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Review]/영화

색계 (Lust, Caution, 2007) 리뷰

시북(허지수) 2013. 2. 12. 21:17

 여러 번 보았던, 색계라는 놀라운 영화가 있습니다. 중국 작가 장아이링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으며, 영화는 베네치아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거머쥐기도 했습니다. 원작 작가 장아이링에 대해서도 평가가 높으며, 혹자는 장아이링은 루쉰과 더불어서 20세기 중국 문학계 최고의 인물이라고까지 찬사를 보내기도 합니다. 화려하고 감각적인 그녀의 문체처럼, 영화도 굉장히 감각적입니다. 색계에 대해서 그저 "야한 영화" 정도로 생각한다면, 오늘은 차분하게 이 영화와 함께 생각할 꺼리들을 따라가 보고 싶습니다.

 

 우선 제목. 영어로 하자면 이 두 단어는 정말이지 어울리지 않습니다. 성적욕망과 경계라는 두 단어의 조합이니까요. 동양권의 사람이라면 색계하면 바로 색을 조심하라는 뜻으로 이해가 빠르겠지만요. 원작 작가 장아이링의 특징이라면 문학에서 정치적인 색깔이 빠져있다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영화도 마찬가지의 시선을 일관되게 유지합니다. 남자주연 량차오웨이(양조위)는 정치적으로 볼 때 최악의 인물임에도, 영화에서는 고독한 장관으로서 그려지고 있습니다. 고독한 장관과 청초한 젊은이와의 어둡고도 치명적인 사랑이야기가 영화 색계라 할 수 있습니다.

 

 

 색계에 대해서 리뷰를 쓰기로 결심한 것은, 영화 베를린의 전지현 모습을 보면서 밀려왔던 슬픔 때문이었습니다. 그녀가 무슨 잘못이 있길래, 저런 가혹한 일을 겪어야 했나 라는 의문 때문이었지요. 그런 의미에서 탕웨이가 열연한 왕치아즈라는 인물의 인생이란, 참 기묘하고도 가혹하며, 모순을 껴안고 있습니다. 왕치아즈는 행복의 달콤함을 본 적이 있었을까요? 글쎄요. 여튼 어서 본격적인 영화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이제부터의 내용은 영화 본편에 대한 누설이 담겨 있으므로 아직 영화를 보시지 않은 분은 주의하세요!

 

 왕치아즈는 명석하고,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 젊은 대학생입니다. 순수하고 청아한 그녀는, 의미 있는 일을 해보겠다는 대학 연극 동아리에서 함께 활동하면서, 결의에 찬 일을 결심합니다. 바로 민족을 배신하고, 탄압하고 있는, 매국노 "이 장관"을 없애버리겠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안중근 의사나, 윤봉길 의사를 기억하고 있듯이, 젊은 대학 동아리의 인물들은 무엇인가 조국을 위해서 의미 있는 일을 하기로 결단합니다. 색계는 충분히 항일운동의 이야기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청년들은 사람들을 계몽하기도 하고, 마침내 "이 장관 암살 계획"을 구체적으로 추진해 나갑니다.

 

 이 계획의 중심인물이 바로 왕치아즈 입니다. 철통 같은 보안을 뚫고, 왕치아즈(=막 부인)는 이 장관을 집 근처까지 유혹하는데 성공했습니다만, 결정적인 암살 직전의 순간, 그 좋은 기회가 그들 곁에서 물거품이 되고 사라지고 맙니다. 이 장관은 의심 많고, 노련한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두운 곳을 싫어하는 경계심 레벨99의 인물이랄까요. 그리하여 이 장관은 왕치아즈와 연을 끊고, 다른 지역으로 가버리게 됩니다. 솔직히, 이 대목에서 저는 청년들이 왜 좀 더 과감하지 못했을까 싶었습니다. 완벽한 기회를 기다리지 말고, 적당한 순간 뛰쳐나가서 이 장관을 흠씬 두들겨 팼더라면 속이 다 시원했을텐데...

 

 그 까닭은 영화 색계 특유의 현실적인 모습에서 찾고 싶습니다. 청년들이 미숙하고, 용기가 부족하고, 안절부절하는 모습까지도 영화는 섬세하게 잘 표현해내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총을 쥐고 겨눌 줄 알았지만, 함부로 쏘지는 못하는 모습. 영화 다크나이트의 한 장면처럼, 현실 앞에서 인간의 나약한 모습을 무엇보다 잘 보여줍니다. 자신의 손을 더럽히며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결코 생각처럼,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왕치아즈는 그동안 치열하게 계획했던 것이 물거품이 되자,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절망감을 얻게 됩니다. 삶의 목표가 순간적으로 사라지자, 다시금 새로운 계획을 세우기 보다는, 갈 길을 완전히 잃어버리는 이 모습이 정말이지 한없이 처량합니다. 사람의 약함을 이토록 적나라하게 묘사하다니... 그녀는 슬픔과 덧없음에 사로잡히며, 많은 시간을 방황했을 것입니다.

 

 3년이 흐릅니다. 여전히 제국주의자 편에 달라붙은 매국노 이 장관은 잘 살고 있고, 저항세력들은 언제 죽임을 당할지 모르는 살벌한 정세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마침내 왕치아즈의 두 번째 시도가 시작됩니다. 이번에야 말로 이 장관을 죽여버리고, 그 피가 내 몸을 적시는 상상을 하는 결의에 찬 왕치아즈. 그녀는 모든 것을 걸고, 색계에 돌입합니다.

 

 영화가 진행되어 갈수록,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이 장관의 고독감" 입니다.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그의 고백과 자신의 일에 대해서 미친듯하게 살벌한 표현을 내뱉는 장면들. 이 장관 역시 자신의 선택을 합리화 하기 위해서 끝없이 저열함 속으로 자신을 몰아붙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영화 내내 흐트러짐 없이 강인한 모습을 보여주는 그가,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태연하게 몸을 숨기는 모습을 보면서, 인간의 이중성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역시 겁쟁이 라는 것이, 매우 머리를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민족을 배반하고, 남을 고문하고, 기득권을 누리는 겁쟁이 인간은 살아남고, 용기 있는 선택을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가난하고, 위험하며, 슬픈 인생을 살아가는 것처럼 느껴져서, 색계를 볼 때 마다 저는 먹먹함이 가슴을 누릅니다. 혼란스러운 것은 왕치아즈도 마찬가지 입니다. 꿈꾸던 암살은 이루어지지 않고, 이 장관과의 격한 밀애 앞에서 그녀의 감정은 조금씩 움직여 나갑니다. 이 장면들도 매우 선명할 만큼 인상적입니다.

 

 그래서 왕치아즈가 마지막에 보여주었던 이 장관을 배려하는 장면 앞에서, 한가지 통찰을 얻습니다. 머리보다는 몸이 더 정확하다는 것이지요. 그는 말만 하면서 끝내 실행해내지 못하는 조직보다는, 자신의 감정을 적나라하게 밀어붙이는 이 장관의 진심을 더 가깝게 생각했던 게 아닐까 합니다. 제가 처음 영화 색계를 보았던 수년 전에는 왕치아즈의 이 최후의 선택을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었는데, 지금은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간의 약함과 인간의 흔들림을 정말 잘 보여주는 영화 색계. 일본식 술집에서 두 사람이 다정하게 교감을 나누는 장면이야말로, 이 영화가 주는 놀라움이라 하겠지요. 격렬한 투쟁의 세계도 있으며, 한편으로는 세밀한 교감의 세계도 있다는 것. 저는 두 사람은 결국 사랑하는 사이로 끝을 맺었다고 생각합니다. 저열한 가치관을 단 한 번도 벗어던질 수 없었던 용기 없는 이 장관은 그녀를 구해주지 못했지만, 그가 사랑을 갈구하는 모습은 분명했습니다. 민족과 사랑 속에서, 사랑을 택하는 왕치아즈의 최후. 그녀에게 함부로 미친X라며 돌을 던질 수 있을까요? 그러므로, 인간을 도구 취급해서는 결국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지도 모릅니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등장하는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는 고민합니다. 인간의 깊은 내면은 그 무엇도 침범할 수 없는 것 아닐까. 라고 고민합니다. 감히 제 상상력을 조금 덧붙이면, 영화 색계의 왕치아즈는 아마 이렇게 답할 것 같습니다. "그래요, 내 깊은 마음은 누구도 이해해 주지 못했지요. 내 삶은, 내 세계는 몰락해 가고 타락해 가고, 그래서 붕괴되어 가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내 마음을 당신들은 듣고 싶어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저는 그녀가 선택했던 마지막 순간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인간의 깊은 내면을 알려고 하지 않은 채, 사상을 떠들기 시작한다면 그것만큼 위험하고 오만해 지는 것도 없겠지요. 작가 장아이링은 그래서 정치색 대신에 일상의 시선을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여전히, 당연히, 정치는 중요한 삶의 영역입니다. 그렇지만, 정치가 한 사람, 한 사람의 일생을 짓밟는 선택을 함부로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 인간을 도구로서 사고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 인간이란 그 자체로 우주와도 같이 깊은 영역을 안고 있다는 것. 영화 색계는 이 모든 것을 이야기 하고 있는 멋진 영화가 아닐까요. / 2013. 02. 리뷰어 시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