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Review]/한국사 168

공민왕의 개혁 의지와, 신진사대부의 성장

공민왕은 이대로 안 된다고 확신했습니다. 적극적인 반원, 반권문세족 을 내세우면서, 개혁을 시작 합니다. 기득권과의 싸움이 시작됩니다. 역사에서 한 번도 이 싸움이 쉬웠던 적이 없습니다. 게다가 이번에는 외부의 원나라, 내부의 권문세족을 이겨내야 하니, 그야말로 정치적 전쟁 으로 볼 수도 있겠지요. 원나라가 주춤할 때야 말로, 일어설 절호의 기회입니다. 언제까지 준식민지로 살 겁니까. 힘은 올바르게 쓰라고 있는 법이지요. 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공민왕은 철령 위쪽에 있는 쌍성총관부를 무력으로 되찾았고, 요동을 공략하면서 영토를 회복 합니다. 안으로는 원나라 내정간섭의 핵심역할을 하고 있던, 정동행성 이문소를 폐지시켜 버립니다. 원과의 연결고리는 다 끊겠다는 결연한 의지 는 계속됩니다. 몽골풍으로 다니..

고려의 대외 관계 2부 - 원나라가 남기고 간 비참함

거란과의 전쟁을 무사히 끝냈다고 했지만, 국제정세는 변하기 마련이지요. 12세기 여진세력이 강력해 지면서, 고려는 조금씩 고생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여진은 말을 타고 공격하는 기병들이 강력했는데, 보병 위주로 편성되어 있는 고려군이 고전했던 것은 당연합니다. 이 때 윤관의 주도로 대여진 특수부대 "별무반"이 조직됩니다. 여진을 정벌해 보겠다는 의지가 느껴집니다. 고려의 기상, 역시 만만찮다니까요. 별무반은 신보, 신기, 항마군으로 구성되었는데, 오늘날로 치면 보병, 기병, 승병이라고 보면 되겠지요. 윤관의 별무반은 천리장성을 넘어, 여진에게 선제공격을 날리며, 동북 지역을 추가로 획득! 동북 9성을 축조하고 호기롭게 출발했습니다. (후에 여진이 조공을 바치겠다고 약속했고, 관리상의 어려움이 발생하자, 동..

고려의 대외 관계 1부 - 거란과의 전쟁

바로 무신 → 권문세족으로 넘어가기 전에, 고려의 대외 관계를 정밀하게 이해한다면 좋을 것 같아서, 문서를 따로 준비했습니다. 호기로웠던 고려의 초반부를 느껴본다면 좋겠다는 측면도 있고요. 주변의 침입에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맞짱 뜨자면서 정면으로 붙는 경우가 있고, 평화롭게 가자며 외교적 협상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는 굴욕적이더라도 외세의 강력함을 인정하고 사대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재밌게도 고려는 이처럼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국가의 분위기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하는데, 차근차근 고려를 침입한 주변 민족들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조금 도식화 시켜서 간단히 요약하면 우선 다음과 같습니다. 고려 초 호족이 주류일 때는, 거란이 쳐들어 옵니다. 10~1..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및 무신 정권 성립

1135년으로 기록되어 있는,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고려 문벌 귀족이 지배층일 때, 묘청이 난을 일으켰다 끝? 암기식 한줄 국사에서 벗어나서, "서경천도" 이것 하나만으로도 문서를 채울 수 있을 만큼, 심층 이해 속으로 들어가보고자 합니다. 우선 외부상황부터 볼까요. 당시 고려는 북쪽에서 아주 강력해진 여진족이 금나라를 세운 시점입니다. 금나라는 쳐들어 와서 대놓고 고려에게 요구합니다. "너희들, 사대 하시오, 너희는 이제 신하 나라다, 알겠소?" 이 때 이자겸을 비롯한 보수파 귀족들은 OK 를 선언합니다. 사대하면서, 나만 배부르면 되지, 라고 생각했던 셈입니다. 현실적으로 강력해진 금나라와 싸웠다가는, 서로 피곤해 질 것은 분명한 일이었고요. (긍정적 측면에서 보자면, 백성들이 전란의 소용돌이에 ..

문벌귀족 사회의 동요 - 탐욕의 모순을 주시하며.

이번 문서는 모순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존경받는 정치가들이 간혹 있는데, 중국 주은래 총리도 그 중 한 명입니다. 이런 평가가 따라붙습니다. "고위 권력자임에도 청렴하였으며 권력자로 행세하지 않았다. 성실성과 친화력으로 인망을 얻었다." 이번 문서에는 반대되는 장면을 만나게 됩니다. 고위 권력자 였기에, 권력자로 행세하면서, 우리 귀족들만 잘 살면 되는, 자신들만의 유토피아를 꿈꾸는 문벌귀족을 만나봅시다. 흐흐. 자! 고려는 어떻게 세워졌는가? 그 출발은 대단했습니다. 호족과 6두품이 힘을 합쳐서, 신라 골품제 같은 폐쇄적 구조를 반대하며, 누구나 주인처럼 살 수 있음을 꿈꾸던 나라였습니다. 그들은 신라 왕가가 자기들 끼리 특권을 누렸던 그 구조적인 차별을 깨부쉈고, 이제 최승로의 건의가 왕..

고려의 지방조직 및 군사조직 고찰

이어서 고려의 지방 행정 조직은 5도 양계 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5도와 양계로 이원화 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5도는 서해도, 교주도, 양광도, 전라도, 경상도로 나누었는데, 지금의 지명도 들어가 있네요! 양계는 군사 행정 구역으로서 북계와 동계 가 있었습니다. 쉽게 이해하자면 국가 북쪽 지역을 북계로 조직해서, 거란과 여진을 막고자 했습니다. 천리장성까지 설치하였고요. 국가 동쪽 지역은 마찬가지로 동계로 조직해서, 왜를 막고 동해를 지켜내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고려의 현실이지요. 잦은 침입으로부터 튼튼히 국가를 지키기 위해서는, 북계, 동계, 즉 양계에다가 신경을 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정리하자면 5도는 행정 구역이고, 양계는 군사적 특징이 강하다는 것으로 보면 됩니다. 중앙에서는 5도에다가 ..

고려의 중앙 행정 조직 고찰

이번 문서는 고려의 행정 조직을 정리해 봅니다. 단순 암기식을 넘어서, 편안하게 생각해 보는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도록, 그들이 무슨 일을 했으며, 왜 그랬을까? 를 같이 생각해본다면 좋겠습니다. 우선 좋은 조직의 특성이 무엇일까요? 저는 밸런스 라고 생각합니다. 균형과 견제가 서로 어울릴 때, 모두가 즐거울 수 있습니다. 만약 왕권이 지나치게 강하다면, 잘못된 군주에 의한 폭정이 시작되고, 많은 이들이 고통에 시달릴 수 있겠지요. 반대로 귀족이 지나치게 강하다면, 일부 귀족을 배부르게 하기 위해서, 다수가 흡사 노예처럼 힘들게 살지도 모릅니다. 고려가 고대보다 발달된 사회인 것은, 조금 더 개방적이었으며, 시스템을 만들어 왕과 귀족간의 적절한 경계를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호족들이 강했던 고려 초기, ..

고려 광종의 개혁, 정치에 감탄하다!

햇살 좋은 봄날, 광종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광종에 대한 평가는 나뉘어져 있습니다. 과거제를 실시한 개혁 군주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인정사정 없는 "호족에 대한 피의 숙청"을 자처했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손을 더럽혀 가면서까지 고려의 기틀을 세우려고 했던 인물 이랄까요. 당연히 무시무시하지만, 싸움의 기술을 엿볼 수 있기도 합니다. 기득권과 싸우려면 호락호락한 태도로 어림 없다는 것은 역사적 진실이라 생각합니다. 고려 4대 국왕 광종이 즉위했습니다. 이미 그는 소용돌이를 잘 겪고 있습니다. 왕권을 강화시키지 않는다면, 그의 생존 역시도 보장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즉위하자마자 기선제압을 하면서, 호족들과 전쟁을 선포하면 될까요? 너무 순진한 생각입니다. 호족 세력들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습니..

고려의 성립 과정 및 태조 왕건의 고민

중세의 정치파트가 시작되었습니다. 약 5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고려 시대 입니다. 918년에 막을 열어 1392년까지, 이 긴 세월을 한 번에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구분을 통해서 좀 더 이해하기 쉽도록 하나씩 정리해 나가는게 좋겠지요. 우선, 고려를 이끌고 있었던 주도세력을 중요하게 살펴본다면, 역사적 흐름을 파악하기 좋습니다. 이 시점, 고려의 주역은 누구인가? 그 주체들을 따라서 구분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호족+6두품에서 고려는 출발하게 되었고, 이후 중앙을 차지하던 호족들은 문벌귀족이 됩니다. 그리고, 1170년을 기점으로 무신정변이 일어나, 무신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는데, 시간이 좀 더 흐르면 "징기츠칸의 위세" 원나라가 쳐들어오면서, 친원파인 권문세족이 주도권을 잡게 됩니다. 이들은 훗날 신..

고대문화사 4 - 건축과 탑, 고대의 멋을 찾아서.

사람마다 멋에 대해서 가치관이 다르겠지요. 기준은 달라도 우리는 "멋진 사람"을 좋아하며, "멋진 것"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참, 제 경우에는 "멋진 시간"을 선호합니다. 음악을 들으며, 조용히 노트를 옮기며, 생각을 정리해 보는 지금 시간도 요즘은 참 즐거운 시간이 되었습니다. 여하튼 이번 문서에서는 고대의 건축과 탑들을 천천히 즐겨봅시다. 외우지 않고, 즐길 수 있는 순간부터, 어쩌면 우리가 문화를 바라보는 시선마저 바뀔 수 있습니다. "우와~" 하고 감탄하는 마음이 저는 좋습니다. 매사에 "그래서? 어쩌라고?" 라는 쿨한 태도는 호기심을 잃어버렸다는 슬픈 증거일 수도 있지요. 자 건축부터 출발, 고구려에는 안학궁이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터만 남아 있는데요. (넓이가 약 38만 제곱미터. 둘레가 ..