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Review]/한국사

조선전기의 대외관계 - 사대 교린 정책

시북(허지수) 2013. 5. 8. 23:41

 조선은 1392년 건국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는 1592년까지 무려 200년 동안이나 전쟁이 없었습니다. 조금 신기한 대목이기도 한데, 나름대로 외교 정책을 밀고 있던게 있습니다. "사대교린" 입니다. 큰 것을 섬기고, 이웃과는 교류한다는 겁니다. 즉 명나라를 섬기고, 여진과 일본과는 교류를 해나가는 정책입니다. 물론 조선 초기에는 정도전이 명을 위협할 수도 있는 요동정벌을 주장하기도 했으나, 어쨌든 조선은 기본적으로 사대교린 외교로 밀고갑니다.

 

 오늘날 관점으로 보면 명과의 관계에 있어서 "사대"라는 말 때문에, 어감은 상당히 좋지 못하지만, 냉정하게 보자면 자주적인 실리외교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얻을 건 확실히 얻어가겠다는 계산이 깔려있지요. 또한 공무역적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주면, 무엇인가를 받아온다는 측면이 있었다는 거지요. (역사에서는 현실적인 판단이 중요한데, 강대국과 무조건 마찰을 빚는다고 해서 좋은 외교라고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자주와 실리를 얼마만큼 효과적으로 추구할지 고민하는게 필요하겠고요.)

 

 북쪽에 있는 여진과는 강경과 회유를 섞어가면서 구사했습니다. 세종 때, 최윤덕과 김종서를 앞세우며 4군6진을 개척하고 영토를 확장한게 대표적인 강경책이지요. 아, 그런데 새로 개척한 함경도 지역은 워낙 험한 지역이다보니 사람이 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민정책(=이사장려)을 시행해, 남쪽에 있는 사람들을 4군6진 지역에 정착시키려고 노력합니다. 당연히 혜택이 없는데 무작정 이주할리는 없었겠지요? 그래서 파격적인 제도까지 사용하는데, 토관제를 실시하며, 지역의 토착 세력을 관리로 임명 하기도 합니다!

 

 한 번, 곰곰이 들어가 봅시다. 조선은 지방관이 파견되잖아요. 이 때, 상피제라고 해서 중요한 원칙을 세웁니다. 그 지역 출신은, 그 지역의 관리로 임명하지 않는다는 거지요. 부정과 비리를 막기 위해서지요. 나름대로 치밀한 시스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방 세력이 비대해지는 것을 막을 수도 있고요. 이렇게 본다면, 토관제는 아주 예외적이고 특수한 정책인 셈입니다. 조선의 기본 행정 원칙에서 벗어나면서까지, 북쪽 국경 지역에 사람들을 거주시키려고 노력했음을 느낄 수 있고요.

 

 한편 여진과의 회유책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으로 유인합니다. 국경지역에 무역소를 만들어 식량을 거래하였고요. 살 곳을 제공해 준다며 여진의 귀순을 장려하기도 했습니다. (※여진은 나중에 청나라가 되는데요. 즉 오래도록 조선에 영향을 끼친 중요한 나라이기도 합니다. 뭐 이 때까지만 해도, 엄청난 존재감은 느껴지지 않습니다만~)

 

 일본과는 어땠을까요? 역시 교린입니다. 강경책으로는 세종 때, 쓰시마(대마도)정벌이 잘 알려져 있지요. 왜구의 본산을 소탕해 버리며, 왜구의 침략을 예방하려고 했습니다. 온건책도 있었는데요. 부산포, 제포(창원), 염포(울산)의 3포 개항을 통해서, 일본과 무역품을 거래하기도 했습니다. 음, 이런 흐름으로만 갔다면 충분히 사대교린 노선이 빛을 발하는 듯 보였으나, 현실은 변하나 봅니다.

 

 1592년, 거세게 침략해 들어오는 임진왜란이 발발 합니다. 선조 때 일어난 임진왜란은, 대체 왜 일어난 걸까요? 갑작스럽게 필을 받아서? 주사위를 던져보니 짝수라서? 날씨가 흉흉해서? 역사가 그럴리가 없겠죠. 무엇인가 명분이 있고, 이유가 있기 마련입니다. 천천히 하나씩 배경을 살펴보면,

 

 시간이 흐르면서, 일본은 더 많은 무역을 원합니다. 3포를 통해서 많은 물자가 오가고 활발하게 거래되기를 요청하는 겁니다. 자 이 때, 조선은 사대교린이기 때문에, 당연히 일본의 요청을 듣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역량을 줄여나가고, 왜구를 경계해 나갑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임진왜란에 앞서서) 중종 때 3포왜란, 명종 때 을묘왜변 같은 일들이 일어났고, 정세가 요동치기 시작합니다. 사태가 심상치가 않습니다. 변방을 더 견고히 대비하는게 반드시 필요해 보였습니다.

 

 여진과 일본을 막기위한 임시기구 비변사가 설치되었고, 흐름이 격해지자, 비변사가 곧이어 상설 기구로까지 승격됩니다. 임진왜란 부터는, 이제 "비변사에 권력이 집중"되어가는 경향이 있었고요. 임진왜란은 많은 것을 바꿔놓았는데, 조선군대가 이대로는 정말 곤란하다는 것을 뼈아프게 깨닫고, 중앙군은 훈련도감을 통해 직업군인의 숫자를 확대하였고, 지방군도 속오군을 통해서 "무늬만 병사"에서 벗어나려고 합니다.

 

 더욱 흥미롭고도 가슴 아픈 이야기들은, 다음 문서에서 본격적인 임진왜란을 살펴보면서 계속해 나가지요. 오늘은 임진왜란 서막이라 하겠네요. 이쯤에서 오늘의 영감겸, 살짝 변명인데 (아래부터는 여담 및 잡문입니다) - 분량이 너무 길어져서 적절하게 양을 끊다보니, 문서를 또 나누게 되네요. 중도포기의 달인인 제가 임진왜란까지 오게 될 줄이야... 사람일은 모르는 것 같다는 생각을 문득 합니다. 운동으로 비유하자면 헛스윙 삼진아웃을 자꾸 당하던 사람도, 계속 시도하다보면 어느 순간, 조금 더 기량이 발전되는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16세기 후반, 조선과 일본의 모습은 상당히 대조적입니다. 조선은 오랜 평화로 인해 국방이 약해졌고, 지방 잡색군은 있으나마나한 거의 허수아비처럼 되어갑니다. 일본은 전국시대를 수습해 나가고 있는 격전의 땅이었고, 도요토미가 드디어 집권을 하게 됩니다. 이 무렵 일본 통일이 이룩되었고, 충만한 자신감도 있었고요. 지배자가 하나의 승리로 만족하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일본이 엄청난 기세로 밀고 들어오는 임진왜란 초반만 본다면, 조선은 그야말로 막장을 향해 가는듯 보이는데요... (아, 이건 다음 문서에서!)

 

 평화로운 시대에 살고 있으면, 세상이 편안해 보이나 봅니다. 그래서 안일한 태도를 갖게 되는거지요. 반면에 내전의 한복판을 살고 있으면, 땅이 전장으로 보이기도 할겁니다. 사람들이 요즘 먹고 사는 일을 "전쟁 같은 일상" 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너무나 어렵고, 고달프기 때문이겠지요. 한쪽은 살기 좋은 평화를 느끼고, 한쪽은 살기 어려운 잔인한 현실을 느낀다면, 그 격차는 실로 엄청난 것입니다. 저는 그런 기분이 들었습니다. 지배층이 안일하고, 백성들이 잔인한 현실을 살아간다면, 이것은 아픈 세상이라 불릴 겁니다. 지배층이 고달프고, 백성들이 안일한 삶을 살아간다면, 이것은 놀라운 세상이라 불릴 겁니다.

 

 우리에게 있어 아픈 세상은 현실이고, 놀라운 세상은 아직 만나보지 못한 이상이라 할 수 있겠지요. 똑똑하고 능력있고 뛰어난 사람들이 사회와 공공을 우선하는 사고방식을 갖추어 나간다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소박한 사람들의 삶이 지켜지고, 행복한 일상을 누릴 수 있도록 만들어 나간다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힘과 권력이 사용될 때, 권력은 아름다운 모습이 될 수 있는게 아닐까요. "힘은 아름답게 사용되어 빛날 수 있다"라는 장면을 만나보고 싶은 요즘입니다. 힘을 함부로 휘두르면? 그 때부터, 쓰러지는 날이 가까이 쿵쿵 오고 있는 겁니다. / 리뷰어 시북.

 

(※이 자료정리는 최태성 선생님의 한국사 강의를 노트로 요약하고, 메모를 함께 쓴 것입니다. 개인적 용도로는, 공부방 등 에서 활동할 때, 보조 자료나 참고 자료, 혹은 글쓰기 영감을 위한 데이터베이스 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 거기에 대한 일종의 고찰이기도 합니다. 키워드 형태로 중요한 부분들은 나름대로 강조해 두었습니다. 크게 바라는 것은 없으며, 다만 짧게나마 영감의 시간이 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