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2013년7월21일/느부갓네살의 꿈2(다니엘2:28-)/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13. 8. 1. 16:14

영암교회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7월 21일 주일 예배

느부갓네살의 꿈2 (다니엘2:28-)

오늘은 지난 주에 이어 느부갓네살의 꿈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그러나 오늘은 그 꿈의 내용에 대해서 살펴볼 것입니다. 그리고 왜 그러한 꿈이 꾸여졌는지도 살펴봅니다.
우리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시기에 나같은 사람에게도 자신의 계획을 알게 하시는 걸까요?
내가 과연 하나님의 그 거대한 꿈과 계획을 알 자격이 있을까요?
그리고 그러한 계시가 나에게 왜 주어지는 걸까요?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유한한 인간인고로 하늘의 그 놀라운 일에 대해서 알지 못합니다. 죽고 또 죽는 장구한 인간역사에 개입할 시간적 여유가 없습니다. 우리의 삶은 해뜨기 전의 풀잎에 맺힌 이슬같아서 해가 뜨면 말라버리고 흔적도 없이 스러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육신을 입고 있는 고로 영적인 일에 대해서 무지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영적인 신비를 알고 싶습니다. 왜냐면 내 안에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이 하나님과의 영교를 강하게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과연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를 알고 싶습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공고합니다.

1.왜 꿈을 꾸게 되었나?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몽하는 다니엘은 먼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오직 은밀한 것을 나타내실 이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당시 중근동의 패자인 신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2세에게 그런 꿈을 꾸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바벨론의 신보다 못해서 유다가 멸망한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역사가 하나님의 장구한 계획의 한부분임을 나타내기 위해서라는 겁니다. 사실상 인간의 역사는 너무나 찰나적이라서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인간왕국은 너무나 순식간에 지나가는 것입니다.

가령 남북으로 나뉘어진 이스라엘의 북쪽이 앗수르에게 망했는데 남쪽은 바벨론에게 멸망합니다. 그것은 유다멸망 당시 이미 앗수르가 바벨론에게 망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니엘이 아직 살아 있을 동안에 바벨론은 메대와 파사의 연합군에게 멸망합니다. 메대는 페르샤, 즉 파사보다 더 강한 나라였지만 다니엘이 총리가 될 당시에는 메대를 누르고 페르샤, 즉 파사가 더 강한 나라가 되어서 중근동의 패자가 됩니다. 페르샤의 뒤를 이어 알렉산더의 그리스가, 다시 그 뒤로 로마가, 다시 그 뒤로 몽고와 티무르와 터키가 패권을 잡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 흔적은 남아 있어도 당시의 강대한 제국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눈으로 목도하면서도 계속해서 유다의 신, 여호와를 바벨론의 신 벨, 말둑보다 못하게 여기는 것은 그 신이 약해서 자기의 나라를 보존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느부갓네살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의 부족을 ‘벨’ 신으로부터 보호하지 못한 별 볼일 없는 신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런 느부갓네살의 인식을 바로잡기 위해서 느부갓네살의 꿈에 하나님의 장구한 계획의 일면을 나타내 보이신 것입니다.

덤으로 하나님은 그 꿈의 내용과 해몽을 다니엘에게 알리셔서 다니엘과 그 친구들을 바벨론에서 높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나라의 정책을 움직일만큼 큰 것이기도 하지만 또 한 개인을 출세시킬 만큼 적은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왜냐면 그분이야 말로 세상을 움직이는 조화옹이며 세상을 지으신 조물주이며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전능의 주이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의 왕에 불과한 느부갓네살에게 바벨론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수백년의 역사를 나타내 보이신 이유는 그가 하나님이시며 그가 세상을 주관하는 자이며 그가 인간의 역사를 움직이는 분이심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자기의 충실한 종에게 이 사실을 나타냄으로써 하나님의 전지전능함을 나타낼뿐만 아니라 자기의 사랑하는 종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보이신 것이지요. 내가 사랑하는 누구를 내가 지구의 국정파트너로 삼아서 앞으로의 일을 나타내 보여준다. 그러므로 너희도 이 사람을 귀히 여기고 나의 뜻을 묻고 싶다면 이사람에게 얘기해라?

2.머리 속으로 받은 환상
특이하게도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의 꿈을 ‘꿈’으로 표현하지 않고 여기서 ‘머리 속으로 받은 환상’으로 표현합니다. ‘환상’은 어떤 현상을 영안으로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꿈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온 계시입니다. 단지 말씀계시인 성경 안에서 맞추어져야 할 계시이지요.

3.침상에서 장래 일을 생각할 때에
그러면 어떠한 때에 그가 꿈을 꾸었습니까? 침상에서 장래 일을 생각할 때에 그러한 꿈을 꾼 것입니다. 자기 직전에 느부갓네살은 자기와 왕국의 미래에 대해서 깊이 생각합니다. 그래서 미래의 일을 알고 싶었습니다.

물론 우리가 미래를 알고 싶다고 해서 하나님이 항상 우리의 꿈에 나타나셔서 계시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경험이 매우 많습니다. 아마 제가 당시에 하나님과 매우 밀접하게 영교하고 있었거나 아니면 저의 상황이 매우 힘들었기에 하나님이 저에게 힘을 주시려고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느부갓네살 역시 자기의 미래와 왕국의 미래에 대해서 자기 직전에 골똘하게 생각하였고 그날 밤에 하나님이 주신 환상을 머릿속으로 받게 된 것입니다.

4.알려 주고 싶어서 꿈을 주신다
하나님이 뭔가 계시를 꿈으로 하셨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계시를 통해서 확실하게 알려주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꿈을 꾸고도 대부분은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일이 벌어지고 나서야 그 꿈을 되뇌이며 “아, 그때 그래서 그 꿈이 꾸였구나!”하며 안타까워 하거나 감탄할 뿐입니다. 그런데 이런 식의 전개를 하나님이 원하실까요? 하나님은 미리 그 일에 대해서 예비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꿈으로 계시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이미 성경 말씀과 하나님의 표현물인 자연과 우리 안에 주어진 하나님의 영, 양심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음에도 명확하게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안이 탐욕으로 인하여 막혀 있기 때문입니다.

욕심으로 사물을 보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욕심을 내려놓고서야 비로소 영안이 뜨여져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하시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꿈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육적인 눈, 인간의 탐욕과 죄성에 물든 눈이 감기고 우리의 내면에 있던 영이 깨어나서 하나님의 일을 보는 것이지요.
어때요? 멋지지 않습니까?

큰 일이 벌어지거나 신년이 되면 점쟁이나 철학관을 찾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조용히 기도하세요. 그러면 그가, 그 놀라우신 천지의 주재자가 우리에게 말씀하실 겁니다. 귀신을 섬기는 점쟁이나 무당보다 못한 성도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오직 그 해석을 왕에게 알려서 왕이 마음으로 생각하던 것을 왕에게 알려 주려 하심이니이다”
알고 싶은 것이 있다면 기도하십시오. 원하는 것이 있다면 마음으로만 생각하며 끙끙앓지 말고 기도하십시오. 그가 말씀하실 것입니다.

5.한 큰 신상을 보다
다니엘은 드디어 느부갓네살에게 그가 꾼 꿈에 대해서 이야기 하기 시작합니다. 먼저 그는 왕이 한 신상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신상은 사람들이 섬기는 신의 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형상을 본떠서 만든 동상같은걸 의미합니다. 그리고 한글판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지만 원문의 뉘앙스로는 그 신상이 매우 크고 두려운 모습을 하고 있어서 이것을 본 왕이 두려워했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경에는 이를 “크고 광채가 매우 찬란하며 그 모양이 심히 두려우니”라고 표현합니다. ‘모양이 두려우니’라는 말에서 신상의 모습이 인간에게 공포심을 불러 일으 키게 생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너무 너무 빛이 나서 제대로 쳐다 볼 수 없을 정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나라들이 가지는 부와 권세, 그리고 힘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압도하고 두려워할 만큼 굉장해 보인다는 의미입니다.

6.머리는 순금이요
먼저 그 우상의 머리는 순금입니다. 어떤 불순문도 섞이지 않은 금으로서 다니엘의 해석에 의하면 순금 머리는 느부갓네살을 일컫습니다. 바벨론 왕국을 가리키는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슴과 두 팔은 은입니다. 금보다 조금 떨어지는 것이지요. 바벨론의 뒤를 이어 패자가 된 메대와 바사는 여기서 은 가슴과 두팔로 나타납니다. 메대와 바사는 두 개의 나라가 한 개로 합쳐집니다. 그러나 그 국력은 바벨론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다음으로 배와 넓적 다리는 놋이랍니다. 놋은 청동을 말하는데 알렉산더 시대의 그리스를 말합니다.
그 종아리는 철이랍니다. 철은 금은구리에 비해서 값이 싸지만 대신에 더 단단합니다. 이 철은 로마제국을 가리킵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까지의 중근동 역사에서 가장 강력했던 나라를 말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발은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이랍니다. 이건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요. 철과 흙은 서로 섞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 발은 매우 부실합니다. 이것을 전체적으로 보면 머리는 순금이요 은, 구리, 철, 진흙으로 내려오면서 값이 싸고 못한 재료로 되어 있습니다. 처음보다 점점 못해 지는 것이지요.
게다가 마지막으로 발은 철과 진흙으로 되어 있어서 매우 부실합니다. 그러므로 세상나라의 뿌리가 결코 굳건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아니나 다를까 “손대지 아니한 돌이 나와서 신상의 쇠와 진흙의 발을 쳐서 부서뜨리매 쇠와 진흙뿐만 아니라 그 위쪽의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서져서 겨와 같이 되었고 바람에 날려서 사라져 버렸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사람이 손대지 아니한 돌은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창세기3:15절에 계시했듯이 여자의 후손인 그리스도가 뱀의 후손의 머리를 깨뜨려 버리는 것을 나타냅니다. 세상을 철저하고 완벽하게 무너뜨리고 복음으로 정복할 것을 말합니다. 아무리 찬란하고 화려하며 무시무시해 보여도 그리스도의 역사 앞에서는 결코 남아 나지를 못합니다. 그것이 가장 강성해 졌을 때 이미 그 안에서는 분열의 씨앗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솔직히 세계의 역사를 살펴보면 거대한 제국이 외세의 침략 앞에 무너지는데 실제로 무너지기 전에 이미 그 제국은 통치자와 백성들이 서로 분열하고 원망하며 잘못된 통치와 풍속으로 병들고 쇠잔해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강한 철과 가장 약한 흙이 공존하여서 위태롭게 제국을 지속하다가 외세의 개입으로 한방에 무너지는 것입니다.

마치 세상이 쌓아 올린 황금의 제국과 같습니다. 그 머리는 빛이 나고 화려해도 결국 그 발은 이질적인 철과 흙으로 이루어져 한방에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너지면 금과 은과 놋과 철은 살아 남습니까?
천만에요. 그것이 모두 부서져서 타작마당의 먼지처럼 되어서 바람에 날려가버리는 것입니다. 형체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지요.

그러나 인간의 손을 타지 않은 그리스도의 복음은 세상을 강타하여 무너뜨리고는 온세상을 뒤엎고 태산처럼 쌓이는 것입니다.
보세요.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나이다”

그런데 유대의 학자들은 이렇게 해석하지 않고 금과 은과 놋과 철과 진흙을 각각 한시대의 패자인 제국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왕들을 나타낸다고 보았습니다. 즉 느부갓네살이 금의 머리고 그 후대가 은의 가슴과 팔이고 그런 식으로 점점 쇠퇴하고 못해지다가 결국은 멸망한다는 걸로 보았습니다.

저는 이 해석을 보면서 문득 이런 식의 해석이 생각납니다. 뭐냐면 시대별, 왕별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이 신상이 동시대의 사회계층을 나타내는 것은 아닐까?
금머리는 대통령, 재벌들 정치가들을 은 가슴과 팔은 고위 공무원들과 중견기업주들, 대기업의 임원들, 놋의 배와 넓적다리는 사회 중산층을 그리고 철은 일만하는 노동자와 군인, 경찰들을 그리고 진흙은 농투성이의 백성들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것이지요.

서로 가치와 강도가 다르고 위치와 하는 일도 다르지만 모두 모여서 한 나라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나라는 복음으로 뿌리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매우 취약한 것이지요.
그러면 이런 나라는 현실적 모순 때문에 오래 존재할 수 없는데 여기에 하나님의 말씀,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져저 , 이 복음으로 충격을 주어서 세상의 제도나 체재를 무너뜨리고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를 만드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상상을 해봅니다.
물론 이 생각은 말 그대로 상상이고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면 다니엘이 바로 여기서 해석을 하고 있거든요.
38절부터 나와 있네요. 그런데 이 바벨론은 건국한지 겨우 66년만에 망하고 맙니다. 너무 덧없지요?
놋으로 지칭된 헬라, 알렉산더의 그리스는 철기보다 청동기를 주로 사용합니다. 손기정 선수가 아테네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하고 고린도식의 청동투구를 선물로 받잖아요. 아시지요. 고대 그리스의 영웅들은 청동갑옷과 청동투구와 청동의 창으로 무장하고 싸웠다는 것을요.

40절에 보면 “넷째 나라는 강하기가 쇠 같으리니 쇠는 모든 물건을 부서뜨리고 이기는 것이라 쇠가 모든 것을 부수는 것 같이 그 나라가 뭇 나라를 부서뜨리고 찧을 것이며”
역사적으로 로마가 쇠처럼 강한 나라이며 수많은 나라와 민족들을 정복하고 멸망시켰지요. 그리고 난 후에 로마는 동서로마로 나뉘었고 다시 수많은 나라들로 나뉘어 졌으며 이들은 겉으로는 하나로 보여도 결코 서로 하나로 합쳐지지 못하여 쉽게 부서진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가 이땅에 건설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마지막의 돌이 태산을 이룬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라고 이해하는 점은 모두 같지만 세부적으로는 무천년주의자, 세대주의자, 전천년주의자들 사이에 하나님의 나라의 정의와 시기가 잡다하게 달라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굳이 그걸 따지고 나눌 필요는 없고 그냥 하나님의 복음만이 영원하고 굳셀 것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하면 되는 겁니다.

7.모든 신들의 신, 모든 왕의 주재자
이러한 해석이 끝나자 느부갓네살은 다니엘 앞에 엎드려 절하고 그에게 많은 상을 내립니다. 뭐 세월이 지날 필요도 없네요.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나라를 쳐부수고 이기는 장면이 바로 느부갓네살이 다니엘 앞에 엎드려 절한 것으로 바로 나타납니다.

그래요, 세상의 왕이 아무리 부귀롭고 강력해 보여도 그걸 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결코 교만할 수 없는 것이지요.
왜냐면 하나님이 그걸 주셨으므로 그걸 또 언제든지 가져 가실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 권력자들과 부자들은 자기에게 부귀와 영화를 주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의 뜻대로 권력과 부를 사용해야 하며 하나님의 종, 선한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은 너무 화려하고 너무 강력합니다. 그래서 보는 것 만으로도 부럽고 감탄스러우며 한편으로는 공포심을 줍니다. 저 거대하고 화려한 제국을 누가 있어 이길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걸 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세상나라들은 보기에는 무섭고 화려하며 단단해 보이지만 생각만큼 단단하고 굳건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철과 흙은 결코 합하여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외부의 충격에 쉽게 부서어 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단 한번 부수어 지면 그 형체도 남지 않고 가루가 되어서 바람에 날라가 버립니다. 너무 빛이 나서 도저히 쳐다볼수조차 없이 빛나는 금은은 마치 종이로 만들어진 돈이 허공으로 날아가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다만 땅에는 태산처럼 쌓인 인간의 손이 가공하지 않은 돌만이 쌍일 뿐.

느부갓네살의 꿈에 나타난 신상을 이렇게 저렇게 해석하는 것은 자유입니다. 성경에서 다니엘이 말한 그 테두리 안에서 어떤 해석을 가해보든 개인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한가지는 확실히 기억해야 합니다.
아무리 강해보여도 , 아무리 부유해 보여도 세상의 왕국들은 너무 취약해서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세상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이길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따지고 보면 신상을 구성하는 모든 재료들은 흙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바로 흙으로 지음받은 것을 기억하며 모든 부귀와 영화는 결국 백성들을 기반으로 나오는 것으로 이들을 품에 안기 전에는 결코 그 제국이 영원히 설 수 없는 것입니다. 금이니 은이니 구리니 철이니 하는 것도 모두다 흙에서 채취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도 아쉬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금이나 은이 못되고 심지어 철도 아니라 단순히 진흙으로 여긴다 할지라도 아쉬워 할 필요는 없습니다. 흙이 굳어서 돌이 되고 그 돌이 신상을 격파하쟎아요.

오늘 제가 드릴 말씀은 단순한 꿈 해몽이 아닙니다. 이미 지나간 역사를 되돌리며 이게 맞니 저게 맞니하며 다투려고 함도 아닙니다.
저는 사탄의 왕국, 겉으로 보기에는 거대하고 화려하며 두려움을 주는 저 거대한 세상이 그리스도의 복음, 한덩이 돌덩이에 부딪쳐서 박살이 날 뿐만 아니라 마치 먼지처럼 부수어져서 바람에 날려 가버린다는 것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 가자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보세요. 돌이 쌓여 온 땅에 뒤덮여서 마치 태산처럼 쌓이쟎아요.
흙을 치니까 그 강한 철도 그 비싼 금도 그냥 무너지고 가루가 되잖아요. 그러므로 슬퍼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며 그를 의뢰하며 나아갑시다. 그러면 그가 우리의 고민을 풀어 주실 것이고 꿈으로 뇌속에 펼쳐진 환상으로 우리에게 응답하실 것입니다.

더욱이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계시가 적혀있는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깊은 영적인 비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미 주께서 우리에게 계시로 주셨기 때문에요.

인간들이 손대지 아니한 산돌이신 그리스도를 이미 나의 주로, 나의 아버지로,  나의 스승으로 모셨으니 거대한 세상의 세력을 두려워하지 말고 금은으로 장식되어 빛나는 세상의 부귀영화도 부러워하지 말고
하나님과 함께 나아갑시다. 그러면 결국 하나님의 복음이 세상을 정복할 것이며 최후의 순간까지 살아남는 유일한 왕국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 왕국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 할 것입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2013년 7월 21일 주일 예배

――――――――――――――――――――――――――――――――――――――――――――――――――――――――――――――――――――――――――

정관영암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백운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한메일 / stronghjs@네이버 연락주세요

――――――――――――――――――――――――――――――――――――――――――――――――――――――――――――――――――――――――――

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식사를 앞두고 우리는 몇 가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왜 신상은 완벽하게 금이나 철로 만들 수 없었고, 약점을 가지고 있어야만 했는가? 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신상의 불완전함 입니다. 어쩌면, 상상력을 동원할 수 있겠지요. 금은 귀해서라든지 등등... 그리고 혼합 짬뽕 신상이 두렵게 느껴졌다는 대목도 재밌었습니다. 날아온 돌멩이 하나에 와르르 무너져 버리는 신상이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굉장해 보인다는 거지요.

많은 사람들이 그랬을 것 같은데, 저는 "돈자랑" 이라는 말이 이와 너무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파올로 코엘료의 책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인간이 약점을 갖게 되는 이유? 그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다른 이들에게 인정을 받고 싶은 욕망 때문이야" 어떤가요? 꽤 날카롭지 않은가요. "인간은 반드시 먹어야만 생존하는 치명적 약점을 가진 존재"라는 루쉰의 이야기 이후로, 이토록 적나라한 언급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인정을 받을 수 있나요? 가장 빠르고 확실한 길이 바로 "자랑하기" 입니다. 브랜드의 힘을 빌리면 확실하고요.

생활 속 사례를 들어본다면, 다이어트나 요가를 한다고 비싼 비용을 들입니다. 명분도 좋습니다, 건강도 살리고, 자기관리도 하니까 뭐라할 사람도 없고요. 그런데 정작 그렇게 자신에게 과잉투자 하면서, 생활고에 시달린다면 참 슬픈 역설 아니겠어요. 돈자랑은 굉장해 보이지만, 그 실속은 정말 형편없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새로 신형차를 뽑았다고 기뻐했다가도, 몇 년만에 가치가 반으로 폭락해 버리는 것이 현실 아니겠어요.

두번째로 왜 돌멩이 하나, 어떻게 본다면, 별로 가치 있어 보이지도 않는 그 돌 하나에, 모든 것이 헛되게 물거품이 되느냐 라는 점입니다. 이왕이면 다이아몬드 같이 불변하고 막강한 게 밀어버린다면 그림도 확 살텐데 말이에요. 하하.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미덕이 아닐까 싶습니다. 작은 돌멩이라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작은 재능이라도 귀하게 생각하는 것 말이에요.

20세기 소년이라는 만화책에서는, 겉으로 보기에 무시무시한 괴물이 등장하는데, 가까이에 다가가서 바라보니 그 실체는 인위적이며, 엉성하고, 볼품없었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두려움도 그렇고, 막연함도 그렇고, 사실 직접 부딪혀보면 충분히 해볼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서적인 위축이나, 괜히 주눅들어서 살아갈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 이야기의 금신상, 즉, 돈으로 화려함을 내세우는 금신상은 현재에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추종하며 따라갈 것인지, 아니면 그들을 향해서 새로운 대안을 던질 것인지, 생각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 2013. 08.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