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나와 내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여호수아24:12-17)

 

오늘 우리는 여호수아의 시대로 돌아갑니다.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족속을 가나안에 인도하여 그들을 제비뽑은 땅에 안전하게 거하게하고 이제 나이 많아 늙어서 최후의 연설을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오직 나와 내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는 말은 바로 이 고별연설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 세월이 흘러 한반도 이 땅에서 이 말이 다시 필요한 때가 되었습니다. 세상에서는 기독교인에게 세속의 풍조를 받아 들이라고 요구합니다. 돈과 쾌락을 사랑하는 풍조를 교회안에 받아 들이라고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요구는 상당 부분 성공하고 있습니다. 점점 이 땅의 교회에서 영성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오순절때나 일어난 것이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는 소리를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영성을 포기하고 세상의 돈과 향락을 받아 들인다면 그건 무장해제나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어릴 때 많이 보았던 뱀파이어 영화가 있습니다. 그런데 서양에서는 이런 관념이 남아 있는 모양입니다. ‘악마는 초대하지 않고서는 결코 아무개의 집으로 들어 올 수 없다’
그러니까 뱀파이어가 보통은 멋진 남자 신사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여자가 자기 집으로 뱀파이어를 초대합니다. 물론 뱀파이어인지 모르고 초대한 겁니다.

 

그런데 그 집에 초대받은 뱀파이어는 그 집에 들어가기 전에 항상 집주인에게 묻습니다. 당신이 나를 초대한 것이 맞습니까? 내가 당신의 집으로 들어가기를 원합니까? 그러면 집주인은 당연히 그렇게 말하겠지요. “네, 당신을 초대한 것이 맞습니다. 어서 들어오세요.” 일단 집안으로 들어온 뱀파이어는 신사의 모습을 벗어버리고 송곳니가 커지면서 뱀파이어의 모습으로 변합니다. 초대한 여인은 깜짝 놀라겠지요? 그때 뱀파이어가 말합니다. “네가 나를 초대하지 않았느냐? 이제 너는 나의 권속이 되어라” 그러면서 이빨로 여자의 목을 콱 물어 버립니다.

 

솔직히 제가 그 영화를 볼 때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뱀파이어도 참 시시하구나, 상대방이 허락하지 않으면 남의 집에 들어가지 못하다니!

그런데 요즘 제가 그 영화를 기억하면 상당히 많은 것을 시사하는 것 같습니다. 일단 뱀파이어를 악마라고 봅시다. 사탄. 그런데 마귀는 성도의 집에, 교회에 함부로 침입하지 못합니다. 이곳은 하나님의 집이므로 ,하나님의 소유이므로 마귀가 침노할 수가 없지요.

 

그런데 교회 안에 있는 교인 중에 아무개라도 사탄이 침투하는 것을 허용한다면 사탄도 교회 안에 침투할 수 있는 겁니다. 어디로 침투합니까? 사탄의 침투를 허용한 그 교인의 마음속에 침투하는 겁니다.
탐욕이니 시기니 질투니 음욕이니 하는 세상물이 그를 장악하고 그것으로 인하여 문제를 일으키고 그러면 멀지않아 반드시 그 교회에 한바탕 회오리가 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이런 세상 풍조가 주변으로 전염이 되고 결국은 교회 안에서 진실된 성도가 고립되는 기가 찬 상황이 초래되는 것입니다.

 

즉 사탄이 교회 안에 들어오면 그건 더 이상 교회가 아니라 세상의 아싸리판이 되어버리는 거지요. 더구나 교회가 안에서부터 자멸하므로 사탄의 공략은 엄청나게 쉬워지는 겁니다. 아무리 많은이가 모여 있다 하더라도 신앙의 용사가 없는 곳은 삽시간에 사탄에게 내어준바 될 것입니다.

너무 과장이 심합니까? 설마 그렇게야 되겠나요? 그래도 교회인데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가 어딜 가는게 아닐진대 너무 과격한 주장입니까?

 

여호수아는 모세의 후계자로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가나안 정착을 완성한 믿음의 용사입니다. 그런데 그가 마지막에 하는 연설을 보면서 약간은 의아스럽지요. 왜 그는 자기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경건하게 섬기도록 강압적으로 명령하지 않고 나와 내집은 여호와를 섬길텐데 너희는 너희가 좋은대로 하라고 말했을까?

 

왜 여호수아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내가 결코 너희를 가만두지 않고 벌을 내리겠다고 말하지 못했을까? 전쟁터에서는 그렇게나 단호하고 용맹했으면서 왜 이런 일에는 이렇게 무르게 처신하는 것일까?

결과적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두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길 것을 맹세하기는 했지만 왜 좀 더 과격하게 강제로 하나님만을 섬길 것을 명령하지 못했을까 하는 의문은 항상 남습니다. 왜 그랬지요? 왜 여호수아는 한발 물러선 것처럼 보입니까?

 

그렇지않고 이 말은 단순히 여호수아의 수사법에 불과합니까? 하나님의 능력과 그를 섬기는 것에 대한 이점에 대해서 말하고 ‘이런데도 하나님을 섬기지 않을테냐?’ 이렇게 말하는 ‘말하기 기술’입니까?

 

여호수아가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는 이미 나이 많아 늙었고 이스라엘 지파는 뿔뿔이 흩어져 공동체성을 상실했습니다. 자기네 지파별로 살고 있습니다. 게다가 아모리인들의 섬기는 우상들을 섬기는 이들이 많아 진 것 같습니다. 아직까지는 그래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이 남아 있지만 머지않아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기억을 잃고 다른 길로 가게 될 그런 상황입니다.

 

상황이 변했습니다. 전쟁의 때도 아니고 유목만으로 나라를 꾸려가던 때도 아니고 더 많은 사치품이 필요한 그런 때입니다. 싸움의 기술도 필요하고 세련된 도시문명이 필요한 때입니다. 이미 사람들은 가나안의 발달된 문명에 젖어 있기 때문에 게다가 애굽의 풍요를 그리워하기 때문에 이전처럼 엄격하게 하나님에 대한 정절을 요구하고 검소한 삶을 강요하기가 어려운 때가 되었습니다.

 

화려하고 음란한 바알과 아세라에 대한 숭배를 맛보았기에 밋밋하고 피비린내나는 멋대가리 없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숭배가 재미가 없어진 겁니다. 하나님만이 전부라는 생각이 점점 약해 집니다.
이대로는 이스라엘이 정체성을 잃고 가나안의 한 부족이 될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여호수아는 노구를 이끌고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섬길 것을 권면하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을 살펴보면 단일 중앙정부를 구성한게 아니라 12지파가 느슨한 공동체의식을 가지고 있는 그런 일종의 부족연맹이라고 보여집니다. 그러니 정복전쟁이 끝나고 각 지파별로 영토를 얻고 난 다음에는 여호수아의 위력이 약화되는게 당연합니다. 그러니까 여호수아는 이제는 권위만 있지 권력은 없는 그런 입장으로 보여지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밖에 말하지 못했을 겁니다.

 

권위는 자발적으로 저들을 움직이는 것이고 권력은 강제로 움직일 수 있는 힘이지요. 이제 여호수아의 시대는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의 이스라엘에 대한 봉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고별인사를 하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 여호와의 품에 영원히 거하기를 소망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문득 주변을 살펴보면 옛날 우리네 신앙에 비해서 정말 많이 약화된 것이 보여집니다. 아름다운 믿음의 전통들이 노인세대의 퇴조와 함께 이루어집니다. 믿음의 열정들이 많이 떨어져 버렸습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어쩔 수 없는 현상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그때의 하나님과 지금의 하나님이 다르지 않고 그때의 진리가 지금의 비진리가 아닌데 우리는 너무 쉽게 변합니다. 이게 사실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급격하게 변하는 세상의 영향 때문이 아닐까요?

 

세상 사람들은 더 이상 신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마저도 버리고 급진적이며 과격한 언사를 마구 내뱉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아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망령되이 일컫습니다. 당연히 여기에 우리 기독교인들의 잘못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잘못을 바로 잡지 못한 것도 사실입니다. 자체적으로 정화할 능력, 자정 능력이 없다면 우리 아버지께서 손을 대시고 정화 시키실 터인데 그렇게 되면 그 누가 아버지 앞에 설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내가 왕벌을 너희 앞에 보내어 그 아모리 족속의 두 왕을 너희 앞에서 쫓아 내게 하였나니”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너희가 하나님을 택할 것이냐 아니면 이방의 우상을 택할 것이냐는 선택을 촉구하면서 이전에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신 은혜를 상기시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보면 ‘왕벌’을 보내서 두 왕을 쫓아 내었답니다. 여기서 왕벌은 말벌을 말합니다. 당시 가나안의 말벌은 상당히 고통거리였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왕벌은 우리 하나님이 미리 보내신 하나님의 권능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방인들이 가지는 이스라엘에 대한 공포’를 말합니다. 미리 이 공포가 이방을 흔들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방이 그 소식을 듣고 마음이 녹았답니다.

 

하나님의 군대가 이리로 오는데 아무도 그 앞에서 살아날 자가 없다. 이런 무시무시한 소문을 왕벌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권능이 너희 앞에서 행하여 너희 앞서 가서 아모리 족의 두 왕을 쫓아내었다는 말입니다. 출애굽기23:28이나 신명기7:20에서 보면 하나님은 왕벌을 앞서 보내어 미리 저들을 쫓아 내시겠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그 예언을 성취한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문자적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무리 말벌이 무섭고 사나워도 이게 군대를 쫓아내고 두 왕국을 멸하게 한다는 것은 쉽게 수긍하기 어렵습니다. 여하튼 우리는 왕벌을 여호와께서 내리신 공포로 해석합니다.

 

내가 가기 전에 이미 나의 소문이 퍼졌는데 “저 사람이 오기만 하면 너희들 다 죽어” 아니면 “저 사람이 얼마나 굉장하냐면 척 보기만 해도 다 알아, 그래서 너희들은 할 일이 없어서 다 쫓겨갈거야” 이런 식의 소문이 난다면 굉장할 겁니다. 누가 일부러 내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그런 소문을 내신다면 그 소문을 듣는 이들이 간담이 녹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사역이 얼마나 쉬워질까요?

 

하나님은 아모리 두 왕 헤스본의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쫓아 내셨다고 합니다. 왜 그러셨나요? 그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직 노예 근성을 못버리고 강력한 군대와 싸우게 되면 미리 겁을 먹고 도망갈까 봐서 하나님이 나 대신 싸워 주신 겁니다. 나보다 먼저 가서 사전 정지작업을 다 해놓으신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작 이스라엘의 군대는 열을 지어 행진만 하면 적이 항복하도록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적이 우리를 보고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우리 역시 적을 보고 두려워합니다. 서로 서로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서로 싸우기가 꺼려집니다. 그렇다면 담대히 행하는 쪽이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나가는 쪽이 이기도록 주께서 우리 먼저 가셔서 손을 다 써 놓은 것입니다.

 

본문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의 칼이나 너희의 활로써 이같이 한 것이 아니며”
칼로써도 하지 않았고 활로써도 하지 않았다. 그럼 뭐로 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 아버지지께서 인간 구실 하기 어려운 히브리의 노예들을 생각해서 미리 자기가 친히 저들에게 공포심을 심어 주고 재해로 괴롭혀서 저들을 쫓아 내었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굉장한 은혜입니까?

 

그래서 여호수아는 이 기적적인 하나님의 도우심을 상기시키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영원히 하나님을 섬기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도 젊었을 때가 있었을 것이고 모세를 따라 다니면서 그의 수종을 들었던 때도 있었지요. 그러나 이제 모세도 가고 마침내 여호수아도 나이 많아지자 이제는 강제적인 명령이 아니라 목자의 심정으로 좋은 편을 택하도록 백성들에게 권면하면서 과거에 우리가 입었던 은혜를 기억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옛날 어떤 목사님은 의리를 참 강조하셨습니다. 저도 마찬가지로 의리를 강조합니다. 물론 의리라고 하지 않고 저는 배은망덕해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사실 같은 말입니다. 왜냐면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일을 시키실 때 요구하는 첫 번째  조건이의리기 때문입니다. 배은망덕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은혜에 감사하지 않고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를 쉬이 잊어 버리는 이에게는 더 이상의 은혜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즉각 즉각 감사할 일에 대해서 감사를 미루지 말고 감사해야 하며 과거에 감사를 잊은게 있다면 더 늦기 전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 속에 계속 있을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연약한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능력이 부족한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심약한 것도 알고 계십니다. 다만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그에 대한 의무로 그의 사랑을 갚아야겠다는 보은의 마음으로 억지로 힘을 내고 있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나가기만 하면 이미 모든게 다 되도록 하나님이 일을 꾸며 놓으셨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명령은 솔직히 나에게 기회입니다. 보다 더 성장하고 더 큰 복을 받을 기회! 그러므로 이 기회를 놓치지 말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공짜가 없다고 했지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뭔가를 얻기 위해서도 먼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시험에 통과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뭔가를 먼저 해드려야 합니다. 그 명령에 먼저 순종하고 나서 그 시험에 통과하고 나서 비로소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 전에는 항상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그 자리에서 맴돌 뿐입니다.

 

도저히 이건 안된다고 포기하고 그의 명령대로 순종하지 않아서, 전장으로 행군하는 것 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의 은혜를 맛도 보지 못하고 우리는 낙오자 실패자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13절은 마찬가지의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물론 12절에 비해 규보다 실질적인 면이 약간 다릅니다.

 

수고하지 아니한 땅과
건설하지 아니한 성읍에 거주하며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원의 열매를 먹는다

 

이 정도면 거의 모든 것을 다 해주시는 것입니다. ‘수고한다’는 말은 ‘어떤 사람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일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지쳐 쓰러질때까지일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먼저 가셔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셨기 때문입니다. 할 일이 별로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의 명령대로 열과 오를 지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가는 겁니다. 그러면 다 되도록 일을 꾸며 놓은 겁니다. 그런데도 그 사랑의 하나님을 배신한다면 그건 정말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바보인 것입니다.

 

그렇게나 사랑해 주시고 은혜를 베푸시는데도 어긋난 길로 가면
하나님의 속만 썩이고 불평만 한다면
절대로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릴 생각을 하면 안됩니다.

 

누구 말마따나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그건 아닙니다.

14절에는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당연합니다. 그런 은혜를 입어 놓고도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그를 진실로 온전히 섬기지 않는다면 말이 안됩니다.

 

그런데 그 뒷부분을 보세요.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이야기가 좀 이상하지요? 이들이 지금 메소포타미아와 애굽의 신들을 섬기지 않고 있는데 이렇게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벌써부터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각종 우상을 섬기고 있다는 말입니다.

 

옛날에는 그 신이 강하면 그 신을 섬기는 민족이나 나라가 싸움에서 이긴다고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북쪽의 강대국과 남쪽의 강대국의 신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할 때 가장 강하고 멋진 신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약소국의 신인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보다 훨씬 더 매력적으로 보인 겁니다. 그러나 지금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강조하면서 여호와만 섬길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일들이 지금도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처럼, 우상에 앞장서서 달려간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지금도 큰 교회면 성령이 역사하시고 작은 교회는 성령이 역사하지 않고 뭔가 하나님의 미워하는 죄를 범하고 있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 부산의 큰 교회에 다니던 어떤 사람은 가정교회, 그러니까 건물이 없이 가정에서 교회를 하면 그건 이단이랍니다. 세상에 믿어지십니까? 아직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에수님도 가정교회를 하신 것을 알고 계시지요? 그도 회당이 없고 집도 없으셨지요.
그래서 이런 왜곡된 사고방식의 사람들은 대형교회에 대해 비판하는 것을 정말 싫어합니다.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 교회를 왜 비판하느냐? 자기는 부흥도 시키지 못하는 주제에.”

 

이게 바로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졌던 생각하고 똑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대형교회 중에서 온전히 우리 곁에 보존되고 있는 교회는 거의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교인들이 스스로 심판하지 못하니까 세상 법정에서 그들을 심판하고 있습니다. 워낙 교인이란 자들이 돈을 숭배하고 물질과 건물을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증거로 신봉하니까 그런 자들이 아니라 아예 교회가 아닌 세상 법정에서 심판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냉정하고 엄격하게 세상 법대로 심판하는 겁니다.

 

저들은 지금 대부분이 하나님의 대적이 되어 있고 하나님의 이름을 땅에 떨어트리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시끄러웠던 모 교회에서 세습 논쟁을 넘어서 800억 비자금 문제까지 나왔는데 도대체 뭐가 더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걸 보고 “아이고 하나님이 얼마나 복을 주셨으면 800억이나 모을 수 있겠냐”면서 더 신봉하는 이들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정말이지 구제불능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본주의와 맘모니즘(돈신 숭배)에 너무 깊이 물들어서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고 숫자를 더 사랑하고 신봉하는 이들입니다. 그들에게 가장 확실한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증거는 돈입니다.

 

성령의 역사를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사람입니다. 제발 그런 어리석은 이가 되지 마시기를 당부합니다.

우리가 명목상 크리스찬이 아니라 진실된 신도가 되고 성도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여기 나와 있네요.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섬겨야 합니다. 옛날 성경에는 ‘성실과 진정으로’ 라고 되어 있는데 이 말은 여기에 윤리적 정직까지 포함됩니다. 즉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신앙 수준이 완전해야 하고 흠없는 완전한 인간?

 

그것을 추구하는 방법이 진실해야 되고 또 윤리적으로 정직해야 한다는 말인데 현실의 우리가 도달하기가 참 어려운 수준이기는 합니다. 바로 이런 수준과 방법으로 하나님만을 경외하라는 겁니다.

 

돈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지 말고 부처와 일월성신과 용신과 산신과 사주팔자와 신선과 각종 우상과 잡신들과 세상 풍조와 겸하여 하나님을 섬겨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적인 방법으로 또는 죄성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죄성으로 인한 그런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겨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참고로 예를 든다면 이런 겁니다.

 

하나님이 너무 사랑스럽고 감사해서 내가 예배당 지붕을 금으로 덮어야 되겠다. 이런건 진정한 하나님 섬김의 자세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왕이나 영주가 예배당 지붕을 금으로 덮으려면 돈이 엄청나게 많이 들겁니다. 그러면 그는 자비로 하는게 아니라 사비로 한다고 하면서도 백성들에게 뜯어서, 세금이나 가혹한 가렴주구의 형태로 뜯어서 하나님의 예배당 지붕에 금을 얹었다고 합시다. 이건 하나님이 절대로 기뻐하지 않는 일입니다.

 

가령 바티칸에 있는 베드로 대성당을 지을 때 돈이 모자라서 면죄부를 팔았습니다. 말 잘하는 신부들을 뽑아서 유럽 각지로 보내서 어리석은 백성들을 부추겨서 금화 한닢에 면죄부를 팔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연보통에 금화가 떨어지는 딸랑하는 소리가 남과 동시에 지옥에 있던 영혼이 천국으로 올라갑니다” 제 정신이 아니지요.

 

거대한 모 교회에서 삯꾼 목사가 ‘교회의 세습을 반대하면 마귀입니다’ 하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를 사랑해서 일부 교인들이 무조건 세습에 찬성하는걸 이해하지만 그건 절대로 진실로 주님을 섬기는게 아닙니다. 그리고 주 앞에서 그런 모습이 결코 완전한 것도 아닙니다. 세상으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의 낮은 도덕 수준으로도 비난받는 그런 행태가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의 취할 바가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는 여호수아가 한 말을 다시 한번 음미합니다.
“너희가 거주하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자를 오늘 택하라”
이제 이들은 애굽과 이라크의 신들뿐만 아니라 가나안의 신들도 섬기고 있는 모양입니다.

 

“산에서는 산신인 여호와를 섬기지만 이제 우리는 평야에 살기 때문에 땅의 신인 아세라를 섬기고 유목을 하고 떠돌아 다닐 때야 유목민의 신인 여호와를 섬겼지만 이제 땅에서 농사를 짓는데 비가 필요하쟎아, 그러니 비를 내려주는 바알을 섬겨야지”

하나님외에 신이 없는데도 그렇게나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고서도 엉뚱한 소리를 합니다. 그 마음속에 너무 하나님 중심이 싫은 거지요. 그 짜릿하고 말초적인 쾌락을 포기하기 싫은 거지요.

 

사실 하나님 제사는 짐승을 잡아서 태우고 멍하니 서서 그걸 지켜보고 그리고 남는거 갈라 먹고 그리고 끝입니다. 더운 여름철에 파리 모기가 들끓고 냄세도 나고 피에 정말 경쟁력 없습니다. 그런데 아세라 신전에는 여사제들이 창녀입니다. 그 여인들과 관계하면 할수록 신이 복을 준답니다. 게다가 그 음란한 춤이니 환락은 또 얼마나 굉장합니까? 절로 어깨가 들썩이는 음악하며 상대가 안됩니다. 그러나 신은 오직 한분뿐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신이 없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방신’이란 말입니까?

 

정말 답답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양단간에 적당히 걸치지 말고 단호하게 하나님만을 섬기고 나머지를 끊도록 촉구합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어중간한 것입니다. 그는 믿음이 적은 것을 보시고는 믿음이 없다고 하시지요. 그는 차지도 덥지도 않고 뜨뜻미지근한 것은 입에서 뱉어 버린다고 하시지요. 그는 하나님과 마귀를 겸하여 섬기는 것을 성도의 원수라고 하시지요. 왜냐면 이런 이들이 교회에 틈을 만들어 사탄이 들어오도록 문을 열어 주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지요.

 

16절에 백성들이 여호수아의 말을 듣고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이스라엘 가운데 불신자보다도 더 흉악한 일들이 일어나서 하마터면 이스라엘이 와해될 뻔한 일들도 나옵니다.

제가 이걸 한번 해석해 볼까요.

 

우리가 목사님의 설교를 듣습니다. 너무 감동스럽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정말 내가 진실로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랬는데 세월이 지나고 시간이 흐르고 처지가 변하면 언제 그런 말을 했더냐는 듯이 까맣게 잊어 버리고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나만 굳이 그렇게 열심히 믿을 필요가 있을까? 그래서 심지어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정체성마저 흔들릴 때가 많다는.

 

어떻습니까? 해석이 그럴듯합니까? 하하, 여러분, “나는 절대로 그렇지 않을거다. 나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다”라고 하지 마십시오. 자칫 내가 정신줄을 놓으면 나도 모르게 죄성이 튀어나와서 이기적인 본성이 나와서 세상 쪽으로 치우친 나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 경성해야 합니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친히 우리와 우리 조상들을 인도하여 애굽땅 종되었던 집에서 올라오게 하시고
우리 목전에서 그 큰 이적들을 행하시고
우리가 행한 모든 길과 우리가 지나온 모든 백성들 중에서 우리를 보호하셨음이며
아모리 족속을 우리 앞에서 쫓아 내셨음이라”

 

어때요, 사실 이 정도면 정말 정말 여호와만을 섬겨야합니다. 그들도 여호수아의 연설에 호응하여 자기들도 여호와를 섬기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정말 번개처럼 저들은 하나님의 곁을 떠났고 그의 은혜를 잊었으며 하나님을 배신하고 다른 우상들을 섬겼습니다.
결과는 사사기에 나오는 것처럼 수많은 이민족과 다른 나라의 속국으로 학대와 학살을 당하고 12지파의 동맹이 와해되었고 하나님의 백성이란 자부심에도 큰 상처를 입었지요.

 

그래도 하나님은 저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저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하나님에게로 돌아오기만하면 저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 이유가 18절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심이니이다”

 

그가 우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를 섬기겠다는 뜻입니다. 앞에 엄청난 여호와 하나님이 베푸신 기적이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은혜를 입어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말이 아니라 그가 우리의 하나님이시기에 우리가 그를 섬기겠다는 아주 원론적인 답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때로 하나님을 떠났다가도 어려울 때 힘들 때 하나님께 부르짖고 돌아오고 그런 일을 반복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들의 하나님이므로 자기들이 하나님을 떠나서는 갈데가 없는 겁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시므로 나의 아버지시므로 내가 갈 데가 없습니다. 그를 떠나서는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내가 인생의 여로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솔직히 인간적으로 보면 이스라엘의 히브리 노예들은 정말 최악의 종족입니다. 어쩌면 그렇게도 배은망덕하고
완악하며
음탕하고 잔인한지
그리고 잘 까먹는지 진짜 이기적인 것들이지요?

 

그런데 우리를 잘보세요. 어쩌면 저들의 모습이 오늘을 사는 우리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참 감사한 일입니다. 잘 살아 오신거고요 그런 생각이 든다면 이제부터라도 회개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의 법을 지키며 살면 됩니다.

 

그런데 오늘의 설교에서 제가 꼭 강조하고 싶은 말은 아직 제가 하지 못했습니다. 뭐냐고요? 바로 나와 내 집은 오직 여호와만 섬기겠노라.

사실 오늘날 이미 우리 주위엔 참 믿음을 찾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점점 세속의 물이 들어오고 하나님에 대한 정성과 헌신이 약화되고 믿음이 약화 되어서 옛 신앙은 찾기가 어려운 지경입니다. 이거 제가 드리는 말씀에 혹 청년들이 상처를 입을 수도 있기는 한데 저는 청년들의 신앙이 문제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명목상 교인들이야 우리 주위에 많습니다. 세상의 몇 번째 가는 대형교회들이 기라성처럼 버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참 그리스도인은 보기 어렵습니다. 참 성도는 만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하나님께 헌신하고 세상을 바라보지 않는 이는 진짜 진짜 어렵습니다.

 

우리의 주위에 그런 이들이 혹 있다면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만나기 어려운 큰 복을 만난 걸로 봐도 됩니다. 함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제자도를 실천한다는게 얼마나 크고 복된 일인지를 안다면 정말 감사한 일이지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주를 떠난다고 해도 나는 주를 떠나지 않겠다
세상 모든 이들이 주를 떠나서 성공을 좇아 가도 나는 결코 주를 떠나지 않겠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만족하며 그만이 나의 주이심을 고백하며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이 세상 사는 동안 주의 길을 벗어나지 않겠다

이런 신앙고백을 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돌이켜 보면 그가 나를 위하여 해 주신 일들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요!

 

이렇게 말씀드리고 우리를 한번 보세요. 세대 갈등을 조장하는건 아닌데...
노인들의 신앙이 현재로서는 제일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 굉장한 신앙의 어른들이 세상을 떠난다면 우리 나라의 교회들이 참 어려워 질 것입니다. 세대를 거듭할수록 신앙이 퇴보하고, 헌신이 퇴보하고 세상 풍조로 주위가 포위되는 것 같습니다.

 

옛날 왜정 시대에는 솥에다 쌀에다 이불까지 들고 몇십리를 이고 지고 와서 부흥회에 참석했지요. 몇날 며칠을 밥을 해 먹어가면서
그런데 그게 없어지고 제가 어릴 때는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부흥회를 했습니다. 그래서 부흥강사와 헤어질 때는 참 아쉽고 그랬습니다. 인사도 정말 눈물겹기도 했지요.

 

그러다 점점 부흥회 날짜가 줄어 듭니다. 낮 시간의 성경공부가 없어 집니다. 새벽기도회가 없어 집니다. 마침내 저녁 집회만 남습니다. 그것도 한 삼일하면 끝입니다.

한번 부흥회를 하면 적어도 서너시간은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다 어느샌가 예배 전체가 한시간을 넘지 않게 되었습니다. 약식입니다. 그냥 했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 흉내만 내는 것 같습니다. 바쁜 세상에 무슨 부흥횝니까? 예, 맞습니다. 주일 하루 나오는 것도 힘든데 평일까지 무슨 짓인지...

 

그렇게 그렇게 우리는 점점 퇴보합니다. 예전엔 주일이면 새벽부터 저녁까지 정신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점점 저녁 예배가 없어지고 오후 예배로 변합니다. 그러다 오후는 예배를 없에고 집에서 가족과 함께 보내자고 합니다.

제가 지금도 생생하게 생각이 납니다.

 

학창시절에 제가 다니던 고향 교회에서 장로님이 광고를 합니다. “이번 성탄절은 저녁예배가 없습니다. 성탄절의 의미를 되새기며 가족과 함께 하는 성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뭐 말은 좋았는데 우리는 점 점 축소됩니다. 그때부터 성탄절 저녁 예배가 없어 졌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참 잘된 일입니다. 빨간날에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친구도 만나야 하고 데이트도 해야 하는데 교회만 와요?

 

물론 예배만 많이 드려야 신앙이 좋은게 아닙니다. 당연하지요. 그러나 돌이켜보면 우리는 점점 하나님 중심 교회 중심 성경중심에서 멀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중심이 사람 중심으로
교회 중심이 회사 중심으로
성경 중심이 학교공부 중심으로

 

아닙니까?
저는 학창시절 행정고시를 준비하면서도 주일 오전과 저녁은 물론이고 수요일 금요일을 모두 참석 했습니다. 그게 저와 저의 집에서는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렇지 않습니다. 시험을 준비한다고 주일예배도 나오지 않는 이들이 많습니다.

 

“엄마는 기도할테니까 너는 집에서 공부하고 있어라. 네가 시험에 붙는게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길이야” 고 하는 직분자들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굉장하지요?

정말 예배보다 자기의 시험을 위해서 집에 있는게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까? 물어 봤습니까? 정말 하나님이 그렇다고 하셨습니까?

 

절대로 아닐 겁니다. 우리 하나님은 절대로 그렇게 답하실 분이 아닙니다. 그냥 핑계하지 말고 몰래 몰래 하시기 바랍니다. 뭔 소리를 해도 합리화를 할 수 없습니다. 아니 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요즘 보면 주께서 “내가 다시 올 때 참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신 그 말씀이 정말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믿음의 용사들이 교회 안에서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과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고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하고 그의 말대로 행하는 이들이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그리고 교회 중심

 

옛날에는 별 생각 없이 따라한 구호이지만 지금 생각하면 정말 어려운 결단을 요구하는 구호입니다.
과연 내가 지금 하나님 중심으로 살고 있는가?
내가 지금 나의 이익에 반한다 해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가?

 

나도 모르게 세상 풍조가 나에게 주인노릇을 하고 내 행동의 주도권을 잡고 때로 튀어나오지 않는가?
혹 세상적으로 놀고 즐기고 누리는 것을 부러워하지 않는가?
아니면 부러워하지 않았는가? 과거형으로.

어떻습니까?

 

지금 온전하고 진실된 믿음을 지키는 이가 점점 줄어 듭니까? 그렇다면 이럴 때일수록 온전하고 진실된 믿음 생활로 하나님의 눈에 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지금이 기회입니다. 웃기는 얘기이기는 한데 지금 하나님에게 복달라고 하는 주의 자녀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런데 그 가운데서 진실된 자녀가 점점 줄어 든다면 아마 하나님께 복 달라는 사람 중에서 그렇게 요구할 수 있는 자격있는 사람의 숫자가 줄어든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지금 더 잘하세요. 세상사람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 중심을 버리고 자기의 뜻대로 마음대로 살려고 하는 이 때에 더 잘하세요.

 

우리 하나님이 높이실 것입니다.

사탄은 절대로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이용만 하지 절대로 우리를 유익되게 하려 하지 않습니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오늘 나와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홍종일 목사님 설교 원고 (2018년 메일 받은 내용을 업데이트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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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누리교회는 가정교회 운동, 가난한 이웃을 섬기는 운동, 쉼을 소중히 하는 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면 솔마루공원 옆 / 함께 하고 싶으신 분은 strongbell@hanmail.net 으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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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올린이의 이야기 (시북의 이야기)

 

저는 평생 마음 속에 품어둔 찬송가가 몇 개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갈보리 산 위에 라는 찬송입니다.

멸시천대 받은 주의 십자가에 내 마음이 끌리도다 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은혜 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거의 본능적으로 화려하고 멋있고 반짝이는 것에 마음이 이끌리기 마련이니까요.

저만 해도, 어여쁜 아가씨의 총명하고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고 몇 달간 가슴앓이를 한 적도 있습니다.

 

정관누리교회는 개척교회로 성장, 부흥 이라는 것이 좀처럼 잘 되지 않고 힘들었습니다.

목사님, 사모님, 교회 식구들은 이것이 꽤 속상했고, 부담되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봤을 때 분명히 열심히 해나가는데도, 목사님 설교는 아 오늘도 참 좋구나... 라고 생각하는데도.

참 하나님의 말씀을 배경까지 잘 이해하고, 주님의 높으신 놀라운 계획에 감탄하고 경외감을 느끼는데도.

 

교회 부흥이 잘 되지 않아서 교인이 30명, 60명, 100명으로 팍팍 늘어나지 않는 거에요.

저는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주님 어째서 이런 것인가요?", CBS, CTS 방송만큼이나 좋은 우리 목사님.

좀 띄워주면 안 되나요! 많은 사람들을 이끄는 목사님 되게 만들어 주시면 안 되나요. 너무 힘들잖아요!

 

그 안타까움에 대해서 저는 어느 책에서 이런 구절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고난을 견뎌 내고 나면, 심리적으로 더욱 굳건해져 다른 사람들을 포용하고

 도와줄 수 있는 큰 그릇으로 성장하기도 한다.(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p190)"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 목사님 가정을 아끼고 필히 사용하신다는 것을 확신하기로 했습니다.

다만 그 때를 정확하게 알 수 없을 뿐입니다. 이 시간 또한 연단이고, 거쳐가는 과정이며,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그릇으로 빚어가시는 귀하고 값진 시간들이라 믿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생각되니, 조바심이 갑자기 생깁니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새벽 3시에 깨어 있으니, 뭐라도 하기로 합니다. 혹여,

한 사람이라도 더 누가 볼 수 있으니까, 설교를 지속적으로 업데이트 해야 한다! 나도 발벗고 전해야 한다!

 

저는 결단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님을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시는 것을 믿으며,

주어진 시간을 최선을 다해서 기쁘게, 내 마음 다해, 그렇게 오늘을 열심히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껏 우리 모두에게 사랑을 베푸셨고, 곁에서 지키셨으며, 인도해주셨음을 고백합니다.

 

주님 어려움을 만났을 때, 우리가 잘 견뎌내 나가고,

최선을 다할 수 있게, 특히 어려움 앞에서 더욱 최선을 다할 수 있게, 다시 일어서는 놀라운 힘을 주세요.

오늘 여기서,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지금 결단하였으므로. / 2019. 시북.

by 시북 2019.03.19 0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