 유월절에 드디어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에게 소중한 것들을 아낌없이 드리며, 겉옷을 땅에 깔고 종려가지를 흔들며 주님을 환영하고 따랐지만 
주님이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시고 단지 11절의 표현대로 단순히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는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로 나가시”고 말았기 때문에

그들은 더 이상 주님에게 잠자리와 식사를 제공하지 않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생각에 주님을 환영한다는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들의 기대 대로  성전주위의 안토니 요새에서 로마군인들을 몰아내지도 않고 왕좌에 앉아서 제2의 다윗왕국도 선포하지 않고, 단순히 성전을 둘러보시고는 나가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주님에 대한 정치적 환상이 깨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심지어 주님은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와 돈바꾸는 자들을 보시고도 그냥 나오셨습니다. 사실 성전 정화사건은 무화과 저주이후에 나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마지막 일주일의 전반부에 계속해서 예루살렘에서 베다니, 예루살렘에서 감람산으로 나왔다 들어갔다 하시면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분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험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은 하루아침에 태도를 돌변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5.베다니까지 주님을 배반했습니다.
여러분
이 베다니에는 예수님께서 죽은지 사흘만에 무덤에서 살려주신 나사로 남매가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마리아와 마르다가 사는 동네. 뿐만 아니라 주님이 지극히 사랑하신 고장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잡히시던 마지막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님은 베다니에 당도하셨습니다. 그때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고 이때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에 삼백데나리온짜리 향유 한근을 붓고 머리털로 씻었습니다.

이렇게까지 예수님을 환영했던 그 사람들은 예수님을 외면했습니다. 베다니 사람들은 주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는 광경을 보았고 주님이 하나님이 특별히 보내신 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수많은 유대인들이 나사로의 집으로 와서 나사로의 살아난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부활의 증인들이었습니다. 주님이 예루살렘성에 오실 때는 대게 이 동네에서 유하셨습니다. 음, 아마 너무 친하고 그리고 충분히 주님의 일행들에게 대접을 할만 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러나 그뿐입니다. 그러한 사랑을 아낌없이 받았던 베다니조차도 주님에게 아무런 유익을 구할 수 없다고 판단하자 주님을 배반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주님을 노숙하게 했고 주님이 길거리에서 떨며 배고파할 때 외면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 본문처럼 이른 새벽에 무화과 열매를 찾으시게 까지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베다니에 있지는 않았습니다.
역시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 성으로 종려가지를 흔들며 동행하지도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맞아들이지 않아서 그분을 길거리에서 유숙하게도 하지 않았고
하룻밤 잠자리와 한끼 따뜻한 식사를 아끼지도 않았습니다

당연히 우리는 주님을 외면한 적이 없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놀라우신 사랑,
영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
높고 영광스런 하늘보좌를 버리시고 오늘 이 낮고 천한 자리에 오셨는데,
마지막 피와 물 한방울까지 아낌없이 우리를 위해 쏟아주셨는데

지금 우리는 과연 주의 나심을 어떻게 기념하고 있습니까?

그의 나심은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그냥 장사꾼들이 장사를 좀더 많이 하는 날로 그칩니까? 청춘남녀들이 설레는 마음으로 짝을 찾아 가는 날로 그칩니까? 예수님이 아니라 산타 클로스가 무슨 선물을 주었는지가 궁금해서 주님이 아니라 산타만 찾는 날로 그칩니까? 주님의 나심과 사랑과 죽음 그리고 부활은 우리에게 너무나 큰 사건이고 은혜입니다. 

오늘 그 큰 의미가 있는 성탄절이 설마 단순히 절기헌금을 내는 날로만 기억되지는 않겠지요?
주님이 내게 유익이 되면 그 앞에서 온갖 죽는 시늉까지 다하다가 주님이 내게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언제 그랬더냐는 듯이 냉정하게 주님을 배반하고 돌아서는 2000년전 유대인들 같지는 않습니까?

이제 우리는 이 무화과 한그루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랑하셨지만 사랑받지는 못하셨던 주님을 생각하는 그런 성탄절
그 놀라우신 사랑을 이제는 조금이라도 돌려드릴 수 있는 그런 성탄절

최후의 순간에 자기의 사랑하는 이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하셨지만 그 외면한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고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을 우리를 위해 아낌없이 선물로 주신 그분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은 그를 사랑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요, 인간의 사랑을 넘어서는 신적인 사랑. 그 사랑 때문에 그는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모욕을 받으셨으며 마침내 사망권세를 이기신 것입니다. 우리가 사망의 권세에 굴복하는 것을 통분히 여기셔서 스스로 사망권세를 깨뜨리기위해 십자가를 지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결코 그는 아무것도 주시지 않은 분이 아닙니다. 그리고 하늘로 가시면서 보혜사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내가 가도 너희는 결코 혼자가 아니야. 성령께서 더 큰 일을 너희를 위해 해 주실거야. 그래요, 그는 끝까지 우리를 위해 사랑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기껏 몇천원, 몇만원짜리 선물 때문에 산타를 성탄의 주인으로 생각합니다.

주께서 우리를 위해서 이제 오셨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분의 나심을 알지 못했습니다. 베들레헴은 당시 인구 2000명의 아주 적은 마을이었습니다. 그곳의 여관에서 그것도 말구유에서 나셨습니다. 왜냐면 당시 로마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천하에 영을 내려 호적을 하라고 했기 때문에 본적지로 사람들이 몰렸거든요. 그래서 방이 없었습니다. 주님은 부자도 권세가의 자식도 아니었기에 말구유에 그 몸을 누이실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제 그는 죽으러 가시기 전에 역시 노상에 몸을 누이시다가 마침내 무화과를 저주하시게까지 된 겁니다.

성경을 깊이 있게 보고 의미를 해석하고 교훈을 찾으려는 자세도 좋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사실을 보고 왜 그러한 일이 일어났는지를 본다면 우리는 주님이 느끼셨을 인간적인 고뇌를 알 수 있습니다. 성탄절, 호화로운 백화점에서 산타가 웃음짓고 비싼 물건들이 오고가는 그러한 세태를 위해서 주께서 성탄절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오히려 가난한자, 약한자, 병든자, 소외된 자, 그리고 억울한 자를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의 나심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땅에 임하기 시작했다는 표시입니다. 자본의 나라나 귀족과 재벌의 나라가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자의 나라가 만들어 지기 시작한다는 표시입니다.

주는 다시 하늘로 올라 가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곁에 눈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도 우리를 위해서 하늘보좌 우편에서 간구하고 계시고 또 보혜사 성령님을 우리에게 대신 보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거든요. 그래도 우리를 사랑하셨던 그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는, 자기의 목숨까지도 우리를 위해 선물로 주러 오셨던 주님을 생각하는 그런 성탄절을 만들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서로 서로 주님의 나심을 축하하는 것도 좋은데 성탄절 기념으로 반드시 이웃을 위해서 좋은 일 하나씩을 하는 날로 만들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끼리만 축하하지 말고 믿지 않는 사람들도 주님의 나심을 축하하도록 만듭시다.

황금방울을 흔들며 루돌프 사슴을 타고 하늘을 나는 산타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아니라 주님의 구유에 나심과 목자들과 동방박사들의 경배가 상징이 되는 그런 성탄절을 만듭시다.

주님의 나심은 뒷전이고 자기들끼리 축하하고 즐기는 성탄절의 주인공은 산타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제 뒷전으로 내몰린 성탄의 진정한 주인을 앞자리로 내세우는 우리가 됩시다. 그래서 기독교인들뿐만 아니라 아이들과 청춘남녀들뿐만 아니라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도 나아가 온 인류가 다 함께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그런 성탄절을 만듭시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2년 12월 23일 주일

――――――――――――――――――――――――――――――――――――――――――――――――――――――――――――――――――――――――――

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백운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한메일 / stronghjs@네이버 연락주세요

――――――――――――――――――――――――――――――――――――――――――――――――――――――――――――――――――――――――――

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몇 번 이 본문으로 글을 올려둔터라, 이번에 다른 버전을 또 올려보는구나 싶어서, 대수롭지 않게 문단정리를 하다가, 불현듯 매우 강한 감정적인 동요를 받습니다. 뜻밖에도 이것은 "깊은 슬픔"이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렇습니다. 이 곳은 내가 주인이다 라고 생각하던 소중한 공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한 2천년쯤 시간이 흘렀다 칩시다. 그리고, 그 시간이 지나고 다시 와보니, 아뿔싸, 주인이 바뀌어 있네요.

원래 주인은 얼마나 슬플까요. 결국 이 무화과 사건도 그렇습니다. 자신은 사랑 하고자 왔지만, 정작 사랑 받지 못할 때의 그 당혹감. 우리가 잘 알다시피 짝사랑 만큼 슬픈 게 없습니다. 짝사랑의 결말은 자주 눈물로 귀결될 때도 많고요. 어쩌면, 우리가 희희락락 메리 크리스마스 하면서 신상을 지르고, 친구들과 신나게 밤새도록 놀고, 해피한 연휴를 마음껏 즐기고 있을 때, 예수님은 그 모습을 말 없이 바라보면서 슬퍼하고 계시리라 생각되어 졌습니다.

저기 저 이웃이 보이느냐, 라고 물어보실 것만 같습니다. 다른 사람을 외면하고 사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린 무감각한 현대인들을 보시고서, 채찍과 고통 대신에 오직 즐거움과 쾌락만을 원하는 현대인들을 보시고서, 예수님은 그 때 노숙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슬퍼하셨을 것만 같습니다. 지금의 감정으로 표현하자면, 저는 이제껏 논리적으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무화과 저주사건을 슬픔과 연관 시켜서 생각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지독한 배신의 슬픔이 담긴 상징적인 사건이 아닐까 라고... 말이지요. 물론 저같은 사람은 신학자도 아니고, 코멘트는 이쯤에서 마칠까 합니다.

성숙한 사랑이 된다는 것은 서로에게 반응을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입으로는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그 삶 속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고, 이익이 될 때만 좇아다닌다면 그것은 전혀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작게나마 신앙이 있다면, 예수님의 삶을 자주 묵상하고, 또 그 분의 말씀에 귀기울이고, 그 분의 반응을 기다리는 것이 필요하겠지요. 그렇게 서로 함께 발맞추어가면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그토록 원하시던 천국을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 2013. 01.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