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Review]/기타

죽음을 넘어 희망으로 (라합이야기)

시북(허지수) 2008. 1. 11. 11:19

 이번 글은 이 곳에 보관할까 말까를 (과장을 보태) 적어도 100번은 고민한 듯 하다.
 하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던 글 중에 하나이기에, 감히 보관해 놓기로 한다.
 이 글은 나의 은사님이신 홍종일 목사님이 2004년 했던 설교 강의의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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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일 목사님. 미국 파사데나에서.


죽음을 넘어 희망으로
(by 홍종일)

1. 여호수아가 정탐꾼을 보내다
여호수아가 모세의 후계자가 된 다음 처음으로 해야 할 일이 바로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여리고의 정복이었습니다. 사실 여리고는 가나안에서 가장 강한 성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요단을 건너가는 이스라엘에게는 너무 어려운 상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백성들이 가나안을 정복하려면 반드시 차지해야만 하는 성입니다. 그것도 빠른 시일내에.
왜냐하면 여리고는 가나안의 남북을 잇는 곳에 있었기 때문에 여리고성을 정복하면 남북의 연합을 방지할 수 있어서 가나안의 세력들을 양분해서 각개 격파를 할 수 있기때문입니다.
그런만큼 여리고는 결코 만만한 성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가나안과 여리고땅을 정탐하고 오도록 두사람의 정탐꾼을 보냅니다
여호수아의 입장에서는 실로 격세지감이 들었을 것입니다. 사실은 그 역시 40년전에 모세의 명으로 가나안을 정탐한 적이 있기때문입니다. 이미 모세는 죽었고 자기가 후계자가 되어서 이번에는 자기가 정탐꾼을 보내는 입장입니다. 그는 모세당시의 실패를 교훈삼아 떠들썩하게 정탐꾼을 보내지 않고 몰래 두사람을 선발하여 보냅니다

2. 라합의 집에 유하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여리고에 들어가자마자 즉시로 기생 라합의 집에 들어가서 유숙합니다.
이상합니다. 왜 하필이면 기생집으로 들어간 것일까요?
사실 우리성경의 기생이란 말은 그래도 고급단어입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창녀입니다. 그러므로 기생 라합의 집이란 창녀집이었단 말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정말 이상합니다.
거룩함을 생명으로 하는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이 아무리 정탐을 위하여서라고는 하지만 거리낌 없이 여리고에 오자마자 즉시로 창녀집으로 들어간다는게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라합의 집이 여인숙을 겸하고 있던 창녀집이었기 때문에 충분히 여행객들이 유숙할 수 있는 여건이 됩니다. 옛날의 여인숙은 대게 창녀집을 겸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아니 그러면 여리고에 여인숙이 라합의 집 하나밖에 없었습니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에도 교통의 요지로서 수많은 사람들이 왕래하였고 여리고 자체가 큰 도시라 향락산업이 발달되어 있었기 때문에 많은 여인숙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정탐꾼들이 라합의 집으로 간것도 우연히 간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의한 것입니다.
라합이란 여인을 여리고의 멸망에서 건져내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세워졌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탐꾼들은 자기네가 비록 의식하지 못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먼 조상, 다윗의 먼 조상이 될, 그래서 구속사의 한 장을 장식할 한 여인, 역사의 주인공을 구하기 위해서 그 집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3. 사람들을 끌어내라
그런데 정탐꾼들이 여리고성에 들어가자마자 그 사실이 바로 왕에게 보고가 되었습니다.
누가 그 사실을 알아내고는 보고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아마도 여리고성은 이스라엘군의 통태를 살피느라 초비상이 걸려있었던것 같습니다. 아무리 원시적인 무기를 들고 있다고 해도 워낙 자기들보다 사람 수가 많으니까
또 그들의 신 여호와는 자기네들이 생각하기는 전쟁에 능한 신이기 때문에.
이미 요단 저편의 아모리인들이 그들에게 참패를 당했다는 소식에 지금 여리고성에서는 눈에 불을켜고 이스라엘의 동태를 감시하고 있는 중입니다.
더구나 지금 이스라엘 인들은 여리고 맞은편에 진을 치고 있는 상황입니다. 아마 여리고로 쳐들어오기위해 요단강을 건너려 할 것같습니다
그래서 수상한 낯선이가 라합의 집으로 들어간 것은 즉각 여리고의 왕에게 보고가 되었고 라합의 집으로 체포조가 당도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낯선 이들을 끌어내라고 이야기 합니다

4. 그 여인이 거짓을 말하다
그런데 라합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적군을 즉시 보고하고 잡혀가도록 해야 될 터인데 이 여인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한글 성경과 다르게 ‘이미 숨긴것’이 아니라 여리고의 병사들이 정탐꾼을 잡으러 오자 즉시 두 사람을 데리고 지붕위로 올라가서는 지붕에 말려 논 삼대밑에 그들을 숨깁니다. 그리고는 말합니다.
뭐라고 합니까?
나는 그들이 정탐꾼인지 전혀 몰랐다.
그리고 그들이 왔다가 저녁에 나갔다. 아마 지금쯤 멀리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빨리 쫓아가 봐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여기 그런 사람이 안왔다고 딱 잡아떼면 당연히 그게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고 집안을 철저히 수색할 것입니다.
참 지혜로운 여인입니다.
창녀치고는 정말 굉장하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조금 다른데 있습니다.
즉 아무리 선한 목적을 위해서지만 그렇게 거짓을 말해도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라합이란 여인의 행위는 성경에서 믿음의 행위로 칭송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지금 거짓말을 한 것이고 또 나라를 배신한 매국노입니다. 이 여자는 여리고를 위험에 빠뜨리려고 하는 정탐꾼들을 살려줌으로 여리고를 이스라엘에 판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과연 정당한 행위입니까?
아니 예수를 위해서는 그래 거짓말을 해도 되고 나라를 파는 더러운 매국노가 되어도 된단 말입니까?
옛날 우리나라에도 황사영 금서사건, 오페르트 도굴사건에 한국인 천주교도가 관여하는 등 매국노들이 많이 나왔더랬습니다.
정말 실망입니다.
도저히 예수믿는 사람들을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일단 이 문제는 넘어가고 나중에 다시 봅시다
그래서 추적자들은 라합의 말을 믿고 급히 성을 나가서 요단강의 나루턱을 조사합니다.
요단강은 지금은 상류에 댐이 건설되어서 물이 없지만 당시에는 폭이 30M에 이르고 물살이 세어서 배도 띄울 수 없었고 다리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비교적 물살이 약하고 얕은 나루턱을 골라서 걸어서 건넜던 것입니다. 당시의 요단에는 이러한 나투턱이 약 60개 정도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당시는 ‘모맥을 거두는 시기라 물이 넘쳤기’ 때문에 이 나루턱에서 헤엄을 쳐야 겨우 건널 수 있었습니다.
자, 추적자의 입장에서도 이는 매우 쉬운 일입니다.
어차피 나루턱중의 한곳으로 갔을 것이고 싯딤의 이스라엘 진으로 갈 것이므로 예상 도주로를 판단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그래서 즉시로 달려가서 정탐꾼들의 자취를 추적합니다.

5. 라합과 말하는 정탐꾼들
다시 정탐꾼들에게로 돌아가 봅시다
2:6에 보면 ‘숨겼더라’ 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 말은 원문으로는 ‘왓티트메넴’이고 기본형이 ‘타만’입니다. 이 ‘타만’이란 말의 일차적 의미는 ‘감추다’지만 올가미나 함정에 빠진 상태를 묘사하는데 사용되기도 합니다.
이 말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 말은 라합이 정탐꾼들을 숨겨주고 있는 것을 나타내지만 반대로 라합이 숨겨주는 척 하고 가서 사람들을 데리고 오면 꼼짝못하고 잡혀갈 수 밖에 없는, 즉 함정에 빠진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임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정탐꾼들이 라합의 인도로 지붕위의 삼대 밑에 숨어있는 행동은 라합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이며 오로지 라합의 처분에 자기들의 목숨을 맡길 수 밖에 없는 위태하고 불확실한 상황임을 나타내 보여 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안전한 은신처로 생각했던 것이 바로 악한자의 올가미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지붕위에 숨어있는 정탐꾼들은 라합이 내려가서 병사들을 따돌리는 동안 불안과 초조, 그리고 의심과 번뇌로 자기의 하나님께 이 자리가 결코 악인의 올가미가 되지 않도록, 하나님이 보호해주시는 안전한 은신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는 여자를 믿다가 실패한 사람이 있습니다.
유명한 삼손입니다. 천하장사인
그러나 자기네는 천하장사도 아니고 단순히 적진을 염탐하는 정탐꾼일 따름입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지금 발각되기만 한다면 꼼짝없이 잡혀가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외통수에 몰려있습니다.
날개가 달리지 않는 한 어쩔 수 없는 곳, 바로 절대절명의 순간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병사들이 물러가고 라합을 다시 만났을때 이 정탐꾼들의 감격과 기쁨은 엄청나게 컸습니다.

6. 내가 여호와를 아노라
두 정탐꾼이 자기 전에 지붕으로 올라온 라합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선대하라”
내가 너를 살렸으니 너희도 나를 살려라
이말입니다.
그러면 라합이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살려준 이유가 자기목숨을 살리기 위해서입니까?
그렇습니다. 라합은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보고 즉시 자기와 식구들의 목숨이 이번에 저사람들로 말미암아 살아나리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 이 여자는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요?
솔직히 꼭 여리고가 패망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혹시라도 다른 곳에서 구원병은 오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여리고라는 성이 결코 호락호락한 성은 아닙니다. 그리고 자기네는 철기시대를 살고 이스라엘 인들은 청동기시대를 삽니다. 뭐 사실 이스라엘 인들이 가진 변변한 무기란게 뭐 있기나 합니까?
그런데도 왜 라합은 이스라엘앞에 여리고가 패하리라 생각할까요?
그 이유가 2:9에 나와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 내가 아노라”
이거 어떻게 알았을까요?
여러분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를 어떻게 점령할지를 놓고 이만저만 근심하는게 아닙니다. 저 거대한 성을 어떻게 우리가 얻을 것인가를 놓고 사람들은 특히 지도자 여호수아는 기도하고 적진을 살피고 정탐꾼을 파견하고 , 그것도 몰래
혹시라도 정탐꾼들이 갔다가 잡혀서 죽거나 아니면 부정적인 소식을 전해올까봐 몰래 보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지금 라합은 뭐라고 합니까?
내가 안다
뭘?
하나님이 이땅을 너희에게 주신줄을 내가 안다
참 굉장합니다.
이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걱정과 근심하는 모습을 보시는 하나님은 얼마나 기가 차겠습니까?
내가 이 땅을 너희에게 준것은 여리고사람들도 알고 있는데 정작 너희는 몰라서 이렇게 걱정하고 근심하며 탄식하는구나
지금 우리는 혹시 이런 모습이 아닙니까?
적군의 외양만 바라보고는 겁을 먹고 걱정하며 좌절하고 주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조금 더 살펴보기로 합시다
역시 2:9에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직역하면 “너희들을 향한 공포가 우리들 위에 떨어졌다”입니다.
계속해서 2:11절에 “우리가 듣자 마음이 녹았고...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그러니까 지금 이들이 느끼는 감정은 공포 바로 그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단지 군사의 많음과 무기의 우수함으로 전쟁에 승리해왔다면 여리고 사람들이 이정도로 공포를 느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리고성은 가나안 중부에서 최고로 난공불락의 요새이기때문입니다.
지금도 여리고는 팔레스타인의 수도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대 사람의싸움이라면 이들도 그렇게 까지 공포를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만 여리고인들은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가 저들로 하여금 전쟁에서 이기게 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저들의 접근에 공포를 느꼈다는 말입니다.
신과 사람이 붙어서는 도저히 이길 수 없습니다.
세상천지에 그 누가 있어도 도저히 하나님과는 대적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가 지고 있는 짐을 맡겨버리면 모든게 해결될텐데도 우리는 끝까지 그 짐을 우리가 지고는 ‘주님 너무 힘들어요’를 연발하고 있습니다
뿐입니까 무거운 짐을 지고는 도저히 갈 수 없어서 짐을 진채로 주저앉아있는 형편입니다.

7. 죄악중에서도 공의를 행하신다
계속해서 라합은 “이 땅백성이 다 너희들 앞에서 간담이 녹았다”라고 말합니다.
이정도면 우리는 당시 여리고 사람들이 얼마나 큰 공포를 느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신들의 전쟁에서 보통 그 전쟁은 성전입니다. 단순히 세력을 확장하는 전쟁이 아니라 선과 악의 대결구도로 가기 때문에 점령당한 도시는 승리의 신에게 승리의 제물로 드려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사람들 역시 자기네가 점령한 가나안 성읍을 철저하게 진멸하고 왔기 때문에 이 소식을 들은 여리고인들은 항복도 마음대로 못합니다.
안받아 주니까
사실 이스라엘 인들도 저들의 항복을 받고 평화롭게 살 마음도 있지만 그건 하나님이 허락지 않으십니다.
왜냐?
이방신을 섬기는 죄악된 민족들과 같이 어울리면 당연히 죄성이 침투하게 되기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인들은 그러한 범죄를 너무나 많이 그리고 너무 오랫동안 저질러왔습니다
당시 가나안의 문화는 단순히 이방신을 섬기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부수되는 온갖 음행들이 난무하여 말로 할 수 없을 지경입니다. 이스라엘 인들이 이러한 죄악에 한번 물들면 결코 헤어나오지를 못할것이기 때문에 .
당시 가나안인들은 지금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온갖 성적인 범죄들을 도가 넘치게 저지르고 있었으며 여기에 더해서 오히려 죄라는 인식조차 없이 쾌락만을 즐기며 살았기때문입니다.
사실상 이스라엘 인들이 430년이나 가나안의 주인이 되지 못한 이유가 바로 이때문입니다.
때가 차지 않았기때문입니다.
즉 가나안사람들의 죄악이 아브라함이나 야곱시대에는 가나안에 관영하지 않았기때문입니다.
그 죄악이 땅에 충만하게 퍼질때까지
그리고 그 죄의 정도가 도를 넘을때까지 하나님은 기다리고 계셨기때문입니다.
430년후에 마침내 가나안에 죄악이 관영하게 되자 바로 그 때가 차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가나안의 도시들을 진멸하라 하신것은 결코 무자비한 폭력은 아닙니다. 그는 원칙상 공의를 행하실 수 밖에 없는 분입니다.

사실 모든 죄가운데 성적인 죄는 너무나 매력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마력적이기 까지 합니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대의 쾌락을 주기 때문에 이것이 멸망으로 이르는 지름길인줄 알면서도 멈출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점령당한 모든 도시는 전멸입니다. 그들은 그 도시를 하나님께 봉납한다는 의미에서 모든 생명있는 것들을 진멸했다는 것입니다.
아모리의 왕 시혼과 옥에게 한 일을 그들이 이미 들어 알고 있답니다.
어찌 여리고인들의 간담이 녹지 않겠습니까

8. 내가 선대한즉 너희도 그리하라
그래서 라합은 정탐꾼들에게 “내가 너희를 선대한것 같이 너희도 나를 선대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선대는 원문으로 ‘헤세드’를 말합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 같지 않습니까
구약성경의 키워드가 바로 이 ‘헤세드’입니다. 하나님의 날개아래 품어주심으로 우리를 환난과 고난에서 건져주시는 상태가 바로 헤세드입니다
여기서 헤세드는 상호관계를 갖는 대상에 대한 의무를 전제한 성실성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라합은 이스라엘의 두 정탐꾼들에게 당당히 요구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헤세드를 베풀었으므로 너희도 나에게 헤세드를 베풀어라
하나님 역시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헤세드에도 댓가가 따르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만을 섬길것이며 그분에게만 복종할 것입니다.
간단하지만 철저한 명령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를 구합니까?
그러면 의무를 이행하십시오. 그분만을 섬기며 순종한다는.
이제 라합은 여리고의 신을 버리고 하나님 여호와만을 섬길것을 다짐했고 그곳에 살길이 있다고 믿었으며 그래서 두 정탐꾼을 살린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라합의이야기를 자세히 보면 조금 이상한 부분이 나옵니다
2:12-13절 하반부에 보면 “우리 생명을 죽는데서 건져내기로” 맹세하라고 합니다. 국역본으로 보면 아직 생명이 건져지지 않았기 때문에 맹세해라는 말인데 원문에는 이게 완료형이 쓰여 ‘이미 우리의 생명을 죽음으로부터 구해냈다’로 되어있습니다.
굉장한 확신이요 바램입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을 이미 이루어진것처럼 이야기 하는 믿음과 소망
굉장합니다
과연 두 정탐꾼은 네가 끝까지 입을 다물고 우리를 선대하면 우리가 여리고를 점령했을때 너희를 살려주리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는 “우리의 생명으로 너희를 대신이라도 할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언약입니다. 이 언약을 지키기위해 나는 내 목숨까지도 걸겠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사이에 맺어진 언약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시는데 자기의 독생자의 목숨까지 내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하나님께 이 언약의 당사자로서 의무를 다하기 위해 우리의 목숨까지라도 내어 놓아야 할 것입니다

9. 창에서 줄로 내리우다
그리고는 라합이 두 정탐꾼을 줄에 달아서 성밖으로 나가게 합니다. 이 줄은 뒤에 나오는 ‘붉은 줄’하고는 다른 줄입니다. 우리 성경에는 “이 붉은 줄”이라고 해서 마치 정탐꾼들이 타고 내려간 줄인것처럼 쓰여있지만 전혀 다른 줄입니다.

10. 창에 붉은 줄을 매고
두 정탐꾼은 자기들의 맹세를 보장하기위해서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달아 놓으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래서 라합은 자기집 창문에 붉은 줄을 매달아 놓았습니다.
좀 이상합니까
병사들이 들어가서 첩자를 수색했던 집에 첩자가 잡히지도 않았는데 붉은 줄이 매여있다면 아무래도 좀 이상합니다.
혹시라도 이게 무슨 줄이냐고 물어 보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라합의 집이 성벽위에 있었답니다. 민간인이 성벽위에 집이 있었다는 것도 이상하고 성벽위에 붉은 줄이 매달려 있다면 더 이상하고..........
하여튼 이상한 것 투성이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과연 라합의 행위가 매국노의 행위가 아닌가 하는 처음의 의문에 대한 해답을 얻게 됩니다.
사실 여리고는 물이 풍부하고 종려나무가 우거진 곳으로 종려의 성읍으로 불려지던 곳입니다. 대상들이 쉬어가던 대읍이기도 하고...강한 군사력을 가진 큰 도시입니다.
뿐입니까
여리고는 발삼나무의 원산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안에는 발삼향이 풍겨나는 그야말로 강하고 부요하고 아름다운 고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리고성은 조금 특이한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무언고 하니 바로 성벽입니다. 이 성은 이중성벽으로 되어있습니다.
고고학자들의 발굴에 의하면 이 성벽은 이중으로 되어있었는데 내성을 보호하기위해 바깥에 또 성벽을 쌓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바깥의 성벽은 두께가 1.8m이고 높이가 9.2m이며 안쪽 성벽과의 거리는 약 4.6m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당시에 많은 가난한 사람들은 이 안쪽성벽과 바깥쪽 성벽사이의 허공위에 나무판자를 걸쳐놓고 집을 짖고 살았답니다.
바로 이 기사의 주인공인 라합의 집 역시 이런 집들중의 하나였습니다.
이 여리고가 아무리 아름답고 부유하며 강한곳이라 해도 라합에게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이야기 였습니다.
그녀는 지상에 땅한평 가지지 못해서 허공중에 나무를 걸쳐놓고 그 위에서 군인들을 상대로 몸을 팔아서 살아가는 여인이었습니다.
여리고의 막대한 부는 이 여인에게는 전혀 딴나라의 이야기 였습니다. 누구도 자기를 동정하고 도와주기는 커녕 연약한 육신을 짖밟고 푼돈을 던져주는 억압과 착취만이 그녀가 가진 전부였다 이 말입니다.
여리고의 신은 이 여인에게는 어떠한 자비도 베풀지 않았습니다.
뭐 창녀질이라도 해서 먹고 사는게 어디냐고요
웃기지 마십시오.
그게 사는겁니까? 이 여인은 성벽을 순찰하는 군인들을 상대하는 기지촌의 창녀에 불과했고 그나마 그것으로 자기와 가족들이 먹고 살아야 할 만큼 희망이 없는 여인네에 불과했습니다.
물론 성안에서 바람이 불면 때로 발삼향을 맡을 수는 있었겠지만 땅이 없으니 나무 한그루 심지도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의 지붕에는 삼대가 널려있었습니다. 몸은 비록 창녀였으나 가난한 여인들이 다 그렇듯이 삼을 잘라서 말려가지고는 베를 짜는 일들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쉬지않고 일해도 결국 이 여자는 여리고에서는 한갓 창녀요 땅한평없는 극빈자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이방인에 불과했습니다.
이제껏 이 여인은 누구에게 자비를 베풀수 있는 위치에 있지 못했습니다.
항상 누군가의 자비의 대상이었지 결코 누구를 동정할 입장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정탐꾼들에게 라합은 자비, 헤세드를 베풀 수 있는 입장이었고 그들의 보호자였으며 생명의 은인이 었습니다.
여리고인들은 자기의 몸만을 탐하고 자기를 인간취급하지 않고 단지 욕정의 제물로만 삼았지만 이스라엘 인들은 이제 자기의 지혜를 구하고 도움을 바라는 연약한 새끼새처럼 자기의 보호의 날개아래 날아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라합의 행위가 일반적인 매국노의 행위로 비난 받을 수 있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라합에게는 너무 억울한 노릇일 것입니다.

11. 약속은 이루어지고
마침내 약속은 이루어집니다.
여리고성이 무너질때 라합과 그 집만은 구원받았습니다.
가장 가난하고 천대받던 기생의 집이 여리고에서 가장 안전하고 복된 장소로 변했습니다.
그녀가 창에 내건 붉은줄은 앞에 ‘ 가는’이란 말이 생략되었는데 바로 이 말은 가늘다는 뜻 뿐만이 아니라 소망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말해서 ‘소망의 붉은 줄’
라합과 가족들은 바로 이집에 모여서 그들의 목숨을 구함받은 것입니다.
뿐입니까
그때 두 정탐꾼중의 한명이었던 살몬과 결혼해서 보아스를 낳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혈통에서 다윗이 태어나게 됩니다.
정탐꾼의 신분은 무엇이었을까요?
지도자 여호수아 역시 , 족장이었던 갈렙역시 한때는 정탐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바로 각 지파의 족장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요즘말로 하면 ‘노블리스 오블리제’에 매우 충실했던 것 같습니다.
다스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위험한 일에 앞장서는 지도자
유다의 족장 살몬과 결혼하여 그녀는 자기의 목숨이 구함받았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창녀가 아니라 족장의 아내로서의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경기사는 참 극적입니다
그러나 당시 그 일을 행했던 사람에게는 바로 삶과 죽음의 경계선위에서의 한바탕 아슬하슬한 모험이었고 결단이었습니다.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나를 선대하라”
이 얼마나 공평하고 당당한 말입니까?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위해 최선을 다했으므로 하나님도 저를 위해 최선을 다해 주십시오’
‘하나님, 제가 아버지의 약속대로 행했으므로 아버지도 저의 소원을 들어 주시옵소서’
‘아버지여 제가 이 일을 위해 목숨까지 걸었습니다. 이제는 저를 위해 역사하소서’
우리 청년들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by 홍종일 (2004년 설교 중에서)

 .

 나는 기독교인이지만, 굉장히 기독교에 비판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다. 이른바 신앙생활을 하면서, 한 두 번 회의가 드는게 아니었다. 특히 신은 과연 공의로운가 에 대한 고민은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 생각해보라. 억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신은 억압과 착취당하는 힘없는 사람들의 기도를 외면하고, 부유한 이들만 축복하고 기억하는 듯 하였고, 자신들만 특별한 존재로 여기는 기독교 문화는 가끔 혐오스럽기까지 했다. 칼 마르크스의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말이 가슴 속 깊이 와닿을 만큼, 내게 있어 기독교는 내 소속이기도 하면서 비판적으로 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라합의 이야기는 내게 적어도 하나님은 계신다 라는 믿음을 갖게 해 준 한 톨의 겨자씨 같은 이야기였다. 또한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가서는 안 된다 라는 생각을 갖게 해주었던 계기이기도 하였다. 나는 솔직히 말해 그리 순결한(?) 기독교인은 아니었다.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고, 일본AV도 보고, 뭐랄까 한 마디로 위선자에 가깝다고 해야할까...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을 최대한 도우려고 발버둥 치던 걸 보면, 이중적인 내 모습이었다고 볼 수 밖에.

 물론 기독교에도 참 좋으신 분들이 많다. 이름 없이 몰래 남을 돕는 사람들은 정말 대단해 보인다. 나 역시도 서울의 한 대형교회 권사님 덕분에 오랜 기간 후원을 받았다. 그 덕분에 고아라서 힘들었던 내 친구에게 미약하지만 경제적인 도움이 되어줄 수 있었다. 이처럼 본디 기독교는 과부와 고아를 기억하는 약자에 대한 배려를 강조하는 멋진 측면이 있다. 또 그것을 몸소 실천하신 분들도 있고 말이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본다면, 역시 나부터가 그런 이름 없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노력하는 훌륭한 기독교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끝으로... 기독교가 제일 좋았던 것이 바로. 이러한 멋드러진 계보였다. 창녀의 후손 예수. 그 예수님은 창녀에게 돌을 던지지 않았다. 구성애 선생님은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왜 기독교는 창녀와 어울리지 않는가, 예수님도 어울리면서 놀았는데. 기독교는 언제나 세상 가장 낮은 곳을 향하고 있어야 한다. 갈 곳 없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한다. 사람을 차별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존중하며 사랑해야 한다. 그게 예수님의 흔적을 몸에 새기고 사는 기독교인이 가야할 길이다.

 영국의 윌버포스, 미국의 마틴 루서 킹, 말콤 엑스 등이 인종차별을 혁파하기 위해서 싸웠던 것처럼,
 이 세상에 잘못된 것들을 바로 잡기 위해서 나는 싸워나갈 것이다.
 오바마의 말처럼, 흑인과 백인이 따로 없다. 모두 한 사람이다.
 사람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 그 실천이 바로 오늘 내가 가야할 첫걸음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