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에 앞서, 개인적으로 저는 하위문화 (서브컬쳐) 에 상당히 관심이 높은 편입니다. 보통 사회에서, 비주류로 인식되는 비디오게임 동호회에서 10년 넘게 운영위원으로 몸담고 있기도 하고요. 저는 얼마든지 하위문화에서도 창조성이 있고, 영감이 있고, 즐거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놀자고 하는 판에, 죽자고 덤비는 사람들에 대한 반감도 있는 편입니다. 또한 성향적으로는, 가볍고 경쾌하지만, 꾸준히 갈 수 있는 태도를 가장 사랑하고요. 물론 제 경우, 책이나 영화 혹은 스포츠처럼, 얼마든지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취미도 좋아합니다만, 한편의 저는 비디오게임과 애니메이션도 뗄레야 뗄 수 없는 사이랄까요.
이렇듯 제 나름대로 하위문화의 가능성에 주목을 해왔고, 얼마든지 아름다운 문화생활로 다루어질 수 있다고, 호기롭게 동호회에서 여러번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보통 부정적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한국에서 그렇게 사는 것은, 얼마나 경멸적인 시선을 감수해야 하는지 아느냐며 욕먹기도 했고요. 하하. 게다가 언론의 좋은 먹잇감이 되어서 "덕후문화"가 매섭게 비난받는 것을 보면서, 저는 조용히 의문을 던져보았습니다. 정말 비주류 문화는 그렇게 조잡(?)하기만 한걸까? 다른 가능성은 없는 걸까? 이제 책 내용들과 함께 새로운 시선의 세계로 들어가 봅시다.
저자 : 이형석 / 출판사 : 북오션
출간 : 2013년 07월 30일 / 가격 : 15,000원 / 페이지 : 304쪽
B급 문화의 저력은 우선 어디에 있을까요? 저자는 핵심이 "열광적인 추종자" 라고 파악합니다. 하나의 작품이 B급 문화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추종자가 있어야 하고, 그들에 의해 창작자의 의도와 작품의 맥락이 끊임없이 "인용"되고 재독해 되어야 한다고 글씨색까지 바꿔가며(!) 강조합니다. 얼핏 보면 이상해 보이는 작품인데도, 그것에 미친듯이 열광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게 바로 B급 문화의 출발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얼마든지 재독해되는 가능성이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본다면, 최근 흔히 회자되는 병맛 코드, 시궁창 현실이라는 코드가 있습니다. 참 좋아하는 조석 만화가의 웹툰을 생각해 봅시다. 꽤 오래전 걸작인데 - RPG 게임이 있어요. 항상 보면 엄청나게 강력한 마왕이 존재하고, 정말 초라하게 시작하는 주인공 용자가 있지요. 전형적인 주류 코드로 본다면, 용자가 성장해 나가고, 동료를 만나고, 힘을 합쳐서 마왕을 없애버리고, 평화를 구축한다는 눈물나는(?) 왕도스토리가 있습니다. 이런 전개는 많은 만화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겠고요. 그런데 조석 만화는 반대로 접근해 들어갑니다.
멍청한 마왕은, 괜히 약한(!) 악당들부터 보냄으로써, 영웅의 성장을 사실상 도와주고, 나중에 뒤에서 폼만 잡고 있다가, 된통 당하는 인물로 코믹하게 그려집니다. 다시 말해, 지금 "마왕 X됐어!", 그리고 "마왕 니가 자처했어" 의 시선을 보여주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애시당초 진작에 용자가 약할 때, 바로 밟았어야지! 하면서, 마왕을 조롱하는 센스! 그리고 언제나처럼 수많은 "뿜었다"는 댓글이 달리게 되고요.
제가 조석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렇게 황당한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품격(!)이 굉장하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이쯤되면 용기 있는 용사 가 애시당초 있었던건지, 아니면 배려심 많아서(?) 영웅을 도와주는 마왕이 있었던건지 모를 일입니다. 여기서 과감한 접근을 해본다면, 강상중 교수님 같은 분은, 현실의 세계야 말로 어쩌면 "말도 안 되는 일이 발생하는 마계"와 가까운에 아닐까 라고 지적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정리해고 되어버리고, 신분상승의 기회는 점점 닫혀가고 있음을 느끼고, 잉여로운 시간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혼란스럽고 뒤죽박죽인게 혹여 현대 사회의 현실이 아닌가? 라는 질문이지요.
그런 현실이라면, 이른바 주류 사회에서 내놓는 교과서적인 정답들이 통하기에는 정말 곤란하지 않을까요.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에 가까워져, 힘든 현실이니까 힘을 내는 수 밖에 없잖아, 사람이 자기가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야," 라는 식으로 지금의 현실을 개인에게만 초점에 맞추려는 태도는 한 번쯤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 자체가 비상식적으로 작동되고, 불균형이 눈에 뻔히 보일만큼 심하게 펼쳐지고 있다면, 우리가 찾게 되는 것은 오히려 비주류 문화의 통렬하고 직설적인 시선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를테면 만화의 장면을 패러디 해서, 환하고 예쁘장한 캐릭터가 찰진 대사로 - 하하하하 이 거지 같은 세상아~ 라고 천사처럼 미소짓는 장면이 더 정직할 수 있음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열심히 노력하고 웃어보지만, 나아지지 않는 형편에, 우리는 탈출 가능성을 찾고 있는건지도 모릅니다.
한편 저자는, 오늘날 새로운 신분 세습 사회에서, 기회를 박탈당한 계층이 이제 그 남은 실마리 (혹은 가능성) 를 "스포츠 연예 스타 되기"로 생각한다는 것을 날카롭게 꼬집습니다. 과거 고시가 담당했던 계층 이동을 이제는 오디션 프로그램이 하고 있다는 겁니다. 부와 인기를 얻을 수 있는 새로운 등용문이 오디션 프로그램이라는 접근은 통찰을 주면서도, 씁쓸함을 느끼게 합니다. 왜냐하면 저자의 말대로 이것은 일종의 환상이면서, 자본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스갯 소리지만, 우승상금보다 시청자들이 문자투표로 보낸 돈이 훨씬 남겠다 라는 것처럼 말이에요. 결국 어디선가 판을 깔아놓고, 누군가는 열심히 재주를 부려보지만, 정작 돈을 버는 사람은 따로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그런 구조 속에서 오늘도 많은 청소년들은 연예인을 선망하고, 꿈꾸고요.
자, 그렇다면 이렇게 부정적인 시선을 배경으로 깔면서도, 결론은 한결 따뜻하고 정겹고 희망적으로 내리고자 합니다. K. 해리스가 정리한 B급 예술의 지향점은 정말 멋지구나 싶었기 때문입니다. "절망을 배경으로 한 유희! 낙원을 잃어버렸다면 대용물을 설정하는 인간, 그리고 그 대용물이 정작 자신이 꾸며낸 것이라는 사실까지 망각해버리는 인간,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스스로를 즐기며, 자신의 환상과 심지어 자신의 고뇌까지도 즐긴다." 이 대목은 한 줄로 과감히 정리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은 즐겁게 살아갈 수 있다." 라는 점입니다. 절망이 배경을 하고 있다해도 어떠하리요~ 낙원이 이미 존재하지 않아도 어떠하리요~ 감히, 말하자면, 인간은 스스로 지금 서 있는 공간을 거기서부터 낙원으로 만들어 가려는 "엄청난 가능성의 존재" 라는 것입니다.
끝으로, 좌절된 잉여의 욕망은, 상상력의 폭발적 힘을 보여주기도 한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비주류였기 때문에, 더 자유롭게 전개할 수 있었고, 때로는 밑도 끝도 없는 "미친 상상력"을 그대로 밀어붙일 수 있었던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전히 비주류 문화의 저력과 떠들썩함에 경의를 표하며, "가능성"이라는 말을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힘들고 열악한 환경은, 자유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점, 그 누구도 터치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막 던지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는 점은 생각해 볼만 합니다. 이제, 저자의 매력적인 결론과 함께 리뷰 마칩니다.
"중요한 것은 다만, 지금 여기 없는 것을 상상하고 실천하며 새로운 미학으로 표현하는 일이다. 점령하라. 새로운 상상력으로. (이형석 기자)" / 2013. 09. 리뷰어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