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3년6월16일/아골 골짝에서 아이성을 얻다(여호수아7:1-)/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3. 7. 10. 18:15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6월 16일 주일 예배

아골 골짝에서 아이성을 얻다 (여호수아7:1-)

1.결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
비옥하고 강력한 여리고성을 점령한 이스라엘은 이제 고지대에 위치한 아이성을 공략하려고 합니다. 여리고가 해저240m에 위치해 있다면 아이성은 해발800m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리고는 너무 낮은 곳에 위치해 있고 아이성은 너무 높은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아이성은 인구가 총12000명에 불과한 작은 성이지만 대신에 고지대에 위치해 있어서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점입니다. 주위를 내려다보며 살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적은 인구수만 보고 이스라엘은 3000명의 군대만 올려 보내기로 합니다. 그런데 이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패해서 36명이 죽고 패퇴하면서 많은 부상자를 내고 맙니다. 이 때문에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같이”되어 버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여호수아의 입장에서는 청천벽력입니다. 거대한 여리고성을 아무런 피해없이 이긴 백성들의 눈에 아이성은 만만하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백성을 다 올라가게 말고 이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마소서”라고 이야기합니다.

결과는 패배입니다. 백성들의 사기가 땅에 뚝 떨어지고 불안감과 공포감으로 백성들이 어쩔줄 몰라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아이성에서 패퇴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적을 경시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이들은 적을 경시하기 이전에 이미 패배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었습니다.
원인없는 결과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이제 패배의 원인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원인이 아닙니다.

자, 봅시다. 보통은 모든 나라에서 다 하는 일반적인 전개과정하고 전혀 다릅니다. 이스라엘은 패배의 원인을 적을 경시한 전술상의 문제에서 찾지 않습니다.
‘왜 저렇게 강력한 적을 오판해서 겨우 삼천명만 올라가게 했느냐?’면서 정탐꾼들을 처벌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직접적으로 싸움을 이끈 아이성 전투 사령관을 벌주지 않습니다.

패배의 원인을 여호수아는 하나님에게 물어봅니다. 도데체 왜 우리가 졌습니까? 하나님 어찌할려고 우리에게 이런 패배를 주셨습니까? 이렇게 기도하며 묻습니다. 사람에게는 묻지 않네요.
그런데 본문의 배열을 보면 2절부터 시작되는 아이성 전투장면 바로 앞에 이미 1절에 아간의 범죄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성경은 장별로 나누지 않고 보통은 동그라미 표시 위주로 나뉩니다)

그러므로 이 전투는 이미 패배할 씨앗이 잉태되어 있다는 겁니다. 패배의 원인은 아이성 전투 이전에 이미 존재한 것입니다. 아간의 범죄는 이미 여리고성을 공략할 때 벌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축제의 기간에 이미 아이성의 패배가 확정되어있었습니다.

2.모든 책임은 최고 통치자가
그런데 우리가 이미 알다시피 이 전투에서 패퇴하고 죽은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원정군 사령관에게 묻지 않습니다. 3000의 군대를 이끌고 누가 아이성에 쳐들어 갔는지도 나와 있지 않습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도 이 전투의 패배에 있어 사령관의 책임은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신기하지요?

사람들은 항상 실패의 책임은 남탓으로 돌리고 성공은 자기의 공으로 돌리려고 하는 이기적인 습성이 있습니다. 물론 사령관도 책임을 져야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최고 통치자가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왜냐면 자기가 군대의 숫자를 정하고 사령관을 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행동에 여호수아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과연 이스라엘의 패배소식을 듣고 여호수아는 옷을 찢고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무릎쓰고 저물도록 있었다고합니다. 국가 체계가 잡히기 전에 이스라엘의 최고 통치자들은 바로 여호수아와 장로들입니다. 여기서 장로는 이스라엘을 구성하는 70가문의 어른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최고 책임자는 바로 최고 통치자라는 이 단순한 진리가 오늘날 지켜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패배 후 이스라엘의 행동들을 보면서 우리는 ‘아 이번에는 뭔가 좋은 일이 생기겠구나!’고 여기게 됩니다. 왜냐면 주께서는 우리의 겸비함을 보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생각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3.패배의 원인은 영적인 범죄로부터 온다
사실 패배의 원인은 아간이 하나님께 바쳐야할 물건들을 빼돌렸기 때문입니다. 아간은 여리고성을 점령할 당시에 시날산 외투 한 벌과  이백세겔무게의 은덩이 그리고 50세겔중의 금덩이를 자기의 장막 땅밑에 파묻어 두었던 것입니다.
아마 외투도 금은 실이 섞인 비단의 멋진 옷이었을 것입니다. 당시 시날은 중동에서 최고로 선진지역입니다. 요즘말로 하면 초고가의 명품옷 정도?

물질에 눈이 어두워져서 그만 범죄하게 된 겁니다.
그런데 성경본문의 ‘범죄’는 ‘변절 또는 불성실’이란 뜻을 가집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에 성실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이게 바로 아간의 범죄입니다.
그런데 아간의 범죄 때문에 아이성 전투에서 패하고 36명의 목숨이 사라진 것은 너무한 것이 아닐까요?
아간이 죄를 저질렀으면 아간이 당해야지 왜 36명의 생목숨이 끊어집니까?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고통을 받습니까?

그것은 이들이 마치 가족같이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공동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공동체라고 말만 하지 실제로 공동체, 운명 공동체로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공동체 내의 약한 형제를 보고 비웃고 그것 때문에 스스로 우월감을 느끼며 멸시합니다.

아간은 좋은 옷과 금은이란 물질을 숨겼습니다. 도둑질? 횡령? 거대한 전리품에 비하면 극히 적은 분량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를 개인의 도둑질로, 사소한 범죄로 여기지 않고 공동체의 영적인 상태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여기셨습니다.

우리는 위급한 순간에는 하나님 앞에서 한없이 겸손하며 선하게 행동하려 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너무 갈급하기에 그의 눈에 들기위해 나를 낮추고 기도하며 남에게도 좋은 행동과 말만을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일단 위기상황이 끝이 나면 우리의 마음은 어느새 다시 높아져있고 남을 헤아리지 못하며 다시는 나에게 이런 위기가 닥치지 않을 것처럼 행동합니다.

지금은 아간 한명이 범죄한 것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범죄하는 이들은 점점 많아 질 겁니다.
왜냐고요? 기본적으로 인간은 이기적인 죄인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려울때는 무슨 무슨 말을 다하지만 그 어려운 급한 불을 끄고 나면 내 안에 있던 죄성이 바로 솟아 오르는 겁니다.
그런데 심각한 것은 우리의 죄성은 우리하고 너무 잘맞기 때문에 놔두면 이게 점점 옆으로 전염이 된다는 겁니다.

아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습니다. 하나님에게 바친 것을 도둑질 한 겁니다. 그는 사람의 것, 그것도 여리고의 패배자의 것을 훔쳤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의 눈으로는 그것은 이미 하나님에게 바쳐진 자기의 거룩한 성물입니다. 그런데 그걸 훔친 신성모독의 범죄를 저질렀는데도 아무런 신벌이 없다면 사람들은 너도나도 따라서 물건을 훔치고 그걸 보면서 하나님이 없다고 하나님도 별수 없다고 조롱할 겁니다. 그 마음속으로 하나님을 업신여길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영성을 지켜주기위해 처음부터 군기를 바짝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명령을 어기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싫어합니다.

우리는 눈으로 보이는 것에 집착합니다. 눈으로 보기에 좋아 보였기 때문에 그걸 가지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옷, 번쩍이는 쇳덩이, 번쩍이는 돌맹이
이 모든게 우리의 눈에 좋아 보이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금보다 은이 더 가치가 있고 금은구리보다는 철이 더 날카롭고 단단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눈에 더 좋아 보이기 때문에 철보다 금은이 더 비싼 겁니다.

비단은 물빨래도 안됩니다. 따뜻하게 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런데도 물빨래 뿐만 아니라 여러겹을 겹치면 총알도 막아내는 면보다 더 비싼 이유는 눈으로 보기에 번쩍이기 때문이지요.
예쁘고 잘생긴 사람은 미인이니 미남이니 하고 우리가 칭하며 선호하는 이유는 눈으로 보기에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보석은 단순히 빛이나는 돌맹이에 불과하지 특별히 쓸데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빛이 나고 눈으로 보기에 아름답기 때문에 귀한 것입니다.

그렇게 모든 범죄에는 욕심이 있고 욕심에는 우리의 눈이 있습니다. 눈으로 보지 못한다면 그 아름다움을 알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눈으로 보이는 시험에는 무지 약합니다.
아간의 범죄는 물질에 눈이 먼 도둑질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심각한 범죄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너무 엄하게 징치하십니다.

왜 그렇지요
그것은 아간의 범죄가 물질을 도둑질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계약을 깨뜨린 불성실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과의 계약에 불성실합니까? 하나님을 만만하게 보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계약을 조금 깨뜨려도 결코 하나님은 나를 벌 주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의 말을 우습게 여기는 것이며 나아가 하나님 자체를 우습게 여기는 것입니다. 어쩌면 내 마음속에 나를 규율하시는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아서 인지도 모릅니다.

적절히 예배당이나 가고 헌금이나 조금 하면 우리의 죄 같은 건 용서해 주시고 물질적인 복, 출세, 합격에만 작용하는 신의 존재가 우리를 도덕률에 둔감하게 만들어서입니다.
은밀한 가운데 나를 지켜보는 눈, 하나님의 눈이 없는데 내가 안 들키게만 하면 되지 왜 이득을 발로 찹니까?
경상도 사람들의 우스개로 죄 중에서 제일 큰 죄는 ‘들킨 죄’랍니다. 모든 죄를 다 저질러도 들킨 죄보다 크지는 않다는 거지요.

우리도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불꽃같은 눈동자로 나를 지키며 보호하는 하나님은 당연히 나의 범죄와 잘못된 행동도 불꽃같은 눈동자로 살펴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지키고 보호할 때는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키고 우리의 죄를 적발하는데는 눈을 감고 계신단 말입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자체가 이미 우리의 영이 둔감해 졌다는 말이며 이미 오염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오염에도 전혀 느끼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도둑질은 우리의 마음이 이미 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나오는 외형적인 부산물입니다.

4.범죄의 결과는 진노고 패배는 진노의 부산물이다
7장 처음을 봅시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으니.....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
아이성에서 패배한 원인은 전략전인 측면에서 보면 지나치게 적을 경시한 때문입니다.
아이성을 함락시킨 8장의 기사에서 이스라엘은 모든 백성이 전투에 임했고 따로 3만의 복병을 성뒤에 매복시켰고 유인하여 섬멸하는 전략을 행하는 것을 보면 아무 대책없이 그냥 삼천명이 가서 패하고 온 것 하고는 싸움에 임하는 자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7장1절, 즉 여리고 공략의 기사 맨 마지막에 범죄와 여호와의 진노에 대한 기록으로 끝을 맺고 2절부터 아이성 공략에 관한 기사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8장 1절에는 역시 하나님이 아이성을 이스라엘에게 주겠다는 승리의 약속이 나옵니다.

8장에는 장황하게 얼마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많이 싸움에 임했고 전략을 잘 짜고 정신을 집중해서 싸웠는지 기록하고 있지만 전쟁에는 항상 의외의 변수가 있으므로 반드시 좋은 전략과 집중된 군사행동이 승리를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승리하게 해 주겠다고 한 그 말이 바로 승리를 보장하는 것이지요.

사실 우리가 눈여겨 보면 여리고성을 공략한 기사보다 아이성을 공략한 기사의 분량이 훨씬 많습니다. 게다가 단조로운 여리고 공격과는 달리 아이성 전투에 사용된 다양한 전략과 여호수아와 백성들의 활약상이 장황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만하면 아간의 가족을 돌로 쳐죽이는 불행한 일이 없었어도 이겼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아간의 죄악을 제거한 것을 승리의 가장 큰 원인인 걸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간의 가족을 돌로 뒤덮고는 아이성의 승리를 허락하십니다.

5.라합과 아간
자, 그런데 우리는 아이성 전투에만  한정하지 말고 여리고성 전투와 함께 생각해 보면 특별히 언급되는 두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여리고 사람이면서도 구원받은 라합과 이스라엘 사람이면서도 멸망받은 아간의 두사람은 혈통이나 배경이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구원의 조건은 하나님과의 신실함에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과의 신실함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과 명령에 대한 순종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인생의 선택의 기로에 서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한 선택의 갈림길에서 우리가 올바른 선택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우리의 선택이 나의 이익만을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맺은 계약의 신실성을 고려한다면 우리의 선택에 크게 후회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간은 이스라엘 자손이며 여리고의 성전에 참여한 사람이지만 겨우 옷 한벌과 쇠조각 두덩이 땜에 죽게 되었지요.
그만 죽은게 아니라 그의 가족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이들까지 돌팔매에 맞아 죽는다는 것은 솔직히 너무 끔찍한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기사를 보면서 우리 주님이 너무 감사합니다.

우리를 ‘하나님교’라고 하지 않고 ‘예수교’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용서를 모르고 그냥 채찍을 휘두르며 손에 피를 묻히는 무서운 분이시거든요. 물론 공의를 바탕으로 하지만 하나님의 공의를 나같은 죄인에게 적용하면 내가 살 수 있습니까?
우리 각자가 생각하면 정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내가 하나님의 그 무서운 분노에서 놓여나서 용서와 기회를 얻게 되었다는 것이 너무 감사한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예수를 믿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받아 들이지 못하고 하나님만을 믿는 이슬람교도들은 그래서 아직도 ‘사랑의 하나님’이란 말을 알지 못하고 어떻게 하면 구원받을지 염려하고 불안해 하는 것입니다.

6.욕심을 버리지 않으면 죄가 된다
욕심은 사실 모든 범죄의 기본입니다. 인간의 탐심은 인간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죄를 저지르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아간도 욕심 때문에 죄를 저지르고 멸망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욕심으로 인한 범죄는 곧 범죄가 인간의 오염된 영혼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이라는 증거입니다.

짐승은 배가 부르면 옆에 사냥감이 있어도 거들떠도 보지 않지만 사람만은 배가 부르고 아니고에 상관없이 끊임없이 ‘더 더 더’를 추구하는 탐욕의 덩어리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죄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죄성으로 말미암은 욕심은 마치 갈증에 타들어가는 목에 쏟아 붓는 한바가지 바닷물 같습니다. 마시고 또 마시고 그래도 갈증이 몰려와서 또 마시다가 결국은 죽는 겁니다.

그러한 죄성을 제어하기 위한 하나님의 율법은 엄격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영이신 하나님이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의 존재에 대해서 끊임없이 의심하고 그러다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명령이 보이는 나의 욕심과 충돌하면 보이는 나의 욕심이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멸망으로 이르는 지름길로 들어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간은 여리고사람의 것을 훔친게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것을 훔친 것입니다. 왜냐면 이미 여리고성이 함락되기 전에 여리고의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 구별되이 드린바 된 제물이기 때문입니다. 이걸 ‘헤렘’이라고 하는데요 여기서 사람과 짐승은 다 죽이고 재물은 여호와의 곳간에 들이는 겁니다.

싸워서 이기면 전리품을 챙기는게 중동사람들의 관습입니다. 그런데 그 싸움을 한 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고 당연히 그 물건의 모든건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간이 여리고의 성내에서 훔친 물건은 장소만 여리고 성내이지 이미 하나님의 것으로 드려진 성물을 훔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아간 역시 눈에 보이는 물질에 대한 욕심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명령을 우습게 여긴 것입니다.

7.해결책은 간단하다.
일의 해결책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그 일이 일어난 원인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아간이 범죄하자 아간을 제거한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 범죄해서 하나님이 진노하셨으니 하나님께 회개하고 그길을 돌이키면 되는 겁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복잡하고 우리가 적용해야 할 방법도 다양하지만 결국에는 그 모든 일의 열쇠가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비위를 맞추지 못해서 고민입니까?
천만에요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열쇠인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에 감사해야 지요. 그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역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를 가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냐 돈이냐는 고전적이며 절대적인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같이 전체가 영으로 된 존재가 아니라 육체가 더해진 물질적인 존재이며 수명이 정해진 유한한 존재라는 점이며 물질이 주는 한계를 벗어나기 어려운 존재라는 점입니다.
이제 다시 우리에게 돌아가 봅니다.
나는 하나님을 택할 것입니까? 돈을 택할 것입니까?

하나님은 자기를 먼저 택하는 자에게는 나머지를 더하시는 분이시지만 돈을 택하는 이들에게는 돈도 주시기를 아까워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없이 돈만을 챙기면 그곳은 지옥이 될 것이요 하나님과 돈을 동시에 챙기려고 하면 교회나 세상이나 똑같게 될 것입니다.

성도라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내눈 앞에서 나를 지켜보시며 감찰하고 계심을 믿어야 하고 그의 명령을 준행하며 그와 더불어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성도의 자세입니다.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질 것입니까? 나 자신에게 진지하게 물어보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기왕이면 우리의 믿음이 한발 나아가서 물질보다 하나님을 택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부자가 되려고 할 때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물질을 흩어라’고 하실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높아 지려고 할 때 하나님은 오히려 낮아지라고 하실 때가 있습니다. 가지려고 할 때 비우라고 하시고 입을 열려고 할 때 다물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그것을 내가 그르다 옳다 판단하지 않고
그것이 나에게 효율적이다 아니다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은 나보다 더 큰 지혜와 전지전능함으로 나에게 가장 좋은 길로 이끄시며 판단하고 그걸 주시기 위해 명령하심을 믿고 그대로 나아간다면 우리도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결과를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냐 돈이냐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큰 질문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답은 이미 정해져 있음을 믿습니다.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6월 16일 주일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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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6월 중순 이 무렵 저는 몸이 계속 아파서, 거의 모든 활동을 중단한 채 회복에만 전념하고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사람의 몸이라는 것이 참으로 약한 구석이 있어서, 뭘 하나 잘못 먹기만 해도, 머리가 깨질듯 아프면서 고통을 호소하고 제발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신호"로서 알려주고 있습니다. 만약 비유적으로 생각해서, 몸이 이른바 운명공동체와 같다면, 그 공동체 속에 있어서는 안 될 이물질이 들어가 버렸을 때 - 그 독극물로 인해서 공동체는 순식간에 파괴되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즐겨 보던 경영학류 서적에서는 종종 이런 묘사들이 나옵니다. 박스에 맛있게 익은 사과가 가득 들어차 있다 하더라도, 그 안에 썩은 사과를 하나만 방치해 두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모든 사과가 썩게 될 것이다. 좋은 조직이란, 썩은 사과를 어떻게 처리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보는 시각이지요. 뿐만 아니라 이제 개인의 작은 발언이나 소규모 모임의 외침으로도, 얼마든지 커다란 파장을 일으킬 수 있음을 목격하기도 합니다.

여기까지를 생각해보면, 제 결론은 간단합니다. "잘못"에 대해서는 확실히 뿌리를 뽑아버려야 한다는 겁니다. 문득, 조직과 비리에 대해서 관찰을 오래도록 해오던 한 기자님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비리"라는게 문제가 생기면, 그 때만 징계가 내려지고, 떠들썩 하게 무엇인가 조치가 취해지는 것 같은데... 사실 몇 달, 혹은 반 년만 지나고 다시 그 조직을 관찰해보면, 똑같은 비리가 계속되고 있으며, 오히려 더 음지로 들어가서 비리가 교묘해지고 있음을 목격하게 된다고 쓰라리게 고백합니다. 인간이란 그토록 간사하고, 잘못에 대한 정당화를 참 쉽게 해버린다는 것을 너무 잘 알 수 있고요.

현대판 아간은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습니다. "당신들이 피눈물을 흘리든 말든, 내 가족만 잘 살면 그만이지", "공공의 소유라면 들키지만 않고 빼내면 다 내꺼지 뭐..." 이런 막돼먹은 사고방식을 가지게 된다면, 그 때부터 그가 반성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요. 그래서 한 번 마음이 탐욕의 길로 접어들어가면, 되돌아 오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애시당초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 경계심을 가지는 태도가 중요하며, 공공성이 있는 것들에 관해서는 더욱 청렴하게 사용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황당하게도, 저는 아주 당연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수천년 전에도 그 당연한 것들을 잊어버린 채 막나가던 인간이 있었고, 그리고 이를테면 아간 같은 인간은 지금도 있을 수 있다는게 참 염려스럽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내 것이 아닌 것을 바라보지 않기를..." 그런 연습을 조금씩 하다보면, 어쩌면 인생은 훨씬 더 풍요로워 질 수 있다는 묘하고 역설적인 생각으로 마무리 해봅니다. / 2013. 07.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