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요한복음10:22-39)
우리는 과학만능의시대인 21세기에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베푸시는 기적을 믿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를 믿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를 믿기에 여기에 나와 앉아 있습니다. 아니면 한번 믿어 볼까해서 여기에 나왔습니다.
적어도 예수 믿는데 큰 거리낌이 없어서 그냥 믿어도 괜찮지 않을까싶어서 나왔습니다. 예수교라는 사이비집단에 빠져서 큰일이 나면 안된다고 벌벌떨거나 강렬한 거부감을 가지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게 따지고 들어가면 좀 이상하기는 합니다. 왜냐면 논리와 이성의 시대에 비논리적이며 과학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초자연적 현상에 우리는 긍정적이며 열린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만 세상을 시대를 역행하는 것일까요?
우리의 뇌구조가 다른이들과 좀 다릅니까? 그래서 이런 이상한 이야기도 믿어지는 것일까요?
성경에서 말하는 기적들, 그게 과연 가능할까 의심하면서도 그게 가능하고 지금도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 어딘가에 신비로운 곳이 있고 신비로운 현상이 지금도 일어나며 주의 성령이 지금도 우리를 보호하심을 믿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몸이 너무나 신비한 존재임을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아직도 하나님을 믿는지 모릅니다.
어떤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사에 불가능하고 어려운 일들이 너무 많아서 우리가 신을 의지하는 것이다. 맞습니다. 너무 불가능하고 어려운 일들이 많아서 도저히 우리의 힘으로만 헤쳐나가기가 버겁기 때문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을 구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원래 우리가 만들어 질 때 이미 우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그의 신이 들어와서 우리가 하나님과 영교할 수 밖에 없는 존재로 지으심을 입었다는 생각을 혹시 해보셨나요?
인간을 만드실 때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우리가 생령이 되었다고 하는 구절이 혹시 생각이 나십니까? 사실 이미 우리 속에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 와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필연적으로 생령이 될 수 밖에 없고 이 하나님의 영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지만 끊임없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려고 하는 습성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영교라고 이야기하는데 이 우리 안에 있는 영과 하나님의 영이 서로 영교하려고 하는 이 습성이 우리가 꿈을 꾸고 미래를 예언하고 하는 일의 밑바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실제로 끊임없이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는데 그걸 가로막는게 우리의 눈으로 인한 욕심, 죄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 눈을 감게 되고 따라서 육체의 욕망이 잠들게 되면 비로소 우리의 영이 하나님의 영이 보내는 신호를 받아 들이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에게 나타나는 신묘한 현상의 원인이라는 겁니다.
어때요?
오늘 본문에 보니까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뒤에 때는 겨울이라고 되어 있지요? 이건 요한이 이방인들을 위해서 겨울이라는 말을 덧붙인겁니다. 유대인들이야 수전절이 언제인지 알지만 이방인들은 수전절이 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즉 이 수전절은 그렇게 중요한 절기가 아닙니다. 유대의 3대 절기라면 우리가 잘아는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입니다. 이때는 유대인들은 성전에 가야되는 겁니다.
그러나 수전절은 아무데서나 지켜도 됩니다. 이 수전절은 그리스의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성전을 더럽힌 것을 마카비가 독립을 쟁취하고서 성전을 정화하기위해 깨끗한 기름으로 성전에 불을 밝힌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안티오쿠스 아페파네스는 시리아왕인데 원래는 알렉산더의 그리스제국의 후계자들중 한사람의 후손입니다. 알렉산더가 죽고 그 후계자 장군들이 서로 싸우고 분립해서 세운 나라의 왕입니다. 그래서 시리아인이 아니라 그리스인이고 헬레니즘을 중동에 전파한 사람입니다.
아무래도 그리스인들은 다신교이고 그래서 성전에 가증한 우상들을 세우고 그랬는데 마카비가 반란을 일으켜서 그리스인들을 몰아내고 우상을 몰아내고 성전을 정화한 것을 기념해서 깨끗한 기름으로 8일간을 불을 밝히는 그런 절기가 바로 수전절입니다. 주로 11,12월 경에 돌아오는 절기입니다.
그래서 이 앞절 9장, 10장의 시기보다 석달 뒤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지금 초막절이 지나고 삼개월동안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있는 중이라는 겁니다. 예루살렘에서는 이상하게도 예수를 잡아서 죽이려고 틈을 엿보는 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아마 유대교의 종교지도자나 헤롯 일파들을 비롯한 친로마 반예수 기득권층들의 본산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갈릴리가 훨씬 안전한데도 그가 하셔야 할 일이 있었기에 체포의 위험을 무릅쓰고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있었고 이런 일이 벌어 진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집에 가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의 위협을 아시면서도 그는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 거주하고 있는 중입니다.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거닐고 계십니다. 이 솔로몬의 행각은 일종의 회랑입니다. 기둥에 지붕이 덮여있는 길게 뻗어 있는 건물, 그런데 여기는 사람들이 제일 많이 모여 드는 곳이고 그래서 토론이 자주 벌어지는 곳이랍니다. 아마 주님은 여기서 뭔가 굉장한 선포를 하시려고 틈을 보고 계시지 않았을까요?
한쪽에서는 성전 관계자들과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예수를 체포하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는 곳에서 주님은 지금 하나님을 자기의 아버지로 칭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솔로몬행각을 걸어 다니실 때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라고 말합니다.
자 보세요. ‘사람들이’ 라고 하지 않고 본문은 ‘유대인들이’ 라고 말합니다. 이 말 속 즉 유대인이란 말 속에는 예수를 배척하고 기득권을 지키려고 하는 완고한 사람이라는 부정적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의 마음을 의혹하게 한다고 불평합니다. 이 ‘의혹하다’는 말은 다른 말로하면 ‘불안하게 하다’ ‘초조하게 하다’ ‘뭔가 자기들의 마음을 억누르다’같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들이 예수 때문에 예수가 누군지 확실하게 몰라서 의혹하고 불안한게 절대로 아닙니다. 예수님은 수시로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밝혔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메시야임을 밝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에게 조금만 관심을 기울였다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이심을 모를 수가 없습니다. 다만 이들은 예수를 믿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 그를 책잡아 예수를 부인하고 싶어서 지금 이렇게 딴청을 피우는 것에 불과합니다.
사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믿으세요 ’하고 전도지를 주는 일은 사실 요즘 많이 줄었는데 이들 믿지 않는 이들이 예수가 누군지 복음이 뭔지를 몰라서 예수를 안믿는게 아닙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아니 적어도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의 이름이 불안을 심어 주는 것은 그걸 믿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코 몰라서가 아닙니다.
요즘 청문회같은 걸 보면 무조건 몰랐다고 부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에게 조금이라도 불리할 것 같으면 무조건 몰랐다 ,모른다로 부인합니다.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줄 몰랐다. 그리고 그가 메시야인줄 몰랐다고 부인하려고 합니다. 왜냐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메시야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면 ‘왜 그를 믿지 않느냐?’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하나님이 ‘왜 그를 믿지 않았니?’라고 물으실 때도 ‘저는 몰랐습니다’라고 변명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보면 이들의 말이 일정부분 사실입니다. 이들은 지금 심한 갈등에 휩싸여 있습니다. 그를 받아 들이자니 자기들의 기득권을 위협받을 것 같고 그를 부인하자니 하나님이 두렵고 그런거지요. 그래서 예수가 자기네들의 마음을 미혹하게 의심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게다가 어리석은 민중들은 주님을 자기들의 구세주로 믿고 따릅니다. 게다가 주님이 베푸시는 기적들은 누구도 흉내내지 못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백성들로부터 버림받을 그때를 노리고 있는것입니다. 주님의 언행이 허점을 보여서 그를 공격할 수 있는 찬스를 노리는 겁니다.
주님 때문에 불안해 하고 불편해 하는 이들은 지금 자기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누리고 있는 기득권을 놓기 싫어서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 되심을 모르는 척 하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예수그리스도 앞에서 가장 어리고 가장 낮은 겸손한 자세로 그를 따르고 그의 말을 좇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기득권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있다면 그 모든 기득권이 주를 받아 들임으로, 하나님의 은총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득권이 그를 믿음으로 위협받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게다가 ‘에워쌌다’는 표현에서 우리는 뭔가 예수를 위협하고 강제로 윽박지르려는 부정적인 모습을 봅니다.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는 것도 같고. 이처럼 그들은 예수를 위협하고 부인하고 책잡아서 죽이려고 시도하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알면서도 가장 사람이 많이 몰리는 성전, 그 성전 중에서도 가장 번잡한 솔로몬의 행각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있는 겁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인지 아닌지를 밝히라고 하는 요구에 대해서 주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이때까지 계속해서 말했지만 너희는 믿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새삼스럽게 설득하려고 할 필요조차도 없다는 겁니다.
이어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주님이 이제껏 하나님의 이름으로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죽은 자를 살린 이 일들이 그가 그리스도임을 증명하는 것임은 너무나 당연히 알 수 있는데도 직접 입으로 하나님의 보내신 자 그리스도임을 밝히라고 또 요구하는 것은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지 너희가 몰라서거나 또는 내가 말을 안해서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요 예수를 안 믿는거는 그들이 하나님의 양이 아니기 때문이지, 즉 하나님을 믿기로 예정된 자가 아니기 때문이지 별달리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가령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아주 쉽게 기꺼이 복음을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특별히 부정적이고 배타적입니다. 그건 다른게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자 인지 아닌지에 달렸지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어떤 이는 남에게 일어나는 기적을 보고 주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어떤이는 자기에게, 또는 자기의 딸에게 일어난 기적을 보고도 주님을 믿지 않습니다. 주님은 자기의 양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 양이란 말은 원문상으로는 ‘그 양들 곧 나의 것들’이란 말입니다. 그래요, 주님의 양은 다른 말로 주님의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요 우리 성도는 주님에게 속해있기 때문에 사탄이 틈을 타지 못하고 해하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사탄은 주님의 것인 주님의 양들 곧 성도들이 스스로 자기에게 틈을 보일 때까지 기회를 엿보며 주위를 배회합니다. 서양에서는 이런 민담이 내려오는데 아마 여러분도 영화에서 한두번은 보셨을 겁니다. 물론 주요한 인물일 경우에 그렇습니다. 왜냐면 사탄은 편재성이란게 없으므로 일의 효율성을 위해서 중요 인물 순서로 공작을 꾸미려고 합니다.
혹 여러분들 중에 나는 주님을 알지만 주님이 나를 모르면 어쩌지라고 걱정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전혀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나는 그들을 알며”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알며’라는 말은 그냥 아는게 아니라 경험상 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과 평소에 교제하며 같이 생활하며 동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막연히 나는 주님을 안다고 가정하고 주님과 전혀 교류가 없고 주님의 말을 따라 살지 않고 인구 센서스에서 ‘나의 종교는?’이라는 문항에서 기독교에 동그라미만 친다고 해서 주님의 양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주님의 양은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주님을 따른다고 하는 이 말을 명심하면 됩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을 따라 주님의 명령을 따라 사는 이는 모두 주님의 양입니다. 그렇게 살면 주님은 자기의 양이라고 인정하시고 보호하시며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을 따르고 주님의 말을 듣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사실 일주일에 한번 교회에 와서 하나님에게 예배한다는 것은 솔직히 어려운 일입니다. 이게 단순히 일주일에 겨우 한번일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어른들의 경우에 일주일동안 일하고 주말에 쉬는데 이 쉬는 날에 교회에 와서 예배한다고 하는 것은 자기의 안식과 쾌락보다 주님께 예배하는 것을 더 중하게 여긴다는 말이고 이것은 곧 주님을 위해 나의 즐거움을 희생할만큼 주님을 소중히 여긴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봅시다. 매주 놀러가는 일이 흔한지는 모르겠지만 금요일 밤부터 해서 2박3일로 여행을 간다면 상당히 재미있는 좋은 추억들이 많이 만들어 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일 오전에 예배를 드리게되면 겨우 1박 2일짜리 여행으로 끝나야만 합니다. 가는데 하루 오는데 하루면 언제 놀지요? 그래서 이런 여행은 잘 없지요.
더구나 금요일 저녁에 출발하게 되면 매우 피곤하고 그 다음날 뭔가 좀 놀려고 하면 돌아오기에 급급해야 된다면 이건 뭐 의미가 없는게 됩니다. 그래서 주일날 교회에서 예배드리는게 그렇게나 큰 일이 되는 겁니다.
만일 우리가 예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공급받지 못한다면 우리가 예배 때문에 놓친 쾌락과 즐거움이 더 커보이게 되고 결국 예배에 불성실하게 되고 그러다가 종국에는 세상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성령의 임재가 그렇게나 중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라고 하면서도 예수를 팔아서 명예와 부를 얻으려고 하는 이는 예수를 빙자해서 이익을 취하려는 자는 결코 주님의 양이 아니라 양의 탈을 쓴 늑대입니다. 이런 늑대들은 양떼들을 해하고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그러므로 목자가 이런 늑대를 적발해서 쫓아내고 죽여버릴 것입니다.
그 뒤에 본문에 여러 말들이 있습니다. 다 중요한 말이지만 여기서는 생략합니다. 사람들이 주님의 말을 듣고 주님을 돌로 치려고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자기의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고 스스로 하나님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를 신성모독죄를 범한자로 여기고 돌로 치려고 하는 겁니다. 아마 이 때문에 예수가 도망가지 못하게 에워싼 모양입니다.
자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 정도로 어렵고도 힘든 일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믿지 않고 돌로 치려 했던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온다는 것을 도저히 믿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건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옛날보다 훨씬 더 이성과 과학이 발달한 오늘날 그리스도의 존재를 믿는다는 것은 훨씬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는다는 자체가 성령받은 표시라고까지 말하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를 향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하는도다” 사실 예수님은 자신을 일러 하나님이라고 한 것은 아니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을 뿐입니다. 게다가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고 말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에게 하나님이라고 자신을 참칭한다고 돌로 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이 본문에서 가장 주목하고자 하는 구절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너희 율법에 기록된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자, 우리는 지금 엄청난 주장 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그렇게나 오래 믿었지만 이런 구절에 대해서 감히 생각해본 적도 없습니다.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는 말을 그대로 받아 들인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신이라고 불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럼 우리는 신입니까?
그리고 다시 35절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이란 말이 연이어서 나옵니다. 그래서 연이어서 우리가 충격을 받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실제로 앞의 말은 정확히는 시편82편6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정확히 살펴보면 신들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재판장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즉 재판관이 재판할 때 하나님의 권한을 대행하는 것으로 여겨졌고 따라서 그들의 업무에 하나님이 주신 신적권위를 가지기 때문에 사사로이 재판해서는 안되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공적인 기준을 따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주님이 약간 이상하게 인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이 말을 이상하게 인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해석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이들은 하나님이 주신 공적인 신적권위를 가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신이라고 불렀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자들을 신들이라고 부르는데 하나님의 아들로 온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하는게 뭐 잘못되었느냐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이런 주장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것으로 예수님을 돌로 치려한 계기가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조선후기에 예수에 대한 책이 들어 왔습니다. 여기서 뭐라고 주장했는고하니 예수를 공자와 같은 성인이라고 말했습니다.
요즘 이런 말을 하면 우리 기독교인들은 지금 장난하냐고 난리가 났겠지만 옛날 우리네 선비들도 난리가 났습니다. 어디 감히 예수라는 듣도 보도 못한 이를 공자님과 비교하느냐고 난리가 난 것입니다.
사람들은 항상 이와 같습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관점을 받아 들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시편을 인용하셨느냐하면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한 말을 합리화하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신이라고 일컬어진 자는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재판장에게도 신적 권위를 부여해서 그들로 하여금 사사로운 감정을 떠나서 하나님이 주신 원칙에 따라서 재판하게 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직임에 있는 이가 그 직임을 행사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행해야 하고 또 그러할 때 이들을 하나님의 권위를 입은 신들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셔서 자기의 일을 대행하게 이 땅에 보내셨으므로 충분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을 유대인들이 수긍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주님의 이 말을 듣고 그를 돌로 치려하였고 또 예수를 잡으려고 했지만 아마 주님은 그들 사이를 빠져나가서 그들이 잡지 못했나 봅니다. 여기서 잡으려는 목적은 체포해서 사죽이려는 목적입니다. 그래서 아주 열심히 수색을 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됩니다. 때문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에워싼 그들을 피할 수 있었는지 여기에 무슨 기적이 있었는지는 나타나지 않아서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발하는 신적 능력때문이라고 생각합시다.
자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이 우리를 진짜로 신이라고 말씀하신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좀 서운합니까?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만들어질 때에 하나님의 생기를 받아 들여서 생령이 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은 항상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가, 우리의 욕심이 잠들었을 때 그 영이 깨어서 하나님과 교통하며 하나님과 연합하려 합니다. 그게 바로 현몽입니다. 꿈에 신통한 예지몽을 꾸고 일들을 예언하고 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현상의 편린인 것이지요.
우리가 성령을 받아서 예언하고 병자를 치유하고 방언하고 하는 이 모든 일들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영성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일러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 주님의 제자인 우리는 뭘까요? 역시 ‘주께서 거룩하게 하사 주님의 명령을 따라 행하게 하도록 세상에 보내신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르게 말해서 주님의 이 말을 우리에게 적용시킨다면 우리가 우리 개인의 욕심에 좌우되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면 하나님의 영적인 신임을 받은이가 될 것이며 하나님의 영성을 가지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자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성도가 세상을 살아 갈 때에 철칙이 있어야 합니다. 뭡니까?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주님과 교류해서 그를 잘 알고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를 일러 신들, 엘로힘이라고 한답니다. 34절에 35절에 ‘신’이라는 말을 원문에서는 ‘엘로힘’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우리가 흔히 하나님을 대신해서 쓰는 말이기도 하지만 원뜻은 ‘신들’이란 말입니다. 제가 말씀드렸지요.
무당이 한 말, 너희는 열심히 예수를 믿어도 예수믿는 사람에 불과하지만 우리는 신이 될 수 있다는 그 말. 그런데 그 말은 예수믿는 사람, 즉 성도를 잘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존재이며 우리의 영에서 욕심으로 인한 죄를 제거하면 우리가 다시 하나님과 연합하게 되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권위를 힘입고 하나님의 일을 하며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는 그런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의 욕심에 좌우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게되면 하나님의 권위를 힘입게 되고 하나님의 영성을 가지고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대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일은 뭡니까?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좇아 살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입니다. 그 일을 우리가 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 속에서 하나님의 권위를 힘입어 세상이 두려워하는 그런 사람, 세상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올 한해도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행하며 주를 따르는 그런 멋진 삶, 형통하며 능한 삶을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7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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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상당히 이색적인 제목과 설교 내용이라 흥미로웠습니다. 뭐, 결론은 언제나 처럼 한결같지만요.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겠다는 생각입니다. 간단히 말한다면, 내 욕심만 좇지말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도 귀기울일줄 알고, 가까운 사람을 잘 돌보며 챙기며, 너그럽고 다정한 사람이 되겠다는 것!
우리는 얼마든지 그렇게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새로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힘내어 오늘을 보내고,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면서 살아간다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힘차게 당당히 살아간다면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어 우리에게 놀라운 일들을 보여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작은 믿음입니다. / 2017. 01.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