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누리교회

이 땅을 성결하게 하라(에스라10:1-12)/홍종일목사

시북(허지수) 2020. 7. 12. 00:44

문제는 통혼이 아니라 성결이다 (에스라10:1-12)

 

이혼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는 해서는 안되는 금기입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인간이 나누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은 모든 기독교인에게 반드시 지켜야하는 주요 실천사항입니다. 그런데, 말은 그런데 실제로 교회 안에 이혼한 이들과 심지어 재혼한 이들도 많이 있습니다.

 

먼저 말씀드립니다. 재혼한 이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뭘 어떻게 합니까? 그냥 이대로 행복하게 서로 사랑하면서 살면 됩니다. 굳이 이혼할 필요가 없습니다.

 

뭔가 모순처럼 보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라 하지 마라 명령하신 그 모든 것에는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하나님의 정의가 배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얼핏 엄하고 무거운 멍에처럼 보여도 결국에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가장 유익된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시는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의 지식이 하나님을 능가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당장 눈앞에서 보이게는 심히 부당하고 무거워 보여도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멍에는 정당하고 가볍습니다.

 

그런데 사실 오늘 주제는 이혼이 아닙니다. 결혼생활도 아닙니다. 오늘의 주제는 성결입니다. 회중의 성결과 하나님의 땅의 성결입니다. 이른바 공동체의 성결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가나안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증표입니다. 그래서 그 땅은 항상 성결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 교회는 하늘로 통하는 문이자 구원에의 약속이며 이 세상에서 죄 아래에서 억압받고 고통받으며 신음하는 많은 인간들을 해방시켜서 하나님의 나라, 지상 천국을 이루게 하시겠다는 산 증거입니다.

 

그래서 그 안은 순결해야 합니다. 성결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주제는 성결입니다.

 

에스라가 페르샤에서 제2차 포로귀환민 9000명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당시에 이미 1차 포로귀환민들과 그 후손들은 영적인 순결성을 잃어버리고 종교적 열정도 식어버렸던 상태였던 것 같습니다.

 

세월은 비록 60년밖에 흐르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을 더 열심히 잘 섬기기위해서 바벨론 땅에서 닦았던 기반을 버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땅 가나안으로 돌아왔던 때의 순수함을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이런 신앙 열정이 식어버린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아마 백성들의 실망도 한몫한 모양입니다.

 

더 이상 다윗왕국의 회복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는 그런 현실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고 그래서 곧 백성들이 소망을 버리게 되었고 결국 기다림에 지친 백성들이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 사람들은 지금 페르샤의 지배하에서 고향에 정주하러 왔지만 독립을 하고 나라를 세우려고 하는건 아닙니다. 페르샤는 너무 강하고 유대인은 너무 적습니다. 도저히 상대가 안됩니다.

 

이 사람들이 다윗왕국을 열망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나라가 강대해져야 자기들이 자랑스럽다는 그런 자부심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입니다. 경제적인 문제라고 해도 되고 ...

 

하루 하루 사는데 있어 나라가 약해서 포로로 끌려가고 과도한 세금을 내고 재물을 빼앗기고 조공을 바친다고 피폐해지고 그런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더 이상 주변나라의 압제에 시달리지 않는 강대한 나라 다윗왕국을 꿈꾼 겁니다.

 

생각해보세요. 정복자와 정복당한 자들이 같은 대우를 받을 수는 없습니다. 만일 그랬다가는 정복자들이 가만있지 않고 들고 일어날겁니다. 힘써 싸워서 강대국을 만드는데 기여했는데 아무런 혜택이없다면 그 사람들이 불만을 가지고 어쩌면 왕자리에서 쫓겨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어째요? 정복당한자들에게 그 만큼 더 빼앗으면 됩니다. 그러니 정복당한 여러 민족들의 삶이 더 어려워십니다. 그러니 자존심도 상하고 게다가 먹고 살기도 어렵고.

 

그래서 반란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당시 페르샤에는 이민족들의 반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제가 언젠가 영미나 오스트리아 스페인 같은 나라들의 궁전이나 유적지를 보고 왜 이렇게 우리나라에 비해서 화려한지 궁금했던 적이 있었는데 저하고 아주 가까운 이가 저에게 그 해답을 말해 주었습니다.

 

식민지에서 빼앗아 온 걸로 이렇게 부유하게 되었다. 그런데 조선은 남에게 뺏기기는 해도 빼앗아 온 적이 없어서 그렇게 초라하다.

 

제가 그 말을 듣는 순간 모든게 바로 이해가 되었습니다. 자연과의 조화에 소박한 기질의 선비정신 때문에 유물이니 궁전이니가 작고 검소한게 아니라 돈이 없어서 라는 것을 바로 알게 되었습니다.

 

유다자손들에게, 포로지에서 돌아온 포로귀환민들의 후손들에게 다윗왕국은 바로 현세에서의 행복과 풍요를 약속하는 말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스룹바벨이 살해를 당했는지 실각을 했는지 더 이상 다윗왕가가 이어지지 못한 것을 본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성경을 의심하기 시작했으며 성직자들마저 하늘 소망을 잃어버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삶에 찌들려서 하늘 소망을 잊어버리고 영적으로 타락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자기들의 삶이 타락했다고 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만 하나님이 보실 때 유다의 백성들은 점점 선택받지 못한 이방인들하고 같아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통치 율법이 더 이상 지켜지지 않고 사람들이 예사로 그걸 어기니까 타락인 겁니다. 심지어 사람들은 그게 문제인지도 모릅니다. 그게 뭐 어때서?

 

1.에스라가 엎드려 울며 기도하니

에스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 여인과 결혼해서 영적인 순결을 잃었다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 그 죄를 회개합니다.

 

9:8,9,10절에서 “우리 하나님이 우리 눈을 밝히사 우리가 종노릇 하는 중에서 조금 소생하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비록 노예가 되었사오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그 종살이 하는 중에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바사왕들 앞에서 우리가 불쌍히 여김을 입고 소생하여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게 하시며 그 무너진 것을 수리하게 하시며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우리에게 울타리를 주셨나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이렇게 하신 후에도 우리가 주의 계명을 저버렸사오니 이제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한 이들은 하나님의 영적인 섭리를 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 지나치게 몰입되어 하나님의 어루만지심에 둔감하게 되면 그는 세상이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지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돌아온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나 범죄하고 폐역한 우리를 살려 주시고 이제 겨우 소생하기 시작했는데 벌써 죄를 저지르다니 정말 하나님 앞에 면목이 없다고 한탄한 겁니다.

 

사실상 이번의 범죄는 에스라하고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에스라 잘못이 아닙니다. 에스라가 결혼한게 아닙니다. 그들은 이제 막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미처 범죄를 저지를 시간이 없었습니다. 이방여인과의 통혼이란 죄는 에스라가 이 땅에 오기전 수십년전에 벌어진 일입니다.

 

그러나 에스라는 백성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전 앞에 엎으려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가 우리가, 자꾸 우리가~했다고 말합니다.

 

와보니 먼저 정착한 선주민들이 범죄했다는 것을 알고 저들의 죄와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정죄하고 구별한게 아니라 저들 역시 하나님의 백성이고 나의 지도를 받는 양이라는 생각으로 비록 내가 이땅에 오기전에 범죄한 것이지만 나의 백성들의 죄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엎드린 것입니다.

 

그래서 너거 죄가 아니라 우리 죄.

 

2.이스라엘 중에서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이제 막 예루살렘에 도착한 에스라가 먼저 온 선주민들의 죄 때문에 예루살렘 성전제단앞에 엎드려 회개기도를 드린다는 소식을 듣고 수많은 백성들이 모였답니다.

 

본문에는 “에스라가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크게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뭐 앞뒤가 생략되기는 했지만 본문은 에스라의 종교개혁을 다루는 내용입니다. 그 중에서도 이방여인과의 결혼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백성입니다. 요즘말로 하면 성도. 하나님의 법에 따라 자기들의 행동준칙을 삼고 하나님의 품안에서 그의 보호와 인도에 따라 산다는 원칙이 모든 백성들의 마음속에 확고하게 자리잡아야 하나님의 나라가 굳건히 서는 겁니다.

 

이방여인들과 결혼한 것도 사람이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해결에도 역시 사람들이 움직여야 합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시도록 성령의 감동과 감화 교통이 필요한 법입니다.

 

지도자가 먼저 죄를 회개했으니 백성들은 가만 앉아서 지도자의 회개기도 덕분에 무사하게 지나가는게 개혁이 아닙니다. 지도자의 회개 기도는 백성과 공동체의 회개를 촉구하고 그 땅을 깨끗게 할 조치를 촉구하는 기도입니다. 결국에는 사람이 회개해야 합니다. 백성이 회개해야 하는 겁니다. 백성들이 결단하고 새로워져야 합니다.

 

백성들은 결단할 생각이 없는데 지도자만 아무리 떠들어도 안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달라고, 우리를 용서해 달라는 회개의 기도가 필요한 거지요.

 

그러므로 사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 들여야 뭐가 이뤄져도 이뤄지는 거지 스스로 자기들하고 하나님하고 상관이 없다고 여긴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것이지요.

 

지도자가 저렇게 자기들의 죄 때문에 엎드려 울며 통곡하고 회개기도를 하는데 ‘저 사람이 왜저러지?’ 또 ‘보여줄려고 쇼하는구나!’ 아니면 요즘 아이들의 언어로 ‘백성들의 관심을 끌려고 하는 관심종자구나! ’이렇게 여기고 문제의 심각성을 모르고 넘어가거나 자기들은 전혀 회개할 마음을 먹지 않는다면 절대로 개혁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3절에 ‘내 주의 교훈을 따르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가르침을 받는자’ ‘내 주’나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는 에스라를 가르칩니다. 그 에스라의 가르침을 받아서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 우리가 살 수 있다고 여기는 자들이 있어야 비로소 개혁이 성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강제적인 개혁도 물론 개혁일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 개혁은 자발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중요한 것이지요. 그래서 핵심 지지층이 필요한가 봅니다.

 

에스라는 페르샤 임금의 총신입니다. 그로부터 예루살렘에 올 때 엄청난 금은보화를 받아서 왔을 뿐만 아니라 강서편 모든 지역의 재판장과 판사들을 임명할 권한까지 가지고 온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판사들의 자격은 ‘하나님의 율법에 능한자’입니다. 그러니까 에스라를 유다로 보낸 페르샤의 왕 아닥사스다는 에스라로 하여금 하나님의 법으로 강서편 지역을 다스리라는 명령을 내린겁니다.

 

그런데 에스라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사법권을 사용해서 강제로 이방인과 통혼한 가정에 이혼을 명하고 그 자녀를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내어 쫓으라고 강제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세상의 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으로 백성들의 영적인 구별성,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라는 마음에 호소한 것입니다.

 

이거 제대로 말씀드리기는 뭐한데 백성들은 일방적인 하나님의 명령에 “예, 알겠습니다” 하고 고분고분하게 따르는 일은 잘 없습니다. 하나님의 실체도 보지 못하고 그의 법을 어겼을 때 내릴 벌도 겁나지 않는데, 아예 천벌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데 무슨 하나님의 명령을 즉각적으로 순종하겠습니까?

 

그래서 사람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려고 하는 백성들이 중요한 것입니다. 개혁에 대한 핵심지지층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준행하려는 마음을 먹은 자들이 필요합니다.

 

목사는 일단 제일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준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목사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양떼에게 먹여야합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경시하는 자가 다른 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중히 여기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자기는 성경을 믿지 않으면서 남에게만 성경을 믿으라고 말한다고 그게 제대로 먹힐 리가 없습니다.

 

성경이나 설교나 하나님의 영과 관련된 것에서 거짓은 통하지 않습니다. 그럴듯하게 보여도 역사하는 힘이 없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영은 거짓을 싫어하시기 때문입니다. 경멸하시지요.

 

만일 어떤 지도자가 자기는 전혀 믿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그럴듯하게 해석하고 풀어서 설교한다고 해도 비록 사람들의 앞에서 그렇게 말해도 아무도 제대로 듣지 않습니다.

 

자기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남이 없는지 삼가 살피고 그리고 제대로 지키고서야 비로소 남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지키라고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건 위선이요 거짓입니다.

 

물론 인간적인 방법으로 일시적으로 사람들을 속일 수는 있지만 절대로 오래 가지 않습니다. 결국 거짓과 가짜는 드러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벌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진실되이 하나님의 말씀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믿고 받아서 준행하는 자여야 만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3.이 모든 아내와 그들의 소생을 내보내기로

영적으로 더러워진 이스라엘을 새롭게 하고 영적인 순결을 회복할 첫 번째 조치로 이혼이 채택되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이스라엘 공동체의 위기에 대한 해결책은 현재 이방여인과 결혼한 사람들에게 이방인과 이혼하고 그 여인들과의 사이에서 난 소생을 유대에서 내어 보내는 약간은 잔인한 방법이 채택되었습니다.

 

이걸 에스라는 유대땅, 하나님이 나라 영토에 오염된 죄악을 제하고 성결하게 되는 첫 번째 조치로 삼았습니다.

 

이걸 보고 우리 중에 혹 이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와, 유대인들 정말 무섭네. 어쩜 저렇게 잔인할 수 있지?’

 

옛날 유대인들은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종교적 광신도 같습니까? 애가 무슨 죄냐? 물론 요즘 식으로 단순히 보면 그렇게 여길 수도 있지만 실제로 속사정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건 나중에 가면 ‘아 , 그렇구나!’하고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역사를 살펴보면 이방 여인과 결혼한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경우도 있습니다. 기생 라합의 경우. 그 여인은 여리고의 원주민이었고 이스라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이방여인이었지만 유대족장의 아내가 되었고 예수의 족보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룻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압 여인이지요. 이 여인은 다윗왕가에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방인과의 결혼이 무조건 불법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방인과의 결혼은 성경 여기 저기에서 많이 눈에 뜨입니다.

 

다윗과 밧세바에 나오는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아는 이방인입니다. 그러므로 민족을 넘어서 통혼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성경에 나온 이름을 잘 살펴보면 이방인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에스라서에 나오는 이스라엘 귀국자들의 명단에도 이방인의 흔적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에는 이름만 봐도 자국민인지 외국인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이방인과의 통혼이 큰 문제가 되는 겁니까?

 

오늘 본문을 약간 벗어나지만 이방여인과 결혼해서 아내를 내어보낸 사람의 숫자는 사실은 110명밖에 되지 않습니다. 많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매우 적은 숫자입니다.

 

마치 에스라가 이스라엘 민족이 사라질 것처럼, 도저히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없을 것처럼 통곡한 것치고는 매우 적은 숫자입니다. 백성들이 모두 모여서 총회를 모여서 결의한 것 치고 숫자가 너무 적습니다. 본문을 잘 보면 안식일은 유대인들이 일을 하지 않는데 인식일을 빼고 총75일동안 이방여인과 결혼한 사례를 조사합니다.

 

각 가문의 족장들과 촌락의 장로들을 동원해서 조사하고 판사들이 중간에 판결을 하고 걸린 시간이 75일입니다. 그런것치고는 정말 소수입니다.

 

4.이방여자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았으나

에스라가 슬퍼하며 회개한 이유는 단순히 이방 여자를 아내로 맞이한 것 때문이 아닙니다.

 

9:1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 땅 백성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가나안 사람들과 헷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과...아모리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행하여”

그러니까 이방여인과 결혼해서 문제라는게 아니라 그 땅 백성들과 결혼해서 그들의 가증한 풍습을 따라하는게 문제라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과 성도의 자녀들과의 통혼입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한 가정이 되어서 믿지 않던 사람들이 결혼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섬기게 된다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의 이방여인과 통혼한 가정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들은 이방인과의 통혼뿐만 아니라 결혼을 통해서 우상을 받아 들이고 저들의 가증한 풍습까지 받아 들였다는 겁니다.

 

가증하다는 말은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신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야 아무 생각없이 음란하고 쾌락을 즐기고 돈을 좋아한다 칩시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래서는 안될텐데도 아무런 생각없이 그런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시는 일을 행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겁니다.

 

원래 이민족들과의 혼혈가정에서 자녀를 어느 식으로 교육할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슬람은 주로 결혼을 통해서 포교합니다. 자기들의 세력을 키워 나갑니다. 그래서 한번 이슬람 가정이 되면 기독교로 개종할 수 없습니다.

 

이슬람 세력권에서 기독교도는 이슬람교로 자유롭게 개종할 수 있지만 반대의 경우는 엄격히 금지되어있습니다. 단지 아버지 때의 신앙을 유지하는 것은 허용하는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도로 태어나면 기독교로 있는 것은 허용된다는 겁니다.

 

지금도 시리아 정교도나 안디옥 교회의 교도, 아르메니아 정교도 콥트교도 등등이 이슬람 세계에서 힘겹게 신앙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원래 그 동네가 기독교 세력권 이었는데 이슬람교에 정복되면서 준 기독교도에 대한 신앙유지권이라 보면 됩니다.

 

그러나 말로만 신앙을 유지하게 한 거지 실생활에서의 차별은 말로 못할 정도입니다. 핍박이 심합니다.

 

에스라가 걱정한 것은 실제로 이방인과 통혼하고 소생이 있는 가정이 매우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에 명단이 나온 110명은 끝끝내 유대교로의 개종을 거부하고 이방 풍습과 우상숭배를 고집한 가정입니다.

 

아마 총회의 결의로 개혁작업을 하겠다고 결의할 정도로 신앙 열정이 살아난 것이 이방 여인과 그 가정에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도록 영향을 미친 모양입니다. 그래서 여기 나온 판사들은 그 사실에 대해서 법적으로 증거하기위함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끝끝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기를 거부한 여자가 110명이라는 말입니다. 10:18의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이란 말과 44절의 “이상은 모두 이방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자라”는 말에서 ‘아내로 맞이한’ 이란 말은 원문으로는 다른 단어가 쓰였습니다. 44절에서 ‘아내로 맞이한’ 이란 말이 더 심각한 범죄임을 나타내는 말인데 그래서 끝끝내 자기네 우상숭배를 고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어 보내는 겁니다. 하나님을 받아 들이기를 거부한 소생도 내어보내는 겁니다. 그것말고는 개혁할 방법이 없습니다. 오염물질을 제거하는 거지요. 순결을 회복하는 겁니다. 성결케 되는 겁니다.

 

그렇다고 죽일 수는 없는 거지요. 그래서 내보냅니다.

 

5.이 끝에서 저 끝까지 그 더러움으로 채웠다

9장1절부터 에스라가 하나님께 회개하면서 드린 기도의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에스라는 무슨말을 합니까?

 

처음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에 정주하러 왔을 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그 땅은 더러운 땅’이라고 했다는 겁니다. 왜 더럽냐면 그 땅에서 이방인들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가증한 일을 행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더러운 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면서 거룩한 하나님의 땅, 하나님의 나라가 되었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거룩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며 그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거룩한 땅이 되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법으로 죄를 제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법으로 그 땅을 다스리셨기에 그 땅이 거룩하다는 겁니다.

 

이걸 방해하는게 바로 이방인과의 통혼이라는 거지요. 사랑이나 욕정을 통하여 침투한 이방인과 우상숭배에의 동조는 정말이지 끊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걸 금하신 것이지 이방인과 결혼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많아지는 것은 하나님이 더 좋아하십니다. 이게 요즘 말로하면 선교입니다.

 

바울도 말했지요. “혹 너희가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를 구원할지 어떻게 알겠느냐”그러니 안믿는 배우자와 살아도 이혼 안해도 된다. 물론 이혼해도 되고.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그렇게 무자비한 분이 아닙니다. 문제는 어디 출신이냐가 아니라 하나님을 진심으로 섬기느냐 그의 법을 준행하느냐입니다.

 

솔직히 제가 성경을 보면 남북조 이스라엘이 우리나라하고 너무 비슷함을 느낍니다. 북쪽 이스라엘하고 남쪽 유다로 나뉜 거라든지 강대국의 위협을 극복하며 나라를 유지하는 것하며 우상숭배와 온갖 음란과 가증한 일들 가운에서도 하나님께 바르게 살고자 하는 이들이 끊임없이 종교개혁을 시도한 것등이 그러합니다.

 

특히 북쪽 이스라엘에서 기독교의 맥이 끊겼지만 남쪽 유다에서는 기독교가 아직 왕성한게 그렇게 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남쪽도 하나님이 보실 때에 더러운 일을 많이 행합니다.

몇 년전에 우리나라도 간통죄가 폐지되었습니다. 작년까지 각 시의 광장에서 게이들의 축제가 열려서 음란한 행위가 판을 쳤습니다. 이제는 차별금지법이란게 국회에 발의되었습니다.

 

종교와 정치의 분리는 글쎄요. 당리당략에 따른 정치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불행하게도 인간은 날 때부터 악하다고 믿는게 기독교입니다. 성악설. 그래서 정치꾼들이 뭐라고 선동해도 결과를 보기 전까지 섣부르게 비판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나라가, 우리가 사는 이 땅이 진멸될까 두려운 경우에 우리는 정치에 개입해야 합니다. 저는 이 땅의 모든 사람이 교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땅에 하나님의 정의가 우뚝서고 하나님의 법으로 이 나라가 다스려지는 그런 나라가 되기를 바랍니다. 실제로 사람들이 범죄하는 것은 충분히 인간인 이상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범죄가 나라로부터 공인되는 것은 정말이지 다릅니다. 나라는 하나님이 자기를 대신해서 정의를 행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라고 만드신 기관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나라의 기능은 이익집단간의 이익을 조정하는 것으로 보여지지만 원래 하나님은 자기의 권세를 나라에 부과하셔서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자기의 뜻대로 정의를 행하면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가운데 살기를 원하십니다.

 

얼마 전에 게이들 때문에 나라가 한번 벌컥 뒤집혔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차별금지법을 발의하면서 가난한 자에대한 차별을 금지하자는 것처럼 호도했지만 그들이 본래 하고 싶은 말은 게이에 대한 차별금지입니다. 지금은 게이에 대한 옹호를 공공연히 할 수 없어서 속이고 있지만. 워낙 게이에 대한 여론이 부정적이니까. 코로나 때문에.

 

간통죄가 페지되고 이제 차별금지법까지 생기면 그래서 하나님의 땅에서 성이 혼돈하게 되고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이건 하나님의 가증히 여기시는 바입니다.

 

이건 나라가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시는 일을 공인하는 행동이기 때문에 하나님으로 햐여금 이 땅을 쓸어버릴 수 있는 명분을 주는 것입니다.

 

절대로 이게 통과되어서는 안됩니다. 차별금지법은 정말이지 파멸로 가는 나라의 터전을 파괴하는 범죄입니다.

 

6.이제 그 지방 사람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버리라

10:11절에 “ 이제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그의 뜻대로 행하여 그 지방 사람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버리라 하니”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12절에 “모든 회중이 큰 소리로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의 말씀대로 우리가 마땅히 행할 것이니이다”

 

사실 종교적인 개혁에는 강제력이 존재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옛날 한때는 강제적으로 종교적 개혁을 이룬 경우도 있지만 종교의 특성상 마음으로 순복하고 자발적으로 참여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개혁이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특히나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진심으로 그리고 전심으로 믿어야 할 필요가 있기에 가식적으로 믿는 척을 하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런거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스라엘 총회에서 이방인과의 이혼이 결의되었습니다.

 

그래서 내보내기로 하면서 유대인 남편이 말합니다.

“여보, 지금은 사세가 불리해서 내어 보내지만 나는 당신을 사랑하오. 조금 있으면 틀림없이 사람들이 다 잊어버릴테니까 그때까지 친정에 돌아가서 나를 기다려 주시오. 내가 유대교인이란게 부끄럽구려. 이 사람들은 비록 내 형제지만 너무 배타적이야. 이 신도 섬기고 저 신도 섬겨서 두 신이 양쪽에서 복을 주면 복도 두배로 되고 우리도 같이 살 수 있고. 얼나마 좋아”

 

이렇게 말한다면 이게 제대로 개혁이 된게 맞습니까? 그래서 에스라는 강제적으로 그가 가진 사법권을 가지고 하지 않고 이스라엘 족속이 모두 모여 총회에서 결의하게 한 것입니다.

 

이건 단순히 표면적으로 이방여인과 이혼함으로 끝날 개혁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 지방의 풍습, 아내가 가져온 이방 풍습과 여호와의 가증히 여기시는 악습을 폐하고 스스로 하나님의 법을 지키겠다는 자발적 결단만이 개혁을 끝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땅을 성결케 하기위해 여기에 스며든 이방인과 그 풍습을 일소하려는 에스라의 개혁이나 세속화의 물결 속에서도 하나님의 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오늘날의 진정한 교회들의 노력은 같습니다.

 

7.속건제로 드리니라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뭐냐면 이방 여인과 결혼한 것도 결혼임은 사실입니다. 그러니 비록 이방여인을 내보내기로 총회가 결의했더라도 이런 행동은 이혼하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게 된 것입니다. 비록 종교가 달라도 이혼이란게 하나님 앞에서 죄인건 사실입니다.

 

그래서 10:19에 “그들이 다 손을 잡아 맹세하여 그들의 아내를 내보내기로 하고 또 그 죄로 말미암아 숫양 한 마리를 속건제로 드렸으며”

 

하나님 앞에서 순결을 유지하기 위해 죄악을 일소하고 하나님의 주신 땅 가나안을 정결케 하기 위해서 비록 불가피한 조치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110쌍의 가정이 이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건 이혼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율법에 비추어 명백한 범죄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그 죄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께 속건제를 드리고 자기들과 이웃들의 죄를 위해 빌었던 것입니다.

 

본문의 배경은 구약시대지요?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바울은 간음한 배우자와의 이혼에 이어 종교가 다를 경우에도 이혼을 허락합니다. 허락입니다. 이혼을 명한게 아니라 그럴 경우에 이혼해도 좋다는 겁니다. 물론 안해도 된다고 적었습니다.

 

성경에 상충되는 조항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상충되지 않지만 그렇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명문으로 명백하게 금한 것을 범하게 되면 그것은 죄입니다.

 

그래서 죄를 위해서 회개할 필요가 있습니다. 회개는 인간이 하는 것이고 용서는 하나님이 하는 것이라고 당연히 용서함 받을 것으로 여기고 자꾸 뻔뻔하게 죄를 저지르고는 아주 당당하게 “용서해 주세요. 어서 용서해 주세요. 시간 없어요. 오늘 죄사함 받은 기념으로 재혼한 아내와 기념 파티를 하기로 했단 말입니다” 라고 말하지는 않겠지요?

 

교회는 하나님의 진리를 고수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명령을 순종하고 순종하도록 격려하고 권면하는 집단입니다. 개인은 그냥 쉽게 넘어가려고 해도 집단으로 모여서, 회중이 모여서 자기들의 부족함을 서로 도와 하나님의 진리에 더 가까이 나가고자 하는 곳입니다.

 

본래 사람은 자기에게는 한없이 관대한 법. 당연히 자기가 아닌 자기의친인이아닌 이가 보고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기심이나 질투로 모략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안됩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성도가 이렇게 말하는게 좋습니다. 그는 형제를 시기해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게 아니라 사랑해서 더 잘되게 하려고 하는 것이니까 일단은 믿어보는 겁니다.

 

그런데 소위 진보교단이라고 하는 뭐시기 단체가 있는데 놀랍게도 이 사람들이 게이를 차별하지 말라는 차별금지법을 찬성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는걸 보고 정말이지 어이가 없었습니다.

 

분명히 게이를 돌로 쳐 죽이라는 아주 단순한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약자와 소수자의 보호가 성경을 관통하는 원리라는 해괴한 말로 사람을 호도하는 이들이 교회와 목사의 탈을 쓰고 있음에 정말이지 통탄할 일입니다.

 

요즘 세상에 개인이 개인을 돌로 쳐죽일 수는 없지요? 그래서 그만큼 게이질이 사악하고 가증한 범죄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걸 비역질이라고 표현합니다. 남색이라고도 부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남겨두신 땅에서 남겨둔 사람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가증히 여기시는 죄악이 성행하는 것을 결단코 두고 보시지 않습니다.

 

게이를 옹호하는 것은 결단코 정의가 아닙니다. 게이질을 찬성하게 되면 그리고 차별금지법을 통과시키게 되면 장차 이 땅의 미래는 없습니다. 안 그래도 지금 출산율이 0명대인데 이게 퍼지게 되면, 이게 나쁘다는 인식조차 없는 아이들에게 게이에 대해 무감각하게 만들게 되면 이걸 찬성하고 지지해야 쿨하다는 인식을 심어주게 되면 아무도 애를 낳을 수 없을 것입니다.

 

입양말고 가정이 될 수가 없지요. 생물학적으로. 가정을 만들려면 외국에서 이민족을 입양시키는 수밖에 없겠네요.

 

어떤 이는 인간은 지상의 바이러스다. 인간이 없어져야 지구가 정화된다고 집단멸종을 주장하는 황당한 이들도 있습니다. 혹 이들이 게이를 옹호하는 것이 바로 이런 사상때문이 아닐까 의심이 듭니다. 음, 농담입니다.

 

인류의 집단 멸망. 아니지 소멸.

 

오늘 기사를 보니까 에이즈환자의 90%가 남성입니다. 게이들인거지요. 물론 통계는 동성간 성접촉이 53% 이성간 성접촉이 사십몇퍼센트라고 되어있지만 이건 게이들 중에서 양성간 접촉을 하는 이들로 인한 사고지요. 게이가 아닌 것처럼 위장한 사람들.

 

또 하나는 통계를 살짝 왜곡해서 마치 에이즈에 게이가 생각보다 큰 원인이 아니라는 인상을 주려고 한겁니다. 그러니 여성 에이즈 환자의 비율이 그렇게나 낮은 겁니다.

 

제가 다시 말씀 드리지만 이 땅이 보존되고 나라가 유지되는 길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회복되어 바로 사는 길 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해야 할 바는 하는 거지만 우리는 하나님께 매달리지 않고서는 저 거대한 나라들을 이길 방도가 없습니다.

 

군대도 필요하고 군비를 지불할 수 있는 경제적인 여력도 필요하고 정신이 제대로 박히는 것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영성 회복이 먼저입니다. 건전하지 못한 정신을 가지고 건전한 가치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쾌락은 찰나지만 그 잘못된 쾌락으로 인해 이 나라가, 우리가 애써 지켜온 이 나라가 멸망한다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일까요? 아니 민족 자체가 사라진다면 이건 믿을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거스르고 제대로 살아난 이들이 있나요?

 

이스라엘 땅에 혼혈이 되어 남은 사마리아인들을 보세요. 이스라엘 열 개 지파가 명목상 그들의 선조들인데 이제 남은 이들은 이십년 전에 겨우 160명으로 줄었습니다. 그리고 종족명이 이스라엘인에서 유대인으로 되었습니다. 원래 유대는 이스라엘 12지파 가운데 한 지파일 뿐인데 말입니다.

 

아니 이 지구에 인류가 멸망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소돔처럼 남성체로 보이는 천사들을 끌어내어 윤간하려 한 그래서 더 이상 존속할 가치가 없다고 불벼락을 맞아 멸망한 그 사람들처럼 되려고 하는건 아니지요?

 

소돔은 남색이 만연한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영어로 ‘소도미’가 남색이란 단어가 되었습니다. 그 끔찍한 범죄를 옹호하려는 적그리스도의 앞잡이들이 교회의 탈을 쓰고 설친다는게 정말이지 기가 찹니다.

 

성경을 명문대로 믿지 않고 무슨 이솝우화집처럼 교훈만 믿는다는 이들은 성경을 인정하지 않는 인본주의자들입니다. 보다 정확히는 히브리 그리스 고전연구자들? 아니면 예수 이름 팔아서 먹고 살려는 사기꾼들입니다.

 

나 혼자 잘 먹고 잘사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아 그렇게 기도하고 지도하면 끝이 아닙니다. 우리 성도는 오늘 여기에 두 발을 딛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지만 우리네가 살고 있는 공동체가 심하게 왜곡되고 변질되어 하나님의 법을 공격하고 무너뜨리려고 하고 그걸 보고 가만히 있거나, 하나님의 법을 끝까지 지키려는 자를 핍박하도록 둔다면 그것도 방관의 죄입니다. 공범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이 안전하고 공의로워야 하나님의 성도들이 평안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에스라의 개혁이 어떤 모습으로 끝이 났는지 볼까요?

 

8.자녀를 낳은 여인도 있었더라

보통 한권의 책이 끝나면 뭔가 그럴듯한 마침의 표시가 있습니다. 내용상으로도 뭔가 더 이상 궁금하지 않게 끝을 냅니다.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더라 아니면 죽어서 민족의 샛별이 되었더라 아니면 그의 개혁으로 나라가 소생했더라 이런 말이 에스라서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마지막에 이방 여인과 결혼했다가 내어 보내는 남자들의 이름을 집안별로 기록하고는 “이상은 모두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자라 그 중에는 자녀를 낳은 여인도 있었더라”는 전혀 내용상 끝이 아닌 표현으로 에스라서가 끝이 납니다.

 

아직도 에스라가 해야 할 개혁이 많은 것처럼 보이는데 다른건 없고 그냥 이방여인과의 이혼만 이야기하고 그 자녀들을 실제로 어떻게 했는지도 나오지 않고 다른 죄악들에 대해서는 그가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도 나오지 않습니다.

 

이걸 보고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개혁은 끝이 나지 않고 중단없이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대로 봉합하기에는 너무 미진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해야할 개혁이 많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개혁주의 신앙을 고수합니다. 날마다 회개해도 늘 회개할 거리가 넘치는 사람들. 회개의 기쁨을 간직하고 하나님 앞에서 더 바르게 잘 살려고 노력하는 이들. 끊임없이 신앞에 선 단독자를 생각하는 사람들. 이게 바로 성도입니다.

 

저는 이런 성도들이 더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우들이 다 이런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제가 볼때는 우리 교우들은 모두 성도입니다. 성도의 가는 길은 비록 외롭고 때론 괴롭지만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있기에 이 땅에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 더 많은 성도들이 생겨나기를 바랍니다. 이미 좋은 편에 서 있는 우리 성도들은 더 이 좋은 것을 꽉 붙드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손을 붙들고 놓지 마세요. 그가 우리의 손을 꽉잡아서 품에안아 보호하실 것이며 세상의 파고가 우리를 침노치 못할 것입니다. 코로나가 부산 경남을 제외하고 다시 발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은총이 우리위에 함께 하실 것을 믿습니다. 기도합시다.

 

- 홍종일 목사님 2020년 7월 5일 주일 설교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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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누리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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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그토록 과학 기술이 발전했음에도, 사실 하루 사이에 비가 막 쏟아지니까 길이 다 침수되고 맙니다.

상상력을 보태서 우주에서 커다란 돌멩이 하나가 떨어지면 모든 것이 끝날 수도 있습니다. 영화 같은데서 간혹 볼 수 있죠.

여전히 지진과 폭우를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합니다.

세상은 복잡하니까요.

 

그러나 근본적으로 시대를 흘러도 변함없는 것이, 사람은 악에 물들기 쉽다는 것과, 쾌락 앞에 무릎 꿇기 쉽다는 점입니다.

특히 경계해야 할 대목은, 이 정도는 괜찮겠지, 이건 용서받을 수 있겠지, 라면서 현실과 타협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에게 유리한 해석과 주장을 덧붙여가며 목소리를 높입니다. 내가 정의의 사도라고 단단히 착각하는 것이지요.

 

기독교는 쌓아두기 보다는, 버려나가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세상의 방향이 절벽아래로 뛰어내리고 있더라도, 그 화살표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소돔이라는 역사가 인류에게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기에, 우리의 판단력이 흐려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 2020. 07. 시북 (허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