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Review]/영화

파수꾼 (Bleak Night, 2010) 리뷰

시북(허지수) 2013. 2. 10. 04:35

 한 소년이 죽었다. 짧은 문장으로 시작되는 줄거리. 영화 파수꾼 이야기 입니다. 파수꾼은 상당히 독특한 전개방법과 장르감을 보여줍니다. 죽은 사람을 추모하거나, 애도하는 영화가 아닙니다. 죽음까지의 과정을 집요하게 추적하는 영화도 아닙니다. 세 친구로 부를 수 있는, 청소년들의 또래집단 이야기를, 오늘날 아이들 일상의 표현방법을 그대로 담아서 영화가 이어집니다. 보는 도중에, 우리는 어쩌면 불편함을 느낄 수 있고, 무엇보다 관계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준다는 측면에서, 이 영화는 충분히 매력적이며, 또 뛰어난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와 동갑인 윤성현 감독의 연출력과 각본력에 저는 대단히 감탄했습니다. 앞으로가 정말 기대되는 무서운 천재성을 보여주었는데, 그의 장편 데뷔작이 파수꾼입니다. 부끄럽지만 조금 자랑을 하자면, 저는 그래도 중고등학생들과 자주 교류를 나누는 편입니다. 특히 남자애들과 말이지요. 저와 띠동갑인 94년생 몇몇 녀석들과는 많은 이야기를 나눠보기도 합니다. 어떤 녀석들은 저를 편한 의미에서 "쌤"이라고 부르고, 저의 일들을 자주 도와주곤 합니다. 이 청소년 친구들은 저마다 고민도 있고, 가끔 서로 싸우기도 하고, 그러면서 지금을 살아가고 있지요.

 

 

 그래서, 부디 저의 리뷰가 그들을 향한 꼰대의 시선이 아니기를 소망합니다. 저는 소통을 정말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폐가 안 좋아서 잠깐만 손대고 끊었던 담배도, 이 94년생 애들과는 한 번씩 나눠피기도 합니다. 2013년이 되어 이 녀석들 모두가 성인이 되었다지만, 여전히 몸만 성인이고, 가끔 철없는 모습에 저는 어이없어 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이 리뷰의 핵심키워드는 "공감"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이 리뷰는 파수꾼에 대한 저의 시선과 경험이기도 하다는 것을 미리 밝혀둡니다.

 

※이제부터의 내용은 영화 본편에 대한 누설이 담겨 있으므로 아직 영화를 보시지 않은 분은 주의하세요!

 

 영화의 핵심인물인 기태(이제훈)는 어딘가 모르게 속이 꼬여있는 친구입니다. 저는 이것을 일종의 열등감이라고 해석하고 싶은데, 남들이 가진 것을 자기가 가지지 못했다는 원망감을 피부로 입고 있습니다. 그럴만도 하겠지요. 기태는 자신이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주목받고 싶은 욕구는 표출할 때가 없어서 좌절된채 다른 형태로 (그것도 좋지 못하게) 드러납니다. 간단히 말해, 그는 MVP 인생을 원했지만, 시궁창 현실 앞에서 동네 골목대장이라도 해먹으면서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맞춰나갑니다. 좀 거칠게 말하자면, 뭐 거의 양아치 같이 살아가는 셈이지요.

 

 다행스럽게도 기태에게는 두 명의 친구가 있습니다. 동윤이와 희준이 입니다. 동윤이는 어릴 적부터 같이 지내왔던 소꿉친구고, 희준이는 최근에 사귀게 된 마음이 잘 맞는 친구입니다. 셋은 기찻길에서 야구를 하면서 놀기도 하고, 같이 여행을 계획해서 실행에 옮기는 등 얼핏 보면 행복한 관계를 이어나가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전달하는 방법을 몰랐던 기태로 인해서, 상황은 서서히 파국을 향해서 한 발, 한 발 나아갑니다.

 

 잠깐 여기서 숨을 고를 필요가 있기도 하고, 이 이야기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인간이 성숙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시선에서 생각하는 능력을 갖춤"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좀 더 풀어쓰자면, 내가 주고 싶은 것을 그냥 막 주는 게 아니라, 상대방이 필요하고 원하는 것을 살펴보고 주는 것. 이것이야말로 좋은 인간관계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 단어로 표현하면 "배려심" 이지요. 가령, 나는 배가 고프고, 저 친구는 밥을 먹은 상황이라면? 여기서의 배려심은 "야, 배고프다 밥먹으러 가자" 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너는 이미 밥먹었다고 했으니, 나는 배고파서 일단 밥부터 먹을께, 너는 뭐할래?" 라고 묻는게 배려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의 입장을 충분히 생각하고서 말을 꺼내는 것이지요.

 

 오늘날 우리는 이 문제를 꽤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기업이 우리가 자랑하는 물건을 마구 만들어서 파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저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부터 생각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통찰이기도 합니다. 이 기능, 저 기능, 우리 기업이 생각하는 좋은 기능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 보다는,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을 디자인과 편리함이 들어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설득력 있고,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말이지요.

 

 기태는 이 점에서, 다른 사람의 감정을 오직 자신의 시선에서만 이해하려고 합니다. 이야기를 충분히 듣고, 함께 고민하기 보다는, 말해보라면서 협박에 가깝게 타인을 몰아붙입니다. 이러한 장면에서 우리는 불쾌감을 느낄 수 있는데, 이것은 그의 행위가 "엄연한 폭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정을 이야기 하고 있지만, 실상은 우정이라는 이름의 양가면을 쓰고 있는, 험악한 이빨의 늑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심리학에서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일반적으로 사람을 진심으로 좋게 대하면, 그 사람도 나를 좋게 대합니다. 반대로, 영화에서처럼 그렇게 사람에게 위협을 가하기 시작하면, 돌아오는 반응도 점점 냉담해 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기태는 왜 이것을 몰랐을까요. 나아가 왜 아무도 이것을 말해주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그 주변에 그를 잡아줄 어떠한 사회적 기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태는 힘겹게 두 친구, 동윤과 희준이에게 의지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기태의 절규는 이렇게 들립니다. "친구잖아, 너희는 제발 날 버리지마" 사람은 사회적 관계가 끊어지면, 좀 더 거칠게 말해서 집단에서 소외되거나 왕따 같은 행동을 당하면, 버티기가 힘듭니다. 무서운 것은 이런 차별과 배제의 논리가 여전히 10대 또래집단에서도 자주 일어난다는 것이겠지요.

 

 친구 희준은 기태의 나랑 놀지 않으면 친구도 아니다 식의 폭압적 논리 앞에서, 상처 받으며 그의 곁을 떠납니다. 친구 동윤은 어떤가요. 기태가 자기 멋대로 행동하면서, 동윤이 가지고 있던 소중함을 무참하게 깨부수기 시작하자, 그를 경멸하며 그의 곁을 떠납니다. 잘못은 기태에게 있음에도, 기태는 영화가 끝나갈 때까지 눈물만 흘릴 뿐, 왜 상황이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어 합니다. 이 부분이 너무 선명하게 남습니다. 영화의 영어판 제목처럼 기태의 삶은 이제 황폐한 밤"Bleak Night"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기태는 자신이 제일 아끼던 것 (야구공) 을 친구에게 주고, 삶에 작별을 고합니다. 이 장면이 소름돋을 정도로 표현이 잘 되어 있습니다.

 

 서로 소통을 원했지만, 결국 영화는 후반부로 가면서, 전혀 소통이 되지 못했던 세 친구의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한 아이는 소중한 생명을 잃었고, 한 아이는 학교를 옮겨서 찌그러져 지내고, 한 아이는 학교를 그만두고 잠수한 채로 소리 없이 살아갑니다. 서로 마음을 맞춰가면서, 배려할 줄 알았다면, 이 세 친구는 어쩌면 평생을 같이할 자랑스러운 친구가 될 수도 있었는데... 소통과 공감능력이 안드로메다로 갈 때, 현실 속의 관계가 얼마나 철저하게 망가져 나가는지 너무 잘 보여주는 영화 파수꾼이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요즘 아이들의 표현능력 상실을 조금 걱정하는 편입니다. 욕설은 잘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데는 서투르다는 느낌을 자주 받습니다. 그리고, 이 생각을 밀고가면, 저는 한 가지 무서운 지점에 다다르게 됩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어른 사회를 모방하면서 커나가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 모두가 감정을 표현하는게 서투르기 때문에, 아이들도 마찬가지가 된 게 아닐까요? 경쟁하고, 살아남고, 돈벌고, 공부하고, 우리가 하는 소리는 매번 이런 식입니다. 저만해도 학교 그만둔 애가 있으면, "그래 검정고시는 이번 4월에 치냐, 아님 8월에 칠꺼냐." 라고 묻기 바쁩니다. 왜 학교를 그만두었는지 물어봐도, 심지어 "그냥 짱나서요" 라고 말하는 것에 그칠 때도 많습니다. 이상해도, 많이 이상한 것 같은데, 이것이 한국의 어떤 모습이기도 합니다.

 

 예전에 다른 리뷰, 아마 부당거래 영화 리뷰에서 였던 거 같은데, 저는 한국 사회가 조금 더 다정해 졌으면 한다는 바람을 썼습니다. 여기서 파수꾼을 보고 난 후 조금 더 살을 붙이자면, 한국 사회가 조금 더 다양한 표현이 오고 가는 모습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양하게 먹고 살 길이 없고, 다양한 방법의 놀이 문화가 없기에, 이들의 선택지는 고작 한 손가락 안에서만 생각하고, 말할 때도 있습니다. 비극이지요. 이 비극적인 모습을 파수꾼은 좀 더 영화적인 극적인 방법으로 표현하고 있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영화 추천의 달인 고마운 L양, 재차 감사합니다 :) 이야기를 마쳐야 겠네요. 적어도 제게는 파수꾼이 남이야기로 들리지 않았습니다. 당장 이 녀석들에게 "너 인마 너무 기죽지마, 다른 것도 할 수 있어" 라고 말을 건네야 겠습니다. / 2013. 02. 리뷰어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